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믿음, 도끼부적과 벼락도끼
    [컬렉터의 서재-5] 그녀는 왜 베개에 식칼을 넣었나?
        2021년 07월 12일 09: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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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이 여편네가 남편을 죽일라꼬 베개 안에 칼을 숨겨놓았어!!”

    1970년대 중반 경북 청도의 한 가정,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베개에 칼을 숨겨 놓았다고 아내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그날도 40대 농부 A씨는 술을 거하게 마시고 늦은 시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그의 술습관인 ‘베개 높이 베기’가 문제였다. 잠결에 그는 옆으로 누운 채 최대한 높게 베려고 베개를 세운 후 반으로 꺾었다. 순간 휙 지나가는 서늘한 느낌! 술이 확 깼다. 베개 속에서 무쇠로 된 식칼이 뺨을 스치며 뚫고 나온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A는 아내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윽박지르게 된 것이다. 당황한 아내 B씨는 식칼을 베개에 넣었음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추궁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이 이야기는 나의 처가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속의 농부 A와 그 아내 B는 필자의 장인, 장모되시는 분들이다. 그렇다면 아내는 왜 남편의 베개 속에 식칼을 숨겨 놓았을까? 남편에게 앙심이라도 품은 것일까?

    이 집안의 가정사를 잠시 들여다보자.

    장인, 장모는 슬하에 딸만 넷을 두었다. 집안의 장손인 장인에게는 아들이 꼭 필요했는데, 낳을 때마다 줄줄이 딸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확률과 통계도 이 딸들의 행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들 임신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름 돌림자를 바꾸어 본다든지 좋다는 비법을 두루두루 다 써 보았지만 이 흐름을 끊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경북 문경에 살았던 아내 B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아내의 외할머니께서는 아들을 얻고자 애면글면하는 딸을 보는 마음이 늘 좌불안석이었다. 조선시대처럼 딸이 칠거지악으로 시댁에서 쫓겨나는 일을 없겠지만, 무엇보다 사돈 집안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그러던 중 문경 어머니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기막힌 비법이 있다는 것. 분명 구원의 소리였다. 누가 어떻게 그 비법을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시작된 비법인지 심지어 효험이 검증된 것인지 이런 것들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믿음과 실천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아니었겠는가?

    그 비법은 식칼을 구해 남편 몰래 베개 속에 넣어 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식칼이 보통 식칼이 아니라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 먼저 아들을 많이 낳은 여자가 사용하던 칼이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새로운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아들을 많이 낳은 그 여자가 바람이 나서 그 집에서 도망가 다른 데서 딴살림을 차렸다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을 찾기가 어디 쉽겠는가? 당시는 2020년대가 아니라 1970년대였음을 상기하자. 일단 이런 여자를 찾으면 그 다음부터는 일이 쉽다. 그 여자가 사용하고 있는 부엌칼(식칼)을 몰래 가져다가 그것을 남편 베개 속에 넣어두면 끝! 물론 남편이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키는 법이라고 했던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르는 이 희한한 비방(祕方)에라도 의지하고 싶었던 B의 어머니는 온 천지를 수소문해 결국 그런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사용하던 칼을 몰래 획득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장에서 사 간 새칼을 부엌에 두고 나왔음은 물론이다. 영험한 힘을 가진 식칼을 손에 쥐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순간만은 그것을 칼이 아니라 손자를 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설레였을 것이다.

    조금의 숨 고르기나 지체도 부정타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일까. 교통편도 변변치 않던 그 시절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한걸음에 문경에서 청도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아들을 낳지 못해 마음 고생하고 있는 딸에게 그 소중한 식칼을 전해준다. 남편 베개 속에 아무도 모르게 넣어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첩보작전하듯 잠시 만났던 두 모녀는 헤어지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반에는 지난 세월 아들을 낳지 못해 받은 설움이 또 그 절반에는 이제는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겼다. 죄인 아닌 죄인이라 사돈에게는 방문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사진] 조선 후기 민화 <백동자도>는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으로 아들을 얻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그림이다. 주로 신혼부부의 방이나 여성들의 생활공간에 놓였다.(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여기까지가 베개 속에 식칼이 들어가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베개 속에 숨어 들었던 식칼은 남편의 독특한 술습관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베개를 뚫고 나오며 자신의 존재를 민간 신앙의 영역에서 ‘엽기(?) 드라마’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의 요란한 소란 이후 처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사건 후 장모는 어렵게 구한 그 식칼을 도저히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 플랜B 가동!

