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떨이와 태극기, 폐품의 새 생명
    [컬렉터의 서재-9] 태극기 수집과 그 이면의 이야기
        2021년 10월 12일 09: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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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이클링 아트(Recycling Art)’라는 예술이 있다. 사용되고 버려진 폐자원을 재활용해 만든 작품을 말한다. 필요 없게 된 것을 새롭게 쓰는 경우나 기존의 용도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재활용이므로, 우리 말로 번역하면 ‘재활용 예술품’ 정도 되겠다.

    내가 수집한 자료들 중에는 리사이클링 아트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몇 개 있다. 아트라는 말이 다소 어색하다면 ‘리사이클링 역사 자료’라 해도 무방하겠다. 물자가 풍부한 지금의 입장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어떤 계기로 일단 집에 들어오게 된 물건들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모양을 바꿔가며 다시 사용되었다. 경제적 상황이 주된 원인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이유가 개입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재활용 과정에서 당대 민중들은 번쩍이는 지혜와 재치를 발휘하곤 했다.

    컬렉터가 수집한 자료 중 흥미로운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는 쇠로 만든 재떨이가 있다. 직경 12cm, 높이가 5.5cm 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재떨이로 쓰기에 알맞은 크기이다. 무게는 1.3kg 정도로 묵직한 느낌을 준다. 재털이 안쪽에는 봉곳 솟은 1센티 높이의 철심이 있어 재를 떨기에 편리하다.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져 재떨이 기능에 충실하면서 안정감까지 더해져 담배를 배우고 싶은 욕심마저 생기게 한다. 그런데 이게 자세히 보면 원래 재떨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물건을 재활용해서 만든 것이다.

    바로 105mm 곡사포 탄피다. 재떨이 아래 면에 음각으로 찍힌 ‘105MM’라는 글자와 함께 가운데의 선명한 뇌관 부분이 재떨이의 전생이 탄피였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 얼마나 많은 포탄이 사용되었던가?

    [사진] 왼쪽은 1950년대 포탄 탄피를 재활용해 만든 재떨이(박건호 소장), 오른쪽은 한국전쟁 중 산처럼 쌓여있는 포탄 탄피 사진이다.

    폐포탄 탄피를 잘라서 재떨이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물자가 부족했던 한국전쟁 당시 민중들은 생활의 지혜를 발휘했다. 가혹한 생활 조건은 그것을 견디고 헤치고 나갈 인내심, 용기와 함께 지혜도 같이 선물하는 법이다. 민중들은 그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기신기신 살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 침략으로 황룡사와 9층 목탑이 소실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만큼이나 가치있는 팔만대장경판을 새롭게 만들어낸 것처럼, 전쟁이 파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뭔가를 창조해낸다는 놀라운 역설을 우리는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햄을 이용해 부대찌개라는 새로운 퓨전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한 그들은 군인들의 철모나 화이바로 두레박이나 똥바가지를 만들었으며, 수류탄 탄피로 호롱불 용기를, 군복으로 솜저고리와 몸뻬 바지를, 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신선(PP선)으로 소쿠리나 바구니로 만들어 사용했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서는 원조 물자로 미국에서 들어온 밀가루 포대기를 잘라서 옷을 해 입었고, 라면 봉지를 여러 장 연결하여 밥상보를 만들기도 했다. 모두 곤궁했던 시기 우리의 삶이고 역사였다.

    [사진] 전쟁과 가난도 민중들의 삶을 지울 수 없었다. 왼쪽 위부터 수류탄 탄피를 재활용한 호롱불, 군용 화이바를 재활용해 만든 두레박, 피피선을 이용해 만든 시장 바구니이다. 아래 왼쪽은 미국 원조 밀가루 포대, 오른쪽은 밀가루 포대를 잘라 만든 바지이다. 바구니와 밀가루 포대는 박건호 소장, 두레박은 국립민속박물관, 호롱불과 바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이다.

    나는 이것들을 볼 때마다 전쟁의 도구를 생활의 도구로 변화시킨 그 시대 민중들의 지혜에 경외감을 느낀다. 2020년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를 출간한 직후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MC 유재석씨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중에 자신의 이름으로 박물관을 연다고 했을 때, 무엇을 대표 전시물로 하고 싶냐고. 그때 나는 두말없이 이 탄피 재활용 재떨이와 원조 밀가루 포대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가난, 굶주림, 전쟁 이런 비극의 이야기들을 당대 민중들은 회피하지 않고 의연하고도 태연하게 자기 삶으로 끌어들여 생활의 도구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들은 그 속에서 당대 민중들의 생명력, 미래에 대한 낙관, 삶에 대한 희망 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

    다음으로 소개할 자료는 낡고 빛 바랜 태극기 한 장이다. 이 태극기는 4괘를 먹으로 대충 그린 것인데,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태극기가 아니다. 태극은 아예 빨간 색만 보인다. 자세히 보아야만 빨간 색 위에 푸른 색을 덧칠한 흔적이 보인다. 기묘한 이 태극기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렇다.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다.

