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빈 이후의 코빈주의②
    신노동당의 퇴행과 좌파의 새 흐름
    [적녹칼럼] '현대화전략'의 우경화와 코빈의 등장
        2021년 01월 21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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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빈 이후의 코빈주의, 짧은 영국 정치 이야기①

    대처리즘의 시대로

    1970년대 초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의 보수당 정부에서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U턴으로 알려진)는 몽펠르렝(Mont Pelerin)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몽페르렝협회(Mont Pelerin Society)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노예로의 길』을 핸드백에 넣고 다녔다는, U턴을 모르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보수당의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타협을 가능하게 했던 장기호황이 끝나가고 경제적 위기가 닥친다. 복지국가의 아이들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질서를 갈망했다. 신좌파와 신사회운동이 그들의 목소리였다.

    마거릿 대처 보수당 총리

    노동당 정부(1974-79)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신우파와 급진적 신좌파 사이에 끼어 있게 된다. 그들의 헌정주의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사회적 토대가 침식되어 시효가 만료되고 있었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를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1976년 찾아온 외환위기는 노동당 정부의 시험대였다. 노동당 정부는 강한 파운드스털링(영국 공식통화)을 지키기 위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고, 이것은 대처 집권 이전, 노동당에 의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결과하게 된다.

    노동당 정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멸과 저항, 1978-9년 불만의 겨울을 거쳐 권력은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간다. 영국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될 결정적인 정권교체였다. 대처리즘(Thatcherism)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노동당은 좌파와 우파 대결의 전쟁터가 된다. 의회노동당과 당권파들의 선택은 좌파적 성향이지만 토니 벤보다는 온건한 CND운동의 베테랑 마이클 풋(Michael Foot)을 새로운 당대표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당 외곽의 좌파적 압력의 물결을 거스르지는 않지만 예의 그 헌정주의를 지킬 수 있는 보루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논란은 계속되었다. 좌파의 목소리는 커졌고 로이 젠킨스(Roy Jenkins)를 비롯한 4인방(Gang of Four)이 당의 좌경화를 비난하면서 탈당한다. 그들은 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1981년 3월의 일이었다. 이제 대결은 부대표 선거에 집중되었다. 당권파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벤은 부대표 선거운동을 강행한다. 상대는 대니스 힐리(Denis Healey). 벤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0.4퍼센트 차이로 패배했다. 그해 9월이었다.

    벤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의 선거강령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마거릿 대처의 공격적인 탈산업화와 금융화, 자유화 정책은 경기 위축을 불러왔고 실업자를 양산했다. 노동당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포클랜드전쟁의 군사적 모험은 상황을 급변시켰다.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강령은 급진적이었지만 당권파와 의회노동당은 미적지근했고 마이클 풋은 당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진 영국의 제국주의적 향수를 자극하는 군사적 모험은 모두의 예상을 깬 보수당의 압승을 낳았다. 79년의 과반 +43에서 +144로 의석을 늘리게 된다. 대처주의가 정치적 토대를 얻게 된 것이다.

    현대화라는 이름의 우경화

    좌파는 정치적 무능을 자책한다. 지식인 그룹에서는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이론을 적용해 대처리즘을 헤게모니 전략으로 간주하고 좌파는 헤게모니전략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Marxism Today』에 발표한 ‘마음을 움직이는 거대한 우파 쇼’(The Great Moving Right Show)는 그런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런데 노동당의 자기비판은 좌파적 혁신, 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대항헤게모니 전략의 모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3년 선거강령을 ‘역사상 가장 긴 자살노트’(the longest suicide note in history)라고 비난하면서 좌파 숙청을 추진한다. 그리고 당권파는 닐 키녹(Neil Kinnock)을 당대표로 선출하고 그들이 ‘현대화’(modernization)이라고 부르는 노선을 선택한다. 헌정주의와 노동계급 열망의 모순에 의해 종종 이념적 전쟁터가 되는 당에서 모순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노동조합과 당 바깥 운동의 열망과 압력으로부터 의회노동당의 자율성을 제도화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당대표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러한 당의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키녹의 노동당은 1987년 선거에서도 패배한다. 대처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신념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 인두세(poll tax) 도입 강행으로 실각한 후에 치러진 1992년 선거에서도 패배한다. 불행히도 키녹 리더십 아래에서의 두 번의 패배는 현대화 전략보다 훨씬 우경화되고 의회노동당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는 선거정당으로 이행할 구실이 되어 준다.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존 스미스(John Smith)였다.