    아내B 즉 필자의 장모는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그 식칼을 대장간에 가져가서 작은 도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단다. 아마 이것도 그녀의 ‘지극정성’ 어머니가 일러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B는 그렇게 만든 새끼손가락 한마디도 안되는 크기로 만든 도끼 노리개를 부적처럼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2cm 정도 길이의 이 노리개에는 구멍도 뚫어 실을 꿸 수 있도록 하였다. 식칼은 이제 작은 도끼로 변신하여 아들을 기원하는 주인과 함께 늘 같이 노심초사하였다. 이 도끼 속에서 사람의 힘만이 아니라 쇠붙이의 힘, 온 자연의 힘이 하나로 합쳐졌다. 모든 정성은 이 도끼 부적에 모여들어 응축되었다.

    그 덕이었을까?

    넷째 딸을 낳은 후 7년 만에 이 집안에 결국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나의 처남이 된 이 아들은 지금 40대 후반이다. 이 도끼 부적의 위력을 몸소 확인한 장모는 그후에도 이것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언제부터인가 허리에서 벗어나 장롱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그 신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장모에게 이 도끼는 그 어떤 종교보다 신성한 기물이다. 그래서인지 이 도끼를 자식들에게 보여 주시긴 했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선뜻 주려하지 않으셨다. 아마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에게 이 도끼 부적을 물려주실 것이다. 이 도끼는 아들을 낳게 한 신성한 보물이기 때문에 그 어떤 소원도 들어줄 거라고 믿으실 것이다. 이 도끼 부적 하나는 이런 신비한 이야기까지 더해져 이 집안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컬렉터로서 나는 이 도끼 부적이 무척 탐났으나 장모의 그 신앙을 존중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지난달 즉 2021년 6월 매우 유사한 도끼 노리개가 경매에 나온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반가웠다. 사실 도끼 부적은 처가 쪽 주변에서만 특수하게 사용한 기물이 아니라, 민간에서 아들을 얻고자 할 때 보편적으로 사용해왔던 것이다. 처가의 별난 미신이 아니라 한국 민간신앙 혹은 기자(祈子) 풍습의 역사 속에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처가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던 터라 이 도끼 부적을 경합 끝에 낙찰받았다. 원산지는 전주였다. 처가 도끼 부적에 비해 크기는 좀 큰 편이고 모양은 비슷하다. 또한 처가의 도끼가 하나로 되어 있는 반면, 이것은 도끼 세 개가 가죽끈에 줄줄이 달린 모양이다. 각 도끼 크기는 가로 5cm, 세로는 최대 폭 1cm였다. 옥수수 스낵과자인 고깔콘 크기와 비슷하다.

    [사진] 세 개의 작은 도끼를 연결한 도끼 노리개 (박건호 소장)

    그렇다면 아들을 기원할 때 이렇게 도끼 부적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끼가 가진 어떤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한국문화상징사전』(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동아출판사,1992)을 찾아보면 된다. 도끼 항목을 보니 먼저 [무속] 조항에서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다고 써 놓았다.

    도끼는 무기이면서도 찍고 자르고 빠개고 깎는 도구이다. 이는 죽은 이의 시신과 영혼을 도깨비로부터 보호하고 쫓는 주술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좋은 의미인 건 맞지만 기자(祈子), 즉 ‘아들 기원’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서술이다. 더 읽어보자. 여기 있다! [풍습] 조항이다.

    민간에서는 부인들은 작은 도끼를 여러 개 끈으로 꿰거나 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찼다. 혼인 첫날밤에는 이를 요 밑에 깔아 두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도끼날이 여성의 생식기를 쪼개어 막힌 곳을 뚫어 잉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도끼 부적이 잉태를 상징하는 기물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전 설명이 너무 소략하여 나는 이 도끼 부적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탐구에 돌입하였다.