    [사진] 1945년 해방 직후 제작된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 (박건호 소장)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느닷없이 광복의 날을 맞았다. 사람들은 이 광복의 기쁨을 드러내고자 태극기를 흔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온전한 태극기가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빨리 만들어 흔들어야 하는데, 오랜만이라 제대로 그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그려보면 4괘가 생각보다 어렵다. 게다가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태극기 만들 천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그들의 눈에 띈 것이 일장기였다.

    그렇지!

    일장기 위에 4괘만 그리고 빨간 색 원 절반에 태극 무늬에 맞게 파란 색을 덧칠만 하면 태극기가 되는 거지. 태극기를 일장기로 바꾸기는 어려워도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래서 광복 직후에 사용된 태극기는 상당수가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였다. 광복 직후의 풍경을 증언한 내용이다.

    사람들이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 일본이 망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건 그날 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일본 천황의 방송이 몇 번 되풀이되었지요. 우리말로도 방송하고 해설도 해주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16일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요. 정말 서울 시내, 누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전부 길거리로 나왔어요. 그리고 제대로 된 태극기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그리도 급히 만들었는지 형형색색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어요.

    – 문제안의 증언, 『8.15의 기억』, 한길사, 2005년

    제대로 된 태극기는 아니었지만, 제각각 손수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뛰쳐 나온 광복 직후 사람들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 속에 섞여 있었을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 광복의 기쁨이 커서 그것이 이상하다거나 초라하다고 누구도 퉁바리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수집한 태극기도 해방 직후 급하게 만들어진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 중의 하나인데, 광복 직후의 감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미 8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태극기를 새롭게 만들 여유가 생겼을 것이므로 이 태극기는 8월 15일 직후에만 잠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장기 위에 칠한 파란색 물감은 이미 빛이 바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렵다. 4괘 중 2개는 나름 정성스럽게 그렸는데, 갈수록 마음이 급했던지 나머지 2개는 대충 그린 표가 역력하다. 광복 직후의 열기가 그런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대문호였던 홍명희의 시에도 그런 흥분이 드러나 있다. 홍명희가 느꼈던 그 감동은 고스란히 동시대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광복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마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홍명희, [눈물섞인 노래]

    온통 만세로만 되어 있는 시다. 비유나 은유나 대비 등 시적 기교 없이 마치 동시처럼 쉽고 직설적인 어투로 해방 직후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감정을 정제할 겨를이 없었다. 냉정을 되찾는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색바랜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 한 장에는 일제 강점기 36년의 시절을 감내했던 한국인들이 8·15 광복을 맞아 느꼈던 격한 환희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는 이렇게 자신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는 광복 직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서울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난 2009년 5월 삼각산 진관사에서 일제 강점기 자료들이 발견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칠성전 해체 공사를 하던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 숨겨져 있던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 20점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일심회라는 비밀결사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하던 진관사 백초월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들 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태극기였다.

    왼쪽 위에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이 태극기는 3·1운동 즈음 제작된 태극기로는 희귀한 것이었다. 현재의 표준 태극기와 비교하면 4괘 중 리(離), 감(坎)의 위치가 바뀐 형태이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진관사 태극기는 위에서 소개한 태극기처럼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들었다. 일장기의 붉은 원 둘레의 네 귀퉁이에 4괘를 덧칠하고, 붉은 원 위에는 푸른 색을 태극문양에 맞게 덧칠하여 만들었다. 학자들은 재료가 부족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다는 것은 일본을 누르고, 일본을 극복하고 독립을 이루겠다는 강렬한 저항의 의지를 담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진관사 태극기는 3·1운동을 상징하는 태극기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진관사가 있는 서울 은평구에서는 2015년부터 3·1절이 광복절이면 구청 청사와 거리에 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태극기가 훼손된 줄 알고, 구청에 신고 전화를 많이 한다는 후문이다.

    [사진] 왼쪽은 일장기에 4괘를 그리고 파란색을 덧칠해 만든 진관사 태극기(문화재청 사진), 오른쪽은 2020년 광복절 은평구 길거리에 게양된 진관사 태극기(박건호 사진)

