• 어떤 유령들
    [엽편소설] 빈 방청석의 그 영혼들
        2024년 02월 29일 12: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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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 대통령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인류와 함께 태어났다고. 어떤 경우에는 정의로운 전쟁도 있는 법이지요. 사실 전쟁을 피하고자 한다면 반대로 전쟁을 위한 준비는 철저해야 하지 않느냐 군대에서 그런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전쟁에 대해 특별한 철학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 열린 방위산업 일자리 박람회에 참석했어요. 공대 출신 취준생. 정규직으로만 채용된다면 뭐든 마다 하겠습니까. 방위산업 취업지원관에서 실시한 AI 역량 진단검사 결과가 높게 나왔습니다. 그 후 인적성 검사 성적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실 무기 관련 사업에 제가 특출 난 역량과 적성이 있는지 알 길이야 없죠. 그저 평범한 취업용 시험이었죠.

    물론 자소서 준비 할 때는 조금 그럴듯하게 썼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 대통령 말을 인용했던 것 같아요. ‘방위산업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산업..’ 그런 표현도 갖다 쓰면서 면접 준비도 하다 보니 방위산업이라는 게 꽤 매력적인 것 같았어요. DX KOREA 디펜스 엑스포 코리아 뭐 그런 뜻입니다. 저는 거기 행사지원팀 인턴으로 취업했어요. 공공기관 인턴이라 경력 쌓기에도 좋을 거라 생각했죠. 평범한 직장 생활이었고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팀장님은 아시아 최대 글로벌 비즈니스 플랫폼을 조성해야 한다는 말로 하루를 시작했어요. 담당부서에서 주관하는 무기 박람회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개막식도 성대했고 28개국 VIP들,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방위사업청장 급 고위 인사들이 참여해 무기 비즈니스를 하는 행사였습니다. 천문학적 계약과 수교가 이뤄졌죠. 제가 입사한 22년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면서 무기사업은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세계 방산 수출 시장 한국 점유율 9위, 일명 K-방산 강국, 회의 때마다 한국방산사업의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죠. 이 분위기라면 정규직 채용도 수월할 거고, 밀린 학자금 대출금도 착착 갚아 나갈 수 있다고 여겼죠. 여기 계신 이분들과 법정에 서기 전까지는요.

    성남 서울공항 실내 전시장에서 무기 박람회가 한창 진행될 때 일입니다. 엿새째 이어지는 행사 기간 동안 30만 명은 참여할 거라 추산했죠. 첫날이었고 예정대로 모든 게 완벽히 진행되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 부스 앞쪽으로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른 사람들이 난입했습니다. 그들은 부스 앞에서 하얀 천 안쪽에 감췄던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갑자기 펼쳤어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발상황이라 느꼈습니다. 침착하게 하얀 천을 두른 사람들 곁으로 다가갔어요. 그들이 품 안에서 꺼낸 노트북 화면에는 3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피와 재로 범벅이 된 채 손을 벌벌 떨고 있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그 옆 모니터에는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2열로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이었죠. 저는 순간적으로 그 노트북을 덮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화면을 보도록 팔을 높이 들었죠. 그때 보안요원이 왔고 바로 그 자리에서 8명의 하얀 천을 휘감은 사람들을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어요. 그들은 끌려 나가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지시를 따랐죠.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행사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피와 재로 범벅된 여자아이 눈동자가 퇴근길에서부터 제 방안까지 쫓아와 잠을 뺏어갔습니다. 다음날, 아무도 그 행사장에 있었던 2분간의 소란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요. 저도 괜히 말을 꺼내기가 뭐 해 직접 인터넷으로 이분들의 정체를 찾아봤습니다.

