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켄슈타인과 지금 우리,
    박영선 후보의 무인편의점 발언
    [기고] 어느 날 사라진 5만명의 존재를 생각하며
        2021년 04월 06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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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읽은 것은 박영선 후보의 무인편의점, 무인계산대 발언 때문이었다.

    선거운동의 첫 행보를 나선 박영선 후보는 3월 25일 자정부터 약 1시간 동안 편의점 체험을 하며 야간 알바생의 고충을 들었다. 그 후 점주와의 간담회에서 자신이 장관으로 있을 때 ‘스마트 스토어, 무인점포’를 확산시켰다며 홍보하고 이를 활용해 볼 것을 권유했다. 식당 무인계산대도 박영선 장관이 적극 확산시켰다고 한다.

    모두 청년노동을 기술 도입으로 대신하는 사례이고 점주 입장에서는 인건비 절감으로 이윤을 증가시키는 선택일 수 있지만, 기술 도입이 사라지게 만드는 일자리로 학업이나 생계를 꾸리는 사람에게는 씁쓸한 일이 될 것이다. 나의 가치가 기계나 기술로 대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청년노동자의 마음이 어떨지, 기술도입이 야기할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정치적 고뇌가 있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다.

    기술 그 자체도 일면적이지 않지만, 그것의 영향은 더욱 다면적이어서, 누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절망의 입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의 복잡성이 정치라는 기술을 만들게 된 이유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창조자의 이름이다. 소설 속에서 괴물은 이름조차 받지 못한 존재로 나온다.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창조를 후회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절절하게 말한다.

    “나를 보고 배우세요. 내가 지킨 규칙을 보고 배우지 못한다면, 적어도 내 사례를 보고 지식의 습득이 얼마나 위험한지, 천성이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위대해지기를 염원하는 인간보다, 태어난 고향이 온 세상이라고 믿는 이가 얼마나 더 행복한지 배우기 바랍니다.”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 소설은 여러 가지 관점으로 독해할 수 있다.

    최초의 여성주의자 중 한 명이며, 여성주의 고전 ‘여성의 권리옹호’ 저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로서, 19세기에는 아주 드물었던 여성 작가로서 메리 셸리를 강조하자면, 이 책은 여성주의 텍스트로 읽을 수도 있다. 실제 소설 속 여성들은 고전의 규범에 충실했던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과는 조금씩 다르다. 괴물에게 처음으로 삶의 희망을 갖게 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사피’는 여성을 재물로 취급하는 가부장 아버지로부터 탈출하여 사랑을 선택한 여성이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결혼한 직후 괴물에게 살해당한 엘리자베트는 결혼의 조건은 가문이나 재산이 아니라 사랑과 대등한 관계라고 주장한다. 중세적 결혼관을 버리고 분명한 어조로 낭만적 연애관을 피력한다.

    종교가 이야기하는 창조와 인간의 실존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고뇌와 모순, 철학적 문제를 주제로 읽어 내려갈 수도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에 의해 탄생한 괴물이 말과 글을 배우면서 처음 읽는 책이 ‘실낙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플루타르크 영웅전 1권’ 인 것은 이런 생각을 더 강화시킨다. 창조자에 의해 버림받은 아담처럼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버려진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자신을 닮은 여성형 피조물을 창조해달라고 협박한다. 이브의 창조를 종용한 것이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자신의 고독함이 보상받을 수 있으며,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자신의 저주와 복수를 포기하겠노라 말한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혐오의 기원이 무엇이며, 혐오를 통한 배제가 어떤 사회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학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창조된 괴물은 생명을 부여받아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창조자에게 버림받는다. 창조과정에서는 창조행위에 대해 단 한 번도 양심의 가책이나 후과를 고민한 적이 없는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의 누런 눈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혐오감을 느끼고 피조물로부터 달아남으로써 그를 사회에서 배제한다.

    버림받아 인간사회에서 밀려난 괴물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사회를 동경하지만 증오하게 된다. 괴물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존재라도 내게 호의를 갖는다면 나는 그들에게 만 배로 갚아줄 것이다. 그 한 존재를 위해 인류 전체와 화해할 것이다.’ 그러나 괴물은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그 한 명을 만나지 못한다. 그 결과는 연쇄 살인으로 이어져 창조자도 피조물도 파국을 맞는다.

