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린비아오와 바이충시①
    [국공내전-64] 쫓는 자와 쫓기는 자
        2021년 03월 02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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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비아오, 바이충시의 부대를 끝까지 추격하다

    린비아오에게 복수의 기회가 왔다. 절치부심한 린비아오는 담가에 누운 채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린비아오의 4야전군은 우한에서 하이난까지 바이충시 부대를 따라 천리 길을 추격했다. 린바이오에게 복수란 쓰핑의 패전을 갚는 것이었다.

    1946년 5월, 린비아오는 바이충시와 두위밍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하였다. 당시 두위밍은 동북 보안사령관으로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 바이충시는 국민정부 국방부장으로 독전차 동북에 와 있었다. 바이충시와 두위밍의 지휘아래 국군은 쓰핑 공략에 성공하여 린비아오 휘하의 동북 민주연군을 쑹화장 너머 하얼빈으로 밀어내었다. 쑨리런, 정동궈, 랴오야오샹, 천밍런 같은 맹장들이 두위밍과 바이충시의 지휘 아래 공을 다투었다. 쓰핑 패배로 린비아오는 ‘후퇴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홍군 이래 손꼽히는 지휘관으로 꼽히던 린비아오로서는 쓰라린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두위밍은 화이하이 전투에서 해방군의 포로가 되었다. 바이충시는 4야전군이 공격을 맡은 후베이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4야전군이 창장을 건너 도하할 때 난징과 상하이 방면의 국군은 이미 추풍낙엽처럼 일패도지하고 있었다. 바이충시는 부득이 우한을 포기하고 광둥성으로 물러났다. 광둥성을 수비하다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출신지인 광시성으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바이충시의 마지막 행로가 광시성이라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바이충시는 린비아오와 결전을 계속 피했다. 승산 없는 전투를 회피하고 실력을 보존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린비아오 휘하 4야전군이 창장을 도하할 때 바이충시 휘하 국군은 이창(宜昌)과 샤스(沙市)선에서 저지하려 하였다. 해방군은 국군 1만 5천명을 섬멸했으나 바이충시는 결전할 의사가 없었다. 린비아오군이 후난성과 장시성으로 진격하는 것을 늦추려고 했던 샹간(湘赣)전투에서도 바이충시는 거듭 물러났다. 린비아오는 결전을 하려고 하여도 방법이 없었다. “이 자가 또 달아났구나.”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때 마오쩌둥이 린비아오에게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식으로 작은 제갈량을 잡기 힘들다. 짧게 우회하지 말고 먼거리를 우회하여 공격하라.”

    칭수핑(青树坪) 전투는 의론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바이충시가 묘수를 둔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린비아오가 깔아둔 복선이라고 한다. 칭수핑 전투에서 바이충시는 매복전으로 린비아오에게 제대로 한방 먹였다. 그 후의 결과를 보면 린비아오는 칭수핑 전투를 미끼로 삼은 것으로 해석된다. 린비아오는 헝바오 결전에서 바이충시의 광시군 주력을 먹어 치웠다.

    그후 덩화(鄧華), 한센추(韓先楚), 리쭤펑(李作鵬) 등 동북의 맹장들이 하이난다오를 점령했다. 목선으로 바다를 건너 진먼다오 패배를 설욕한 것이다. 바이충시는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린비아오는 어떻게 국군 최고의 지장인 바이충시를 패퇴시켰을까? 결과론만으로 두 사람의 공방을 평가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이 결승전을 치를 무렵 국공내전의 향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린비아오가 가진 병력과 부대의 사기는 바이충시 부대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결국 린비아오는 후베이성, 광둥성, 광시성까지 바이충시의 부대를 추격하며 끝내 섬멸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숙적 린비아오와 바이충시. 국공 최고의 지장으로 꼽힌다.

    린비아오군, 화남지역으로 거침없이 진격하다

    랴오선, 핑진, 화이하이 등 3대 전역에서 국민정부 주력부대는 대부분 섬멸되었다. 남은 병력은 107만명 남짓했는데 신장에서 타이완까지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전략적으로 이미 방어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3대 전역에서 승리한 직후 해방군 병력은 이미 400만명을 넘어섰다. 1949년 말에 이르면 최대 550만명에 이르렀으니 국군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새로 징집한 신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투항한 국군을 해방군으로 편입시켜 확대한 병력이었다.

