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인보의 탄생과 조치훈
    '현대바둑 사이드 스토리' 시작하며
        2021년 05월 01일 01: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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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 사이드 스토리를 시작하며

    1924년 오쿠라 기시지로의 후원으로 일본기원이 설립되면서 현대바둑이 시작되었다. 일본기원의 탄생은 막부 시절부터 이어지던 세습바둑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세습 바둑 가문인 혼인보(한국에서는 본인방이라고도 부름)의 마지막 당주인 21대 혼인보 슈사이는 세습 중단을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마이니치신문사는 슈사이와 논의 끝에 일본 최대 기전인 혼인보전을 시작했다.

    사이드 스토리는 21대 혼인보 슈사이를 시작으로 일본기원의 양대 바둑도장의 설립자인 기타니 미노루와 세고에 겐사쿠, 그리고 그들이 길러낸 한국인 제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기타니의 대표적인 한국인 제자는 조치훈, 세고에의 제자는 조훈현 등이 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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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국 제패를 눈앞에 두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바둑 광팬이자 고수였다. 천하가 눈앞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당대 바둑 최고수의 실력이 궁금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두 점 접바둑이면 당대 최고수와 자웅을 겨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석 점이면 천하의 누구도 필승이라고 확신했다. 당시의 최고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사찰의 암자에 기거하고 있는 닛카이라는 스님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닛카이를 초빙해 대국을 요청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정중하게 두 점 접바둑을 제한했다. 닛카이의 답변은 다섯 점이었다. 석 점으로 할지 넉 점으로 할지 오다 노부나가가 조정하자는 요구는 치욕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다섯 점을 받아들이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닛타이가 이기면 “원하는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이고 패배하면 “산중을 폐문할 것”이었다.

    다섯 점 접바둑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기회 한 번 잡지 못하고 참패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닛카이에게 천섬의 토지와 백 명의 노비를 하사했다. 이를테면 장군이 아닌 사람에게 영주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혼인보’라는 칭호를 내렸다. 또한, 오다 노부나가는 정기적으로 바둑대회를 개최한다고 선언했다. 닛카이 주변으로 전국의 고수들이 ‘바둑 식객’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흔히 도장이라고 불리는 바둑문파가 형성된 것이다.

    초고수들에게도 평생 바둑을 두어도 한번 나오기 힘든 형태가 있다. 장생과 3패다. 두 모양은 같은 상황을 반복할 수밖에 없어 무승부로 처리된다. 살아있는 기성이라는 칭호를 받은 오청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생은 백만판을 두어도 나오기 어렵다고 단언했다. 공식 기전에서 장생이 등장한 것은 한국기원과 일본기원에서 한번, 후지쯔배 국제기전에 한번 등 총 3번에 불과했다.

    오청원은 장생이 등장한 대국은 ‘길조’라며 모든 바둑기사와 팬들이 한마음으로 축하를 보내야 하는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장생 다음으로 나오기 어려운 3패에 대해서는 오청원은 ‘흉조’라며 정반대의 주장을 내놓았다. 둘 다 등장하기 불가능한 모양이지만 장생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3패는 상황에 따라서 가능한 모양이기 때문에 흉조라고 오청원은 말한 것이다.

    3패와 혼노지의 변

    1582년 봄,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제패의 마지막 숙적인 모리 정벌을 시작했다. 노부나가의 부대는 오른팔인 하시바(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사령관을 맡고, 왼팔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측면을 맡았다. 천하통일을 위한 노부나가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노부나가는 교토 외곽의 임시 거처인 혼노지에서 정예병과 함께 전투를 지휘했다. 수만 대군이 움직이면 상대방도 알아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시바 히데요시는 속전속결로 움직였다.

    그때, 노부나가의 왼팔인 미쓰히데가 갑자기 교토에서 열병식이 있다면서 부대에게 회군을 통보했다. 어리둥절한 병사들은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 혼노지로 돌아갔다. 혼노지 앞에 다다르자 미쓰히데는 저 유명한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을 외치며 반란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노부나가는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군사력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하통일을 꿈꾸던 노부나가는 자결을 선택했다. 허무한 최후였다.

