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⑪
    대선, 처참하게 패배하다
        2021년 05월 10일 07: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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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 비판, 다가오는 대선(10회차)

    (11화) 대선, 처참하게 패배하다

    12월 13일이 넘어가도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수는 온갖 당황스러운 모습들을 보기 시작했다. 영문과 선배들은 자신들의 단일후보 전술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혹은 깨닫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84학번 선배 중 김영주라는 여자 분이 있었는데, 그는 12월 14일에도 노태우가 될 리는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감히’ 4학년 선배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던 그 때 민수가 물었다. “왜 노태우가 될 리가 없는 거죠?”

    다소 작은 키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꼈던 그 선배는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아메(리카)가 그것을 바라지 않거든.”이라고 말했다.

    민수는 ‘아메’를 그리 미워하는 이가 미국이 바라지 않아 노태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국이 군부독재를 지원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을 미국이 원하지 않아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당선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선배는 그러나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군부가 아닌 민간의 외양을 띈 친미정권을 미국이 바라고 있다는 얘기를 한 것이었고, 나중에 민정당과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고 결국 대통령이 된 김영삼의 모습에서 그의 말은 어쩌면 입증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를 모르는 민수는 속이 타고 답답했고, 다른 87학번 학생들도 그 선배의 발언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당황했다.

    12월 15일 대선 전날이 왔고 후보단일화 투쟁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깨달은 영문과 학생들은 학생 총회를 열었다. 두 가지가 얘기되었다. 하나는 대선 당일에 공정선거감시인단 운영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민수도 85학번 여자 선배와 짝을 이루어 신림동의 한 투표장 앞에서 활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총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한 후보자에게 우리와 주변인들의 투표를 모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선 가능성이 YS보다 높아 보이는 DJ에게 투표하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그렇게 독려하는 것으로 과의 방침을 정하면 어떨까 합니다.”

    “비판적 지지는 말도 안 된다고 한 게 누구였는데. 나는 김영삼에게 투표할 거야.”

    앞서 말한 형은 서울 출신이었고, 뒤에 말한 형은 부산 출신이었다. 민수는 어이가 없어 이제 막 웃었다. ‘고고한’ 의식으로 무장하여 세계를 변혁하려 했던 삼학년 선배 둘은 지역에 의해 갈라졌다. 그는 속으로 서울 선배보다는 부산 선배를 더 비난했다. 그가 서울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서울 형은 그나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는 심정으로 말한 것이었고 부산 형은 그냥 지역 색에 굴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 다 실패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 날 마유미 혹은 김현희라는 북한 공작원이 대한항공 858 편을 폭파시켰다는 정부의 발표와 함께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대한항공 비행기의 폭파 사건으로 노태우의 승리는 굳어졌다. 학생들은 그의 입국 날짜를 대선 전날로 정한 정부에 분노했고, 이 일이 한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얘기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지만, 돌아서는 국민들의 정서를 막을 수는 없었다.

    12월 16일 그는 85학번 여자 선배와 함께 열심히 공정선거감시인단 활동을 했다. 그 선배는 재미있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둘은 3동 앞에서 담배 하나를 번갈아 피며 재 먼저 떨어뜨리는 사람이 밥을 사는 게임을 하기도 했고 술 시합을 한 일도 있었다. 당시 독했던 25도 진로 소주를 둘이 여섯 병 째 마시다 민수는 근처 친구 하숙집으로 실려 갔었다. 심난했고 좌절감이 들었던 그는 이 유쾌한 선배의 도움으로 그 날 일정을 잘 끝낼 수 있었다.

    1987년 12월 17일 경향신문 일 면.

    1987년 12월 18일 오전의 구로구청

    결국 전두환과 함께 12. 12 군사반란의 주범 중 하나였던 민정당의 노태우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통민당의 김영삼은 28.0%, 평민당의 김대중은 27.1%를 득표했다. 그러나 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이들은 적지 않았다. 먼저 주요 후보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김영삼은 “이 선거는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하며 투쟁하겠다.”라고 발표했고, 김대중 또한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극적으로 부정 선거 반대 투쟁을 하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시민들, 특히 서울 시민들이었다. 선거일 오전 11시 구로구청에서 부재자 투표함을 구로선관위 직원이 의심스럽게 옮기려는 모습이 발각되어 시비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을 포함한 시민들 수천 명이 구로구청으로 몰려갔다. 구로구청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신림동의 대학생들 몇 백 명이 그곳으로 향했다. 중앙선관위는 이 날 저녁에 평화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함을 탈취했다는 성명을 공식 발표했고, 이 발표는 오히려 농성의 규모를 더 크게 만들었다.

