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하의 추억
    1987년의 히트곡들···
    [대중음악]이십대에 떠난 이의 노래
        2021년 09월 06일 10: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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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일은 2월 18일이다. 생일이 18일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발음의 욕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는 18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노래를 생각하면, 십팔 번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오늘 글의 주제와 상관없는 노래 하나를 소개한다. 단지 18이라는 숫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Skid Row의 <18 & Life>는 지금의 사오십 대 아저씨 아주머니들 일부가 십 대 아니면 이십 대 때 꽤 좋아했던 노래였다. (관련 영상)

    1987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오리엔테이션 비슷한 것을 받으러 대학에 갔다. 그날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수강 신청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했고, 학과장 교수님의 연설을 들었다. 그는 한 학년 선배인 86학번들이 전년도에서 다섯이나 구속되었음을 유난히 강조하며 학생운동을 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학생운동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참. 그날 <좌경용공, 그 실상과 음영>이라는 무시무시한 책자를 받았다. 그런데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봉천동의 어느 중국집에서 있었던 예비 신입생환영회였다.

    나의 본명과 같은 이름의 가수가 1986년에 낸 첫 앨범에 담겼던 <남남>이라는 노래가 그 당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선배들은 한입을 모아 그 노래를 부를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그 노래의 가사를 알지 못했고, 당황한 나머지 가장 내 입에 많이 붙어있던 노래였던 고등학교 교가를 불렀다. ‘돌아이’가 나타났다는 듯한 눈빛들을 무시하며 나는 열심히 교가를 끝까지 불렀다. 실망 가득한 분위기. 선배들은 3월에 있을 정식 신입생환영회에서는 <남남>을 부를 것을 기대한다고 했었다. 나쁜 자들이었다. “기대한다.”라는 말은 그 당시 만 17세였던 나에게는 “안 하면 별로 좋지 않을 걸.”이라고 들렸다.

    이 노래가 문제의 <남남>이다. (관련 링크)

    나는 2월 18일에 만 18세가 되었고, 3월 2일에는 대학생이 되었다. 3월 초에 있었던 정식 신입생환영회에서 나는 <남남>을 불렀고,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 곡의 핵심 중 하나였던 휘파람까지 연습했었고, 가수 최성수의 노래의 느끼함을 제거한 상큼한 버전의 그 노래를 창조했다. 1987년 3월에는 여러 종류의 신입생환영회가 있었다. 고등학교 동문 모임, 고등학교 동문 인문계열 모임, 어떤 서클 모임, 아무튼 <남남>을 지겹도록 불렀다.

    1987년은 내가 학생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했던 해였지만, 그래서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민족해방가> 등의 민중가요를 주로 불렀던 해였지만, 대중음악에 관한 관심을 멈추지는 않았었다. 그해의 노래들을 살피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유재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먼저 1987년의 ‘가요 톱텐’에서 1위를 차지했던 곡들을 살펴보자. 그 프로그램이 큰 가치를 지녔었는지는 궁금하지만, 어쨌든 역사를 살핌에 있어서 인용 가능한 것이기는 할 것이다.

    1987년의 히트곡들을 보면 통상적으로 ‘발라드’라고 부르는 노래 일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분류하지 않는 노래는, 주현미의 <눈물의 부르스> (관련 영상)와 장덕의 <님 떠난 후>(관련 영상)밖에 없을 것이다. 전영록-영화 <돌아이> 시리즈의 주연이기도 했던-의 <내 사랑 울보>는 약간의 트로트 느낌이 나는 퓨젼 발라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사랑 울보 영상)

    이 해의 최고의 히트곡은 다음의 세 노래였다. 먼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를 들어보자. (알고 싶어요 영상). 다음 영상은 매우 놀라운데, 십 대의 김혜수가 불렀다. (관련 영상)

    이치현과 벗님들의 이 노래는 꽤 많은 남자 대학생들이 놀러 가면 단골로 부르던 노래였다.(관련 영상)

    이해 마지막을 장식한 빅 히트곡은 이정석의 <사랑하기에>였다. 1987년에는 아직 노래방은 없었는데, 나중에 노래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1990년대가 되었을 때, 나는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부르는 이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관련 영상)

    이렇게 많은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이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1987년의 노래는 솔로 가수로는 TV에 단 한 번 출연했고, 각종 방송의 순위 프로그램들과는 인연이 없었던 유재하의 노래들이었다. 그해 그의 유일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가 발표되었다. 앨범은 다음의 곡들을 담고 있었다.

