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은 이명박이다


“파병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한미FTA도 비준만 남은 상태다. 지나간 것을 지나치게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인 생각이다.” - 하승창 ‘희망과 대안’ 상임운영위원, 2009. 10. 22

“한미FTA, 해외파병, 비정규직법 등 각 정파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는 이슈는 못 본 척 하고 놔두자. 지방자치 선거이니 만큼 교육, 복지 정책 중심으로 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 유시민 국민참여당 주권당원, 2010. 1. 18.

“한미FTA, 노동유연성 문제가 합의되지 않는다고 선거연합의 틀을 깨서는 안 된다” - 이정희 민주노동당 정책위 의장, 2010. 1. 20

연합을 하려면 서로 간에 양보도 해야 할 것이고, 지방선거이다 보니 큰 정책을 다루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 성향의 시민단체들과 야당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경제정책, 노동정책, 대외정책 등을 선거연합의 조건에서 빼자고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한미FTA와 비정규 정책, 지방자치에 직접 영향

먼저, 지방자치는 국가 정책과 무관할까? 한미FTA가 발효되면, 현재 각급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 중인 친환경급식 조례, 향토 상품 우대 조례, 중소기업 및 재래시장 지원 조례, 농수산물 수급 안정화 조례 등은 모두 폐기된다.

그리고,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공공고용에 대한 의존율이 높아지는데, 이들의 근로조건은 민간고용시장보다는 비정규직 정책 등 국가가 정한 법제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결국, 국가 정책은 논외로 하자는 주장은 아이들에게 싸구려 미국 쇠고기 먹이고, 지역경제는 고사시키고, 지방 실업자를 더 늘리자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

유시민씨는 이것저것 다 빼고 교육과 복지만 다루자고 하는데, 교육은 교육자치 사항이고 복지는 주로 국세와 사회보험에 의해 운영되니, 역시 현행 지방자치의 주무가 아니긴 매한가지다. 이것저것 다 빼려면 지방자치법 조항으로 잘 프로그래밍된 컴퓨터를 시장으로 앉히거나, 노회찬이나 유시민보다는 훨씬 잘 생긴 오세훈에게 종신 시장을 맡기는 게 낫다.

지방의회나 단체장이 국가 정책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어떤 지방자치도 그 고유영역이라는 틀에 갇히지는 않는다. 1995년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 업무인 ‘행정 개혁’과 국회 권한인 ‘지방세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지방자치를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미FTA와 비정규직법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와 무관하게 지방자치를 잘 하려면 대한민국에서 독립하는 도리밖에 없다.

전과를 묻지 말자는 계산

그렇다면 왜 시민단체들과 야당들은 국가 정책을 제외시키자고 주장할까? 평소 지방자치 권능을 확대하자던 개혁단체들이나 노무현의 유지(遺志)를 떠받든다는 야당들이 위와 같은 사실을 몰라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편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꺼리는 한미FTA, 비정규직법, 파병과 다뤄도 좋다고 윤허한 교육, 복지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간단하다. 한미FTA, 비정규직법, 파병에 대한 반대운동은 민중단체들이 중심을 이루어 격렬히 치렀고, 노무현 정부의 복지와 교육 정책에 대한 비판은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돼 비교적 온건하게 진행됐었다. 민중단체들에게는 여전히 격한 감정이 남아 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노무현과 그 계승자들을 눈감아 주기 위해 교육과 복지에 대한 소신을 묻어두고 싶은 것이다.

한미FTA 등을 빼자는 것은 ‘다시 민주당’이라는 정답에 맞추어 던지는 시험문제다. 여우와 학 앞에 내놓는 스프 접시다. 이것은 집행유예 기간 중의 사면복권이고, 주범의 거짓 뉘우침과 종범의 청원에 의한 전과기록 말소다.

“잘 살아보세” 이래 한국 보수정치는 언제나 그럴싸한 목표를 내걸고, 그에 도구가 되는 정치만이 올바르고 다른 정치는 장애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려 왔다. 오늘날 이명박은 그것을 ‘민생’과 ‘중도실용’이라 부르고, 유시민은 그것을 ‘민주’와 ‘선거연합’이라 말한다.

‘민생 실용’이든 ‘민주 연합’이든 그 본질은, 정치하지 말자고 남들 정치 막으면서 자기만 정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가 아니라, 민생과 민주가 천부적 정치독점권의 도구가 된다. 유시민은 이명박이다.

레디앙 / 이재영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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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네그리 사상의 진화』, 스피노자의 인간관과 자율주의

1.