    12월 17일에 학교에 간 민수는 구로구청 얘기를 들었고 분노했다. 그 날 그는 처음으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부정선거 규탄을 외치는 학생들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대개는 싸늘했다.

    그 투표함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 그 투표함이 개봉되었고 김대중이 1위를 차지했던 곳에서 노태우의 지지율이 70%가 넘게 나오자 이것이 부정선거의 증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재자 투표의 특성상 여당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박도 있었다.(1)

    농성이 시작된 다음 날인 12월 17일에, 구로구청에서 농성하던 시민들은 투표함을 밀반출하려 했던 사람을 붙잡아 공개 기자회견을 가졌다. 저녁 때 쯤 한 시민이 부정선거에 항의해 분신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밤이 되자 구로구청의 농성자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12월 18일 새벽에 수천 명의 경찰들이 진압 작전을 펼쳤다. 경찰들의 대부분은 ‘백골단’으로 불리던 사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농성자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민수의 친구와 선배들도 처참하게 폭행당한 후 끌려가 구속되었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그 구로구청 5층 강당에서 쇠파이프 세례를 당한 후 추락했던 한 서울대 경영학과 3학년 학생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수십 년 동안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농성 참가자들 중 이백 명이 넘는 이들이 구속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웠던 많은 이들에게 12월 17일부터의 며칠간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민수의 머릿속 또한 혼돈의 다른 말 카오스였다. 그는 그의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루고 싶었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실망하고 슬퍼했다.

    그의 목표는 그 해 1987년에 생긴 것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1979년에, 박정희가 죽었던 때에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만 열 살에 박정희를 미워하게 되었고 얼마 후 전두환을 미워하게 되었던 아직도 십대였던 민수는 낙담과 슬픔만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욕심에 분노했고, 선배들이 보수야당이라고 부르던 통민당과 평민당의 본질을 의심했다. 어쩌면 그는 또 한 번의 의식화를 경험했던 것이다.

    학교의 상황 역시 혼돈이었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은 부정선거 규탄을 명분으로 1학기에 이어 또 다시 시험 거부를 주장하였고, 민수는 결국 1학기 때와 2학기 때 모두 중간고사와 리포트만으로 성적을 받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기말고사 같은 것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민수와 달리 과의 친구들 중 일부는 두 학기 연속 시험 거부를 주장하는 ‘운동하는 애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운동하던 애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나 민수처럼 애매한 친구들 모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 달랐겠지만.

    ‘부정선거 규탄 투쟁’은 구로구청의 진압 후 강제 진압에 항의하는 투쟁으로 변화했지만, 얼마 후 싸움의 동력을 상실했다. 학생운동세력을 포함한 민중운동 진영은 며칠이 지나자 이제 새로운 싸움을 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동일했으나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달랐다. 총칼을 앞세워 말도 안 되는 방식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과 ‘여야가 합의한’ 헌법에 기초한 직선제 선거로 합법적으로 집권한 노태우는 외관상으로는 매우 달랐던 것이다.

    22일을 마지막으로 소위 부정선거 반대 투쟁을 마친 민수는 12월 24일과 25일에 이틀 연속 유정과 데이트를 했다. 유정은 민수의 마음속에 어두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위로하려 했다. 유정 자신도 자신의 고향 출신인 노태우가 당선된 것에, 그리고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버지가 노태우 당선에 즐거워하는 것에, 많이 힘들어 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민수가 더 어두워 보였고, 그는 민수를 달래기 위해 정성을 들였다. 유정의 정성에 효과가 있었는지 민수는 24일보다는 25일에 훨씬 밝았다.

