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샌프란시코체제의 핵심,
    미일동맹과 한미일 체제
    [국방칼럼] 동아시아 냉전의 상징물
        2021년 05월 11일 03:4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4월 29일 취임 100일을 맞이했다. 씨엔엔은 이와 관련한 특집기사에서 현재의 미국 외교정책을 ‘플립플롭(flip-flop)’에 비유했다. 체조에서 ‘플리플롭’은 공중에서 거꾸로 몸을 한 바퀴 돌리는 이른바 ‘공중 제비돌기’를 말한다. 씨엔엔은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180도 바뀌면서 우왕좌왕하는 현실을 ‘플리플롭’에 빗대어 비판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바이든 대통령이 폐지를 선언한 ‘국제금지규정 GGR(Global Gag Rule)’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제기구나 단체의 ‘임신중절’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금지한 규칙으로써 공화당 레이건 행정부가 도입한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폐지(민주당)와 부활(공화당)이 반복되어 왔다. 유럽은 트럼프는 탈퇴했고 바이든은 재가입한 파리기후변화협약의 운명이 2024년 미 대선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해 하고 있다. 파리기후협약에는 미국 또는 중국과 같은 주요 탄소배출국이 탈퇴를 선택했을 경우를 대비한 계획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미일동맹’만큼은 미국의 정권교체 이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정책의 ‘요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더욱더 강화되고 있는 모양새이다. 발간될 때마다 미국과 일본의 정치외교 엘리트집단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리처드 아미티지’와 ‘조셉 나이’의 ‘2020년 미일동맹보고서’는 미국과 일본을 중국의 부상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지전략(geostrategy), 경제, 기술, 거버넌스 이 네 가지 모두에 필수불가결한(vital)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들로 규정하며 바이든 신임 대통령이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방미를 빨리 추진할 것을 조언하였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월 16일 공표된 미∙일 정상의 공동성명에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대단히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지워지지 않는 동맹(indelible Alliance)’으로 표현되었다.

    아미티지와 나이의 ‘2018년 보고서’는 미일동맹의 장점으로 첫째 미∙일은 인권 보호, 민주주의, 자유 시장 및 법치와 관련된 가치를 공유하며 전세계에서 이들 가치의 신호등 역할을 한다는 점, 둘째 미∙일의 경제 규모는 전세계 지디피의 약 30%를 차지하는 가장 크고 혁신적이라는 점 셋째 미∙일은 동북아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고 수십 년 동안 공동의 이익에 대한 위협을 억제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왔다는 점을 들며 이러한 강점들로 인해 미국과 일본의 협력 기반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018년 보고서’는 미일동맹의 제일 큰 장점으로 무엇보다도 미국과 일본이 평화와 번영의 지역질서와 세계질서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전쟁의 잿더미에서 벗어난 미국과 일본이 함께 현재 80년이 된 전후 질서를 더 유익하고 지속가능하게 구축했다는 것인데 이 같은 역사인식은 침략전쟁의 당사국인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의 전후질서 수립과정에서의 역할만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아태전략과 현재의 인도∙태평양전략 수립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미국 미일동맹파(Japan Handlers)의 인식체계에 문제가 많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 및 이케다 하야토 등(사진=위키)

    보고서가 말하는 전후질서는 1951년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평화조약’에 기초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말한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중국이 급속히 공산화하고 한국전쟁의 발발이 이어지자 미국으로만 구성된 ‘연합국총사령부(GHQ)’가 통치하던 패전국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권의 세력 확대를 저지할 구심점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에게 관대한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대신 소련의 위협을 명분으로 미군이 자유롭게 주둔할 수 있는 권한과 기지를 확보했다. 그렇게 패전국 일본의 주권이 부활하였다.

