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스라이팅 그리고 신라의 달밤
    [컬렉터의 서재] 신라의 통일이 슬프다는 K에게
        2021년 05월 07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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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회의 칼럼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쏟구친 이유”

    K야. 그동안 잘 지냈니?

    신록이 푸르름을 더해가는 계절, 문득 너의 생각이 났다. 아마도 지난달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 때문이었을 거야. 한 언론이 꽤 유명한 두 연예인이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내용을 공개하면서 회자되었다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1938년 영국에서 공연된 연극 「가스등(Gaslight)」(1944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에서 파생된 심리학 용어라고 한다. 이 연극은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이 온갖 속임수와 거짓말로 멀쩡한 아내를 정신병자로 만드는 과정을 그렸어.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저서 『가스등 이펙트』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와 그를 이상화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피해자가 만들어내는 병리적 심리 현상’을 설명하면서 영화 제목을 인용해 ‘가스등 이펙트(Gaslight Effect)’라 명명했다고 해. 즉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 학대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국립국어원이 제시한 대체어는 ‘심리 지배’야.

    [사진] 1944년 개봉된 영화 「가스등(Gaslight)」의 포스터

    그런데 두 연예인의 가스라이팅 연애와 비슷한 시기 외교안보 쪽에서도 ‘가스라이팅’ 논란이 있었단다. 연예인들 때문에 좀 가려지긴 했어도 여기서도 ‘가스라이팅’이란 용어가 등장해. 이 논란은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최근에 발간한 저서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에서 한미동맹을 ‘가스라이팅’에 비유한데서 시작되었어. 이 책에서 그는 한미동맹을 ‘가스라이팅’에 비유하고 ‘동맹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한미동맹 재조정을 미룰 수 없다고 주장했단다. 그런데 미국을 혈맹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 표현이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이를 깨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던 거지. 김 원장은 이 논란에 대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해명했단다.

    “지금의 한미동맹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군사동맹의 신화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 하다 보니, 우리가 미국과의 딜에서 원하는 것을 받아 내지 못한다. 한미동맹도 국익을 위해 조정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신성시하는 데에서 깨어나 실용주의로 가야 한다. 한미동맹을 가스라이팅에 비유해서라도 ‘재조정’에 임팩트 주고 싶었다.”

                                                                                              (경향신문 2021. 4.14)

    한미관계에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이 지난 수십 년간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해 왔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런데 지금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 심상치 않아. 2010년 G2로 진입한 후 중국은 급격히 그 존재감을 키워나가고 있고, 미국은 이런 중국과 무역전쟁을 해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더 나아가 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포위 압박 전략을 펼치면서 적극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지. 갈등이 점점 더 악화되어 미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지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야.

    2021년 지금 대한민국은 미중 패권 다툼의 한가운데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명과 청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빠졌고, 이는 병자호란의 참화로 이어진 것을 기억할 거야.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은 거대한 시대전환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다. 지정학적으로 여러 세력의 힘이 교차되는 곳에 사는 나라의 숙명일 테지.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영리하고도 의연한 외교를 펼쳐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서는구나.

    그런데 한국사를 회고해 보면 이런 상황은 비단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명멸했던 나라들은 늘상 주변 나라들로부터 침략과 간섭을 받았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역사를 배우자니 학생들은 늘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테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너였다.

    K야. 기억하고 있니? 너는 삼국통일 단원을 배운 후 장문의 편지를 써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었지. 편지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 의존적이었음을 비판하고,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옳았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특유의 혈기와 비분강개로 가득찬 글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논리와 너무도 흡사하여 나는 네가 훌륭한 역사학자가 될 것만 같았다. 단재는 『독사신론』에서 신라의 통일에 대해 “다른 종족을 끌어들여 같은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불러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특히 당나라의 힘을 빌어 통일을 이룬 점에 대해서는 K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의 생각도 비슷하지.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바에 따르면 그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연이어 격퇴한 그 자랑스러운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그 통일이 보다 통쾌할 것 같은 느낌. 나도 한동안은 그런 입장에 가까웠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어.

