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 역사’를 넘어 삶 속으로!
    [컬렉터의 서재] 나는 왜 역사 자료를 수집하나?②
        2021년 12월 27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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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은 왜 공부해야 합니까?”

    지난 10월 16일 광명시 소하도서관에서 ‘유물로 역사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강연이 끝난 후 강당 뒤쪽에 앉은 한 남성 청중이 컬렉터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일반 청중에 비해 나이가 많이 어려 보여서 물어 보았더니 인근 초등학교 학생이라 한다. 진땀 흘리며 답을 마친 후 또 다른 질문을 요청하자 이번에는 강당 왼편에서 한 여성이 손을 든다.

    “먼 훗날 인간들이 이 지구에서 멸종해 사라지고 여러 자료들(혹은 유물들)만 남게 되었다면, 그 자료들은 무슨 가치나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인문학은 어디에 쓰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자 역시 어리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물어보니 초등학생이라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강연은 초등학생 대상 강연이 아니라 도서관 일반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별도의 나이 제한이 없었고, 당시 40여 명 강당을 채운 이들은 저 손을 든 두 꼬마 빼고는 다 성인들이었다. 두 학생이 했던 질문은 컬렉터가 2021년을 통틀어 가장 답변하기 힘든 것이었다. 어떻게 답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어린 나이에 강연도 듣고 그런 질문을 하는 학생들의 미래가 기대된다며 칭찬해 준 건 확실하다.

    이 초등학생들의 질문은 다소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강연에서 제일 흔하게 받는 질문은 보통 이런 내용들이다. “수집에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느냐?” “수집품 중 제일 비싼 게 뭐냐” 등과 함께 “왜 수집을 하느냐?”라는 것이다. 이번 글은 왜 수집을 하느냐는 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지난 회의 글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으므로 제목은 ‘나는 왜 수집하는가(2)’로 붙였다.

    수집품이 말해주는 역사

    그렇다면 나는 왜 수집하는가?

    명확한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이렇다.

    수집자료 속에서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교과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역사는 거시사이자 구조사이며, 프레임 중심의 역사이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의 전부라고 한다면 역사는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옛사람들이 느꼈던 희로애락의 감정과 거친 욕망과 좌절, 그리고 난관에 맞서는 의지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지극한 도전들을 그러한 역사가 오롯이 담아낼 수 있을까?

    옛 생활문서와 기록물, 그리고 사물들 중에는 그 시대의 생생한 생활상과 감정들을 충실히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비유하자면 교과서가 한 시대의 ‘뼈대’를 구성해 보여준다면, 수많은 자료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뼈’와 ‘살’이다. 그렇게 구별된다고 해서 이런 자료들이 교과서 속 역사와 대립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역사를 보완해줄 뿐 아니라 훨씬 풍부하게 해준다.

    통일신라 승려 의상은 화엄사상의 핵심을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 했다. 하나는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우주 만물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잎사귀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고, 한 점 고기만 맛보고도 솥 안 고기 전부의 맛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하나의 문서와 자료 속에는 그 시대 역사의 총체가 녹아 들어있다. 그리하여 옛 자료를 통해 그 시대의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면, 그 자료는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교과서에 실린 창씨개명에 대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1940년부터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강압에 의해 이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궁금증이 생긴다.

    한국인들은 창씨개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창씨개명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항했을까?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있다면 그들의 논리는 무엇일까?

    창씨개명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했을까?

    창씨개명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교과서 설명으로는 풀기가 어렵다. 그럼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먼저 당시 사람들이 쓴 일기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당대 식민지 민중들이 이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1940년부터 45년 사이의 졸업앨범도 좋은 자료가 된다. 앨범에 실려있는 학생들의 사진과 이름을 통해 각 연도별로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해나갔는지 변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옛 자료를 수집해 들여다보는 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런 데에 있다. 교과서를 넘어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위는 일제 강점기 말기 금속 공출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사람들 앞으로 공출한 금속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아래는 일제 강점기 ‘결전식기’라는 글자가 쓰인 사기그릇. 금속제 세수대야나 요강 등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식기의 경우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이러한 사기그릇으로 교환해 주었다. (모두 박건호 소장)

    또 교과서에는 일제 강점기 말 금속제 그릇 공출을 설명하면서 그냥 ‘수탈’해갔다고만 나온다. 그러나 실제 그 당시 남겨진 유물들에는 ‘공출보국(供出報國)’이나 ‘결전식기(決戰食器)’라고 쓴 사기그릇들이 있다. 컬렉터도 처음에는 이 그릇들이 무슨 용도인지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이것들은 일제가 금속제 그릇을 걷어가면서 그 대용품으로 지급해 준 그릇들이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금속그릇과 사기그릇을 바꾸어 간 것이다. ‘수탈’이라는 역사 속에는 ‘교환’이라는 것도 같이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탈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수집품을 통해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한 번도 이 ‘공출보국식기’, ‘결전식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교과서를 계속 살펴보자.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약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은 쌀 수탈, 1930년대 이후 전시 체제하의 인적·물적 자원 수탈…..