    중공 중앙군사위와 마오쩌둥은 4대 야전군에게 진군하여 전국을 해방하라고 명령했다.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4야전군은 후난, 후베이, 장시성 등 3성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하였다. 린비아오의 오랜 적수 바이충시 집단군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허난, 후베이, 후난, 장시, 광둥, 광시등 6성을 해방하고 전후 건설에 참가하라고 하였다.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전에 린비아오는 정치위원인 뤄룽환과 작별하였다. 뤄룽환은 병이 중해 직무를 수행하기 힘들었다. 그는 린비아오에게 충고했다. “바이충시 부대를 쉽게 보면 안된다. 리쫑런, 바이충시가 이끄는 광시와 광둥의 자제들이다. 짧은 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던 병사들이지만 전투력이 강하다. 산도 잘 타고 잘 뛰며 민활해서 미꾸라지처럼 잘 잡히지 않는다. 광시군은 바이충시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른다. 작은 제갈량이 있으면 공산군도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다. 후베이 우셩관(武勝關)에서 후난의 우링산맥(武陵山脈)까지 주전장이 될 것 같다. 지휘관들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아마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광시군의 모습

    정치위원인 뤄룽환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린비아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동북의 세월을 잊지 않았으며 특히 쓰핑 전투를 잊지 못하였다. 쓰핑에서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위엄에도 금이 갔다. 적수인 바이충시를 생각하면 눈에 힘줄이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4월, 선봉 병단을 먼저 출격시킨 후 린비아오는 핑진지역에서 4야전군 주력을 남하시키기 시작했다. 4야전군이 노도처럼 밀고 내려오자 바이충시는 린비아오가 설욕하러 온다고 느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바이충시를 가리켜 “창장 중하류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평한 적이 있었다. 적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장제스가 바이충시에게 화중 군정장관 자리에 임명하려 하였을 때 그는 견결히 거절하였다. 장제스가 다시 촉구하자 바이충시는 선결 조건을 내세웠다. “창강을 지키려면 화이지역(화이허와 유역 주변지역을 말한다.)를 수비해야 한다. 화중에는 1개 초비사령부를 두고 벙부에 총사령부를 두어야 한다. 화중 부대가 장화이(江淮: 창장과 화이허 유역) 지역에서 이동하며 공세적 방어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쉬저우에 초비사령부를 하나 더 세우고 류즈에게 책임을 맡겼다. 바이충시의 주장은 이도 저도 아닌 결말이 났다.

    “화중 병력을 그렇게 분할하여 사용하면 필패할 것이다.” 바이충시는 부임을 거절하고 상하이에 머물렀다. 사실상 피신이었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의 오랜 벗이자 광시계 중진인 황샤오(黄紹)를 보내어 바이충시를 달랬다. 황을 만난 바이충시는 짜증을 냈다. “누가 보냈나?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길 바라나?” 황샤오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당신이 난징에서 국방부장을 하는 건 조롱 속에 갇힌 새가 되는 거요. 지금 장 위원장이 문을 열고 놓아 보냈는데 좋은 일 아니오? 이제 당신은 높이 날 수 있소. 장차 기회가 되면 형세를 제어할 수 있소. 장이 하야하게 되면 더공(리쫑런의 자가 더린德隣이어서 더공德公이라고 불렀다.)이 나설 수 밖에 없지 않소? 그때 당신이 크게 힘을 써야 하지 않겠소?” 바이충시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바로 짐을 싸서 임지로 갔다. 그는 화중 군정장관 공서를 9성이 사통팔달하는 우한으로 옮겼다. 바이충시가 화중에 있는 동안 따베산의 류보청과 덩샤오핑 부대들은 죽을 고생을 하였다. 차근 차근 포위해 들어오는 바이충시 부대에 병사들의 반 가까이를 잃었으며 두 사람이 병력을 나누어 일부를 따베산 지역밖으로 후퇴하기도 하였다.

    1949년 1월 26일, 장제스가 은퇴하여 고향인 시코우로 갔다. 리쫑런이 총통 대리가 되어 국면을 주재하였다. 바이충시는 군사적으로 시간을 벌어 해방군의 도강을 막고자 하였다. 그래서 리쫑런에게 평화회담을 열 것을 건의하였다. 4월 6일, 바이충시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난징에 왔다. 그는 리쫑런에게 물었다. “도강에 대하여 공산당이 결정한 것이 있소?” 하고 물었다. 리쫑런은 “태도가 완강하네. 정치적 해결을 해도 강을 건너고 군사적 해결이면 당연히 건너겠다고 하네.”하였다. 리쫑런은 신문 한 부를 바이충시에게 건네었다. 윗면에 린비아오가 핑진전선 사령원 명의로 발표한 장문의 담화문이 실려 있었다.