    90년대 이후에 대학에 입학했던 이들이라면 크리스마스 날에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질문을 유정이 민수에게 했다. “너 점점 과격해지는 거 아냐?” 같은 얘기를 해도 표정과 몸의 움직임과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의미와 해석은 달라진다. 그 말을 민수는 애정의 표현으로 알아들었고, 주위를 둘러본 후 유정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었다. 다행히 카페에 있던 다른 이들은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민수가 말했다.

    “친구 하나가 많이 다쳤고, 구속되었어. 그런데 그 일 때문에 내가 과격해질 일은 없을 거야. 나에겐 나의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지키며 살고 싶어. 나는 변화하겠지.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내가 얘기했었잖아.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을 거야. 예를 들어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변하면서 변하지 않을 거야. 더 깊어질 수도 있고, 더 얕아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 얘기는 너는 변하겠지만 어떤 부분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겠네. 음. 노래 잘하는 건 아마 40대까지는 안 변할 것 같고. 말 잘하는 건 죽을 때까지 가겠지? 로맨틱한 건 언제까지 갈 지 알 수 없고.”

    “넌 어떨 것 같아?”

    “난, 음, 서른 중반까지는 예쁘다는 말을 들을 것 같고.”

    민수가 웃었다. 유정도 웃었다.

    “그리고 나는 원래 보수적이었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일 년간 많이 달라졌는데, 하나는 안 달라질 것 같아. 일편단심에 일부종사라고나 할까.”

    민수가 웃으며 말했다. “너 점점 나랑 비슷해져가고 있어, 말하는 게.”

    “원래 연애가 그런 거라며.”라고 유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둘은 이십칠 일에도 만났고 그 날 유정은 대구로 내려갔다. 유정 없는 서울에서 민수는 광란의 며칠을 보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 서울대 인문대 동문들과 28일에 가진 술자리부터 그것이 시작되었다.

    민수의 고등학교 출신 서울대 선배들이나 동기들 중에는 중어중문학과 학생들이 많았다. 중문과 선배들은 중국 시를 좋아하고 술자리에서 그 시들을 읊어대곤 하던 민수를 귀여워했다. 그를 특히 ‘예뻐하던’ 한 학년 선배 민정우가 민수에게 당시 한 수를 읊어보라고 말했다. 반쯤 취해 알딸딸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수는 두보의 시 <절구>를 읊조렸다.

    江碧鳥逾白 강벽조유백
    山靑花欲然 산청화욕연
    今春看又過 금춘간우과
    何日是歸年 하일시귀년강물이 파라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이 불타는 듯하구나.
    금년 봄은 보아하니 또 가고 있으니
    언제가 고향에 돌아가는 해일까?(2)

    이 시를 들은 민정우가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중문과 대학원 가야겠네. 넌 영문과는 도대체 왜 갔냐?”

    민수가 말했다. “소나 탄다는 차를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타는 어떤 자 때문에요.”

    술자리에 있던 선배들과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장은 폭력적인 교사의 상징으로, 학교 스쿨버스를 판매한 돈으로 개인용 승용차 소나타를 구매한 악덕 사학주로 그들에게 각인되었었기 때문이었다.

    정우와 민수는 두보 얘기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민수는 두보의 이 시가, 자신이 아는 한, 인류의 시의 역사에서 가장 극명한 색의 대비를 보인 시라고 극찬했다.

    “파란 강물과 하얀 새. 파란 산과 불타는 것 같은 붉은 꽃. 와, 이거 진짜 장난 아니지 않아요? 게다가 꽃이 불타오르려 하다니(花欲然). 어떻게 당나라 시대에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천 몇 백 년 전이었는데.”

    정우는 기원전의 인물이었던 카이사르를 예로 들며 천이백여 년 전이나 이천년 전의 인물들의 지성이나 예술성이 현재보다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민수에게 설명했다. 이 기원전 100년에 태어났던 인물이 했다는 말들은 놀라웠다.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본다.”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아냐고 정우가 민수에게 물었다.

    “들어보긴 했는데 누가 말한 건지는 모르겠네요.”

    “케사르가 한 말이야.”

    “씨저가 한 말이군요. 씨저라면 그럴 만 했겠네요.”라고 초등학교 이학년 때 <플루타크 영웅전>을 읽으며 한니발과 카이사르를 좋아하게 되었던 민수가 말했다.

