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태춘 박은옥,
    아름다운 저항의 노래
    [대중음악] 노래와 삶, 모두 빛나는
        2021년 08월 16일 07: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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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쯤의 일로 기억한다. 누군가가 돌아가셨고 그래서 문상을 갔는데, 거기에서 지금의 레디앙 편집장을 만났다. 그때의 그는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부의금 봉투에 내 이름을 쓰는 것을 보더니 부부 이름을 모두 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얘기를 그날 처음 들었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했던 나의 대학교 때 친구들 대부분이 부부 이름을 썼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진보 진영(주 1)이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로 여겼었다.

    오늘 소개할 음악가들은 소위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보다도 앞서 행동했던 사람들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선구적이고 훌륭했던 예술가들이다. 그런 점들 중 하나가 다음의 것이다. 대부분의 노래를 정태춘 혼자 불렀지만, 앨범은 항상 정태춘 박은옥 명의로 발표되었다.

    정태춘․박은옥 4집 [떠나가는 배/우리는] (1984/지구레코드): 정태춘 박은옥의 첫 합작품이지만 정태춘의 전 앨범들까지 합쳐 4집으로 명명(지구 레코드가 그렇게 함).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단순히 둘이 사랑하는 부부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1980년대 초반에, 그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은 당시에는 별로 없었겠지만.

    시와 노래는 고대에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그것은 분리되어 인식되었고, 시는 고급인 것이고 대중가요 가사는 그러하지 않다는 생각도 퍼져나갔다. 1970~201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일부 ‘유명’ 시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앉는 자리에 서열을 만들고 술을 마시며, 성희롱을 밥 먹듯 하는 존재들이었지만, 겉으로는 고고한 척 했다. 일부 시인들은 대중가요를 부르는 혹은 만드는 이를 ‘딴따라’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통해 한국 사회의 특정 시기가 지났음을 알렸던 최영미가 ‘미투 운동’의 확산에 힘을 얻어 ‘만년 노벨상 후보’였던 고은의 추악함을 폭로했다는 것은 참으로 ‘시’적이었다. 고은이 매장된 것은 바로 인과응보, 영어로 poetic justice(주 2)였다. 최영미는 한 시대가 끝났음을 시를 통해 알렸을 뿐 아니라, 한 시대를 끝내는데 행동으로 기여했다. 2021년의 문학계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고고한 척 하던 시인들 중 일부는 사실은 자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인이라 불리는 이들 중 일부는 고은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하찮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나는 강남에 건물을 소유한 건물주다, 나도 강남에 건물을 소유해 앞으로 편히 살고 싶다, 이런 꿈을 꾸는 것이 유죄의 증거라고?”라고 안도현은 썼다. 조국과 정경심을 옹호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출신을 옹호하는 이 시인의 ‘가슴’은 차가워진 연탄재만큼이나, 뜨거웠던 과거와는 달랐다.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해진 도종환은 죽은 아내에 대한 절절했던 자신의 시를 잊었는지 재혼했고, 사실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국회의원이 되었고 장관이 되었다. 이재용을 풀어주고 민주노총 위원장은 코로나 방역을 빙자하여 잡아가는 정부에서 말이다. 카카오의 폭주(관련 글 링크 하나 더)를 눈감아주는 정부와 여당에서 말이다.

    이 글은 모든 시인을 비판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나는 대중가요라 불리는 것의 가사가 위선자들의 시보다 훨씬 훌륭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어느 시인의 시보다도 시대와 사회를 정확히 파악했을 뿐 아니라, 부정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아름다운 음악가 정태춘 박은옥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8년 11월에 정태춘이라는 신인 가수가 《시인의 마을》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한대수나 양병집과 같은 이들도 있었기는 하지만, 1970년대의 소위 포크 음악은 사실은 미국 등의 외국 노래를 번안한 것이었거나, 미국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신인 가수의 음악은 달랐다. 가사도 달랐고, 음색도 달랐다. <시인의 마을>도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다음 노래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바로 <촛불>이다.

    1979년에 나는 이 노래를 들었고, 그 노래에 매료되었다.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는 많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도 많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들도 많다. 그런데 이렇게 가사와 어울리는 느낌의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밥 딜런은 정태춘에 비교하면 그런 면에서는 하수이다. 정태춘은 조용필이나 박정현과는 다른 의미에서 노래를 매우 잘한다.

    1979년 MBC의 ‘10대 가수 시상식’은 한국 역사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원래 이 시상식은 1979년 10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전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안다. 유신 수괴 박정희가 죽었다. 행사는 연기되었다. 12월 12일에는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에 연기되었던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 한해의 마지막 날 혹은 그 전날 이 행사는 치러지게 되는 전통이 생겨났다. 그날 상을 탄 이들은 모두 한국 가요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이들이었다.