    린비아오의 담화문은 내전이 일어나던 정황을 거론하였다. 내전의 책임이 국민당에게 있다는 것, 지금 와서 거짓된 평화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창장을 경계로 남북조를 꾀하고 있다는 것, 마오쩌둥의 8개항을 즉시 수락하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무력을 통해 해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줄이면 “투항하지 않으면 섬멸이 있을 뿐”이라는 강경한 내용이었다.

    바이충시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들이 강을 건너겠다면 싸울 뿐, 무슨 회담을 한다는 말이오.” 바이충시는 회담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투항하기 싫으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정력을 다해 화중 방어계획을 짰다. 제2의 쓰핑전투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도 1946년과 1949년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오늘의 린비아오는 백만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한번 싸움에서 크게 깨뜨려 판을 흔들어야 했다. 바이충시는 오직 광시계에서 답을 찾았다. 자신의 기반과 실력을 유지하여 중남 및 화남지역의 반벽강산을 지키고자 하였다.

    1949년 5월, 창장 하류를 건넌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과 제3야전군이 난징 및 강남으로 짓쳐 내려왔다. 바이충시 집단군은 6개군이 창장 중류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창장의 천험을 이용하여 4야전군의 도강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4야전군 선봉병단과 장한(江漢)·통바이(桐柏) 군구 부대가 우한 동쪽 황스강(黄石港)에서 국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제12병단 사령원 샤오징광(肖勁光)이 공격부대들을 통일 지휘하였다. 도강한 부대들은 어청(鄂城), 따예(大冶), 양신(陽新) 등을 점령하고 광시군 후방으로 크게 우회하려 하였다. 해방군 득의의 포위 섬멸작전이었다. 이를 간파한 바이충시는 부대들을 우한에서 철수시켜 이창(宜昌)과 샤스(沙市)를 고수하게 하였다.

    해방군이 우한에서 장시성 주장까지 도강에 성공한 뒤 바이충시는 이창과 샤스에 방어선을 쳤다. 상악변구(湘鄂邊區: 후난성과 후베이성 경계지역을 관할) 수정공서 주임인 쑹시롄 휘하 4개군과 지방부대 등 10만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7월 6일, 4야전군 13병단 사령원 청즈화(程子華)가 지휘하는 25만 병력이 길을 나누어 위엔안(遠安), 당양(當陽)으로 밀고 내려왔다. 쑹시롄은 섬멸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후난과 후베이 두성 서부지역으로 후퇴하였다. 4야전군 주력은 이창과 샤스를 점령하고 강을 건너 후난성 창더(常德)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내전 후반기에 이르러 공산당은 전략적 추격을 시작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와 마오쩌둥은 국군의 도주를 막기 위해 대우회 작전을 채택하였다. 국군의 후방으로 우회하여 먼저 종심 (군사용어. 병력이 앞뒤로 늘어선 대형ㆍ진지ㆍ방어 지대 따위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를 이르던 말)을 포위한 뒤 비로소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해방군은 국군이 상대적으로 약한 중남 지역에서 바이충시 집단군을 우선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이완이나 연안 도서로 향하는 해상쪽 퇴로를 차단하여야 하였다. 공산당은 바이충시 부대를 섬멸한 뒤 쓰촨지역으로 후퇴한 후쫑난 집단군 부대를 섬멸할 계획이었다. 공산당 중앙군사위는 18병단으로 하여금 국군 친링(秦岭) 방어선에 양공하여 쓰촨 진격태세를 보였다. 장제스가 쓰촨을 고수하게 한 뒤 중남 지역의 국군을 섬멸할 계산이었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에게 먼저 후난성 남부로 치고 들어가 헝저우(衡州) 남쪽에서 작전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광시 서부로 진격하여 작전한 다음 윈난에서 작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바이충시 집단군을 원거리로 우회하여 포위하라는 방침을 하달하였다.