    미쓰히데는 최고 권력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모리 정벌의 선봉이었던 히데요시는 곧바로 전투를 중단하고 총력으로 회군했다. 불리해진 미쓰히데는 혼노지를 버리고 후퇴하며 저항했지만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히데요시는 최고권력자에 떠올랐다.

    혼노지 변이 일어나기 바로 며칠 전, 공교롭게도 닛카이가 제자들을 이끌고 노부나가를 방문했다. 노부나가가 전국 제패를 위해 혼노지에 머문다는 것은 극비에 관한 사항이었다. 닛카이의 요청에 노부나가는 선선히 방문을 허락했다. 자신의 운명 모두가 걸린 전투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대국에 심취했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지켜보던 대국에서 3패가 발생했다. 노부나가가 보기에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바둑이던 대국자가 극적으로 3패를 만들면서 무승부를 만든 것이다. 노부나가는 그 결과에 빠져들었고 닛카이는 이런 대국은 길조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혼노지 변의 그 날, 닛카이는 혼노지를 빠져나가 현장에 없었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나 마찬가지였던 닛카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하고 난 후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아예 히데요시는 더 거대한 장원과 닛카이에게 세습 가능한 귀족 칭호인 ‘혼인보’를 하사했다. 제1대 혼인보, 혼인보 ‘산사’가 탄생한 것이다.

    첫 대전과 암살설

    히데요시는 닛카이에게 가문에 대한 전권을 준 것이지 전국 바둑에 대한 전권을 준 것은 아니었다. 대국 실력을 통해 막부에 버금가는 직책을 주고 주요 결정권을 주는 방식을 도입했다. 일종의 바둑 영주권을 주었지만 실력을 통해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혼인보에 대항하는 이노우에, 야스이, 하야시 가문들이 생겨났고 최고수 타이틀인 ‘명인’을 차지하기 위해 반상 위에서 피의 쟁투를 벌였다.

    혼인보는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보다는 정치적 세습의 성격이 짙었다. 유능한 후계자는 가문을 먹여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혼인보 산사가 죽고 후계자로 내정된 카무라 도세키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했다.

    혼인보 가문에서 다시 명인 자리를 다시 세습하려고 했지만 나머지 세 가문이 연합해 반발하면서 세습은 좌절됐다. 세 가문은 애초의 취지대로 대국을 통해 명인을 결정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왕좌에 오르는 것은 명예가 아니라 실력이어야 한다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었다

    연합세력은 도전자로 야스이 가문의 후계자 산치를 내세웠다. 2대 혼인보 산에츠와의 대국은 7국으로 결정됐고 먼저 4국을 승리하는 측이 명인을 차지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반대파의 계획은 참담한 벽에 가로막혔다. 혼인보 측은 갖은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고 제한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을 것을 이용해 다섯 시간의 장고 끝에 돌 하나를 놓고 3개월 후에 속개하는 일도 일어났다. 8년이 지났지만 대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따.

    8년 후, 6국이 끝난 결과, 3 대 3 동률이었다. 마지막 한 판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혼인보 산에츠는 건강을 이유로 대국을 연기했다. 대국이 기약 없이 열리지 않자 세 가문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렇게 5년이 흐르고 혼인보 산에츠가 죽었다. 공식사인은 자연사였지만 세 가문에 의한 암살설이 계속해서 제기됐다. 난처한 것은 막부였다. 막부는 이 결과를 유보하기로 결정했다.

    야스이와 나머지 가문은 명인이 없는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것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막부는 적당한 선에서 수습하려 했지만 반혼인보 동맹은 필사적이었다. 동맹이 필사적인 이유는 명인은 공석이었지만 여전히 혼인보에 의해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과 논쟁은 무려 10년간 계속되었다. 동맹의 정치적 지지가가 필요해진 막부는 야스이 산치에게 명인 칭호를 넘겨주는 것으로 오랜 논란을 수습했다.

    혼인보와 메이지유신

    동맹이 명인을 가져간 이후 혼인보가 되찾기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혼인보와 나머지 가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리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메이지유신의 등장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려버렸다. 막부가 붕괴하면서 바둑에 대한 지원이 전면 중단됐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토지만으로는 가문을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면세가 사라졌고 지원체계가 무너졌다. 바둑 가문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신분에 가까웠던 농민들은 농업노동자로 변신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대규모 장원의 영주나 마찬가지였던 혼인보 가문은 혼란에 직면했다.