    ‘유령 복장하고 무기 박람회 기습해 침묵시위 이어간 반전 평화운동 활동가…’

    활동가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솔직히 그때는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반전, 평화 그런 단어 자체가 거북했어요. 인턴으로 겨우 취업했고 곧 정규직이 되면 학자금 대출빚도 갚고 전세자금을 마련해 월세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다 떨쳐버리려고 애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순간 더 생각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 후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누르다가도 갈비뼈만 남은 아이가 파리를 겨우 쫓고 있는 장면, 그 뒤로 후원 독려 메시지가 흘러나올 때면 그날의 유령들이 떠올랐어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누군가 스티커를 내밀며 아이들을 살리시겠습니까? 하고 물을 때마다 입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습니다. 그날의 유령들이 품에 숨겼다 꺼낸 폭격당한 아이의 얼굴을 다시금 보게 될까 봐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주말에 광화문 서점에 갈 일이 있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더디게 갔어요. 비까지 와서 춥고 눅눅한 날이었죠. 그런데 비 오는 버스 차창 밖으로 또 평화라는 글자가 느닷없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잘못 읽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버스가 정차했을 때 분명히 보았습니다. ‘반전 평화’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요르단에서 지중해까지 평화를’라고 적힌 팻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한 무리에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며 빗속에 무작정 도로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제 앞자리에 앉은 승객에게 열어놓은 창문을 닫아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졸고 있던 그 사람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팔을 뻗어 직접 차 창문을 거칠게 닫았습니다. 서점에 무슨 일로 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불쾌했습니다. 도대체 평화라니요. 내 일상의 평화를 앗아간 그날의 유령들, 팻말, 비 오는 거리를 배회하는 흐릿한 또 다른 유령들이 뭔가 제 일상을 단단히 망쳐놓은 것 같았습니다.

    서점을 나와 무작정 걸었습니다. 또다시 골목길로 들어섰고 비좁은 골목 사이를 배회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심코 덕수궁 돌담길 입구에서 안쪽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어느새 비가 그쳤더군요. 연인들,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들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어요. 가끔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인 평범한 정동길이었습니다.

    그날 역시 길 안쪽에서 관현악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첼로 연주자 한 분과 바이올린 연주자 두 분이 이화여고 정문 맞은편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죠. 감상 중이던 사람들 틈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연주자들 옆에 ‘평화를 위한 음악회’ 그리고 love peace and music와 날고 있는 새 한 마리 그림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음악회는 종전 시까지 진행된다는 안내 메시지가 보였습니다. 종전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음악회를 계속하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한 이가 누군지 궁금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 나를 엿 먹이려고 꾸며놓은 망할 장난 같았습니다. 후에 지인에게 이날 있었던 이야기를 터놓으니 신의 계시 같다고 하더군요. 정말이지 대책 없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 아닙니까.

    선율은 곧 소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재빨리 그 길을 빠져나와 택시부터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택시 라디오에서 평화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 차례인가? 그런 망상마저 들더군요. 마치 누가 숨어서 이런 제 하루를 지켜보며 마음껏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불면의 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음악은 전쟁보다 강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제 주변에도 있었습니다. 학생 시절 학점을 대충 맞추려고 교양과목인 ‘클래식 음악사’를 신청했습니다. 교수는 항상 멍한 얼굴로 뜬구름 잡는 말들을 자주 했었죠. 그는 음악의 위대함에 대한 자기 확신에 빠져있었습니다. 음악은 지극히 인간의 영역인 동시에 인간을 초월하는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인간과 인간적이지 않은 두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도 했죠. 수학과 이성의 세계를 나름 신뢰하는 공대생에게는 다 쓸데없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 학기에는 주로 전쟁에 얽힌 음악사를 강의했는데 음악이 전쟁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음악을 탄생시킨 경우도 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무슨 감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학기 말 과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활용된 음악에 대해 리포트를 써 제출했어요.

    ‘수용소 안에 음악은 폭력과 통제의 수단이었다. 행진곡으로 시작된 새벽이면 채찍 속에 하루 노동이 시작됐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스실로 갈 사람을 구분하는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를 들려주었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경쾌한 음악에 발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수용소 생활에도 박자와 리듬이 필요했다.’