    전녀위남법과 전남위녀법

    거북이와 악어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성별이 결정된다. 알이 부화할 때의 온도에 따라 성별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악어의 경우 알의 상태에서 주위 온도가 30도 미만일 경우에는 모두 암컷으로 태어나고, 34도 이상의 온도가 유지될 때에는 모두 수컷으로 태어난다. 30∼34도 사이가 유지되면 암컷과 수컷 모두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거북이의 경우는 모래의 온도가 25도 이하인 경우에는 모두 수컷, 33도 이상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되니, 성별이 악어와는 반대이다. 역시 25도에서 33도 사이가 되면 두 성별이 다 태어난다. 변온동물인 파충류들은 알의 부화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것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남녀의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트랜스젠더처럼 이미 태어난 사람의 성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다. 임신 중에 태아 성별을 남자에서 여자로 바꾸는 방법인 전남위녀법(轉男爲女法)과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방법인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을 말한다. 이는 임신 초기에 임부가 태교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남녀 성별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말이 안되는 거지만, 어쨌든 옛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이 두 비법이 의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남아선호사상이 자리잡는 조선 후기가 되면 전남위녀법은 사라지고 오로지 전녀위남법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허준이 쓴 『동의보감』도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때 편찬되었으므로 전녀위남법만 소개하고있다. 아들과 딸이 다 중요한 시대에서 아들만 중요하고 딸은 덜 중요한 시대로 바뀐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태교를 하면 여아를 남아로 바꿀 수 있을까? 『동의보감』 속 ‘전녀위남법’ 부분을 읽어보자.

    임신 3개월 째는 시태(始胎)라고 하는데, 혈맥이 흐르지 않고, 형상이 비로소 변하는 때이니 남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때이므로 약을 복약하거나 방술(方術)에 의해 남태(男胎)로 전환할수 있다. 처음 임신한 것을 깨달았을 때 도끼를 임신부의 침대 밑에 두고 임신부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면 남아를 낳는다. 이것을 못 믿으면 닭이 알을 품을 때 도끼를 닭의 우리 아래에 달아놓으면 그 속의 알이 전부 수평아리가 되는 것을 경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석웅황(石雄黃) 한 량(兩)을 주머니에 넣어서 임신부의 왼쪽 허리춤에 차면 남아가 된다. 활줄하나를 비단주머니에 넣어서 임신부의 왼쪽 팔에 달고 또는 허리에 찼다가 3개월만에 풀면 남아가 된다. 훤초화(萱草花: 일명 宣男草)를 임신부가 차면 남아가 된다. 수탉의 긴 꼬리를 임신부 몰래 침대 속에 넣어두면 남아가 된다. 남편의 두발과 손발톱을 임신부 몰래 침대 밑에 넣어두면 남아가 된다.

    [사진] 『동의보감』에 기록된 전녀위남법 부분이다. 붉은색 테두리 부분에 ‘도끼를 임신부의 침대 밑에 두고 임신부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대목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닭이 알을 품을 때 도끼를 닭 우리 아래에 달아놓으면 알이 부화할 때 모두 수평아리가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근거로 도끼를 임신부의 침대 밑에 두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설명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도끼를 곁에 두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비법이 『동의보감』에 이렇게 당당하게 실려 있으니, 아들을 원하는 이들은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게다가 개인이 대충 만든 것도 아니고,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편찬한 의서라 책의 권위를 부정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 사회에서 아들을 희구했던 이들은 ‘도끼=아들 잉태’라는 공식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도끼를 작은 노리개 형태로 만들어 허리에 부적처럼 차는 풍습은 아마 『동의보감』에 나오는 비법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도끼를 곁에 두어서 아들을 낳는다’는 총론은 같지만 각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는 그냥 ‘도끼’라고만 했지 ‘작은 도끼’라고 규정하지 않았고, 침대 밑에 두라고 했으며, 임신부가 모르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도끼 부적을 패용하는 풍습에서는 임신부 자신이 허리춤에 차는 것이니 자신이 모를 수가 없고, 침대 밑도 아니고 허리춤에 차는 것이니 『동의보감』의 설명과는 다르다. 『동의보감』 비법이 민간에서 몇단계 변이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처가에서 소란을 일으킨 ‘베개 속 식칼’은 도끼 비법에서 조금 더 변형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식칼이 도끼보다는 얇고 부피가 작아 베개 속에 숨기기가 용이하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의보감』에서는 ‘도끼를 임신부의 침대 밑에 두고 임신부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면 남아를 낳는다’고 하였는데 처가의 비법에는 베개 속 식칼을 남편이 알지 못하게 했다는 점도 다른 부분이다. 역사가 그런 것처럼 문화와 풍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상황과 처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국에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알파, 베타, 감마, 델타식으로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변이의 또 다른 사례.