    카리스마 있었던 정치인 스미스는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2년 만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자리를 두고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 경쟁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브라운에게 역사상 가장 강력한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을 약속하면서 블레어가 당권을 획득한다. 키녹에서 시작되어 스미스를 거쳐 블레어에서 완성된 현대화 전략은 이제 ‘신노동당’(New Labour)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80년대 초까지 사회주의 강력을 채택했던 정당이 이제 대서양 건너 민주당의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신자유주의의 추진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블레어(왼쪽)와 브라운

    현대화 전략 추진과 겹쳐지는 1980년대 초 좌파는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런던, 웨스트미들랜즈, 뉴캐슬, 셰필드 등에서 노동당 좌파가 지방자치정부 차원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실험을 추진했다. 이러한 시도는 지방자치체 사회주의(municipal socialism)라고 불렸다. 키녹의 노동당은 지역에서의 좌파 반란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의 여인의 대응은 강력했다. 대처는 1984~5년에 걸친 광부노조의 파업마저도 잔인하게 짓밟았다. 언론은 토니 벤과 광부노조 위원장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 그리고 런던의 반란을 주도했던 켄 리빙스턴(Ken Livingstone)을 ‘정신 나간 좌파’(looney left)로 악마화했다. 1986년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 의회를 폐지하는 대처의 강수로 끝을 맺게 되는 지방자치체 사회주의는 노동당 좌파에게는 긴 어두운 터널의 시작이었다.

    신노동당의 신자유주의와 정체성 상실

    1997년 선거승리에서 시작되어 2010년 고든 브라운 정부의 선거패배에서 막을 내리는 신노동당 정부의 역사는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토니 블레어는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했고 노동당의 이름으로 대처리즘을 완성했다. 책임과 의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당과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보수당 시절보다 사회전체의 시장화는 가속화되었다. 다시 한번 그람시의 개념을 차용해서 신자유주의적 역사블록(neo-liberal historic bloc)은 블레어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정보를 왜곡하고 문서를 조작하면서까지 기꺼이 아들 조지 부시의 군사적 모험에 가담했다. ‘부시의 푸들’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노동당의 경제정책은 부동산과 금융시장 붐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금융적 팽창은 언젠가 터지게 되어 이었다. 2007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2008년 본격화된 금융위기가 영국을 강타했다. 브라운 정부는 도산하는 은행을 국유화했고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를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역행하는 정부 개입은 정책기조의 전환을 의미하지 않았다. 2010년 들어선 보수당-자유민주당 정권이 잘 보여준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긴축’이라는 새로운 핑계거리를 찾았고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더욱 노골적으로 계급적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2010년 선거에서의 패배는 노동당에게 위기였다. 당의 좌파 성향 당원들은 2003년 걸프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당을 떠났다. 녹색당으로 당적을 옮기거나 무당파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새로운 당원이 충원될 리가 없었다. 블레어-브라운의 신노동당 노선은 긴축과 이에 동반되는 양극화 시대에 더 이상 호소력이 없었다. 사회주의적 정체성이 희미해진 노동당은 자유민주당의 도전까지 받아야 했다. 노동당의 ‘대테러전쟁’은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했으며 이를 비판했던 자유민주당이 노동당보다 ‘진보적’으로 비춰지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자유민주당은 2010년 보수당과의 연정에서 곧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자유민주당은 긴축에 앞장선다.)

