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⑫
    "노동가치론을 배우다"
        2021년 05월 13일 08: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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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처참하게 패배하다(11화)

    (12화) 노동가치론을 배우다

    1988년 1월 9일에 민수는 학교로 가 대학서점에서 영문판 <햄릿>을 샀다. 책의 제목은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이었다. 그는 햄릿이 덴마크 사람이었는지를 잠시 생각하다가 셰익스피어가 덴마크를 배경으로 희곡을 썼다고 결론지었다. 학교에 온 김에 그는 과 사무실에 갔고, 마침 거기에 있던 김현우가 다가와 민수에게 말했다.

    “종찬이 형이 직접 지도하는 세미나 팀이 있는데 참가할래? 형은 커리 작성의 귀재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사람이야. 똑똑하고 설명 잘하고.”

    사실 이 세미나는 인문대에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87학번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민수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우는 민수가 87년 3월 학생회 발대식에서 했던 전두환은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다는 논리적 발언이나 그 후 느낄 수 있었던 그의 사고력을 높이 평가했었고, 대선 국면에서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보며 민수가 앞으로 더욱 적극적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김종찬에게 그 세미나 팀에 민수도 끼워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종찬에게 민수를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형처럼 이론가적인 스타일이 될 수도 있는 친구에요.”라고 소개했다.

    “그래요. 우리 과 애들이랑 하는 건가요?”라고 민수가 답했다.

    “아니, 그 팀에는 인문대 여러 과 애들이 참가할 거야.”라는 현우의 말이 이어졌다.

    1월 중순에 그들은 <노동자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민수는 85학번 선배 김종찬을 서너 번 본 일이 있었지만 눈여겨 살핀 적은 없었다. 이 날 그는 종찬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선배 김종찬은 참으로 평균적인 외양을 지닌 사람이었다. 키는 당시의 한국 성인 남성 평균이었다는 170cm 정도로 보였고, 빼어난 외모도 아니었고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몸무게도 아마 60kg 정도로 보였다. 얼굴은 갸름한 민수에 비해 약간은 둥글었고 그 당시의 남자 대학생들이 거의 그러했듯 안경을 끼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두드러지는 점은 그의 눈매와 눈빛이었다. 사회대의 한 85학번 학생은 그에게 ‘칼 있음’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었다. 그런 사실을 그때에는 몰랐지만, 민수는 첫 세미나를 하던 날 그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사를 나눈 종찬과 네 명의 87학번 학생들은 세미나를 시작했고, 먼저 동양사학과 87학번이라는 윤영철이 그들 모두가 읽었던 부분을 요약했다. 약간의 토론이 이루어진 후 김종찬이 설명했다.

    “땅에서 가치가 만들어진다는 말은 경제학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땅이 식물에 영양을 공급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야. 주인 없는 산에서 너희는 산딸기를 먹을 수도 있고 밤을 주워 먹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것을 경제활동이라고는 하지는 않아. 그런 산딸기와 밤을 상품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고.”

    “설악산 갔다가 산딸기 사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건 상품 아닙니까?”라고 종교학과 87학번인 김선태가 반론을 제기했다. 광주 출신이라는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해 보였는데, 그는 민수의 눈에는, 그의 고등학교 때의 표현을 쓰면, 조금 ‘어벙’해 보였다.

    “맞아. 누군가가 산딸기를 채취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노동을 했다면 그 산딸기는 상품이야.”

    김선태가 말했다. “아, 제가 산에서 제 손으로 따먹으면 상품이 아니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땅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말은 경제학적 의미로는 땅이 양분을 공급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그것을 지대라고 부르며 생산의 한 요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지대가 생산의 한 요소라는 것은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에 소유주가 일정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연결되지. 그런데 땅의 소유주가 생산된 농산물의 소유주가 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게 바로 착취라는 거야.”

    “땅의 소유주가 농산물의 소유주가 되는 게 착취라고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라고 동양사학과의 윤영철이 말했다. 윤영철은 달변의 소유자였고, 소위 선동을 잘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그러니까 1989년 말에, 그는 인문대 학생회장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소유권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면?”

    “그렇다면 착취라는 말을 쓸 수 있겠죠.”