    그 교수는 제게 좋은 학점을 준 편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메일로 졸업을 축하하는 메시지와 지겨웠을 강의를 성실히 들어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있었죠. 이런 메시지들이 더러 그렇듯 항상 추신에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 붙기 마련이죠.

    ‘당신이 믿는 이성과 과학에도 영혼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길. 음악이든 과학이든 그 쓰임을 결정하는 것도 인간이라네’

    그 대목에서 명치에 뭐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예술가들의 수사 따위라고 치부하며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떨쳐냈습니다. 사실 초등학생 시절에도 명치에 뭐가 걸리는 느낌을 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과학영재반에 함께 다니던 친구였죠. 방학이면 k대학에서 과학영재 초등학생을 모집해 강의도 열고 수학경진대회, 글짓기 대회, 체험학습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이 만족스러웠지만 글짓기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습니다. 수학만 잘 풀고 화학 공식만 외우면 됐지 ‘과학’이란 학문에 대해 뭘 그렇게 골똘히 고민해야 영재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까. 어린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딱 저와 반대였어요. 궁금한 것도 많았고 수학 문제 푸는 시간보다 책을 읽고 혼자 중얼대는 것이 그 친구의 특징 중 하나였죠. 저는 그런 친구가 피곤해 거리를 두었습니다. 모호하게 말하는 인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딱 질색이었습니다. 과학의 영향력에 관한 글짓기 대회가 있던 날, 그 친구는 집에 가는 방향이 다른데도 저를 따라오더군요. 그래놓고는 뭐라고 글을 썼는지 제게 집요하게 물었죠. 그 당시 저는 과학지상주의자처럼 과학에 대한 끝없는 찬양만 늘어놓은 글을 썼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요. 딱히 쓸 말도 없었고 한편 과학영재라면 응당 그렇게 인식하는 편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는 저와 생각이 다르다며 한참 잡다한 소리만 하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자기 생각을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비유를 발견 한 듯했어요.

    “과학자는 전기를 발명할 수 있듯 전기고문 의자도 발명할 수 있는 존재야”

    그 말을 하는 12살에 그 아이의 목소리는 분명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제 명치에 뭐가 걸리는 느낌의 최초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령들이 다시 나타난 건, 지난 9월이었습니다. 퍼블릭 데이, 일명 일반인들이 무기를 만져볼 수 있는 행사였죠. 유령들은 K808 장갑차와 K2 전차 위에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이번에 품에서 꺼내든 것은 노트북이 아니라 바이올린과 첼로였습니다. 그들은 연주를 시작했어요. 마치 주최 측이 준비한 행사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전시회장에 울려 퍼졌죠. 엄청난 위용을 과시하던 장갑차와 전차가 그냥 연주자들의 발 밑 무대가 돼 버린 것입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전시회장에서 모든 무기들은 그냥 고철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오래전 묵직하게 명치에 걸려있던 무언가 이제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안에서부터 거꾸로 차올라 목울대를 치며 눈물로 넘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주가 끝날 때까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바이올린 연주를 끝낸 사람이 “전쟁 장사를 중단하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첼로를 연주하던 사람이 “STOP THE ARMS FAIR”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외침을 저도 모르게 따라 했습니다. “STOP THE ARMS FAIR” “STOP THE…” “stop”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정말 그곳에 유령이 왔다 갔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알 수 없는 폭팔음과 비명 속에 피와 재로 범벅된 아이의 유령이 제게 왔다 간 것입니다.

    진술은 끝났고 판사의 선고가 이어졌다.

    “14시 31분부터 14시 42분까지 방위산업체 직원인 피고인 ○○○은 ‘전쟁 장사 중단하라’라고 외치며 장갑차 위에서 연주하던 피고인들과 공모하여 위력으로써 피해자 대한민국 방위산업전의 전시 업무를 방해하였다.”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한동안 알 수 없는 고요가 재판석과 피고인석을 지나쳐갔다. 마치 빈 방청석에 수천 명의 영혼이 들어찬 듯했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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