    신라라는 나라가 1,000년의 역사를 유지한 저력은 무엇일까?

    1,000년 정도의 역사를 유지한 왕조가 세계사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거든. 신라가 그렇게 장구한 역사를 만들 수 있었던 어떤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단다. 오늘 편지는 지금까지 찾은 내 나름의 답이란다. 동시에 네 편지에 대한 때늦은 답장이기도 하다. 너무 늦었다고 화를 내진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너는 그 편지를 까먹었을 것이다.

    400년 고구려, 신라를 구원하다.

    K야. 나는 서기 400년 신라에서 있었던 사건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대략 60년간의 역사도 같이 살펴볼 거야.

    먼저 400년 즈음의 삼국시대를 살펴보자. 지금부터 1600여년 전 쯤이지. 당시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대왕이었다. 그는 체제를 크게 정비한 소수림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나이 열 여덟살이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내물마립간, 백제는 아신왕이 재위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고구려-신라가 우호적 관계, 백제-가야-왜가 우호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북방 연합과 남방 연합의 대립 구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399년 왜가 신라에 침입해 오게 된다. 신라는 당시 삼국 중 제일 힘이 약한 나라였다. 6년 전인 393년 5월에도 신라는 왜의 침략을 받아 수도 금성이 5일간 포위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스스로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적을 추적해서 격퇴했어. 왜는 당시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혔단다. 그런데 그 왜가 다시 신라에 쳐들어온 거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이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 속에서 내물 마립간은 친선 국가인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했지. 이 해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이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은 400년 보병과 기병 합쳐 5만의 구원군을 파견하여 위기의 신라를 구원하고, 이어 가야 쪽으로 도주하는 왜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금관가야의 종발성을 함락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영락 9년(399)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부수고…..(광개토대)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10년(400)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지나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했다. 고구려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금관가야로 추정)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이 일을 계기로 금관가야는 세력이 쇠퇴하고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다. 한국사에서는 400년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가야를 전기 가야연맹, 400년 이후의 가야를 후기 가야연맹이라고 구분한단다.

    [사진] 광개토대왕릉비의 모습. 높이 6.4m의 화강암으로 된 비석으로 400년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신라 구원과 가야 공격은 비단 가야의 중심지 이동만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는데 심지어 신라의 왕경 서라벌(경주)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게 된단다. 앞으로 예상되는 백제-가야-왜 연합의 침략을 막아준다는 취지였겠지. 400년 이전의 고구려-신라의 관계가 단순한 친선 관계였다면 400년 이후의 관계는 좋게 말하면 혈맹 관계, 나쁘게 말하면 주종 관계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5세기 전반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보호국이자 복속국이 되어버린 거지.

    왕이 되기 전 실성과 눌지가 고구려에 인질로 가고, 고구려가 신라의 왕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이러한 관계를 배경으로 한 것이란다. 당시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왕족 실성을 인질로 보냈는데, 내물 마립간 사후 왕위를 이은 것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눌지가 아니라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실성이었다. 심지어 실성은 고구려인을 사주하여 내물 마립간의 아들인 눌지를 제거하려 했는데, 그 고구려인이 눌지를 보고 ‘군자의 기품’이 있음을 보고 실성 마립간의 암살 계획을 폭로하게 된다. 이에 눌지는 고구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 계승에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구려의 개입에 따라서 왕이 될 수도, 그리고 언제든 왕위를 잃을 수도 있는 처지였던 거지.