    바퀴∙바큇살(Hub and Spokes)체제 (China’s Rise and Australia–Japan–US Relations)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과 함께 미국은 일본(1951년), 한국(1953년), 대만(1954년) 등과 각각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미국(Hub)과 각각의 동맹국(Spokes)들은 11 양자동맹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나 힘의 우위에 서있는 미국이 동맹을 주도하게 되는 위계질서가 자연스럽게 수립되었다. 이 구조의 장점은 유럽의 나토에 비해 미국의 생각이 동맹국의 정책에 더 깊숙이 투영되는 데 있다. 이렇게 완성된 동아시아 냉전의 상징물인 ‘샌프란시스코체제’는 ‘바퀴∙바큇살 체제(Hub and Spokes)’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그림 참조. 1960년 미일안보조약 새롭게 체결, 1979년 대만관계법 발효.). 미국을 중심으로 1대1 동맹국들을 배치하면 마치 바퀴 중심에 연결된 바큇살과 같다 하여 이런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체제’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전쟁을 막고 프랑스를 고립시킬 목적으로 주변국과 다양한 형태의 동맹과 밀약 또는 협력관계를 맺으며 유럽대륙의 현상 유지에 성공했던 독일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이러한 체제에서 공생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경험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에 의해 큰 좌절을 맛보았다. 조선의 정세가 ‘아관파천’, ‘친일내각 붕괴’, ‘대한제국 수립’으로 급변하자 일본은 서구열강의 후원 없이는 지역 패권국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는 현실을 절감했다. 이에 일본의 본류는 ‘영일동맹’, ‘’카쓰라 태프트 밀약’, ‘워싱턴 체제’ 등 미국과 영국에 대한 추종, 이른바 ‘협조’를 받아 국익을 확보하는 노선으로 일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국총사령부’ 통치 아래에서 1920년대 친미협조노선을 이끌었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연이어 총리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후 미일관계는 영어단어가 되어버린 일본말 가이아츠(Gaiatsu, 외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압력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1941년 ‘대일석유금수조치’로 미일관계의 파탄을 경험한 미국은 다른 ‘바큇살’ 국가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일본이 새로운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영토 분쟁’이라는 덫을 놓았다.

    마고사키 우케루와 존 W. 다우어에 따르면. 미국은 전후 처리과정에서 ‘독도’, ‘북방 4개 섬’, ‘센카쿠열도’의 귀속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주변국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일본을 얽매었다. 그래서 브루스 커밍스는 일본의 근현대사가 ‘미국 앞에서는 2등’, ‘미국이 없는 곳에서는 1등’을 추구해온 ‘2등국가’의 역사라고 주장했고 개번 매코맥은 미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통국가’와 ‘적극적 평화’를 외치지만 그럴수록 미국을 더 추종하게 되는 일본의 역설적인 현실을 ‘속국주의(Clientelism)’로 비판했다.

    (최희식 한미일 협력체제 제도화 과정 연구)

    샌프란시스코체제 성립 이후 한국과 대만은 공산진영에 대해 동아시아를 방어하는 최전선의 역할을, 일본은 이들 전진기지를 받쳐줄 핵심발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고전과 1968년 1.21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푸에블로호 사건과 1969년 EC-121 격추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한반도의 갈등이 고조되는 등 공산진영의 공세가 거세지자 이에 대한 대응을 위해 미국 닉슨 행정부가 동아시아전략을 새롭게 개편하면서 한∙미∙일 사이의 협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표 1 참조).

    미국은 한국과 대만을 지원하기 위해 1968년 국가별 지디피 기준 세계 2위에 오른 일본의 역할분담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 같은 합의로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미일동맹보다 우선하는 동맹으로 한미동맹의 위상을 자리매김하려던 박정희 행정부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애초 한반도의 위기 해결을 목표로 하는 한미동맹은 동아시아 전역 방위를 위한 미일동맹의 하부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한∙일이 모두 미국 아래에 있는 ‘바큇살’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이 부여한 역할의 중요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구조였던 것이다.

    먼저 한미동맹의 제도적 틀이 만들어졌다. 1968년 처음 개최된 한∙미 간의 ‘국방각료회의’는 1971년 ‘안보협의회의(SCM)’로 확대되었다. 1969년에는 최초의 한미연합훈련인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를 통해 공수기동훈련이 전개되었다. 1969년 ‘미일 정상 공동성명’ 제4항(일명 한국조항 또는 대만조항)에 의해 미국은 동아시아전략의 핵심기지인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한 후에도 한국과 대만에 위기가 발생할 경우 미국이 이용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였고 일본이 이를 확인하였다. 1967년부터는 한∙일 간에 각료회담이 정례화되었다.

    한국의 안전과 번영은 일본의 협력 여하에 영향을 받는다’는 1968년 제2차 한일정기각료회의 공동성명 내용은 한∙일 양국이 한국이 냉전체제에서 일본의 방위를 위해 희생하는 만큼 ‘피의 대가’(경제협력)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의 집요한 설득으로 ‘종합제철 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 간의 기본협약’이 체결됨으로써 경공업과 농업에만 집행되던 청구권자금을 한국의 군수산업 성장을 위해 포항종합제철소 건립에 전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이 대만과 동남아보다 먼저 일본으로부터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일부 중화학공업을 인수함으로써 한∙일 사이의 분업체계가 고도화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사토정권은 대만에도 총액 1억5천달러 규모의 엔 차관을 공여하여 대만의 경제발전을 지원하였다.