    태극기 사진, 그 진실과 오해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태극기 수집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고자 한다. 내가 태극기 관련 자료 수집에 몰두해 있을 때였다. 수집을 하다 보면 특정 주제에 꽂히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모든 자료들을 다 모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자기들만의 전문 수집 분야가 생기게 된다. 어떤 이는 우표를, 또 어떤 이는 동전을, 또 어떤 이는 역사 자료를 수집한다. 같은 역사 자료라 하더라도 어떤 이는 옛 전적을, 어떤 이는 민화 등 고미술품을, 또 어떤 이들은 지도 자료를 모으기도 한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수집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고, 그 길 위에서 수집가들은 다 자기들 나름의 특색 있는 수집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역사 전반에 걸쳐 고루 고루 수집하는 편인데, 한때는 태극기 관련 자료 수집에 열중한 적이 있다. 태극기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어 그것 자체가 한국의 근현대사이다. 그래서 태극기만이 던져주는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독자들께 해방의 감격을 가장 잘 표현한 사진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어떤 사진을 떠올리시겠는가? 아마 ‘서대문형무소를 나서는 독립지사들’ 사진일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고난과 수모를 당했던 감옥을 나오면서 모두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고 환호하는 장면이다. 물론 어떤 분은 이것을 연출사진으로 보기도 하지만, 해방의 감격하면 이 사진이 등장하고, 각종 교과서에도 현대사 첫 머리에 실릴만큼 유명한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이 역사가 된 것이다. 광복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아직 기소되지 않은 사람들을 가두어 두는 구치감이라는 게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한 사상범이라고 잡혀간 60여 명의 투사들이 갇혀 있다가 이날 저녁 때 풀려났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형무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사진] 1945년 8월 15일 광복절 서대문 형무소를 출소하는 독립지사들

    이날 근처 독립문에는 기다란 깃발 두 개가 휘날리고 있었다.

    ‘환영 혁명 동지 출옥’

    ‘축 혁명투사 출옥’

    어제까지도 ‘축 000군 입영’의 깃발이 휘날리던 그 거리였다. 하루 아침에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36년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으니 그 기쁨이야 오죽했겠는가?

    어머니,

    쇠사슬에서 풀린 기쁨은 쇠사슬에 얽혔던 사람보다 더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는 노예의 어머니가 아니요, 나는 노예의 아들이 아닙니다……나는 울었습니다. 마음놓고 거리낌없이 한번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어머니도 우시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래오래 참으셨던 울음을 어머니도 마음놓고 우시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대로 우는 자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 사는 것이 하도 괴로워 차라리 죽은 이의 행복을 부러워하기도 하였던 우리들입니다마는 이제 이 큰 기쁨을 당하여 살아 남은 자의 행복을 죽은 이들과 나눌 수 없는 것이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추억의 세계로 돌아왔고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합니다…

    동전(東田) 오기영, 1945년 8월 23일

    식민지의 사슬이 풀린 날의 그 감격을 오기영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월북한 인물이다. 이처럼 쇠사슬에서 풀린 기쁨은 쇠사슬에 묶여있던 이들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 것이다. 일제 강점기 ‘사는 것이 하도 괴로워 차라리 죽은 이의 행복을 부러워하기도 했던’ 그들이었다. 현실의 고통이 큰 만큼 기다림도 그만큼 컸다. 그래서 해방의 날 천지가 기쁨으로 요동치고, 사람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거리에서 얼싸안고 춤추었던 것이다.

    2015년 광복절을 두어 달 앞두고 있던 6월이었다. 나는 인터넷 경매에서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8.15 광복의 기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10여명의 남자들이 술집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그들 뒤로는 그리 크지 않은 두 장의 태극기가 걸려있다. 표정을 보면 보통 기쁜 것이 아니다. 환호성이다. 해방의 기쁨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힘든 그런 표정들이다. 사진의 인물들이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사진이 광복의 감격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진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진] 2015년 한 경매에 나온 사진으로 10여 명의 사람들이 술집에서 환호하고 있다. 아래쪽 사진은 환호하는 인물들 중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듯한 두 인물(위 사진의 붉은 색 테두리)을 확대한 것이다. (박건호 소장)

    이 사진 자료를 경매에 올린 이의 설명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 설명 때문에 광복의 기쁨을 표현한 사진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희귀 근대사,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진 한 장
    역사적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사진을 등록합니다.
    아주 희귀한 사진으로 사려됩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아주십시오.
    기생집으로 판단되며 손으로 그린 태극기에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강점기에 태극기 역사적으로 꿈도 못꾸는 일이죠.
    거기에 만세..
    정확히 이거다라는 말씀은 못 드리나 근대 역사적 자료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싸이즈는 가로14.8cm, 세로 10.7cm입니다.
    사진을 잘 보시고 입찰하시기 바랍니다. 관심 부탁드립니다.”

    판매자는 ‘광복의 기쁨’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상황 자체가 뭔가 그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확신으로 나는 경매에 참가했고, 결국 비교적 높은 가격으로 낙찰 받았다. 며칠 후 낙찰 받은 사진을 우편으로 받아 실물을 확인했다. 일단 복장을 보면 국민복을 입은 남성들이 여럿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태평양전 쟁 이후 즉 1940년대는 분명한 것 같았다.

    그런데 찬찬히 보니 뭔가가 좀 이상하다.