    400년 직후의 고구려-신라 관계는 좀 거친 비유이지만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의 한미 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지. 1950년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으로 한반도를 미국의 태평양지역 방어선에서 제외했던 미국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유엔군 조직을 주도하여 전쟁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후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완전한 국제적으로 확대된 전쟁은 결국 발발 3년 만에 휴전 체제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휴전협정 석 달 뒤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전후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처음 6만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 2만 7000명 정도란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과 미국은 좋게 말하면 혈맹 관계, 나쁘게 말하면 주종 관계가 되었다.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대등한 관계란 애당초 불가능한 거지. 400년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미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거야.

    호우명 그릇과 맥아더 장군 동상

    다시 1600여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400년 고구려의 신라 구원 직후 고구려와 신라의 이런 특수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 1946년 경주의 노서동 140호분(호우총)에서 나왔단다. 해방 후 우리 학자들이 발굴한 첫 무덤에서 놀라운 유물이 나온 거지. 흔히 ‘호우명 그릇’이라고 불리는 청동 그릇이다. 이 그릇 뒷면에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십)’이라는 총 1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시호였어. 신라 무덤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적힌 그릇이 나오다니!!

    먼저 이 그릇에 새겨진 제작 연도인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을 장례 지낸 일년 뒤인 415년(장수왕 3년)으로 추정한단다. 그리고 이 그릇의 글씨체는 예서체로 고구려가 금석문을 작성할 때 애용했던 글씨체.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고구려체라고 부르기도 하지. 광개토대왕릉비도 바로 이 예서체로 새겨진 거야. 그렇다면 이 그릇은 분명히 ‘made in 고구려’, But ‘found in 신라무덤’! 이렇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이 왜 신라 무덤에서 나온 것일까?

    [사진] 1946년 경주 노서동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으로 5세기 초반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보물 제1878호로 지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K야. 여기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미스테리를 풀어야 해.

    자! 눈을 감고 그 때를 상상해보자.

    당시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그리고 신라를 국가적 위기에서 구해준 상국(上國)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국가적 은인이었다. 그런 광개토대왕이 돌아가셨다. 서기 412년, 그의 재위 22년 되는 해였다. 학자들은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의 왕릉에서 거행된 큰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 호우를 만든 것으로 본단다. 일반적인 설명은 이래.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 고구려는 대왕의 제사를 속국 신라에 알렸을 테고, 신라는 신하국의 예를 다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을 것이다. 고구려는 제사 의식에 참여한 조공국 사절들에게 기념품으로 이 그릇을 주었는데, 이 때 신라 사절도 그릇을 받아 경주로 가져왔고, 그 그릇은 세월이 흐른 다음 누군가의 무덤에 묻힌 것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 이건 내 생각이야. 광개토대왕이 죽자 신라는 은인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국가적 차원에서 사당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이에 광개토의 아들 장수왕은 이 기특한 신라에 대해 제사에 쓰라고 이 그릇을 만들어 신라에 하사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제사에 참석한 신라의 사신에게 선물로 준 것인지, 아니면 신라의 광개토대왕 사당에 쓸 제사용품으로 하사한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 그릇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져 신라에 전해졌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야.

    이 그릇 명문의 마지막 글자 ‘十’에 주목하는 학자들도 있단다. 이를 ‘시리얼 넘버(Serial Number)’로 보아 10번째 그릇으로 해석하는 거지. 이 가설이 맞다면 이런 유의 그릇이 최소 10개 제작되었고 그 중 일부가 신라에 전해졌다는 거지. 고구려가 만든 게 최소 10개일 수도 있고, 신라에 준 게 최소 10개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신라 고분 발굴 여하에 따라 ‘三(삼)’이 새겨진 아니면 ‘七(칠)’이 새겨진 그릇들도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거야. 흥미진진하지 않니? 이 ‘十(십)’자에 대해서는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의미 없는 표시라는 주장, 길상어(吉祥語)라는 주장 등 다양한 의견이 있어 뭐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어쨌든 이 호우명 그릇은 400년 고구려의 신라 구원 직후의 양국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개토대왕을 제사지내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릇이 신라무덤에서 나왔으니, 이 호우명 그릇 하나는 400년 직후 더 정확히 말하면 415년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특수 관계를 말 없이 증언해주고 있는 셈이지.