    1914년, 혼인보 슈사이가 명인에 올랐지만 메이지유신은 고도코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명인이라는 명예를 주장하는 것은 자유지만 명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는 더 이상 행사할 수 없다는 통첩이었다. 바둑가문은 있지만 공식대국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폐족의 시대가 시작됐다.

    1924년, 1차 세계대전으로 거액을 번 오쿠라 기시지로가 정권의 실력자인 외무상 마키노 노부야키을 설득해 현대 일본기원의 창립을 주도했다. 노부야키를 이사장으로 일본기원은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계획은 늪에 빠졌다. 대회를 추진하려고 해도 혼인보와 나머지 가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을 남은 기득권을 행사하며 일본기원을 압박한 것이다. 일본기원은 시작부터 위기에 빠졌다.

    모두가 말문을 열고 있지 않을 때 혼인보 슈사이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슈사이의 첫 일성은 혼인보 세습을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3백년 가문의 마지막 수장이 옥쇄를 선언한 것이다. 옥쇄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그 첫 번째는 일본기원이 최대 바둑기전을 추진하되 그 이름을 ‘혼인보’로 할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세습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대신 혼인보를 10연패 하는 기사가 나올 경우 혼인보 칭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21대 마지막 혼인보 슈사이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10연패라는 전인미답에게는 22대 혼인보라는 타협책을 제시했다.

    21대 마지막 혼인보 슈사이. 일찍 부모를 여인 슈사이는 친척들의 손을 거쳐 거리를 전전하다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사찰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는 동자승 아닌 동자승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처참한 슈사이의 삶을 바꾼 것은 우연히도 사찰의 주지가 상당한 바둑 기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이었다. 어깨 너머로 바둑을 배웠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20대 혼인보가 후계를 만들기 위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문파는 혼란에 빠졌다.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혼인보 가문은 창시자인 산사의 유언을 내세우면서 대국을 통해 최강자가 21대 혼인보가 된다고 공표했다. 무명의 슈사이는 후계자들을 실력으로 제압하고 21대 혼인보에 올랐다. 부와 명예가 모두 사라질 위기에서 슈사이는 명예만큼은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슈사이는 묵묵히 혼인보의 문을 닫으며 22대 혼인보가 탄생하는 날을 기다리며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파국으로 끝난 22대 혼인보

    패전 후 일본바둑의 최강자는 다카가와 가쿠였다. 현대바둑으로 비유하자면 전투력은 이세돌과 조훈현을 섞은 최고수였고, 계산과 수읽기는 훗날의 이창호에 비교할 수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니었다. 가쿠의 칼바람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고 모든 기전의 타이틀은 가쿠의 것이었다. 당대 최강인 가쿠가 혼인보 타이틀을 차지하자마자 단 한 번의 위기도 없이 9연패를 기록했다. 22대 혼인보가 탄생하기 직전이었다. 팬들은 그의 이름을 경배했다.

    천재가 있으면 그를 허무는 천재도 있는 것이 역사다. 사카타 에이오가 혜성 같이 등장했을 때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차세대 카쿠’였다. 언젠가는 에이오가 가쿠가 쌓은 역사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측했다. 그 예측은 산산이 부서졌다. 에이오는 차세대 명예를 받자마자 그 훈장을 자신의 손으로 뜯어버렸다. 에이오가 10연패를 앞둔 가쿠의 혼인보 도전자에 올랐을 때 일본 전역이 놀라움에 빠졌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에이오는 가쿠를 처참하게 무너트리며 혼인보를 차지했다. 22데 혼인보 탄생이 목전에서 사라진 것이다.