가톨릭 신자이자 20대의 교수, 이탈리아 사회당의 시의원, 테러혐의, 수형, 망명을 거쳐 존경받는 세계의 지성이자 막강한 판매력을 지닌 작가가 되었다. 네그리 말이다.

그를 읽기 전에 그려본 그의 계보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델라 볼페와 프랑스 공산당의 알뛰세르에게서 반헤겔주의와 ‘맑스 책 다르기 읽기’를, 들뢰즈로부터는 스피노자를 영감받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Empire)』은 홉슨 이래의 냉정한 폭로보다는 월러스타인의 모호한 긍정처럼 읽혔고, 『다중(Multitude)』은 20세기 노동의 변화를 살핀 브레이버만의 실증 같은 것은 거의 없이 미래경영학류의 예언을 남발하고 있었다.

경박한 오독일 이런 인식에서 구원해주기에 네그리의 책들은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그는 그랑제꼴 정도는 나와야 겨우 알아먹을 수 있는 ‘프랑스 철학 교수’였다. 그의 책은 서가의 왼쪽 위 먼지 쌓인 고전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마케팅 책들이 자리하고 있는 오른쪽 아래 서가를 차지했다.

『제국』과 『다중』의 공저자인 미국 교수 마이클 하트가 쓴 『네그리 사상의 진화(갈무리)』가 네그리의 주장을 조금은 알기 쉽게 풀어주지 않을까 한 기대는 오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책은 들뢰즈와 네그리를 연구한 하트의 박사 학위 논문이었고, 완숙기 이전 네그리의 활동 전개를 다루고 있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자율주의가 어떠하다고 설명하는 개설서가 아니라, 통사적 네그리학이다.

당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대중 폭력

그러나 책은 다음과 같은, 네그리 사상의 요체를 가감 없이 전한다.

“네그리의 논의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국가의 거울 이미지이며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기구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자유롭게 적대를 표현하는 것을 억압하는 당 혹은 전위의 구축이다.

네그리는 대중의 폭력에 대한 이러한 억압과 통제가 굴락(Gulag)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조직화와 함께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더 일반적이고 다가적인 폭력사용을 주장한다.” - 『네그리 사상의 진화』

지금의 네그리가 제한 없는 폭력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당 등으로부터 제한되거나 억압받지 않는 대중의 자기행동 전면화를 주장하는 것은 여전하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그런 사상이 스피노자로부터 연유함을 언뜻 비쳐준다.

“스피노자는 …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력을, 따라서 자신의 지배력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이렇게 초월적인 사회적 권위를 구축하는 사회계약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홉스적 국가를 거부하는 토대이다.

물론 이러한 거부는 사회를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주체인 다중의 힘에 기초할 때에만 가능하다.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에서 네그리는 이러한 정치적, 철학적 대안을 권력(potestas)과 힘(potentia)의 차이로 자리매김한다.”

2.

『네그리 사상의 진화』가 밝히는 네그리와 스피노자의 관계는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인간 개체나 그룹이 국가나 정당에 양도되지 않는 폭력의 보유자이려면, 그리고 폭력과 그 사용의 판단을 결정하는,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지배자이려면 스피노자의 인간론이 개입되어야 한다.

스피노자를 스피노자 자체가 아니라, 헤겔이 아닌 스피노자로 말하는 것은 낙관적 스피노자와 비관적 헤겔의 대립적 인간관, 즉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이타적이라는 근대과학 이전의 인간관에 입각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지배의 조건, 쿠피디타스

“아래로부터의 지배”나 자율주의는 그런 권력을 가진 인간 단위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리라는 기대, 믿음, 희망에서 출발한다. 즉, 그 구성체의 의사결정과 행동이 구성원 사이에서 조화롭고, 자기파괴적이지 않으며, 다른 구성체의 가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가정을 전제한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자기 존재 유지의 무의식적 욕망인 코나투스(conatis)를 넘는 이성적 이상(理想)-쿠피디타스(Cupiditas)가 작동해야 한다.