    나는 호우명 그릇을 볼 때마다 인천 자유공원에 서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떠오른단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총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이었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나라였고, 맥아더 장군은 그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인 거지. 전쟁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저 멀리 있는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보다 일본과 한국의 전장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했던 맥아더가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은인이었던 거지. 신라인들에게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은인으로 받아들여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생각들로 인천상륙작전 7주년이 되던 1957년에 많은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똑같은 모양의 맥아더 동상 2개를 제작해서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의 격전지였던 인천의 현 자유공원에 세웠고, 나머지 하나는 서울 중심부인 서울 세종로 현 KT빌딩 자리에 있던 반공회관 앞에 설치했어.

    흥미로운 것은 4.19 때 시위대가 독재권력의 주구 노릇을 하던 청년단의 본부로 쓰이던 반공회관을 불태웠는데, 시위대는 그 앞의 맥아더 동상에는 ‘공산 침략의 격퇴자’라고 쓴 리본이 달린 화환을 걸어주고 예를 표했다는 사실이야.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4년밖에 지나지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그 당시 맥아더에 대한 한국인의 숭배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인천의 무당집들 중에는 맥아더신을 모신 곳도 있어. “맥아더 장군의 신명과 강직한 신의 직성으로 삶의 맺힌 고를 풀어준다”고 홍보도 하고 말이야. 그때 세운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세종로에 있던 맥아더 동상은 1963년 서울수복 13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미술관 광장으로 이전한 후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단다.

    내 수집품 중에는 옛 사진들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인천 지역에서 찍은 사진의 상당수가 맥아더 장군 동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맥아더 장군에 대한 한국인의 우호적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지. 최근에는 이 동상에 대해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지만, 1957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은 인천을 대표하는 명소이자 한미 동맹을 상징하고, 한국전쟁 이후의 한미 관계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어. 그러므로 이 동상은 우리 시대의 호우명 그릇인 거야. 은인 광개토대왕을 제사지내는 용도로 사용된 호우명 그릇이나 은인 맥아더 장군을 기리는 동상이나 그 맥락은 비슷한 거지.

    [사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을 배경으로 찍은 각종 기념사진들 (박건호 소장)

    다시 1600년 전!

    400년 이후 고구려-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은 호우명 그릇만 있는 게 아니야. 국보 205호 충주고구려비(중원고구려비)도 그래. 비문의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해독되는 내용 중 몇 가지 주목되는 부분은 고구려는 자신을 태왕의 나라로 지칭하면서, 신라를 ‘동이(東夷)’로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종주국으로서 고구려가 신라 마립간에게 고구려 관복을 하사했다는 사실과 ‘新羅土內 幢主(신라토내 당주)’라는 고구려 관직명을 통해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사실 등을 담고 있어. 이를 통해 신라가 고구려에 상당 기간 종속적인 입장에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

    호우명 그릇과 충주고구려비를 통해 400년 직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겠지? 그런데 이런 고구려의 속국 상태인 신라에서 반고구려 자주화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눌지 마립간 때였다. 내물 마립간, 실성 마립간에 이어 417년 왕위에 오른 눌지 마립간은 이런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반고구려 자주화의 길을 걷고자 했어.

    그는 즉위 이듬해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내 그곳에 인질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데려왔다. 데려오는 방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장수왕을 찾아가 유려한 문장으로 설득해서 데려왔고,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탈출시킨 것으로 되어있어. 내 생각에는 『삼국사기』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 몰래 빼오는 방법은 고구려 신라 양국의 외교적 분쟁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인데, 그러기에는 아직 신라의 국력은 결전의 서막을 올리기에는 역부족! 그런 방법은 고구려와의 일전을 각오해야 감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직 신라는 인내가 필요했고, 좀 더 고구려의 간섭을 용인해야만 했다. 왜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고구려의 도움으로 극복한 신라에서 사실 고구려에 적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의리를 배신하는 것이며 배은망덕한 것이기도 했다. 강국의 보호하에 있는 것이 그것을 벗어나고자 했을 때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에 비해 훨씬 안전했다. 자존심을 조금만 버리면 그것은 매우 편안하고 안전한 길이지.