    먼저 남성들 중간 중간에 있는 접대 여성으로 보이는 6명 여성은 복장으로 보건대 모두 일본여성같다. 그런데 해방이 되었을 때 손님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이해가 되나 여성들 표정도 그리 어둡지 않다. 두 명 빼고 네 명 모두 웃고 있다. 이건 이렇게 해석하기로 하자. 민족을 떠나 직업인으로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일본인이 운영하는 술집에 손님이 왔으니 그들을 기분좋게 접대하는 것은 나름의 의무일 수 있으니…..

    더 이상한 부분이 있다. 분명 컴퓨터 화면 속에서 보았을 때는 태극기였는데, 실물을 보니, 사진 위에 ‘손으로 몇 개의 선을 그어’ 태극기를 그린 것! 즉 사진 속 태극기가 아니라 사진 바깥에서 누군가가 가필하여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어 그린 것이다. 당혹스럽다.

    [사진] 경매로 구입한 사진의 부분 확대로 사진 속 일장기를 누가 가필하여 태극기로 만들었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게 태극기가 아니고 원래 일장기이었다면…….

    1940년대 당시는 전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환하게 축하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누군가의 생일이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였을까? 그렇게 보기에는 표정이 너무 격하다. 일본군이 싱가폴과 필리핀을 함락했다는 뉴스를 듣고 환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흥미롭지 않은가?

    단 몇 개의 선으로 사진이 담고 있는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일장기일 때는 일본군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진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몇 개의 선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버리면 이건 일본의 패망과 광복의 기쁨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변한다. 나는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간단한 조작을 통해서, 혹은 아주 사소한 해석 오류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될 수 있음을 여러 번 경험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임명장(간이국세조사원)을 하나 수집한 적이 있는데, 연도가 ‘대한 14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수여한 임명장에 연호가 ‘대한’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대한’과 ‘독립운동’ 같은 말들은 금기어 중 금기어였다. 이 임명장의 연호는 ‘大正(대정)’에 가필해서 ‘大韓(대한)’으로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총독부’까지 정교하게 바꾸지 않은 한 그 진실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왜 이렇게 글자를 고쳤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친일 인사가 해방 후 자신의 흑역사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장난삼아 해 본 것이었을까? 궁금점만 남아있다.

    [사진] 조선총독부가 수여한 간이국세조사원 임명장이다. 누군가 ‘대정14년’을 ‘대한14년’으로 글자를 고쳐 놓았다. (박건호 소장)

    술집에서 일장기를 배경으로 환호하는 사람들을 찍은 위의 사진도 조그마한 조작으로 실제의 사실이 왜곡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매의 눈으로 날카롭고도 정교하게 사실을 가리고 규명해야 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 중에 많은 거짓들이 숨어 있다. 이건 비단 역사 자료뿐만 아니다. 우리의 현실도 그렇다. 그럴 듯하게 보이는 정치인들이 언론에 의해 포장된 과대한 껍데기 속에 사악하고 초라한 본질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료 속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예리한 눈길은 자료 속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도 빛을 발해야 한다. 진정 훌륭한 컬렉터는 그래서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서 거짓을 가려내고 진실을 탐색하고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참, 위 일장기 가필 태극기 사진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실 것이다. 경매에서 낙찰 받고 구입한 물품도 일반 물품처럼 반품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판매자의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으로 그린 태극기에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태극기는 정말 손으로 그리지 않았던가?

    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판매자는 소개글 앞부분과 마지막에 두 번씩이나 사진을 자세히 보라고 당부했었다.

    “사진을 잘보시고 입찰하시기 바랍니다.”

    사진을 더 유심히 살피지 못한 것은 나였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치고 그냥 소장하기로 했다.

    사진은 내 자료 파일 속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진은 나에게 자료를 검토할 때는 항상 꼼꼼히 세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주었다. 그래서 이마저도 소중하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어야 높고 깊은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이후 나는 자료를 수집할 때, 특히 태극기가 나오는 경우에는 신중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것도 트라우마의 일종일까?

    [사진] 재활용 태극기의 최고 걸작은 아마 이 태극기일 것이다. 한국일보가 2019년 3·1절을 맞이하여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부착된 사진 5,600장을 이용해 진관사 태극기를 모자이크로 표현했다. 진관사 태극기는 이렇듯 피와 땀으로 얼룩졌다. 아래 작은 사진들은 태극문양 부분의 확대 사진들이다. 작은 조각처럼 보이는 각각의 사진 중에는 유관순, 안창호 등 유명한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대다수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민초들까지 다양한 얼굴이 담겨 있다. 일제 강점기 감시대상자 사진을 재활용하여 만든 이 태극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장엄한 느낌을 주는 태극기일 것이다. (한국일보 사진, 원본 사진 이미지는 다음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goo.gl/sthsLR )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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