    Side A

    # 제목 재생 시간

    1. 지난 날 4:29
    2. 텅빈 오늘밤 5:52
    3. 우리들의 사랑 4:53
    4. 사랑하기 때문에 4:46
    5.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2:37

    Side B

    # 제목 재생 시간

    1. 그대 내 품에 5:52
    2. 가리워진 길 3:14
    3. 우울한 편지 5:01
    4. Minuet (경음악) 2:37
    5. 정화의 노래(건전 가요)

    앨범은 처음에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용필의 7집 앨범에서 먼저 발표되었었고, <가리워진 길>이 김현식에 의해 발표되었었고, 그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참여했었고, 처음에는 김현식의 반주를 맡던 밴드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독자적인 음악집단이 되었던 ‘봄 여름 가을 겨울’에도 참여했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계에서의 인지도는 매우 높았다. 작곡과 편곡 능력은 이미 알려져 있었고, 게다가 이 앨범의 노래들은 가사의 완성도 또한 매우 높았다. 좋은 곡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특히 유재하 정도의 재능을 지닌 음악인의 곡들이라면.

    먼저 <사랑하기 때문에>를 들어보자. (‘사랑하기 때문에’ 링크)

    시작 부분의 연주만으로도 감동적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가사 또한 아름다운데, 오랜만에 한 번 읽어보며 들어보시는 것이 어떠할지.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젠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조용히 따르리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에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는 김수희의 <애모>의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와 함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가사 중의 하나이다. 사랑은, 슬프지만, 때로는 갑-을 관계가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애정의 강도가 다를 수 있는데, 더 애타게 사랑하는 이는 을이 되는 것이다. 갑-을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바뀔 때 아름다운 사랑이 탄생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사랑은 이런저런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열여덟의 나는 위의 문단과 같은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멜로디와 가사 모두에 반했다. 그런데 이 노래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이 곡이었다.(관련 링크)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네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첫사랑이 허무하게 끝났고, 대통령선거에서도 허망한 결과를 얻었던, 어렸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울었었다. 다시 보아도 다시 들어도 공감하게 되는 노래이다. 이 앨범의 노래들은 ‘건전 가요’인 마지막 곡을 제외하고 모두 훌륭한데,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가리워진 길>을 나는 언제나 최고의 곡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늘 다시 들으니 또 눈물이 흐른다. 이거 참.

    마지막으로 들어볼 노래는 <지난 날>이다.(관련 영상)

    지난 옛일 모두 기쁨이라고 하면서도
    아픈 기억 찾아 헤매이는 건 왜일까
    가슴 깊이 남은 건 때늦은 후회
    덧없는 듯 쓴웃음으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네

    예전처럼 돌이킬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득문득 흐뭇함에 젖는 건 왜일까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세상 사람 얘기하듯이 옛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다시 못 올 지난 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그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지난 날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하루하루 더욱 새로웁게
    그대와 나의 지난날

    언제 어디 누가 이유라는 탓하면 뭘해
    잘했었건 못했었건 간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세상 사람 얘기하듯이 옛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다시 못 올 지난 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지난 날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하루하루 더욱 새로웁게
    그대와 나의 지난날

    생각 없이 헛되이 지낸다고 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지난 날
    다시 못 올 지난 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그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지난 날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하루하루 더욱 새로웁게
    그대와 나의 지난날
    다시 못 올 지난 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지난 날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하루하루 더욱 새로웁게

    알다시피 유재하는 유일한 음반을 냈던 1987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모든 죽음은 애통하지만, 이십 대 중반의 죽음은 더욱 애통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노래를 나에게 주었고, 나는 슬픔보다는 기쁨을 준 사람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페이스북에 20대 사진 올리기 열풍이 불었었다. 유재하의 이 노래를 들으며 지난날보다는 살아갈 날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자는 생각을 해본다.

    * ‘대중음악 이야기’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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