    그런데 신라는 김씨의 왕위 세습권이 확립된 4세기 후반 이후 점차 국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이와 함께 국가의 자존심도 상승하면서 반고구려의 정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표출할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고구려 체제로부터의 이탈을 시작한다. 이 시점은 대략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준 지 30년이 지난 후였다.

    역사에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고구려 영향력 하에서 신라에서 반고구려의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30년 정도가 걸렸듯이 대한민국에서 반미의 목소리도 한국전쟁 이후 대략 30년만에 표출되기 시작한다. 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병해 도와준 것도 모자라 전후 기아로 허덕이고 있던 대한민국에 원조 물자까지 제공한 나라가 미국 아니었던가! 이런 나라에서 사실 반미의 목소리가 나오기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여전히 위쪽에는 여전히 북한이라는 적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그 볼품없던 대한민국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국가의 위상도 그에 비례해 높아져 갔다. 속된 말로 한번 똘마니가 영원한 똘마니로 남으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의 반미 목소리는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1970년대까지는 확실히 대한민국은 반미의 무풍지대였다. 그런데 이를 바꾼 계기를 제공한 것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 유혈진압을 방조 묵인했다고 규정하면서, 광주에 대한 미국 책임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바로 1982년 3월 18일에 일어났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물론 이 사건 이전에도 1980년 12월 발생한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하여, 1980년 6월부터 각지에서 대학생이나 학생운동가 등에 의한 주한미군이나 미국관련 시설에 대한 공격이 없진 않았으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파급효과가 컸고, 이후 대한민국 내에서 벌어진 각종 반미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반미운동의 출발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반미운동의 무풍지대로 인식되어온 대한민국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은 물론 미국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부산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한 이들은 5.18 당시의 미군의 강제진압에 대한 묵인 외에도 1981년 1월 갓 출범한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가장 먼저 전두환 대통령을 미국에 초빙하여 환대한 것을 보고 미국 정부가 독재 정권을 인정하고 비호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미국 문화원을 점거한 그들은 “5.18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 타도하자! 미국은 이 땅에서 즉각 물러가라!”고 외쳤다. 1980년대 초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반미운동의 출발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반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온하였고, 젊은 혈기의 대학생들의 목소리였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나 정부의 입장이나 정책은 아니었어. 이 부분이 신라와 구별되는 지점이야. 게다가 언론과 시민들의 여론도 싸늘하였다.

    참!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 덧붙일게. 당시 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재판에는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했고, 변호인단에 참여한 인물에는 노무현 변호사도 있었지. 이 둘은 이후 20년 뒤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게 되는데, 여기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면서 대통령이 되었고, 이회창은 15대 대선에 이어 16대 대선에서도 연달아 패배하면서 이후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단다. 참 얄궂은 역사다.

    [사진] 왼쪽은 1981년 2월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표지 사진으로 소개한 뉴스위크 1981년 2월 16일자.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미국이 신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1981년 2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지지와 공고한 한미동맹 관계를 확인하고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일련의 과정은 민주화운동세력에게 미국 정부가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한다는 비판 의식을 확산시켰다. 오른쪽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직후에 발행된 반상회 자료의 뒷면으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용의자의 몽타쥬가 실려있다. (모두 박건호 소장)

    다시 눌지마립간의 신라!

    당시 신라의 반고구려 입장을 촉발한 것은 고구려의 내정 간섭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고구려의 평양 천도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장수왕은 427년 기존의 수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긴장한 백제가 먼저 신라에 손을 내밀게 된다. 이에 눌지는 결단을 내린다. 433년 백제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이른바 ‘나제동맹’이다.