    나는 박영선의 무인점포, 무인계산대 때문에 이 책이 생각났었다. 기술진보에 대한 낭만적 사고가 얼마나 유치하고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학적 영감이 필요해서 독서를 시작한 셈이다. 그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지만, 애초의 의도도 충분히 달성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독서의 계기가 되었던 주제에 대해 얘기할 순서가 되었다.

    2년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이호승씨가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 일을 ‘없어질 직업’이라고 말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아마도 고속도로 하이패스 이용자가 늘어나면 도로공사가 더는 수납원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거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진보를 거부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착오한 것은 청와대였다.

    이제는 고전이 된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가 있다. 한국 문학사 불멸의 천재라 평가받는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썼다. 극중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노동자로 나오는 영자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는데, 그 중 하나가 시내버스 안내양이었다. 그러나 아침 만원버스에 학생들을 밀어 넣고 거의 매달려 가다가 마주 오는 버스에 팔을 부딪혀 외팔이 되고 만다. 70년대의 영자처럼 시내버스 안내양(정식명칭은 ‘안내원’이었다)으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숫자가 거의 5만명에 달했다. 이 5만개의 일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는데, 그 원인은 정부가 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하여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5만명의 일자리를 대신한 기술혁신은 네 가지였다. 하차벨, 자동문, 요금수납박스, 그리고 운전노동자의 강화된 노동강도가 그것이다.

    나는 일자리 5만개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일부러 썼는데, 전형적인 유체이탈식 표현이다. ‘사라질 직업’이라는 말과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말이다. 사라지는 것은 마치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사라지는 것에 누군가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5만명이 해고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누가 해고했는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작년에 단행된 이스타항공 정리해고 규모가 640명, 대우버스 해고자가 400명이었는데, 신문기사의 제목이 이랬다. ‘쌍용차 이후 최대규모 정리해고.’ 30여명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규모가 3000명이었다. 그러니 법규정 한 줄을 삭제하여 무려 5만명을 해고한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를 앞세워’ 하차벨, 자동문, 요금수납박스를 도입하고, 운전노동자의 노동강도를 강화해서 안내원 5만명을 혁신적으로 해고한 버스업계의 늘어난 이윤은 고스란히 사장님들 주머니로 들어갔다. 5만 명이 일자리를 잃는 과정에서 정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부가 추진했고 국회에서 개정된 이 제도변화에 대해 야당이 저항한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고용보험이나 실업부조제도가 이들의 실업 이후를 책임지지도 않았고, 당시엔 이렇다 할 복지제도도 없었다.

    지금 우리가 매일같이 타고 내리는 시내버스는 30여년 전에 단행된, 소위 기술혁신의 결과인 것이다. 해고된 5만 명의 삶을 책임진 것은 정부도, 정치도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악착같이 살아남아 버텨온 것이다.

    그러니까 전국민고용보험제도, 실업부조제도, 혹은 기본소득이나 참여소득제도, 일자리 보장제도, 완전고용이라는 정책목표, 또는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고, 오직 기술혁신·4차산업혁명 만을 주문처럼 읊어대는 정부나 박영선 후보의 비전은 5만명의 안내양을 해고하게 했던 1989년 노태우 정부 하의 정치만큼이나 후진적이다.

    소설 속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시체들의 조각을 이어 붙여 생명을 불어 넣는데 성공한다. 인간을 창조하고 신의 물건인 불을 선물한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과학기술을 남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존재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오직 창조할 수 있다는 확신만이 그를 움직였다. 그 결과는 모두에게 파국이었다.

    사회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사회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거대한 미세먼지 집진기를 설치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던 2017년 대선후보 안철수의 생각이나, 야간노동의 수고로움과 비용을 무인점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박영선의 말은, 모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오만과 다르지 않다. 사회를 바꾸지 않고도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시대에 대한 이 낡은 착오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허무함으로 글을 맺을 수밖에 없다. 내곡동 그 사람이냐, 야스쿠니 뷰냐, 이것이 핵심쟁점이 되어 버린 선거판을 들여다 보자니 참 괴롭다.

    필자소개
    독자. 정의당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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