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장 보궐선거,
    연단의 여성을 상상하며
    [서울시 이야기] 어떤 불온한 상상
        2020년 12월 30일 01: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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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연단에 혼자 서있지 않다…내 주위에 목소리, 수백 개의 목소리가 있고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 소감이다. 그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살아남은 여성 200여 명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전쟁은 여자..>은 남자들이 남긴 공훈과 승리의 전쟁 이야기, 전쟁의 민낯. 그런 전쟁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전장에서 사람을 보고, 일상을 느끼고, 평범한 것에 주목하며 공포와 절망, 시체가 널브러진 거리의 끔찍하고 가엾고 어린 병사, 피아 구분이 없는 폐허를 여성의 눈으로 증언한다.

    독자인 ‘나’는 책 제목의 여성을 결코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 책이 가진 의미는 작가가 목소리 수집을 위해 선택한 주체가 누구였느냐 어떤 인간이었느냐에 있다. 제목만 단순히 보면 여기서의 ‘여자’는 마치 전쟁의 반대 축에 있는 것이냐 반문할 수 있다. 이에 작가는 ‘여성’이라는 타자성에 주목하고 있다. “위대한 조국전쟁의 신화” “공훈과 무용담”을 지우고 대의명분에 가려져 죽어간 모든 생명과 고통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여성’ 다시 말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져온다.

    ‘여성적 재현’이란 무엇인가. 가령 우리는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승자와 패자와 점령의 역사로 상기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성’의 이데올로기는 마치 ‘역사’와 ‘일상’을 이항대립처럼 놓고 역사라는 남성의 영역과 일상이라는 여성의 영역을 구분 짓는 방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조안 스콧은 가부장제 질서는 ‘남성’을 보편성의 자리에 두기 위해 ‘여성’이라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러한 여성성의 이데올로기는 공적 영역에 대한 여성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과정 속에 구성된 것이며, 여성의 자아를 축소하고 남성을 대리 보충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가둬온 체제의 산물인 것이다. 때문에 간혹 여성주의 또한 공론의 장에서 남성의 승인과 인정 속에 이루어졌으며, 운동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전하기 전, 조직보위를 염두해야 하는 난점에 빠지곤 했다. 혹은 여성의 주장이 “자신들의 몫과 목소리”를 위한 인정투쟁의 문제로 치부되곤 했다.

    서울시청(사진=위키백과)

    안철수는 “반드시 승리하여 정권의 폭주를 막겠다 ”라고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 우상호도 “문재인 정부 성공을 위해 출마”한다고 했다. 기관장의 성비위 문제로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를 남성 정치인들의 대선 디딤돌, 자기정치 갱신 코스와 레벨업의 무대로 조성하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보궐선거는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수순으로서 이른바 ‘탈-정치’로 포장된 주목 받기 위한 경쟁의 장으로 전락했다. 기실 ‘퍼스트레이디’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여성은 여전히 대통령의 옆자리를 보좌해 줄 보충물로 가부장적 리더십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2021년 4월 7일 치러질 서울, 부산시장 보궐선거에는 여성 후보의 출현이 필요하다. 단순히 수적 균형이나 유리천장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진보정당에서 ‘여성’ 후보의 필요성은 단순히 성별화된 정체성을 자격조건으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집단으로서의 여성, 여성 전체의 삶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후보, 정치권에 즐비한 ‘아버지의 형제들’이 형성해온 위계적 조직문화를 타파하고 보다 공동체적이고 비위계적이며 민주적 서울시를 만들어낼 상징으로서의 ‘여성 후보’의 출현이 기다려진다는 뜻이다.

    시민 스스로 통치자이자 피통치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시장, 한국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 가부장 문화에 파열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더 이상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할 남성리더의 영웅적 출현이 아니라, 결국 영웅은 없다고 선언할 후보, ‘아래로부터의 변화’라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시정 운영의 철학을 세운 후보가 나서야 할 때이다.

    코로나19, 약자의 희생을 재물 삼아 지탱하고 있는 서울시의 안녕에 저항하고, 시대의 지형을 바꾸자고 외치는 시장이 필요하다. 권력교체, 경기 활성화, 부동산이라는 소수의 경제적 자유를 수호하며 체제의 사다리를 세우는데 일조한 남성화된 여성이 아니라 젠더적, 계급적 인종적 다양성을 수평적 연대로 만들기 위해 가치와 철학을 담지한 인물이어야 한다.

    휘황한 시청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고, 후미진 골목과 낙후된 곳, 더없이 부박하고 한없이 취약한 곳에서 시정을 펼치는 그런 여성후보, 천만 시민의 눈물을 머금고 연단에 선 진보정당의 존재감 있는 여성 후보를 나는 상상한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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