    린비아오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작전 방침을 수긍하였다. 그래도 린비아오는 근거리 우회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양익으로 적을 비스듬히 우회하는 ‘전술적 소우회’ 작전이었다. 창장 도강과 이창, 샤스 점령은 모두 이런 구상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이충시 집단군 주력이 자꾸 물러서 포위할 수가 없었다. 린비아오는 이런 결과가 자신이 직접 전선에서 지휘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였다. 7월이 되자 린비아오는 후난과 장시성의 작전을 직접 지휘하였다.

    해방군이 난징과 우한을 점령한 뒤 바이충시는 우한에서 주장까지 방어하던 병력을 남쪽으로 후퇴하게 하였다. 7개군 15만 병력을 창사 북쪽의 웨양(岳陽) 주변 지역에 배치하여 해방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하였다. 린비아오는 5병단과 12병단, 잠시 자신의 지휘에 편성된 2야전군 4병단으로 후난 장시 전역(샹간전역이라고도 한다) 을 일으켰다. 대군이 잇따라 집결하는 사이 15병단을 출격시켜 펑신(奉新), 까오안(高安)을 습격하고 12병단으로 하여금 리링, 핑샹(萍鄕)으로 우회하게 하였다. 린비아오는 3로 대군을 7월 8일부터 주야로 진격하게 하였다. 바이충시 집단군 주력을 포위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4일후 바이충시는 린비아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바이충시는 즉시 전군에 후퇴명령을 내려 유현(攸縣), 차링(茶陵)지역으로 병력을 물렸다. 4야전군은 또다시 허탕을 쳤다.

    린비아오의 병사들은 헛고생만 실컷 하였다. 어느 종군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힘겨운 행군이었다. 남방의 여름은 찌는 듯 더웠고 비가 자주 왔다. 비가 오면 도로가 진흙탕이 되었다. 동북의 부대는 베이핑과 텐진을 해방한 뒤 즉시 남하하였다. 급속하게 전진하며 제대로 쉬지 못하여 피로가 가중되었다. 동북 병사들에게 그물같은 수로망과 산악지역 작전이 매우 생소하였다. 남방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고생하였다. 우비나 모기장이 지급되지 못해 환자가 속출하였다. 행군 도중 누워있는 수많은 간부 및 병사 환자들을 만났다. 병사들은 걷다가 고꾸라져 길가에 쓰러지기도 하였다. 동북의 병사들에게 남방의 기후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남방의 산악지역은 북방 병사들에게 더욱 낯설었다. 혹서, 기아, 질병, 피로 속에서 4야전군은 대군을 추격하였다. 병사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비전투원들도 수가 줄어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보통 중대마다 병자가 4분의 1에 이르렀다. 심각한 부대는 4분의 3이 병자인 경우도 있었다. 린비아오는 부득이 명령을 내려 추격을 멈추고 휴식하게 하였다.

    “또 달아났네.” 린비아오는 잔뜩 성이 났다. “중이 달아나도 절은 도망갈 수 없지요. 창사를 치면 됩니다.” 4야전군 제 2정치위원겸 화중군구 정치위원인 덩즈후이(鄧子灰)가 위로했다.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는 자

    5월에서 8월까지 4야전군은 우한과 창사 등 대도시를 점령하고 장쩐과 천밍런 등 2개 병단의 기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바이충시 집단군 주력을 붙잡아 결전을 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린비아오는 머리가 아팠다. 바이충시가 전투를 피하는데 대책이 별로 없었다. 광시군은 오랜 기간 산악지역과 하천에서 전투를 치러왔다. 병력은 적어도 기동성이 강하여 전술적으로 4야전군 주력과 결전을 피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베이징에 있던 마오쩌둥은 남방작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린비아오에게 전략방침을 써 전문으로 발송했다. 기나긴 전문에는 마오의 견해가 담겨 있었다. “바이충시 부대와 작전할 때는 차링이나 헝저우 남쪽 어느 지방, 혹은 취안저우(全州)나 구이린을 막론하고 근거리 포위를 하면 안된다. 원거리 우회로 포위해야 한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바이충시의 부대배치를 신경쓰지 말고 멀리 멀리 우회하라. 그의 후방을 점령하여 부득이하게 아군과 전투하게 해야 한다. 바이충시는 밑천이 적은 대신 기동성이 뛰어나며 아군과 작전하기를 꺼린다. 당신들은 바이충시 수십만 병력을 광시 구이린, 난닝, 류저우등으로 유인하여 섬멸해야 한다. 쿤밍까지 가서 섬멸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한마디는 린비아오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는 쓰핑의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작은 제갈량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먼저 적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적보다 먼저 예측해야 한다. 싸우고 싶을수록 싸우지 못할 것이다. 상대가 임기응변에 능한 바이충시이기 때문이다.” 바이충시도 린비아오의 동정에 예민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풀이 움직여도 영채를 뽑아 후퇴하는” 형국이었다.