    1980년 마이클 풋을 당대표로 세웠듯이 노동당은 좌파로 분류되는 에드 밀리반드(Ed Miliband)를 위기를 타개할 적임자로 선택한다. 신노동당의 실패는 곧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당내외의 좌파그룹이 형성될 수 있는 새로운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좌파적 흐름은 의원단 내에서의 영향력을 미치는 데는 한계를 가졌다. 실제로 1970-80년대에 비교하면 강력한 힘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보수당-노동당 정부 모두에서 심각해진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 그리고 긴축은 저항의 씨앗이 되었다. 반-긴축(anti-austerity)이 이러한 경향을 묶어주었다. 불만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당권파들에게 ‘빨갱이 에드’(red-Ed)라고 불리던 밀리반드는 다목적용이었었다. 풋이 그랬던 것처럼 좌파적 비판을 무마하고 당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랬다. 당권파들에게는 불행히도 밀리반드는 선거패배도 풋의 전철을 밟는다.

    밀리반드의 노동당은 2015년 총선에서 다시 패배한다. 하지만 아래로부터 표출되고 있었던 긴축에 대한 저항은 노동당의 패배와 상관없이 축적되고 있었다. 어쩌면 총선 패배는 이러한 운동과는 무관한 ‘노동당의 일’이었을 뿐이었을 수도 있었다. 노동당은 이미 불만이 정치적 목소리로 전환되는 통로이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코빈주의 사회적 배경

    이제 다시 민주주의 한계로 돌아올 수 있다. 노동당의 역사는 트럼프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되었던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였다.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대표성마저도 사라졌다. 거꾸로 말하면 매우 효율적으로 감추어졌던 ‘비대표성’이 가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가 노골적인 계급 착취를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여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나게 했던 바로 그 시대는 조직화된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시장을 유연함으로써 불만이 정치적으로 결집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도 갉아먹은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불모는 신노동당이 보여준 것처럼 중도좌파 정당의 우경화를 동반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불만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권력의 카르텔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조직운동의 단절와 좌파정당의 부재라는 조건에서 축적된 사회적 불만은 극우적 선동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성차별적 혐오가 정치의 원료가 된다. 바로 이런 조건이 민주주의의 한계를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착각하게 한다. 미국의 트럼프,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르 (Jair Bolsonaro), 영국의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같은 극우정치인의 돌발적인 행동과 선동은 민주주의적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로 간주되면서 정작 이러한 ‘예외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는 둔감해지는 것이다.

    2015년 당대표 경선에서의 제레미 코빈. 박스 안은 에드 밀리반드

    2015년 에드 밀리반드의 뒤를 잇는 노동당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제레미 코빈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민주주의의 한계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미 가시화되고 있었던 극우적 길의 반대편에서 좌파적 정치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당대표 코빈이 대변한 사회주의적 노선의 부활은 블레어-브라운 시대에 급격히 줄어들었던 당원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새로운 당원들 특히 젊은 당원들의 코빈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기성정치권, 언론, 그리고 노동당 당권파들은 당혹했다.

    하지만 노동당 당권파들과 기성정치세력은 이때만 해도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제든지, 기회만 주어지면 코빈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정말 그런 기회가 왔다. 2016년 유럽연합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제기된 당대표에 대한 불신임은 1년 만에 대표 선거를 다시 치르게 했다.

    그런데 결과는 당권파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코빈의 인기를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코빈은 두 번째 당대표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당권을 얻게 된다. 코빈의 미미한 당내 영향력 때문에 그림자 내각에 포진시킬 수밖에 없었던 우파정치인들이 불신임의 표시로 스스로 사퇴해주었으니 이 또한 운신의 폭을 넓혀 주었다. 당권파들은 당내 정치의 역학관계의 풍향에만 관심이 있었지 시대적 흐름을 읽고 역사적 책무를 자각할 만큼의 역량을 갖고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계속>

    필자소개
    교수. 제주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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