   
▲ 네그리와 하트 (사진=갈무리)
 

정치와 과학을 말한 때 우리는 인간 개체나 인간 집단의 총합 평균, 일반적인 경우를 전제한다. 이 문제에 있어 우리는 헤겔이나 스피노자가 이르지 못한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굳이 선인들의 가르침에 근거하려면 헤겔의 비관이나 스피노자의 낙관보다는 인간의 욕구와 행동이 후천적이라는 묵자의 소염론(所染論)이 사실에 더 부합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경험적으로 우리의 정치와 운동은, ‘비타협적 노동계급’이나 ‘이타적 개인들’이라는 희망 섞인 가정이 아니라, 극우 정치인과 대자본가, 얄밉기 그지없는 이웃이나 원수 같은 아내와 남편, 이 글을 읽지도 않고 악플을 달 게 뻔한 수많은 네트워크 주민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경험적 진실을 이미 획득하고 있다.

맑스에 미친 헤겔과 스피노자의 영향 중 어느 쪽 면을 주로 해석하고자 하거나, 맑스를 프로이트나 니체와 섞어 보려는 포스트맑시즘 조류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헤겔과 스피노자, 프로이트와 니체 모두가 기독교 신과 맞서 싸운 철학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관념은 불가피하게도 신의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은 신에 가깝다고 하였는데, 나로서는 그의 코나투스는 다른 신들과 경쟁하는 구약적 신으로, 쿠피디타스는 자기 희생의 신약적 신으로 읽혀진다.

마트에서 아기 분유를 훔친 엄마는 마트 투자자들과 노동자들에게는 코나투스적 위해를 끼쳤겠지만, 만약 성공하기만 했다면 아기에게는 쿠피디타스적인 구원의 여신이었을 게다. 경찰서 조서의 그녀는 범죄자이지만, 신문 사회면의 그녀는 가련한 피해자다.

이 분유 절도범은 네그리의 동지일까, 아닐까? 미국조차도 제 의지대로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제국(Empire)’에서 이 연약한 여성은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 자아를 보존한 상태의 그녀는 자율권의 주체로서 해방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네그리는 “맑스의 연구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너무도 앞서 나갔기 때문에 봉쇄당했다”고 말하는데, 네그리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고전 철학 이어붙이기, 탈기독교라는 전근대적 인간관에 기초한 운동론은 현대 사회의 현실에 너무도 뒤처져 있는 것이 아닌가?

3.

맑스는, 스피노자의 낙관과 헤겔의 비관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게다. 그런 점에서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맑스에 남긴 잔재의 복원자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가장 밝은 면이다.

밝은 네그리, 어두운 미래

나는 네그리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꿈꿨던 맑스보다도 더 비관적이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 표지 색인 분홍보다는 더 어둡고 붉으죽죽한 연옥까지만 도달 가능하리라고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의 의지를 접자고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자유란 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만 년 동안 인류 사회가 문화적 진화를 이루었고, 그 문화적 진화가 어느 정도는 되고 싶은 바가 이루어진 라마르크적 진보라 믿으므로, 무엇보다도 앞으로 남은 인류 전진의 방향이 타자에 대한 존중과 공유하는 자유뿐일 것이므로.

10년쯤 전 제주도로 출장갔을 때 서귀포에서 비키니 입은 처녀들 훔쳐보며, 딱 발목까지만 바닷물 적셨었다. 철 들고서는 옷 훌떡 벗고 따뜻한 바닷물에 몸 실은 적 거의 없다. 기름 둥둥 떠다니는 마산인가 거제 조선소 옆에서 주대환과 해수욕한 것이 지난 30년 동안 유일하다. 촌스런 외투 벗기 어렵다. 추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고, 그 안에 숨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유럽 합리주의의 정통, 공자에서 박정희까지로 면면히 흐르는 사회공리와 계몽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세속의 그늘 아래서 햇볕 가득한 라틴의 네그리나 조정환 같은 천생의 반역자들의 열변을, 하승우나 우석훈 같이 발랄한 이들의 상상을 흠모할 뿐이다.

2008년 10월 31일 (금) 16:03:12 이재영 기획위원 criticme@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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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우석훈에게 묻다…"파시즘? 글쎄.."

우석훈의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네 번째 책이자 완결인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의 눈으로 살펴 풀어 쓴 경제학사이다. 우석훈은 토마스 홉스,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 경제관료들까지를 칭찬하거나 통박한다.

1부는 세계경제고, 2부는 한국 자본주의고, 3부는 대안인데, 그 각각의 사회경제 상황을 설명하며 이런저런 학파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어떤 학설을 펼쳤는지 소개하고 자신의 비평과 주장을 곁들인다.

우석훈이 좋아하는 경제학자들

‘경제학자’라는 초점으로 이 책을 읽어보면 우석훈이 좋아하는 외국 경제학자는 하이에크와 폴 로머이고, 주목하는 한국 경제학자는 백남운과 장하준이다.