    린비아오는 마오쩌둥의 전문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즉시 ‘바이충시 부대와의 작전에 관한 지시’를 발송하였다.

    1. 바이충시의 전략 의도는 방어하며 퇴각하여 실력을 보존하는 것이다. 미국의 원조와 국제형세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침은 공격으로 수비하는 것이다. 가짜 진을 곧잘 치며 허장성세를 사용한다. 아군의 전략방침은 상대와 전투하는 것이다. 전략적 우회로 퇴로를 차단한다. 주도권을 장악하여 적을 붙잡아두고 결전을 추구한다. 일거에 적을 섬멸토록 한다.

    2. 바이충시의 작전 특징은 전투력이 강한 광시계 직계군을 사용한다. 익숙한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아군의 정찰이나 경계가 소홀할 때 돌연 습격하거나 매복 포위공격을 한다. 퇴각할 때도 산악지형을 이용, 작은 무리로 분산하여 신속하게 후퇴한다. 아군의 특징인 기습작전을 익혔으며 분진합격도 익혀 사용한다. 조우전도 피하지 않으며 과감하게 습격하기도 한다. 아군은 정찰과 경계에 주의하고 적정이 불명할 때는 절대 경솔하게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군사가들의 지휘방식은 각자 달랐다. 제1야전군 지휘부는 언제라도 성질 급하고 다혈질인 펑더화이의 벽력같은 호통을 들을 가능성이 있었다. 지휘 인원과 참모들이 늘 긴장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2야전군 지휘부는 평화로웠다. 류보청, 덩샤오핑은 모두 능력이 출중한데다 함께 한 기간이 10여년이었다. 서로 잘 이해하였으며 참모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3야전군 총사령부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천이는 뼈있는 말이나 우스갯소리를 잘했다. 엄숙한 쑤위도 참지 못하고 웃고는 하였다. 가장 신비롭고 조용한 곳은 4야전군 지휘부였다. 종군기자 한사람이 계속 4야전군 지휘부와 만나기를 원하였다. 정작 만나고 나더니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기사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최고사령원을 보기 힘들다. 린비아오는 거의 문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밤낮으로 네 벽에 가득한 작전지도를 보며 지낸다. 수척한 얼굴로 침대겸 의자에 앉아 말없이 지도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한번 앉으면 온종일이다.”

    린비아오가 방에 칩거하는 데에는 신병도 원인이 되었다. 내전 4년 동안 그는 중요한 전역을 지휘할 때마다 날로 쇠약해졌다. 그는 중일전쟁 때 국군 병사의 오인으로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노획한 일본군 장교의 외투를 입었다가 적으로 오해받은 것이다. 소련까지 가서 치료했으나 상처가 계속 염증을 일으켰으며 중추신경도 쇠약하였다. 산하이관에 들어설 때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프에서 지냈다. 창장을 도하할 때는 말조차 탈 수 없었다. 담가에 실려 행군하고 겨우 지휘하였다. 중앙은 그에게 몇 번이나 휴양하라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복수심과 군인으로서 호승심이 그를 지탱하였다. 린비아오는 바이충시 부대를 깨끗하고 철저하게 해치울 생각이었다.

    바이충시, 칭수핑에서 린비아오군을 일격하다

    8월초, 4야전군 12병단과 13병단은 후난성 핑장(平江), 류양(瀏陽), 창더(常德) 등으로 진격했다. 동쪽과 서쪽에서 후난성 성도인 창사를 포위했다. 8월 4일, 국민당 창사 수정공서 주임 겸 후난성 정부 주석인 청첸과 국민당 제1병단 사령장관 천밍런이 7만명을 이끌고 기의를 선언했다. 창사 및 샹탄, 닝샹 등이 해방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바이충시는 기의를 막으려고 애를 썼으나 한번 기운 투항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창사의 수비병력이 기의를 하였는데 그곳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바이충시는 즉시 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기의한 국군 중 4만명을 움직여 남쪽으로 도주하게 하였다. 기의부대가 다시 배반하자 린비아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12병단의 40군과 46군, 49군 그리고 잠시 4야전군 지휘를 받게 된 2야전군 5병단 18군에게 기의부대와 바이충시 집단군 주력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린비아오는 4야전군 병력을 삼로로 나누었다. 동,중,서 등 삼로 대군은 남쪽으로 진격했다. 시험공격을 통해 바이충시 주력 병단의 위치를 찾았다. 린비아오는 6개군 19개 사단으로 편성한 중로군을 직접 지휘했다. 그가 기습작전을 지시하자 49군의 진격속도는 놀랄 만하였다. 인접 부대보다 하루 이틀 거리를 앞질러 중로군의 선봉부대가 되었다.