    정우는 이어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 앞에서 했었다는 그 유명한 말들을 민수에게 말해주었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3)

    민수는 선배가 전해준 카이사르의 말“주사위는 던져졌다.”를 들으며 황홀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천여 년 전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 병사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듯, 자신도 그 강을 건너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와 정우는 때로는 심각해하며 때로는 즐거워하며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결국 둘은 반쯤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둘은 대학로에서 독립문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시체들 치고는 훌륭하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진영 간의 내전을 얘기했다.

    광란의 며칠은 이어졌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영문과 친구들과 선배들과 술잔치를 벌였다. 하루는 쉬자고 마음먹었던 민수는 그러나 30일에도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그 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었던 고등학교 친구이며 농구 동료였던 김정우의 전화를 받고 동네 술집으로 갔다.

    옛날 농구 멤버들이 모여 있었고 놀랍게도 ‘뚱땡이’ 신동식도 있었다. 동식은 그를 반가워했다. 민수도 이 시점에서 그에게 적대할 이유는 없었고 역시 반갑게 그를 대했다. 몇 번의 ‘쨍잔’이 오간 후 동식이 말했다. “뭐하면서 사냐?”

    “연애도 하고 책도 읽고 그러면서 살지 뭐.”

    “운동은 안하냐?”

    “나야 농구가 인생의 절반인데 설마 운동을 안 하겠냐. 요즘은 추워서 못하고 있지만.”

    “그거 말고 학생운동 말이야.”

    “글쎄, 집회에 몇 번 가기는 했는데, 내가 운동한다고 말하는 건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 같아. 나는 그 사람들만큼 결의가 있거나 용기가 있거나 그렇지 않거든. 그냥 방황하는 청춘이지 뭐.”

    “놀라운데. 나는 우리 동기들 중 네가 제일 열심히 운동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무래도 서울대 인문대와 사회대가 제일 운동을 많이 하기도 하고, 네가 똑똑하고 뭐랄까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애정도 있고 말이야.”

    민수는 동식의 어휘 선정과 말투에 깜짝 놀랐다. 동식을 바라보며 말을 못하고 있던 그가 물었다.

    “너 설마?”

    동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놀라서 말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랜만에 그의 어린 시절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씨발 고려대 장난 아니네. 신동식을 운동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보아하니 이놈은 4월 18일 고려대 4.18. 기념행사 때부터 집회를 따라다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둘은 헤어졌다. 민수는 다른 친구들과 더 남아있었고 동식은 취했는지 먼저 일어섰다. 민수가 흥분하여 계속 건배를 했고 동식이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 모인 넷 중 6월 항쟁 때 거리에 나가지 않은 이는 민수가 유일했다. 87학년도 입학생들에게 6월 항쟁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나 보다.

    민수는 그 날 처음으로 술을 혼자 마셨다. 들어가는 길에 640ml 병맥주 두 병을 사서 모두 잠이 든 집에서 혼자 한 시간 정도를 마셨다. 민수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동식이가 나보다 더 운동을 열심히 하다니.’ 무슨 경쟁심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지나치게 몸을 사리며 산 것은 아닌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는 아직 한국사회의 구조와 모순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은 알고 있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파악하기 전에 움직이는 것은 잘못 아닐까?’

    술 한 모금을 한 그의 생각은 바로 달라졌다. ‘하지만 완전한 파악은 평생이 지나도 얻을 수 없는 것이잖아. 나는 평생 얻을 수 없을 완벽한 이해 때문에 정치적 활동을 기피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자신도 루비콘 강을 건너야 하는지를 생각하다 그는 잠들었고 소변이 마려워 새벽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는 그날 밤에 생맥주 3,500cc와 병맥주 두 병을 마셨으니 그럴 만 했을 것이다.

    12월 31일 낮에 그는 개인적인 기록 하나를 세웠다. 유정과 두 시간을 넘게 통화한 것이다. 누나가 그를 발로 차서 전화기를 빼앗기 전까지 그는 인생에서 만난 가장 중요한 사람과 끝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민수는 좋아서 실실 대며 그날을 보냈다.