    “이 나라의 수많은 농지들과 농지에서 파생된 건물들의 소유의 기원을 생각해 볼까. 전라도나 경상도에 가면 관악구보다 넓은 면적의 땅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어. 예전에는 서울의 구들 몇 개를 합친 넓이의 땅을 가진 이들도 많았어. 그런데 그들은 그 소유권을 어떻게 얻었을까.”

    “모르죠. 아마 상속받았겠죠.”

    “그래. 상속받았고, 그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두 가지 종류가 나와. 하나는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공신전이 현대까지 이어지는 거야. 또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기원이 있고. 자 생각해보자. 조선의 어떤 소위 사대부가 정적을 제거하고자 무언가를 꾸미고 사화가 일어나. 그는 정적의 땅도 얻고, 왕으로부터 다른 토지도 받았어. 그게 계속 물려 내려왔어. 그런데 그의 자손은 일을 하지는 않고 소작농에게 그 땅을 농사짓게 해. 그 땅에서 예를 들어 천만 원 가치의 쌀이 생산되었어. 그런데 소작농은 그 절반을 받아가. 땅 주인이 절반을 받아가. 땅 주인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는 사화를 일으켜 땅을 얻은 이의 정자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에 오백만원을 챙긴 거야.”

    모두들 웃었다.

    “누군가의 정자로부터 기인하여 땅 주인이 되었음이 생산에 기여할까?”

    민수가 말했다. “아니겠네요. 땅 주인은 부당한 소득을 챙기는 거네요.”

    “그래서 세상은 전도되어 보인다는 거야. 사실 땅 주인이 소작농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이지만 그들은 소작농이 자신 때문에 먹고 살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주장해. 겉으로 보기에는 그 주장이 맞는 것 같아. 왜냐하면 그가 소작농에게 땅을 빌려주지 않으면 소작농은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보면, 과학적인 경제학의 견지에서 보면 주인은 생산에 기여하지 않고 소득을 올리는 것이고 소작농은 자신이 기여한 만큼의 소득을 얻지 못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착취이고 원시 공산제 사회가 끝난 후 생겨난 계급사회의 기초야.”

    민수는 반박할 수 없었고 종찬의 말에 매료되었다.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볼까?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자작농들의 소유권을 강탈하거나 일제로부터 부역의 대가로 땅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자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작위를 받기도 했지. 그 부역자들의 땅은 일부는 해방 후에 국가가 환수했지만 많은 경우 후손들에게 상속되었어. 그들의 땅에서 소작을 하는 농민들이 있어. 자, 그들의 땅에 대한 소유권은 생산에 기여하는 것일까?”

    민수는 옛 버릇을 소환해 ‘쪽발이들의 좆을 빨던 새끼들의 좆물로부터 기원한 소유권이 생산에 기여할 리는 없지요.’라고 말할 것 같은 자신을 다독이다 피식 웃었다.

    “민수, 갑자기 왜 피식 웃었지?”

    “아니에요. 갑자기 딴 생각이 나서. 아무튼 일제 부역자들의 자손이어서 계승한 소유권이 생산에 기여할 리는 당연히 없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농지의 문제만은 아니야. 그 땅들은 농지로만 남은 게 아니고 거기에 공장도 지어지고 상가들도 지어졌고 아파트들도 지어졌어. 그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고, 건물주가 되어 또 엄청난 임대료를 챙기고 있어. 민족 반역자들의 자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지배자들 중 일부가 된 거지.”

    피 끓는 만 열아홉 스무 살의 예비 이학년 남학생들은 종찬의 언변에 반하고 사회에 더욱 더 분노하게 되었다. 민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음 주에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얘기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자본가와 노동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상품을 생산하려면 재료가 있고 기계가 있고, 기계를 운용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재료와 기계의 소유주는 자본가야. 그리고 기계를 돌리는 사람은 노동자야. 그런데 상품이 만들어졌을 때 재료는 상품의 가격에 반영되겠지?”라고 종찬이 말했고 민수와 그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겠죠. 예를 들어 소면 1,000원짜리 한 봉지에는 밀가루와 소금과 물의 가격이 들어 있겠죠.”

    “그래, 그 누구도 1,000원짜리 국수를 만들면서 2,000원 가치의 밀가루와 소금을 쓰지는 않아. 그런데 국수 기계는 가격이나 혹은 가치에 기여할까?”

    “기여하겠죠.”