    눌지마립간 17년 (43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므로 그대로 들었다.

    눌지마립간 18년(434년)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2필을 보내왔다. 가을 9월에 다시 흰 매를 보내왔다.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맑은 구슬로써 답례 사절을 보 냈다.

                                                                                                             『삼국사기』

    이 나제동맹은 교과서에서 흔히 말하듯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 신라와 백제가 손 잡았다’는 식의 평면적 사건이 아니었다. 오랜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내물 마립간에서 눌지 마립간까지의 30여년의 역사는 신라의 홀로서기 과정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백제와 신라의 동맹에 대해 고구려가 특별히 제재를 가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야. 우리 상식으로는 이런 두 나라의 연결에 고구려는 강력한 응징을 해야 하는데 말이야. 백제와 신라가 극비리에 동맹을 체결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시 고구려에 있어 이런 한반도의 상황보다 더 다급한 외교 현안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433년 나제동맹 체결 당시 고구려의 최대 적은 중국의 북위였다. 고구려는 이에 맞서고자 북위와 대결하는 나라들을 하나의 외교망으로 연결하였다. 남조의 송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몽골 초원의 유연과도 긴밀히 결합하였다. 이렇게 외교의 1순위가 북위였던 터라 나제동맹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460년대 접어들어 고구려가 적대국이었던 북위와 친선관계를 맺고 북방의 위협을 제거함에 따라, 이후 남쪽에 온 국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정세는 다시 한번 요동치게 된다. 백제가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는 것은 이런 절박한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475년 고구려는 결국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이게 된다.

    고구려와 신라의 완전한 결별, 작전명, ‘수탉을 죽여라!’

    어쨌든 433년 나제동맹이 체결된 상황 속에서도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내부의 의지가 외부의 굴레를 혁파하는 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나제동맹 후로부터 17년이 지난 450년부터였다. 그러다가 460년대 이후에는 두 나라 사이에 본격적인 군사 충돌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고구려의 공격을 막고자 변경지역에 많은 성을 쌓기도 했다. 다시 정리해보자.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신라는 433년 나제동맹 체결을 시작으로 고구려와 결별의 수순을 밟기 시작하고, 450년부터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고, 460년대 이후에는 군사 충돌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럼 신라의 대고구려 적대시 정책이 본격 표출되었다는 ‘450년의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 때는 역시 눌지 마립간 때의 일로 그 전말은 이러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 벌판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지금의 강릉) 성주 삼직(三直)이 군사를 내어 그를 엄습하여 죽였다. 고구려왕(장수왕)이 이것을 듣고 성이 나서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닦아 매우 기뻐하던 터에 이제 군사를 내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니 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즉시 군대를 일으켜 우리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니 그들이 그만 돌아갔다.

                                                                                                                『삼국사기』

    신라의 지방관이 고구려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인 이 사건은 신라가 나제 동맹을 맺었어도, 고구려와도 관계를 아주 끊지는 않고 있었던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거대한 정세의 전환기에 신라는 고구려의 간을 본 것이었을까? 신라는 결국 한발 물러선다. 고구려에게 겸손한 말로 사과함으로써 갈등은 일단 봉합된다. 아마 하슬라 성주가 일으킨 우발적 사건이었다고 변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처벌하는 것으로 성의를 보였을 것이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눌지 마립간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서면서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오랫동안 인내하고 기다리며 분투했다. 이런 정책은 이후 자비 마립간과 소지 마립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구려와 신라의 갈등은 점점 고조된다. 신라는 고구려의 시험하듯 고구려 변경을 침공하기도 하고,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면 구원병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두 나라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공식적인 결별만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450년 실직 벌판에서의 그 사건 이후의 몇몇 기록들이다.

    눌지마립간 38년 (454) 8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눌지마립간 39년 (455)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였다.