“하이에크의 매력적이면서도 교양 넘치는 책들을 직접 읽어보시면, 지금 한국의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위에서 ‘747 경제’를 주창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유쾌하지 않고 황당하면서도 잔인한 민족패권론자인지 좀 이해가 가실 겁니다.

… 그에게는 보편주의와 휴머니즘이 가득합니다. 최소한 하이에크만 제대로 읽어도 3~5%의 사람들만을 위하는 한심한 경제 비전을 제시하고, 또 그걸 강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로머의 논문들 몇 개에 남겨진 흔적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걸로 박사가 된 셈이다. … 로머와 나는 학자로서 가는 길이 전혀 다르고, 나는 그보다는 생물학적인 패러다임과 진화 현상과 시스템 이론 쪽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 그러나 시리즈 첫째권의 작업이 어느 정도 완결되어갈 즈음, 로머에게 배운 것들이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에너지와 자원은 덜 쓰고, 지식과 문화는 더 많은 국민경제’, 그야말로 로머의 출발 지점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결론이 아닌가?”

외국이론이나 소개하는 조순, 정운찬

우석훈이 백남운과 장하준을 꼽는 이유는 하이에크나 로머처럼 호오(好惡)의 관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론 없이 외국 이론을 그저 소개하고 적용할 뿐인 조순이나 정운찬, 이한구 같은 한국 경제학자들과 대비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국 경제 위기 온다’는 주장은, 백남운이나 장하준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무식한 극우’ 탓에 크게 기댄다.

“이 시점에서 지금 한국의 우파 혹은 극우파들 역시도 경제적 돌파구를 찾아내기 위한 진지한 논의들이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 그런 논의를 하고 고민을 하는 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 이렇게 3~4년 더 소모적인 논쟁을 하다가 결국 국민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공황을 만나게 되리란 게 지금 우리를 음산하게 기다리는 운명이 아닐까 싶다.”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의 다른 글들처럼 교양이 넘쳐나고, 도전적 문제의식으로 번뜩인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스스로 던진 화두가 그의 산만함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논거 부족, 화두의 실종

아래는 『괴물의 탄생』에서 우석훈이 펼친 주장에 대한 의견이나 질문이다. 우석훈이 당장 보충 설명을 해주어도 좋겠고, 지금 어렵다면 나중에라도 공부하여 알려주길 바라고, 우석훈 아닌 어느 누구라도 『괴물의 탄생』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가장 먼저, 우석훈판 경제 위기론의 전제 중 하나인 이명박 정권이 극우파라는 진단. 한국 우익의 역사적 근원이 좌익과의 격렬한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 이후의 태도 역시 극우 반공이었고, 근래에는 극우 경제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 정치’가 아닌 구체 정책들이 남미나 동남아의 우익들과 많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나 이집트 나세르와는 또 무엇이 다를까? 가장 최신의 우익인 이명박 정부에서조차도 제3세계의 매판 우익들과는 달리 국가주의와 인민주의 전통이 잔존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우’라는 진단으로 인해 현실 정치경제학에서의 섬세함을 잃는 것은 아닐까?

다음, 한국 경제시스템을 ‘건설 파시즘’으로 읽는 문제. “한국 자본주의의 대부분을 사실상 장악한 건설 파시즘이고, 그 수장은 현재 이명박이지만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으며, 그 실체는 해체의 과정을 겪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건설 파시즘'이란 독해의 위험성

우석훈이 비판하는 지방 토호들의 성격, 그리고 생태운동의 대립자로서 ‘건설’을 반정립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현 단계 또는 국면을 ‘건설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건설-부동산이 유한계층의 불로소득원이나 비생산적 투기행위로 치부되었던 데 비해 지금에 이르러 어지간한 소득 가진 사람들의 ‘재테크’인 데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금 한국의 건설-부동산 붐 양상은 지자체와 토건족이 주도했던 일본의 버블보다는 외환위기 전 영국이나 스웨덴, 현재의 미국처럼 금융자본의 움직임에 철저히 연동돼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명박의 대운하 역시 ‘건설’이라는 사업 부문의 문제가 아니라, 거대 자본의 투자와 운용이라는 본질에 따라 언제든지 부문 변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 경제 위기 문제. 책 곳곳에서 약간씩 다르게 서술되고 있지만, 우석훈은 이명박 정권 말기나 다음 정권 초기에 1980년이나 1998년 같은 공황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는데, 논거가 많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 다음번 공황은 조금 앞당겨질 거라고 예측하는 편이다”라는 설명은 너무 불친절하다.

