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부 당한 칼럼
    왜 '한겨레'는 이 글을 싣지 못했을까?
    [기고] "허울뿐인 공익, 불가피한 양비론"
        2022년 12월 05일 04: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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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이 거부한 칼럼을 레디앙의 허락을 얻어 이곳에 게재한다.

    나는 올 초 한겨레에서 칼럼 기고를 요청받았고, 지난 8월부터 [숨&결] 코너에 매달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오늘, 담당 기자에게서 내일 자 신문에 나갈 칼럼에 대해 게재 불가 통보를 받았다. 기자는 글 내용에 동의할 수 없어 논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전했다. 특히 아래 본문에 나오는 ‘문화방송’과 ‘화물연대’ 부분이 한겨레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도 말했다. 신문사가 요청해 작성된 외부칼럼을 담당 기자의 의견을 기준으로 게재 여부를 결정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완고한 보수 언론도 이 정도로 편협하진 않다. 언론사 기본에 관한 문제다.

    씁쓸하다. 오늘날 진보의 편협함과 편향성을 확인한 것 같아서다. 나는 20년 가까이 진보적 사회운동을 해왔다. 말하자면 골수 운동권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가 진보/보수로 나뉘어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세계적 경제위기, 탈세계화, 신냉전, 프로토파시즘의 확산 등 그야말로 현대 문명을 지키는 게 시급한 때다. 아래 글 또한 이런 맥락이다.

    자, 이제 독자들이 판단해보시라. 아래 칼럼이 과연 진보언론에 싣지 못할 정도로 과격하거나, 편향적인가?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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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울뿐인 공익, 불가피한 양비론

    나는 요즘 사회적 갈등에 대해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회 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서로 합의되지 않으니, 어느 편에 선들 공허하다. 힘 대결만 남는 것 같다. 지난 달의 경우를 보자. 사회 전체의 이익, 즉 공익을 두고 한 달 내내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월 초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문화방송 보도가 국민의 공익(국익)을 해쳤다며 취재진을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했다. 언론단체들은 이를 두고 국민의 알 권리라는 공익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또 월 말에는 경영계가 화물연대 파업을 두고 공익을 부르짖었다. 산업을 볼모로 한 집단 이기주의라는 비난이었는데, 화물연대는 자신의 요구인 안전운임제가 ‘도로 안전’이라는 공익적 목표에 기여한다고 반박했다.

    윤 대통령이 말한 국익은 국민 이익의 총계다.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으로 표현되는 공리주의 명제라 하겠다. 그런데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존 스튜어트 밀은 언론의 무제한적 자유를 옹호한다. 잘못된 의견은 치열한 토론을 통해 교정될 수 있지만, 의견 자체를 억압하면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진리의 잠재적 혜택이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 있어서다. 윤 대통령은 밀의 <자유론>을 자신의 인생책으로 꼽았었다. 하지만 그의 현재 행동은 밀이 말한 공익과 정면에서 충돌한다.

    문화방송의 보도가 공익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언론 자유는 공론장의 공정한 경쟁을 전제한다. 공정치 못한 경쟁은 결과적으로 억압과 같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화방송은 정부 지원이라는 특권을 누리는 언론사다. 민간 언론사와 달리, 신중함 또는 비당파성이라는 불이익을 감당해야 공정하다. 실제 선진국 공영방송 대부분이 특별한 규제를 받는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당파적이라는 평가가 안팎에서 나오는 상황에서 검증이 덜 된 대통령 욕설 의혹을 보도했다. 나는 문화방송이 이번 건에 한해서는 공익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처지라고 생각한다.

    경영계의 집단 이기주의 비판은 모순적이다. 사익 추구로 공익을 달성한다는 게 경영계가 신봉하는 시장의 원칙이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의 박애심이 아니라 이기심 덕분”이라고 애덤 스미스가 말했다. 우리가 화물운송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건 화물차주의 이기심 덕분이며, 운송거부 역시 화물차주의 수입 극대화를 위한 선택일 뿐이다. 기업들도 종종 이윤 극대화를 위해 감산을 선택한다. 물론 화물연대 일부 조합원의 폭력 사용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쟁점은 일부의 경쟁 방해이지, 화물연대라는 집단의 이기주의는 아니다.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가 공익에 부합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노동계의 공익에 관한 관점은 존 롤스의 차등 원리와 가깝다. 즉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의 최대 이익이 보장되어야 공익(정의)에 부합한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안전운임제는 경제 조건에 따라 밑바닥 계층의 이익을 훼손할 수도 있는 결점이 있다. 안전운임은 비용 증가분과 이익을 강제성 있는 최소운임에 반영한다.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 과적, 과속 같은 위험을 줄인다는 좋은 취지다. 하지만 고물가와 저성장이 함께 나타나면 역효과가 나타난다. 성장률이 하락해 일감이 감소할 때 고물가로 인해 운임이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일거리를 확보한 차주는 괜찮은 소득을 얻지만, 나머지는 일감조차 얻지 못한다. 밑바닥에 위치한 화물차주들이 더 어려워진다. 한국경제는 수년간 고물가·저성장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안타깝게도 안전운임제는 최소한 몇 년간은 공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나의 결론은 공익에 관해 양비론이다. 각자가 내세우는 공익은 모순적이거나 허울만 좋다. 현대사회는 인류가 지혜를 모아 합의한 공익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이것이 ‘사회계약론’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계약이 해지되고 있는 느낌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일 뿐인 시대가 올 수 있다. 누구의 편에 서는 것보다 사회가 합의하는 공익을 재건하는 게 시급한 때다.

    필자소개
    연구활동가, <대통령의 숙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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