    자비마립간 11년 (468) 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오늘날의 삼척)을 습격하였다.

    자비마립간 17년 (474) 7월에 고구려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쳤다. 백제왕 경(慶; 개로왕)이 아들 문주로 하여금 구원을 청해 왔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구원 하였다.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어 경이 역시 죽었다.

    소지마립간 원년 (479)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성을 빼 앗고 다시 미질부(지금의 흥해)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가는 것을 추격하여 니하 서쪽에서 쳐 부수고 천여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이런 사건들은 강대국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신라가 이탈하면서 자립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있다. 그런데 이런 양국이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남아있다.

    작전명 ‘수탉을 죽여라’

    이는 신라가 음력 2월 깊은 밤 야음을 틈타 신라 땅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한 사건이다. 이때의 작전명이 “수탉을 죽여라!”

    고구려 군인들의 복장에서 특이한 점은 모자에 꽂힌 새깃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고구려 군인을 뜻하는 속어로 쓴 말이 ‘수탉’이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주한미군을 부를 때 “코쟁이”라고 부르듯이. 이렇게 신라는 자국 내의 ‘수탉’은 모조리 죽이고 고구려와 완전히 결별했다. 그런데 이 ‘수탉 죽이기’는 우리 기록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웅략(雄略) 8년 2월의 기사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 왕이 정예병사 1백 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 마부)로 삼았다.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의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전마는 이를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고 물러나서 뒤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나 들은 바를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명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곧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다.

    여기서 따져볼 것이 있다. 일본 역사에서 ‘웅략 8년’은 464년인데, 이때의 신라왕은 자비 마립간(458~479)이다. 그는 눌지 마립간의 아들로 눌지 마립간을 이은 왕이었다. ‘수탉 죽이기’는 『일본서기』를 따르자면 자비 마립간 때의 일이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자비 마립간보다는 눌지 마립간 때, 연도로는 대략 450∼454년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관계 단절을 시작한 임금이 눌지 마립간이고, 눌지 마립간 때 이미 여러 차례 고구려와 전투를 치르는 등 관계가 험악해졌는데, 자비 마립간 때까지 고구려 군대가 신라 왕도에 주둔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 때문이야.

    어쨌든 ‘수탉을 죽여라!’라는 작전명으로 감행된 신라 왕도에서의 이 참극은 신라와 고구려의 완전한 결별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신라인들에게는 수탉을 죽이던 그 시간은 신라인들에게는 가슴 뛰는 축제의 달밤이었을 것이고, 고구려인들에게는 치욕의 달밤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최종 승자가 된 이유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신라가 천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를 물어본다. 후진국 중에 상후진국이었던 바로 그 신라가 선진 두 나라를 제치고 삼국 통일을 완수한 이유가 무엇일까도 물어본다.

    K야.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류의 나라가 아니었다.

    일단 힘이 약하면 강한 나라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것이 생존전략이자 외교다. 당나라가 신라를 이용했듯이 신라도 당나라를 이용했다. 400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를 물리치고, 또 7세기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한 것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후의 행동이 신라를 천년 왕조로 만든 비결이다. 힘을 빌려준 그 나라가 만약 선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할 정도로 깊숙이 내정을 간섭하거나 국익을 침해할 때 신라는 국가 운명을 걸고 그 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힘의 강약에 대한 유약한 고려나 주저함도 떨쳐 버렸다. 앞에서 살폈던 “수탉 죽이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것으로 그쳤을까?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도 이런 일은 여실히 드러난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었다. 그러나 힘을 빌린 나라로서의 저자세는 없었다. 나당연합군이 같이 백제를 칠 때 전개된 기싸움을 기억해보자. 팽팽한 신경전! 660년 신라군이 당군과의 합류지점에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을 때 당 장군 소정방은 신라 장군의 목을 베겠다고 고압적 자세를 드러냈지. 이를 빌미로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었는데, 김유신은 그럼 당과 먼저 싸우겠다고 결연한 자세를 보여 소정방의 기를 꺾어 버렸다. 신라는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두고 그 밑에 여러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을 때 신라는 당과 전쟁을 각오한다. 보통의 나라였으면 이렇게 했을까? 한강 이남의 땅만 신라의 땅으로 인정해 달라든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오늘날 경상도 지역 정도만이라도 인정해달라고 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신라가 당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게다가 승리를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670년 당과의 7년 전쟁에 돌입한다. 나당전쟁에 국가 운명을 모두 걸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최종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전투를 통해 당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당 세력 축출과 삼국통일 완수는 신라의 영리한 외교와 결연한 의지가 빚은 결과였다. 가슴 뛰는 이야기 아니니?