    일제 강점기를 항상 수탈의 프레임로만 설명하니 그 시대 내부의 복잡한 사회상이나 수탈 방식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실제 학생들을 지도해보면 1920년대와 30년대 전반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쌀 유출과 1940년대의 미곡 공출에 의한 쌀 수탈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냥 모두 ‘쌀 수탈’일 뿐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치고는 너무 거칠고 피상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배우게 되면 일제 강점기의 복잡한 대립 구도나 인간 군상들의 이해관계, 수탈에 대응하는 당대인들의 다양한 대응 등 입체적 역사는 사라지고, 간악한 수탈자 일제 당국과 수탈 당하는 선량한 조선 민족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구도만 남게 된다. 거대한 선악 구조와 프레임만 남게 되면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지워지게 되고, 역사와 도덕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게 된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구조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학은 인문학이므로 궁극적으로는 그 구조 속에서 명멸해간 사람들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사학이 결국 구조와 함께 사람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강대 임지현 교수는 『기억전쟁』이라는 책에서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의 책임 문제를 다루면서 구조가 사람을 학살할 수 없고 결국 사람이 학살한 것이라고 했다. 논지는 다소 다른 맥락이지만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히틀러와 나치 수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곤란하다. 동유럽의 학살 현장에서 실제로 유대인을 죽인 것은 나치 수뇌부의 펜이나 명령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 병사의 소총이었다. 구조가 사람을 학살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 나치의 학살 기계도 현장에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었다.

    – 『기억전쟁』, 휴머니스트, 2019

    송황순의 추억록

    우리는 지금 서력기원, 즉 서기(西紀)을 쓴다. 올해는 서기 2021년이고, 다음 주가 되면 2022년이 될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공용 연호로 처음 쓰인 것은 단군기원(檀紀)였다. 단기는 고조선 건국인 기원전 2333년을 기점으로 연도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 단기가 서기로 바뀐 것은 1961년이었다. 백과사전을 살펴보자.

    단군기원을 공식적인 국가연호로 처음 쓴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이다. 1948년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그 부칙에서 “본 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고 법제화하여 단군기원을 국가공용연호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12월 2일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그 부칙에서 “본 법은 서기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 제4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 본 법 시행 당시의 공문서 중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연대에서 2,333년을 감해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고 법제화하면서 단군기원 대신에 서력기원을 쓰게 되었다. [Daum 백과사전]

    1948년부터 1961년까지는 단기를, 1961년부터 지금까지는 서기를 공용 연호로 썼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공식적인 역사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적인 역사와 달리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 연호가 무엇이었나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게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어떤 연호들을 썼는가 하는 부분은 이 백과사전 설명에는 나와 있지도 않다. 이런 미시생활사를 파악하는 데는 역시 그 시대의 생활문서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들을 통해 교과서적인 이야기 이면에 있는 구체적인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미리 정해진 틀을 정해놓고 사람들을 거기다 끼워 맞출 수는 없는 법이다.

    컬렉터가 수집한 자료 중에는 이런 연호 사용의 실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해방 직후 대전사범학교를 다녔던 송황순이라는 학생의 추억록이다. 이 추억록은 친구들이 자기에게 써 준 덕담류의 글들을 송황순이 시간순으로 묶은 것으로 1946년 7월부터 1955년 7월까지 9년간 총 43명의 친구들이 썼다. 그런데 글쓴 이들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자신의 글에 다양한 식으로 연도(연호)를 같이 써 놓았다.

    추측해 보시라. 당시 청년들은 어떤 연호들을 썼고, 제일 많이 사용한 연호는 무엇이었을까?

    [사진] 왼쪽은 송황순의 추억록 표지이다. 오른쪽은 이 추억록 6페이지 내용으로 ‘경순’이라는 친구가 1948년 5월 21일 쓴 글로 태극기 그림과 함께 ‘자주독립’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박건호 소장)

    추억록이 작성된 9년의 전 기간을 통틀어 제일 많이 사용된 연호는 ‘서기(西紀)’로 28명(68.3%)이고, 두 번째가 ‘단기(檀紀)’로 11명(26.8%)이며, 2명은 연도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두 명은 특수한(?) 연호를 썼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특이한 것은 연호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일을 기준으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전후의 변화를 살펴보자. 먼저 48년 8월 15일 이전에는 서기 연호가 23명(85.2%) > 단기 연호 3명(11.1%) > 특수 연호 1명(3.7%) 순으로 서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미군정 시기에 군정 당국이 공식적으로 서기를 썼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변화가 생긴다. 단기 8명(57.1%) > 서기 5명(35.7%) > 특수 연호 1명(7.1%)으로 단기가 서기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단기를 공용 연호로 제정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는 서기가 주로 쓰였고, 이후에는 단기가 주로 쓰였다.