    – 신인가수부문 : 정태춘(관련 동영상), 정윤선(관련 동영상)

    – 중창가수부문 : 사랑과 평화, 희자매

    – 남자가수부문 : 송창식, 윤수일, 전영록, 조경수(주 3), 최헌

    – 여자가수부문 : 심수봉, 양희은, 이은하, 정종숙, 혜은이

    – 특별가수부문 : 이미자

    – 최고인기 가수상: 혜은이(<제3 한강교> 등)

    이날의 화제 인물은 ‘가수왕’이 되었던 혜은이보다도, 박정희가 죽던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심수봉이었었다. 하지만 심수봉은 이 행사 후, 1980년대 초반에는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심수봉만큼은 아니었지만 대중들의 관심을 받은 이가 있었다. 26세의 청년 정태춘은 신인가수 대표로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 출연하게 되었고,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작사 부문(촛불>)을 수상했다. 21세기로 치면 남자 아이유가 탄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첫 앨범 <시인의 마을>을 내는 과정에서 그는 유신 정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그의 가수 생활 동안 지속된 공윤과의 투쟁의 시발점이라 할 만한 앨범이기도 한데, 시인의 마을은 1978년 6월 19일 심의에서 개작 결정 조치를 받았다. 당시 심의에서는 시인의 마을이 원래 있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으로 보고 원작 시를 찾았지만, 당연히 시인의 마을은 정태춘이 직접 작사한 곡이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시작과 연결 없는 대중가요 가사로는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부적절하다고 사료됨으로 전면 개작 요망함”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처분을 받았고 결국 서라벌레코드 사장은 정태춘을 대신해 가사의 여러 부분을 수정해 심의를 통과했다.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는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로, ‘텅빈 가슴’은 ‘부푼 가슴’으로,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은 ‘맑은 한줄기 산들바람’,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는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등으로 바뀌었다. (관련 글 출처)

    그는 이후 대중성과 이별했고, 2집인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 (1980년)는 상업적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그의 특징은 더욱 강화되었고, <탁발승의 새벽노래>와 같은 멋진 노래들을 담고 있었다. (관련 영상)

    3집인 《우네》 또한 대중에게 전해지는데 실패했고, 지구 레코드는 그에게 주던 생활비 지급을 중단했다. 그 시기에도 예능 프로는 있었지만, 그는 ‘명랑운동회’에 한 번 나가 계란과 밀가루 범벅이 되는 경험을 한 후 TV 출연을 1980년부터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생계가 막막했는데, 그는 아내와 함께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4집인 《떠나가는 배(이어도)》 (1983년)부터 정태춘이 아닌 정태춘 박은옥으로 앨범을 냈고, 타이틀 곡인 <떠나가는 배>도 널리 알려졌지만, 둘이 부른 이 노래는 속된 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음 달빛 밝은 밤이면
    음 그리움도 깊어어이 홀로 새울까 견디기 힘든 이 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 내 더운 가슴 안아 주오 (관련 영상)

    정태춘의 ‘음유 시인’ 같은 목소리와 맑은 박은옥의 목소리는 잘 조화를 이루었고, 단순하지만 사랑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가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김민수전>을 쓰고 나서 나는 아내가 김유정을 질투하는 것 때문에 며칠을 시달렸었는데, 이 글은 아내가 읽지 않기를 바란다. 1987년에 나는 첫사랑을 했고, 내 사랑은 나만큼이나 노래를 잘했고, 우리 둘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 술집은 뒤집어졌었다. 물론 첫사랑은 길지 않았고, 첫사랑이 깨진 후 나는 정태춘 박은옥을 잊기를 바랐다.

    다시 정태춘 박은옥 애기로 돌아가자. 1985년에 발매된 정태춘의 5집이자 정태춘 박은옥의 2집이었던 《북한강에서》 역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타이틀 곡은 바로 2년전의 모습으로 들어보자. (관련 영상)

    그는 20대 때와 60대 때의 음색의 차이가 거의 없는 몇 안 되는 가수이다.

    <북한강에서>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 거릴 생각하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고….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속으로는 또 강물이 흐르고
    내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고….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곁에 오래 머물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오….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1988년에 그는 새 앨범 《무진 새 노래》를 발표하는데, 수록곡은 다음과 같았다.

    1. 실향가
    2. 이 사람은
    3. 고향집 가세
    4. 아가야, 가자
    5. 우리의 소원은 통일
    6. 우리가 추억이라 말하는
    7. 한밤중의 한 시간
    8. 사랑하는 이에게 2
    9. 그의 노래는
    10. 얘기2

    널리 알려진 노래 <얘기2>를 들어보자.