    [사진] 나당전쟁 당시의 매소성 전투를 그린 민족기록화. 이 전투에서 신라는 3만명으로 20만명의 당군을 격파하였다. (전쟁기념관 소장)

    이런 이유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을 이루었다는 단재 신채호의 비판으로 설명될 수만은 없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도 거의 없었던 시대였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이 형성된 것은 고려 후기 몽골 침략기와 원 간섭기 즉 대략 13세기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뒷날에 형성된 민족 관념으로 신라의 관념을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그 외세에 굴종하기보다 전면전을 통해 통일을 완수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것은 고구려가 수·당을 연달아 격파한 것 이상으로 빛나는 민족사의 쾌거이다. 신라는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굴종의 길보다는 자주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당당했다. 우리는 신라의 이런 자주적이고 의연한 정신이야말로 신라 천년 역사의 비밀임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인해 신라는 충분히 존중받고 높게 평가될 자격이 있다.

    2021년 우리는…..

    K야. 편지가 무척 길어졌구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네가 나의 이러한 설명에 동의해 줄지는 모르겠다. 이건 순전히 나의 견해야. 나는 신라의 외교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신라는 때로는 국가 운명을 걸고 외세와 싸웠단다. 우리는 ‘수탉 죽이기’ 작전을 앞두고 있던 눌지 마립간의 고뇌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전이 감행되던 신라의 달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년 뒤 세계 대제국 당과 전쟁을 각오했던 문무왕과 신라 지배층의 결연한 의지도 읽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사려깊고 진지했던 K야.

    너는 나에게 외교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과에 합격했다. 너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니?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 우리 외교의 갈 길은 어디일까? 정답이 있긴 한 걸까?

    지금의 상황은 신라의 상황과 동일하지도 않고 정세도 매우 복잡하다. 우리에게 국익을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외교는 무엇일까? 이 거대한 체스판에서 절묘의 한 수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동맹국인 미국은 무엇이고, 제1의 경제 교역국인 중국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같은 민족이며 전쟁을 겪었고 지금도 적대와 화해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북한은 무엇인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규정한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관계”인 남과 북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미국과의 혈맹관계를 고수하여 북한을 응징하고 힘에 의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정답일까? 그걸 위해 미국의 대중국 포위압박전략에 동참하는 길에 합류하는 것이 바른 길일까? 아니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 외교, 광해군식의 외교를 모색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는 어떤 외교적 포지션을 취해야 할까? 오랜 레파토리인 반일이 정답일까? 아니면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강력한 동맹을 구축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것이 물음표로 남아있지만 명확한 것은 지금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는 사실이다.

    G2 시대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우리 생존의 가장 영리하고도 의연한 선택을 위해 모두가 고민해야겠다.

    K야. 나와 너는 이 정답을 찾기 위해 같이 부단히 현실을 직시하고 묘수를 찾기 위해 노력하자구나. 천 년이 지난 먼 훗날, 이 한반도에 살게 될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스러워할 역사를 만들어야겠다. 독일의 한 언론인이 했다는 말로 나의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늘 건강하길 빈다.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위대함의 징표가 된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필연적인 것을 완성한 사람들이었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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