    “그런데 국수 기계가 가치에 기여하니까 기계의 주인인 자본가도 가치 형성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여하는 거 아니에요? 국수를 만드는 데 분명히 기계는 기여하니까요.”

    “그런데 아니야. 기계는 그 과정에서 약간 마모되고, 그것은 감가상각비라는 것으로 상품의 가격에 더해져. 예를 들어 기계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만 봉지의 국수를 만들 수 있고 기계 가격이 백만 원이라면 한 봉지 당 백 원 만큼의 가치가 국수 가격에 반영될 거야. 그것만큼 가치 형성에 기여하지.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계의 소유주가 가치에 무엇을 더했지?”

    민수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없네요. 그런데 자본가는 대개 사장이고 사장은 일을 하잖아요.”

    “그 사장이 일을 해서 가치 형성에 기여할 수도 있지. 그런데 사장은 그 일의 대가를 따로 챙겨. 너 대기업 오너 사장이나 회장들은 월급이 있을 것 같아, 없을 것 같아?”

    “아, 월급 따로 받는다는 얘기 들었어요.”

    “일을 하는 사장과 소유주 자본가는 현실 속에서는 동일한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경제학적 측면에서는 다른 존재야. 일을 하는 것은 노동을 한다는 것이고 그도 그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지.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지분만 가지고 있어도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들은 생산에 어떤 기여를 할까?”

    “그런데 그들이 주식을 사 주었으니까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측면이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윤영철이 말했다.

    “외관상은 그렇게도 보이지. 하지만 그건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 가능한데, 먼저 저번 애기를 생각해보자. 외관상으로는 지주 때문에 소작농이 먹고 사는 거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주가 소작농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이라고 했어. 기억나지?”

    “예.” 모두들 그렇게 대답했다.

    “그들이 주식을 사 주어서 회사가 돌아간다는 것은 맞는 얘기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인가, 아닌가?’와는 다른 얘기야. 그들이 배당금을 나중에 받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기여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기여 때문이지. 또 하나를 얘기해볼게. 그들은 주가의 상승이나 하락으로 인해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보기도 해. 그런데 어느 회사가 흑자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주가는 떨어질 수 있어. 그럼 주식 소유주들의 소유분의 가치는 내려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음’이 상품의 가치 형성에 마이너스로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죠. 그 제품을 우리는 사용할 수 있고 상품의 가치는 주가 하락과 무관하게 형성되니까요.”라고 민수가 말했다.

    “그래. 반대로 주가가 오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상품은 만들어지고, 가치는 형성돼. 결국 그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 형성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야.”

    “광고 같은 것도 중요하잖아요. 광고가 없으면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안 팔릴 텐데.”라고 철학과의 장선형이 거의 처음으로 이 주제에 대해 말했다. 그는 세미나에서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광고 중요하지. 그런데 광고비용은 상품 가격에 반영되지 않을까?”

    “반영되겠죠. 강수연 누나가 받아가는 돈은 제품 가격에 반영될 거예요.”라고 민수가 말했다.

    “너 강수연 팬이냐?”

    “그렇기는 해요. 엄청 연기 잘하잖아요.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도 탔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조용원이 더 좋기는 하지만.”

    김종찬이 웃더니 말했다.“내 동갑인 여배우들 몇 명이 끝내주기는 하지, 자, 이제 농담은 그만두고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가격을 형성하는 데는 많은 것들이 반영될 거야. 사무실과 공장의 임대료도 들어갈 거고 광고비용도 들어갈 거야. 기계가 마모되는 비용도 들어갈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가격이 이전되고 감가상각비로 반영되는 거야. 다 이전된다는 거지.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는 노동으로부터만 형성되는 거야.”

    “그게 노동가치론이군요.”

    “그래.”

    “그런데 제 경제학과 동문 선배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반박이 쉽대요. 예를 들어서 설악산 꼭대기에서는 사이다 한 캔이 다른 곳보다 가격이 두 배인데 그걸 마르크스 경제학은 설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라고 종교학과 김선태가 말했다.

    민수가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그것을 본 종찬은 “민수가 생각을 말해볼래?”라고 요구했다.