    민중들은 도끼 신앙을 자신들에게 알맞게 계속 바꿔 나갔다. 그들은 도끼 위에다 계속 소망과 기원의 탑을 쌓았다. 도끼는 아들 잉태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끼 수를 늘려 3개를 달았다. 이를 ‘삼태도끼부적(三台斧符籍)’라고 하는데 태어날 아이가 삼정승(三政丞)의 운을 받길 바라는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즉 도끼가 남자 아이의 출생을 비는 의미를 담았다면, 세 도끼는 이왕 태어날 남자아이라면 재상으로 출세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소원의 옥상옥인 셈이다. 내가 수집한 도끼 노리개에 3개의 도끼가 줄줄이 달려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끼의 신비한 힘을 서술한 것이 조선시대 『동의보감』이 최초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아두자.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발견하셨을 수도 있는데, 침대 밑에 도끼를 둔다는 말에서 이 도끼를 통해 아들을 비는 것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 쪽에서 유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침대 문화가 아니라 온돌문화로 방바닥에 자는 문화라 침대 밑의 도끼는 다소 어색하지 않은가? 사실 도끼의 신비한 힘은 중국의 옛 기록에 먼저 나온다. 중국의 의서 중 『제병원후론』에 전녀위남법이 최초로 실렸는데, 이 책은 610년에 편찬되었으니 『동의보감』보다 무려 1000년 전이다. 그 이후에 나온 중국과 우리나라 의서에는 대부분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도끼의 신비한 힘’을 주장하는 중국 의서의 내용이 오랜 시간 전해지다가 『동의보감』에도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동의보감』 때문에 그 풍습과 신앙이 비로소 생겼다기보다, 그 이전부터 내려 온 신앙과 풍습이 『동의보감』에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또 하나의 도끼, 벼락도끼

    도끼 신앙과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위에서 서술한 도끼 노리개는 아들을 낳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쇠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선사시대의 돌도끼 역시 민간에서 주술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선사시대의 돌도끼는 오늘날에는 고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옛 사람들은 이를 주술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우리들은 돌도끼를 선사시대 사람들이 돌을 갈아서 만든 옛 유물 정도로 이해하지만, 옛 사람들,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돌도끼가 사람이 아니라 신비한 자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돌도끼가 뇌신(雷神) 즉 벼락신이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벼락이 떨어진 곳에 가면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돌도끼를 뇌부(雷斧) 즉 ‘벼락도끼’라 불렀다. 보통 뇌부라고 하면 돌도끼를 말하는 것이지만, 또 어떤 기록에는 돌도끼는 뇌설(雷楔)과 벽력부(霹靂斧)로, 금속제 도끼는 뇌부(雷斧)로 구분해 불렀으므로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

    ‘신이 떨어뜨린’ 벼락도끼에는 천둥과 번개의 힘이 들어있으므로 신기한 능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벼락도끼를 베개 속에 넣고 자면 악몽을 없앨 수 있고, 어린 아이에게 채우면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아이를 갖게 하는 행운을 가져다주고, 잉태한 부인이 갈아먹으면 아이를 빨리 낳게 한다고 믿었다. 뱀 독도 배출해 주고, 허한 기를 보충해주고 마음의 안정에도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롱 속에 넣어 두면 좀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돌도끼를 갈아 먹거나 심지어 달여 먹었다는 기록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귀해서 구하기가 힘든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이런 효능에 대한 믿음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부가 지방관들에게 벼락도끼를 찾아 바치라 했다는 기록이 드물지 않게 나온다.