    이것은 린비아오의 계산된 모략이었다. 일부러 외로운 군대가 깊이 들어가도록 하여 바이충시의 주력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모험이기도 했는데 49군은 이미 피로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49군은 창장을 도하한 이래 줄곧 바이충시 부대를 쫓아왔다. 병사들은 동북 출신이어서 남방에 익숙하지 않았다. 더위와 풍토,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데 후속 부대와도 떨어졌다. 바이충시의 덫에 걸리기 좋은 형국이었다.

    칭수핑 전투 구지

    칭수핑 전투는 해방군 49군이 달아난 기의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49군 군단장 종웨이는 과감하기로 유명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동북의 3차 쑹화장 남부 공세 때 카오산툰(靠山屯) 전투에서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린비아오는 종웨이의 전과에 만족하였다. 얼마 후 린비아오는 종웨이를 사단장에서 12종대 사령원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12종대는 관내에 들어와 49군으로 개칭되었다. 관내에 들어온 뒤 종웨이는 거듭 전과를 올렸다. 이샤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샤스에서 창장을 도하하여 이양(益陽)과 펑현(澧縣)을 함락하였다. 도주한 국군을 쫓을 때 린비아오와 덩즈후이는 각 부대에 전문으로 통보했다.

    “49군은 전력으로 남진해야 한다. 146사단은 닝샹으로 전진하고 147사단은 바오칭 방향으로 전진하라. 도주한 반적들을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라. 반적들이 계속 도주하면 추격하여 섬멸하라.”

    49군 146사단은 닝샹으로 진격했다. 전위부대인 436연대는 주력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공성을 시작했다. 포격으로 맹렬하게 엄호하는 가운데 첨도 중대와 2대대 5중대가 성 북쪽에서 돌파하여 현위문과 국군 지휘부로 곧바로 치고 들어갔다. 국군은 소수가 남문으로 도주한 외에 4100여명이 섬멸당했다. 닝샹을 함락한 뒤 146사단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145사단과 샹샹- 바오칭간 공로를 통해 도주한 국군을 추격했다.

    포격하는 해방군 부대

    바이충시는 린비아오의 교만함에 일침을 박고자 하였다. 그는 병단 사령과 군단장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그는 형세를 분석하기를 “린비아오가 크게 자만하고 있다. 큰 싸움에 계속 이기더니 어려움을 다 잊은 모양이다. 그는 아군이 연패하여 손을 쓸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군의 헝바오 방어선을 지나 헝양을 직접 치고 싶어한다. 아군 주력을 섬멸한 후 후난과 광시 경계로 진출하여 우리 근거지를 끝장내려고 한다. 린비아오는 나 바이충시와 우리 20만 광시 자제들을 깔보고 있다. 우리 칭수핑(青树坪)에 반마색(絆馬索 :옛날 전쟁할 때 적의 말이 걸려 넘어지도록 둘러친 굵은 새끼나 밧줄)을 걸어 모조리 쓰러뜨리자.”

    칭수핑은 칭수이핑(青水平)이라고도 한다. 후난성 샹샹현 서남쪽 백사십리 거리에 있는 산중에 있다. 후난 중부에서 남부로 가는 길목이었다. 바이충시는 우선 샹샹에서 크게 후퇴하는 모양을 꾸민 뒤 이미 후퇴한 광시군 3병단을 도로 북진시켰다. 칭수핑에 매복 진지를 만든 것이다. 바이충시는 전선 지휘권을 3병단 사령인 장진(張淦)에게 주고 당부했다. “장 사령관, 빨리 (快), 사납게(猛), 모질게(狠) 이 세 마디를 염두에 두게. 예전 쓰핑 혈전 때 린비아오를 제압한 요결일세.”