1980년은 중화학공업으로의, 1998년은 정보통신산업과 신자유주의 금융으로의 이행 과정이었는데, 그렇다면 다음 공황은 어떤 것으로의 이행에서 생겨나는 것인지? 주기적 순환을 넘어 1980년과 1998년과 같이 거대한 사회 변동을 불러올 ‘공황 에너지’는 무엇인지?

넷째. 파시즘 문제. “한국에서의 파시즘은 ‘건설자본 + 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을 억압하고, 정치 지도자와 2~3% 정도의 경제 엘리트가 나머지 국민들을 끌고 가는 상황 정도”라면 굳이 ‘파시즘 온다’고 질겁할 일도 없겠지만, 어쨌거나 책 곳곳에서 비감한 비관을 내비치고 있으므로 그 가능성을 짚어 보자.

파시즘 가능성이 크지 않은 이유

파시즘이 되려면 정치적 극단으로 치우칠 만한 경제적 위기와 파시즘을 추진할 사회 계층,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경제 위기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계급 계층 문제에서는 파시즘화의 가능성이 크지 않다.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 같은 중하위 근로계층의 곤궁이야 폭발 직전이고 그들이 좌익을 경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의 지배자인 대자본은 지금 방식으로도 충분히 지배 지속 가능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일당독재’의 가능성이야 높지만, 그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한국판 자민당 시대의 개막이지 않을까?

또, 파시즘은 우익을 위협하는 좌익의 도전 또는 실험이 좌절된 데 이은 반동일 텐데, 그런 위협과 실패가 전혀 실재한 바 없으므로 한국 우익에게는 파시즘이라는 반동의 유혹도 크지 않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권익 유보를 상쇄할 만한 국가주의적 목표에 대한 ‘국민적 합의’인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다섯째, 우석훈이 대안모델로 제시하는 스위스는 많이 흥미롭고 베껴올 게 많을 듯싶다. 나는, 한국이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이므로 분산자치적인 스위스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우석훈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석훈이 스위스의 고졸자 마에스트로 시스템을 거론할 때 조금 멈칫거리게 된다.

섬유산업에서 곧장 거대 장치산업과 정보통신산업으로 넘어간 한국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고숙련 노동자를 실업자로 내모는 현황을 보면 왜 한국에 정밀가공 기계산업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런 건 1970년대의 ‘Made in West Germany’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김나지움-마에스트로에 힘입어 세계 최대 수출국이었던 독일이 지금은 한국 대학보다도 경쟁력이 뒤진다든가, 그래서 스웨덴이나 핀란드만 못하다는 일각의 진단도 그저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제3섹터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들

우석훈이 들고 있는 스위스의 상품 이름들 - 에망탈 치즈, 골드문트, 스마트카 같은 것들이 또 한 번 멈칫하게 한다. 이런 고부가가치 명품들은 사실 스위스보다는 북부 이탈리아가 더 본산이라 할 텐데, ‘좋은’ 스위스와 ‘나쁜’ 이탈리아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고부가치 산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끝으로, 제3부문. 공공부문이나 시장부문의 크거나 작음보다는 제3부문의 과소(寡少) 지표가 더 현격한 한국 경제의 특징이므로, 우석훈의 주장처럼 그 방향에서 여러 활로가 찾아질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석훈이 들고 있는 유럽 선진 나라들의 제3부문이 어떤 사회문화적 전통에서 확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회적 기업’ 육성사업을 펴는 노동부나 ‘제3섹터’를 주창하는 시민단체들은 제3부문을 ‘좋은 일’ 정도로 오해하거나 오해하도록 하며 ‘계도’하고 있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제3부문은 그런 작위적 노력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국민국가 자본주의에 흡수되지 않은 전자본주의 또는 비자본주의적 커뮤니티의 경제활동으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극도의 연방주의-꼼뮨주의를 취하고 있는 스위스나 아직도 분리독립의 꿈을 접지 않고 있는 바스크, 막부에 대항하는 영주-자민당에 대항하는 공산당 지자체의 일본에서 제3부문이 흥하고 있는 사실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특수한 제3부문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두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들 사이에서는 세대를 초월하여 지속되고 있는 부조 조직 계(契)는 무엇인가? 왜, 생협은 도시지식중산층의 전유물로 치부되고 있는가?

2008년 10월 06일 (월) 09:09:48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 criticme@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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