    김봉주는 일본을 상위바큇살국가로, 한국을 하위바큇살국가로 구분했다. (그림은 이즈미카와 야쓰시로 일본 주오대 교수의 논문에서 인용)

    1991년 합동참모본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필섭 합참의장은 한∙미∙일 삼각 협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이 의장은 “일본과의 군사협력은 국민적 정서를 고려할 때 직접 협력체제는 어렵다고 보나 한미군사동맹체제와 미일군사동맹체제를 연계해 고려할 때 양국간 간접협력체제는 이미 관행화돼 있는 상태“이며 “유엔사령부의 후방지휘소가 일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사태 발생시 일본은 한국방위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고 증언하였다.

    샌프란시스코체제는 이후 몇 가지 상황변화에 놓이게 되었다. 첫째 냉전이 해체되고 소련이라는 적이 사라짐으로써 그동안 안보에 억눌려 있던 동아시아에 영토∙역사분쟁이 본격화하였다. 둘째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이 일본과의 경제전쟁에 몰두하는 가운데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가 국무부와 국방부를 제치고 미일관계의 주도권을 넘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를 기준으로 새로운 편가르기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미일동맹파는 미국과 일본의 결속을 강화하고 동맹의 범위를 전세계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재편했다. ‘바퀴∙바큇살 체제’에서 일본의 본래 역할은 유사시 체제의 전쟁수행능력을 지속적으로 보강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일본의 경제력과 방위력이 강화될수록 미국 중심의 샌프란시스코체제는 더욱 견고해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은 다른 한편으로 일본의 방위비 증액을 이용해 미국에 위협이 돼왔던 일본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통제하고자 했다.

    전통 교역망의 변화 -정보통신기술부문 (WTO Global Value Chain Development Report 2019)

    그러나 이 체제는 그림과 같이 중국이 일본을 밀어내고 동아시아 경제의 새로운 바퀴(Hub)가 됨으로써 진정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본이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미국에 이은 2등국가임을 자임할 수 없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과 대만, 아세안은 모두 일본과의 국제분업에서 탈피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분업체계로 이동했다. ‘바퀴∙바큇살 체제’에서 미국의 또 한가지 중요한 역할인 동아시아국가 상품시장으로서의 지위가 일본이 중국에 추월당함으로써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인도네시아 아세안포스트)

    위의 아세안포스트 삽화처럼 동아시아는 이미 안보와 경제에서 각기 다른 위계질서(두 개의 바퀴)가 구축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체제 하부구조(경제)와 상부구조(안보)에 서로 다른 질서가 형성되는데서 오는 불안정이 미중갈등과 한일갈등 등 복합적인 형태의 긴장상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센이 주도한 관세동맹인 ‘졸페라인(Zollverein)’이 독일통일의 구심점이 되고 유럽의 질서를 새로이 썼음을 기억한다면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왔던 국제질서가 미래에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고민택 진보평론 편집위원은 일본의 ‘수출규제조치’를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 축소를 메꾸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발호’(진보평론 2019년 가을호)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해석했는데 일본이 만약 그러한 전략에 의해 움직였다면 한국을 아직도 110여 년 전의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일본의 공세는 세력 확대라는 관점에 이어 현상 유지라는 방어적인 측면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라는 방패가 없어지면 일본은 위협에 직접 노출되게 된다. 한미일 협력체제에서 한국이 이탈하게 된다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것으로써 그동안 누려왔던 지리적인 위치로 인한 안보상의 혜택이 사라지고 미중경쟁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따라서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핵심축인 한∙미∙일 협력체제에서 혹시 모를 한국의 입장 변화를 선제적으로 예방함으로써 일본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수립을 통해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은 되풀이되는 한∙중과의 역사분쟁을 국제규범을 위반하고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출규제조치’와 같은 일본의 거친 행동은 2016년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체결 당시와는 다르게 미국을 등에 없지 못하는데서 오는 전략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고상하게 이야기한다면 미일동맹으로 한미동맹을 압박하지 않는한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입장이 관철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쇠퇴했고. 미일동맹이 한층 강화되는 것도 미국, 일본 모두 예전 같지 않아서이다.

    현재 ‘지구촌 주요 의제(Global Agenda)’ 극복을 목표로 하는 연합군으로서의 위상을 가진 미일동맹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속되는 한일갈등(continuing tension)이다. ‘아미티지’’와 ‘나이’로 대표되는 미일동맹파는 ‘2020년 미일동맹보고서’에서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게 다가오는 ‘도쿄올림픽’을 한일관계의 새출발을 위한 중요한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에게 2021년 도쿄올림픽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 한반도의 현실인 것이다.

    필자소개
    국방평론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