    [사진] 조선후기 18세기 후반 김덕성이 그린 뇌신을 그린 [뇌공도]이다. 뇌신은 고대의 신으로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는 신이다. 천둥을 일으키는 데 사용하는 북인 뇌고(雷鼓)와 나무망치를 등에 메고 칼을 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종 23년(1441년) 5월 18일 기록에는 의관(醫官)의 요청에 따라 돌도끼를 전국에 걸쳐 찾아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연산군 11년(1505년) 5월 8일 기록에도 벼락도끼 40개, 벼락창 40개를 널리 찾아 바치라는 기록이 보인다. 광해군 14년 7월 9일 기록에는 궁궐 공사 중 벼락이 치자 왕이 “벼락맞은 곳엔 반드시 뇌부(雷斧)가 땅 속에 파묻혀 있는데 그것을 갖게 되면 사기(邪氣)를 피할 수 있다 하였다”며 내관에게 명령하여 파보게 하였으나 얻지 못했다고 하였다. 성종 23년(1492년) 5월 16일에는 이런 기록도 보인다. 경상도 관찰사가 그해 4월에 진주에 운석이 떨어진 사실을 보고한다. “빛깔은 뇌설(雷稧)과 같고 모양은 복령(茯苓)과 같았는데, 손톱으로 긁으니, 손톱에 따라 가루가 떨어”졌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성종의 대답은 민망할 정도로 간단했다.

    “벼락도끼에 비할 것이 아니니, 올려 보내지 말라.”

    운석 정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 벼락도끼였던 것이다.

    나도 선사시대 돌도끼를 몇 점 소장하고 있다. 주로 경매를 통해 수집한 것이다. 이것들을 보여주면 대다수는 가짜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석기들은 믿을만한 중간 수집상에게 구입한 경우 진짜 선사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혹시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중간 수집상이 다루는 물건들에 중국 물품이 많이 섞여 있으면 중국에서 들어왔을 수 있고, 그 제작 시기 역시 선사시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경우가 아니라 국내에서 수집한 것을 올린 경우라면 선사시대 돌도끼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몇만원 정도, 비싸야 10만원 정도의 돈을 벌려고 그렇게 힘들게 돌을 가는 사람이 어디 많겠는가? 그리고 돌을 근년에 갈아 만들었다면 어떻게든 표가 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돌도끼를 수집하여 약재로 쓰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였다면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이런 돌도끼는 이런 저런 경로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의심의 눈으로만 보지 마시기를…….

    예전에 나는 이런 돌도끼들을 만지면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 돌도끼 속에서 아프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혹은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가 있어서 이 돌도끼를 희구하고 갈거나 달여 마셨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숱한 염원과도 마주치게 된다. 이 돌 하나는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다. 역사이고 풍습이며, 사연이고 삶이다. 그래서 돌도끼는 따뜻하면서도 한편 짠하다. 무쇠로 만든 도끼 노리개 부적도 또한 그러하다.

    이제 시대는 더 이상 돌도끼를 갈아 먹거나 달여 먹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선사시대 유물로 인식할 뿐이다. 또 이 시대는 도끼 부적을 만들지도 달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것은 과학과 합리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건 미신일 뿐이다. 아들을 낳고 못낳고는 과학의 영역이다. 삼신할머니나 벼락신이 지배하던 지내는 끝났고, 대신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신의 시대!

    그러나 도끼부적과 돌도끼를 민간신앙이라 부르든, 미신이라 부르든 자유지만 그 속에 담긴 지극한 정성만은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옛사람들은 도끼부적과 돌도끼가 가진 주술적 힘을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 기물 속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았다. 그 속에 담았던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 때문에 돌도끼와 도끼 부적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돌 하나 쇠붙이 하나에 지극 정성을 담았던 그 시절 이름없이 살다간 그들을 그래서 나는 미신쟁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그들보다 더 진실되고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과 정성으로 살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자신도 없다. 이 세상은 합리와 과학과 이성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광기·신앙·초현실적 힘과 같은 것들도 그 속에 중간 중간 섞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이고 역사다.

    [사진] 조선시대 사람들은 선사시대 돌도끼를 인공물이 아니라 신비한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신물(神物)로 보았다. 그래서 병이나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갈아마시거나 달여마시시도 했다. (박건호 소장)

    <컬렉터의 서재>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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