    [사진] 위의 왼쪽은 양해석이 ‘1948년 6월 15일’ 쓴 글이고, 오른쪽은 정건섭이 ‘1948년 7월 13일’ 썼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이처럼 ‘서기’가 일반적인 연호였다. 아래 왼쪽은 ‘황소의 힘이면 원수의 38선을 가볍게 부시리로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단기 4282년 2월 3일’에 승태건이 쓴 것, 오른쪽은 김현구가 ‘단기 4283년 7월 10일’ 쓴 것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다수가 단기 연호를 쓰고 있다.

    그럼 위에서 서기도 단기도 아닌 ‘특수 연호’라고 언급했던 2건에 대해 살펴보자.

    그 중 첫 번째는 ‘간지(干支)’를 활용해 연도를 표시한 것인데, 여기서는 1948년을 ‘무자년(戊子年)’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확히는 정부 수립이 되는 8월 15일 이전에 적은 것이다. 해방 후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기록된 총 27건 중 단 한 건만이 이렇게 간지로 연호를 표현했다는 사실을 통해 해방 이후에는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간지 연호’는 거의 소멸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장년 이상에서는 여전히 간지를 써서 연도를 나타내는 습속은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수집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간지 연호 말고 사용된 또 하나의 특수 연호는 정부 수립 이후에 쓰인 것이데 ‘춘식’이 써 준 글에 있는 ‘대한민국 30년’이란 연호이다. 이 연호는 단 한 번밖에 나오진 않았지만, 의미 있는 연호이다.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기록한 이 연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정한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여 대한민국의 건립(건국) 시점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1919년으로 보고 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도 대통령 취임사에서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밝혔으며, 1948년 9월 1일 발행된 대한민국 최초의 관보에도 발행 일자를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적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즈음의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국민들 일부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이를 이 추억록의 ‘춘식’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한민국 30년’ 연호 사용은 이 송황순의 추억록 말고도 컬렉터가 수집한 이 시기 사진 한 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무렵 어떤 학교의 수학여행 사진인데, 여기에는 연도 표시를 ‘대한민국 30년 8월 14일’이라고 써 놓았다.

    지금까지 송황순이라는 한 학생의 추억록을 통해 해방 이후 약 10년간 평범한 한국의 청년 학생들이 어떤 연호들을 썼는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교과서가 말해주지 않는 미시생활사 즉 해방 직후 청년들의 연호 사용 실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는 서기가 주로 쓰였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단기가 주로 쓰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임정 수립을 기준으로 한 ‘대한민국 30년’이란 연호도 일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 추억록은 우리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료를 찾아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책임은 전적으로 현재의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사진] 위는 송황순의 추억록 33페이지의 내용으로 ‘춘식’이 ‘희망의 나라로’라는 제목으로 쓴 글로 밑에 ‘대한민국 30년 10월 24일’이라고 써 놓았다. 아래는 1948년 8월 서울 청량리의 어느 학교 학생들이 부산항에서 찍은 수학여행 기념사진으로 밑에 ‘대한민국 30년 8월 14일’이라고 써 놓았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1948년 정부 수립 당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기준으로 한 ‘대한민국’ 연호도 일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건호 소장)