    “그건 웃기는 얘기 같은데요. 오히려 마르크스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 같은데. 설악산 꼭대기로 사이다를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그러니까 그걸 운반하는 지게꾼 아저씨의 노동이 더해졌으니까 설악산 꼭대기의 사이다는 평지의 사이다보다 비싼 거겠죠.”

    김선태가 말했다. “와, 그렇겠네.”

    “운송비용은 가격에 반영되어지는 게 당연하지. 예를 들어 한국 인삼이 미국으로 간다면 여기보다 비싸지겠지? 트럭으로 공항으로 가야하고 비행기로 운반되어야 하고 또 미국의 공항에서 각지로 트럭으로 운송되겠지. 그 때 트럭의 감가상각비, 비행기의 감가상각비, 연료비용, 트럭 운전사나 비행기 기장 등의 노동, 창고 비용과 창고 노동자들의 노동, 이런 것들이 다 가격에 반영될 거야. 그러니 여기보다 엄청 비싸지겠지? 그러니 위치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노동 가치론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아.”라고 종찬이 말했다.

    “그렇겠네요.”라고 민수가 답했다.

    그들의 토론은 종찬이 주도하고 주로 민수와 영철이 대답하거나 질문을 던지면서 한 시간 더 진행되었다. 토론이 끝날 무렵 종찬이 그 날 논의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배운 것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에 부는 넘쳐나. 다들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그런데 그것은 편중되어 있어. 그리고 그 편중은 하나는 조선시대나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기인하는 땅의 소유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번다는 것과 관련돼. 몇 조원, 몇 십조 원을 수십 년 간 번 사람들이 많아. 그들은 뛰어난 사람들일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몇 만 배 뛰어날까? 몇 만 배의 가치를 만들어낸 것일까? 아닐 것 같아. 그럼 왜 몇 만 배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다른 이들의 노력을 빼앗은 거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월급의 일부를 자기들이 가져가서 많은 돈을 쌓는 거겠네요.”라고 윤영철이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 주위에는 엄청나게 부자가 될 사람들이 있어. 영철이가 있는 동양사학과에 너희들 동기인 87학번 아이가 하나 있어. 그는 알아주는 대기업 오너의 아들이야. 여기 있는 너희들 모두가 평생을 벌어도 못 벌 돈을 그 친구는 상속받을 거야. 서양사학과에는 굴지의 백화점 소유주의 아들이 있어. 그 친구도 너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물려받을 거야. 그들이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여기 민수가 있어. 키도 훤칠하고 똑똑하고,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걔들보다 학력고사 점수도 상당히 높았을 거야. 농구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예술적 감수성도 뛰어나. 그런데 민수는 결코 그들보다 부자가 될 수 없어.”

    “가진 건 몸 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저는 과외만 해도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건 불평등이 맞네요.”라고 민수가 답했다.

    “동아일보를 만든 김성수는 전라도 땅의 몇 퍼센트를 물려받았대. 나도 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의 소유지의 출발점에서 보았을 때 지평선 너머까지 땅을 가졌다는 거야. 그 땅은 골고루 돌아가야 할 땅이었어. 미국에서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와 설탕을 불법으로 불하받아 그걸로 종자돈을 만든 이가 지금 대한민국 최고 부자의 아버지야. 작년에 타계했지. 그의 아들이 또 그의 아들의 아들이 이 나라의 부를 싹쓸이할 거야. 이 추세로 나가면 몇 십 년 후면 정 씨와 이 씨들 몇이 나라의 부의 절반을 차지하는 세상이 올 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이러한 부의 편중은 독재와도 연관될 거야.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다 그들의 정치자금을 받았었고, 받을 거고, 그들은 다시 그 소유주들에게 혜택을 주겠지. 작년에 작고한 그 양반의 유명한 지론이 뭐였는지 아는 사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는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라고 철학과의 장선형이 답했다.

    “그럼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권은 노조를 탄압하여 그들을 돕겠네요.”라고 민수가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을 교체해야 하기도 하지만 소유의 문제에도 손을 대야 해. 그리고 부자들은 절대 자기 돈을 스스로 내놓지 않아.”

    민수는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폭력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 순간 깨달았다. 형들이 왜 화염병을 던지는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 형들 중 상당수가 더 많은 소유와 더 큰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될 것임은 알지 못했다. 이 똑똑하고 멋진 선배마저도 그렇게 될 것임은 더더욱 몰랐다. <계속>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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