    (* 한국기원의 프로바둑 대회는 일반적으로 32강전으로 진행되고 전 대회 성적에 따라 일부 인원을 32강에 시드로 배정한다. 나머지는 통합예선을 통해 32강에 진출한다. 통합예선은 시드를 배정받지 못한 프로들이 초단부터 9단이 모두 조를 나눠 참여한다.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남겨 시드를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것만이 통합예선이라는 지옥을 다시 거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본기원은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막부 시절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기원은 체계를 중요하게 유지하고 있다. 혼인보는 통합예선이라는 것이 없다. 초단은 초단이고 9단은 9단인데 타이틀이 없다고 호선으로 바둑을 두는 것은 역사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선은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먼저 초단 전체가 예선을 한다. 초단 전체예선에서 우승한 단 한 명이 2단 예선에 참여한다. 그리고 2단전 우승자 한 명이 다시 3단 예선에 참여하는 식이다. 차세대 신예가 도전권 자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다. 에이오는 바늘보다 좁은 예선을 모두 진압하고 도전권을 차지한 것이다. 일본의 바둑팬들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에 환호하기는커녕, 그의 파천황에 분노했다.

    에이오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허약한 체질이 문제였다. 타이틀 방어전에 전력을 다하고 있던 에이오는 기타니 미노루 도장의 간판스타인 이시다 요시오에게 혼인보 결정전에서 패하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기타니 도장의 기풍은 실리 후 타개였는데 실리파였던 에이오는 상극 기풍을 소화하지 못했다. 실리파의 당연히 시간소요가 많은 것이 공통점이었고 체력의 부담을 느낀 에이오는 이를 견디지 못했다.

    요시오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타이틀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방어할 1순위는 혼인보 타이틀이었다. 전력을 다했던 혼인보는 5연패로 실패했고 요시오는 점점 늪에 빠지며 무관으로 전락했다. 십수 년간 혼인보는 우승자가 뒤바뀌며 춘추전국 시대가 계속됐다. 혼인보를 연패하는 기사들도 드물었다. 모두가 도전자였고 ‘당대 최강’은 등장하지 않았다.

    삼촌 조남철 9단과 바둑유학을 떠나는 조치훈

    조치훈의 입단 장면. 가운데가 기타니 미노루.

    1962년, 6살 어린아이가 한국바둑의 대국수이자 삼촌이 조남철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다. 조치훈은 조남철이 젊은 시절 유학한 적이 있는 기타니 미노루 도장에 입문했다. 5년 후 11살의 나이로 일본기원에 입단하며 도장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1976년 약관의 나이로 천원전 타이틀을 차지하자 스승인 기타니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대 최연소 타이틀 보유 기록이었다.

    1981년, 시간문제라고 말했던 조치훈은 혼인보 타이틀을 차지했다. 2년 후 기성 타이틀을 차지하며 한 해에 기성, 명인, 혼인보 타이틀을 차지하며 ‘대삼관’에 오른 최초의 기사가 되었다. 조치훈의 천하집권은 불과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그해 혼인보 방어전에서 ‘이중허리’ 린하이펑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7번기 대국에서 3연승 후 4연패를 당하며 내준 방어전이라 조치훈에게는 충격적인 대국이었다.

    이후 조치훈은 일본기전의 7대 기전을 모두 차지하며 일본 바둑역사를 새로 썼지만 유독 혼인보는 다시 손 앞에 잡히지 않았다. 일본기원의 최강자가 6년이 넘도록 혼인보 도전자 결정전조차 나가지 못한 것이다. 호사가들은 “일본바둑의 기원인 혼인보에 조선인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안주거리로 삼았다.

    1989년 조치훈은 예선과 본선을 파죽지세로 승리하며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해 혼인보 타이틀을 다시 차지했다. 그리고 조치훈은 혼인보를 다시 내주지 않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1997년 조치훈은 혼인보 방어전을 성공하면서 9연패에 성공했다. 22대 혼인보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1998년 혼인보 결정전을 앞두고 일본기원은 특별한 결정을 내렸다. (종전 이후) 혼인보를 5연패 한 기사에게 혼인보 칭호를 내린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조치훈에게 22대 혼인보 칭호를 주지 않기 위해 혼인보 슈사이의 유훈을 외면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슈사이의 후계자는 예정에 없던 다카가와 가쿠에게 돌아갔다. 22대 혼인보 슈가쿠 다카가와 가쿠(9연패), 23대 혼인보 에이쥬 사카타 에이오(7연패), 24대 혼인보 슈호 이시다 요시오(5연패). 조치훈은 25대 혼인보 치쿤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현재까지 혼인보를 10연패한 기사는 조치훈이 유일하다. 75회 우승이라는 대기록도 여전히 불멸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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