    ‘1948년 건국’ 논란

    얼마 전 20대 대선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발탁된 노재승씨가 자진 사퇴한 일이 있었다. 그날은 2021년 12월 10일로 그가 임명된 지 5일 만의 일이었다. 그가 과거에 SNS 등에서 했던 발언들로 야기된 논란이 사퇴의 원인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과거 5.18은 폭동이라고 볼 수 있다는 취지의 동영상을 공유하면서 ‘대한민국 성역화 1 대장’이라고 적었고,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주장했다. 지난해 5월에는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수령자를 ‘개·돼지’로 비유하는가 하면, 8월에는 “김구는 국밥 좀 늦게 나왔다고 사람을 죽였다”라고 논란이 될 만한 글을 써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11월에는 2016년 촛불 시위를 비난한 글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그리고 검정고시 제도를 ‘비정상적 교육’으로 규정한 글을 공유했는데 그가 공유한 원글의 메시지는 이재명 후보와 같은 비정상인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고, 정상인의 조건 중 하나로 검정고시가 아닌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을 꼽았다. 이렇게 속칭 ‘일베’의 논리로 무장한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결국 공동선대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사퇴하기 직전 노재승씨는 YTN뉴스에 출연하여 자신의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밝히기도 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규정하는 이른바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웠다.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공(功)을 배제하고 김구를 추앙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그의 발언은 ‘김구가 국밥 때문에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왜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유추해보기에 충분했다. 더 나아가 역사와 관련된 그의 숱한 논란성 발언들이 실수로 나온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 사관에 기반한 그의 신념이었음도 스스로 밝힌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어서 1948년을 건국의 해라고도 했다. 이 역시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과 대한민국 보수 우파들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십여 년 전부터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논란은 2006년 7월 이영훈 교수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글이 실리면서 처음 공론화되었고, 그 직후인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광복절 명칭을 건국절로 바꾸겠다고 나서면서 논란을 키웠는데, 당시 이명박 정부는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출범하고 건국 60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후에도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이런 인식이 반영된 몇 가지 주장들을 들어보자.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2016년 8월 15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

    “우리나라 생일이 언제입니까? 바로 1948년 8월 15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8월 15일이 광복절이자 건국절입니다.” (2016년 8월 15일 당시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

    “너무 당연한 일(1948년 건국)을 견강부회해서 1919년을 건국일로 건국해로 삼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8월 15일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이 당일의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중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년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 대목에 대한 논평)

    [사진] 위는 노재승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이 2021년 12월 8일 YTN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은 1948년을 건국의 해로 본다고 설명하는 장면(YTN뉴스 화면 캡쳐), 아래는 2016년 8월 15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장면으로 광복절을 건국절로 규정하고 있다. (JTBC뉴스룸 화면 캡쳐)

    1948년 건국 주장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못박은 현행 헌법의 전문 한 문장으로도 무너뜨릴 수 있는 취약한 논리임에도 뉴라이트 계열은 지속적으로 이 논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여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규정하면 이승만은 당연히 건국의 아버지로 숭상된다. 이승만 국부론으로 무장한 이승만 추종 세력들이 건국절 제정을 주장하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승만의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인물이 되므로 지금 같은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승만 위상은 올라가고 김구 위상은 그만큼 낮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제 강점기 열심히 친일 활동을 했더라도 해방 후 반공 전선에 참가하여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면 그는 애국자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1948년 8.15 건국절 주장은 많은 친일파들이 자신의 흑역사를 세탁하여 건국에 기여한 공로자로 변신할 수 있는 요술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그 공로에 의해서만 인물을 평가하게 되면 식민지 시기의 모든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승만에 협조한 자는 애국자가 되고, 이승만에 반대한 자는 그가 아무리 김구라고 하더라도 비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 원년으로 주장하려면 당대 사람들 중 적어도 몇 사람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어야 주장에 대한 신뢰가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대중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생각했다면 1948년이나 그 직후에 ‘대한민국 원년, 대한민국 2년…’ 이런 표현을 썼어야 그 주장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송황순의 추억록이나 사진들, 기타 생활문서와 자료 등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기준으로 건국 몇 년 이런 식으로 사용한 사례는 전무하였다. 오히려 1919년을 기점으로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적은 연호가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건국 논쟁이 얼마나 생산적인가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제정하려는 이들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라도 설득력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1948년 건국 주장은 그 시대 사람들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누군가가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으로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역사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기에 몇 십 년 뒤에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보는 주장이 상식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 뒷면에 담긴 의도와 당대 사람들의 인식 등을 고려해보건대 그들의 주장이 주류적 상식으로 될 가능성은 지금 현재로서는 매우 희박해 보인다.

    송황순의 추억록은 교과서가 말해주지 않는 생활사의 한 단면을 밝혀주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1948년 건국 주장을 통해 과거의 흑역사를 자신의 자랑스런 역사로 치장하려는 보수 우파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자료들이 품고 있는 이런 소중한 역사와 이야기들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늘 자료들을 살피고 분석하고 또 가치가 있으면 기꺼이 수집한다. 이 정도 중언부언이면 왜 수집하느냐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 것이다.

    [사진] 2016년 8월 12일 청와대 독립유공자와 애국지사들을 위한 오찬에서 광복군 출신 김영관 선생(91)이 박근혜 대통령의 건국절 제정 주장에 대해 면전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며 “왜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면서 독립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국란 때 나라를 되찾으려 투쟁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서 그는 “건국절 주장은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 부합되지도 않고 역사왜곡이고 또 역사의 단절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당시 대통령은 이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사진)

    * ‘컬렉터의 서재’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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