    밤에는 가족들과 술을 마셨다. 민수는 한라산 시를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두들겨 맞은 후 아버지와 별로 말을 나누지 않았었다. 대부분의 신경이 유정과 책들, 대통령 선거에 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민수가 외박도 거의 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투쟁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아 안심하고 있는 눈치였고, 민수에게 소주를 권하며 말했다.

    “실망했을 것 같다. 나도 실망했으니까. 그래도 어디 전두환 때 같겠냐? 그런 세상은 다시는 오지 않을 거다.”

    민수는 아버지에게 동의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을 했다. “아버지도 참 대단하세요. 열 몇 살에 6.25 겪고 이승만에 박정희에 전두환에, 참 힘들게 살아오셨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다음번에는 김영삼이 될 거예요.”

    아버지는 김영삼에게 투표했음이 분명했다. 아버지도 다음에는 김영삼이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부자의 생각은 옳았지만, 그가 노태우와 같은 당 소속으로 그렇게 될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걸 그 때 누가 알았겠는가.

    새해, 1988년이 왔다. 민수는 생일인 1월 8일에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 특별한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라 유정과 서울과 대구의 중간 지점에서 보려 했기 때문이었다. 대전역 앞에서 만난 그들은 ‘동양 데파트’라는 생소한 이름의 백화점으로 갔다.

    “데파트는 디파트먼트 스토어의 줄임말이겠지.”라고 말하며 유정은 그 백화점에서 민수에게 셔츠를 사주었고, 카페로 가서 반지를 끼워주었다. 커플링이라는 개념을 들은 일이 없었던 민수는 자신과 유정의 손가락에 끼워진 은반지를 보며 유정을 사랑에 빠진 이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유정이 말했다. “오늘부터 5월까지는 친구네. 5월이 되면 다시 내가 누나겠지만. 그러니까 넌 4개월만 친구고 8개월은 내가 누나니까 나에게 잘해주어야 해.”

    “평생 누나여도 되고 평생 잘할게.”

    “호호. 아침에 미역국은 먹었지?”

    “미역국? 소고기무국 먹었지. 미역국은 여자들 생일에 먹는 것 아냐?”

    민수는 유정과의 대화를 통해 남자 생일에는 소고기무국을 끓이고 여자 생일에는 소고기미역국을 끓이는 자신의 집안의 관습이 표준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표준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드문 일이었다. 500년 넘게 한양 도성 안에서 살았다는 자신의 집안은 전국적으로 보면 상당히 특이한 관습을 많이 가졌었던 것이다.

    9시가 통금 시간이라는 유정이 6시 기차에 타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4시부터 식사를 했다.

    “이 시간에 먹는 걸 점저라고 해.”라고 민수가 말했다.

    “아하, 아점의 변형이구나. 영어로도 brunch는 있는데 점저는 뭐라 해야 할까?”

    “런치(lunch) 더하기 디너(dinner)라. lunchinner? luncher?”

    “런처로 하자. 간결하니까. Brevity is the Soul of Wit(간결함은 재치의 정수이다).”

    민수가 못 알아듣자 유정이 말했다. “햄릿을 안 읽었단 말이야? 서울대 영문과생이?”

    “어. 우리는 2학년 1학기 때 배운데. 너희는 벌써 배웠어?”

    “아니. 나는 미국에 있을 때 읽었지. 우리 학교도 2학년 때 배울 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네가 서울로 올 때쯤이면 나는 다 읽었을 거야.”

    “그러겠지. 그리고 너 오필리아 좋아하면 안 돼. 나만 좋아해야 해. 하기야 오필리아는 나중에 미치니까 그럴 리도 없겠네.”

    “미치지 않아도 너만 좋아할 거야. 네가 햄릿이 죽지 않아도 나만 좋아할 것처럼.”

    “You are not just a walking dictionary, but also a walking romance.”라고 유정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만 열아홉 살의 삶은 이렇듯 행복하게 시작되었다. 대선이 끝나고 생겨난 민수의 우울함은 3주 정도 지나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언젠가 언급했던 것처럼 미래는 미리 결정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사전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였다.<계속>

    <각주>

    1. 구로구청 부정선거 의혹 사건 관련 링크

    2. <당시선>, 역자 이병한, 이영주,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에서 인용.

    3. <로마인 이야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한길사, 1996.에서 인용.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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