    리쫑런과 함께 한 장진

    당시 형세는 확실히 바이충시군에 유리했다. 49군은 환자가 많았다. 4야전군 부사령원 겸 12병단 사령원이던 샤오징광은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49군은 6월말 후베이 텐먼(天門)에서 출발했다. 두 달이 넘는 동안 환자가 1만 3천명이 넘었다. 그중 사망자가 130여명이었으며 병원 치료한 사람이 2,700여명이었다. 부대의 마필도 200필 넘게 죽었다. 계속 전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8월 15일, 해방군은 용펑을 점령하고 광시군 1개 연대를 격퇴하였다. 이때 바이충시는 광시군 최정예인 7군을 칭수핑으로 이동시켰다. 해방군 일부를 섬멸하여 추격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린비아오는 이를 알고 49군에 전문을 보냈다.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맹목적으로 전진하지 마라.”

    그러나 146사단은 도주한 국군이 바로 앞에 있다고 인식하고 49군 지휘부에 계속 추격을 건의했다. 종웨이는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내고 145사단에 바짝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날 저녁 전위연대 1대대는 제링(界岭)에 이르렀다. 1대대는 적을 경시해서 양쪽 산악지역에 수색분대를 보내지 않았다. 대대가 산지를 통과할 때 국군이 양쪽 산에서 사격을 가해 왔다. 해방군은 즉시 반격에 나섰다.

    10분 동안 격전이 벌어져 해방군은 5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 부대는 달아났다. 해방군 대대는 제링과 주위 산악지역을 점령했다. 그날 저녁 국군 대부대가 공격해 왔다. 해방군 1대대는 제링에서 후퇴하여 사단 주력과 함께 주위 마을에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했다.

    보고를 받은 4야전군 참모들이 대경실색하였으나 린비아오는 태연하였다. 그는 누런 콩을 먹으며 한마디 했다. “싸움 좋아하는 종웨이가 그 안에 있다. 49군은 깨뜨릴 수 없는 구리 완두가 될 것이다.” 린비아오는 늘 누런 콩을 볶아서 먹었다. 누런 콩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늘 콩을 먹더니 49군을 완두콩에 비유한 것이다.

    8월 16일, 145사단도 칭수핑 지역에 도착했다. 17일이 되자 국군 3개 사단이 146사단을 집게형으로 포위하였다. 탱크, 대포와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공격을 가해 왔다. 146사단은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했다. 병력이 우세한 국군이 순번을 정해 교대로 공격하여 치열하게 전투했다. 한밤중이 되자 응원군인 해방군 145사단이 접근해 왔다. 해방군은 서로 엄호하며 전장을 벗어났다. 이 전투에서 146사단은 48시간 동안 격전을 치렀다. 국군 사상자가 553명에 이르렀으나 해방군 손실은 두 개 사단 합해 3,3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해방군이 완패한 전투였다. 칭수핑 전투에서 린비아오가 미끼를 던진 것이라느니 책략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결과론에 가깝다. 그후의 헝바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므로 칭수핑에서의 실패가 가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이충시는 칭수핑 전투로 승세를 타고 진격하던 해방군에 강한 쐐기를 박았다. 국민당 매체들은 이 전투를 ‘칭수핑 대첩’이라고 대서특필하며 “쉬벙회전 뒤 국군 최대의 승리”라고 썼다. 그리고 “싸우면 승리한다는 린비아오의 논조를 깨뜨렸다”고 하였다. 쉬벙회전은 화이하이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쉬저우와 벙부 부근에서 벌어졌다 하여 타이완에서는 붙인 이름이다.

    바이충시는 헝양에서 ‘승첩대회’를 열고 노획한 무기를 전시하였다. 국군의 사기를 고무시키려는 것이었다. 칭수핑 전투에서 패하자 마오쩌둥은 화가 났다. 그는 즉시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냈다. “바이충시는 중국에서 가장 교활한 군벌이다.” 마오는 린비아오를 책망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린비아오가 거둔 대승에 비하면 가벼운 패배였다. 이 전투는 양쪽의 심리에 변화를 가져왔다. 중공은 이 전투로 적을 경시하는 심리를 일소했다. 국민당 쪽은 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바이충시는 이제 해방군과 한번 싸울만 하다고 생각했다. 양쪽의 심리는 다음 전투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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