    담 넘어 뒷집의 젊은 총각
    구성진 노래를 잘도 하더니
    겨울이 다 가고 봄바람 부니
    새벽밥 해 먹고 머슴 가더라산 너머 구수한 박수무당
    굿거리 푸념을 잘도 하더니
    제 몸에 병이 나 굿도 못하고
    신장대만 붙들고 앓고 있더라어리야디야 어리얼싸
    어리야디야 앓고 있더라길 건너 첫 집의 젊은 과부
    수절을 한다고 아깝다더니
    정 들은 이웃에 인사도 없이
    그 춥던 간밤에 떠났다더라집나간 자식이 돌아온다 하기
    동네 긴 골목을 뛰어가보니
    동구 밖 너머론 바람만 불고
    초저녁 단잠의 꿈이더라

    어리야디야 어리얼싸
    어리야디야 꿈이더라 (관련 영상)

    다음 링크는 앨범의 전체 수록 곡을 들을 수 있는 동영상이다. (관련 링크)

    1990년에 그들의 기념비적 앨범인 《아! 대한민국》이 ‘불법적’으로 발매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많은 이들이 그랬듯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그들은 공윤의 심위를 거부하고, 정식 경로가 아닌 방식으로-예를 들어 대학에서 열리는 집회나 공연장에서 시민들에게 직접-레코드를 전하기 시작했다. 타이틀곡은 그때 기준으로는 충격적이었다.

    아, 대한민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략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양심과 정의가 넘쳐흐르는 이 땅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은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관련 영상)

    지금도 ‘민주 인사’들은 조국을 말하고 애국을 말한다. 그러나 정태춘은 이미 1990년에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라고 말한다. 이준석 같은 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정태춘은 투사였고, 누구보다 앞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정체를 까발린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건희와 이재용이 깜짝 놀랄만한 가사를 이미 31년 전에 썼다.

    하룻밤 향략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이건희는 한 번에 2천5백만 원을 뿌려댔다고 하며,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정태춘은 정확했다. 그 재벌의 아들은 사회의 법질서를 비웃으며 며칠 전에 풀려났다. 그것이 우리의 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체이다.

    정태춘,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 목록

    정태춘

    《시인의 마을》 (1978년)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 (1980년)
    《우네》 (1981년)

    정태춘 박은옥

    《떠나가는 배(이어도)》(1983년)
    《북한강에서》 (1985년)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노래》(1988년)
    《아 대한민국》(1991년)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3년)
    《정태춘 박은옥 – 20년 골든》 (1995년)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2002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2012년)
    《사람들 2019》
    《정태춘-3집 LP(Remaster2020)》

    그는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다가 2002년부터 2012년 사이에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2012년 북귀했다가 다시 침묵했고, 2019년에 《사람들 2019》으로 다시 돌아왔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으려는 정태춘을 설득했던 이는 바로 아내인 박은옥이었다. 그들의 사랑하는 사이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동지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음악을 다시 소개하면서 끝내고자 한다.

    <서울의 달>

    정태춘, 박은옥, ‘정태춘 박은옥 골든’ 앨범, 지구 레코드, 1990.

    저무는 이 거리에 바람이 불고
    돌아가는 발길마다 무거운데
    화사한 가로등 불빛 너머
    뿌연 하늘에 초라한 작은 달

    오늘 밤도 그 누구의 밤길 지키려
    어둔 골목, 골목까지 따라와
    취한 발길 뜨겁게 막아서는
    아하하 차가운 서울의 달

    한낮의 그림자도 사라지고
    마주치는 눈길마다 피곤한데
    고향 잃은 사람들의 어깨 위로
    또한 무거운 짐이 되어 얹힌 달

    오늘 밤도 어느 산길, 어느 들판에
    그 처연한 빛을 모두 뿌리고
    밤새워 이 거리 서성대는
    아하하 고단한 서울의 달 (관련 영상)

    쓰레기 같은 시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도 있듯이, 저열한 가사의 노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가사의 노래도 있다. 멋진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시인도 있고, 시와 삶 모두가 아름다운 시인도 있다. 불행은, 후자의 예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고은도 아니었고, 박노해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사와 행동 모두가 아름다운 가수를 찾을 수는 있었다. 그들이 바로 박은옥과 정태춘이다.

    <주석>

    주 1) 더불어민주당 등의 정당은 그 어떤 상식으로도 진보 진영이 아니다. 그들을 진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들은 조선일보 등 극우 혹은 우익 매체들이었다. 또, 그 용어를 젊은 남성들에게 퍼뜨린 대표적인 인터넷 사이트는 일간 베스트 저장소였다.

    주 2) https://reckon.tistory.com/1507

    주 3) 남자가수부문 중 그나마 덜 알려진 이인 조경수는 영화배우 조승우의 아버지로 나중에 다시 알려지게 된다.

    <대중음악 이야기> 칼럼 링크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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