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이후의 사회,
    어디로 어떻게 이행할까①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코로나 대안
        2020년 10월 22일 01: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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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 가을호에 게재된 한지원 씨의 “코로나 19 이후의 사회…어디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를 동의를 얻어 3차례 나눠 게재한다. 1회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 코로나 대안들’ 2회 ‘계급과 사회의 위기’ 3회 ‘이행의 문제 : 봉건제 변혁의 시사점’을 싣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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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어가며

    포스트-코로나 사회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진다. 시민들이 체제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갑게 얼어버린 실물 경제와 달리 스스로 뜨겁게 달궈진 주식시장, 이 와중에도 국민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인들, 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에도 도리어 커지는 국가 간 분쟁. 우리는 시장과 정치가 동시에 실패하는 역사적 과정을 이렇게 경험하는 중이다.

    본 글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와 이행에 대해 여러 쟁점을 검토한다.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코로나 대안들의 타당성, 사회의 위기가 가지는 의미,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이행이었던 봉건제 변혁이 오늘날에 주는 시사점, 대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현재적 쟁점 등을 살펴볼 것이다.

    2.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코로나 대안들

    4차 산업혁명론의 코로나 버전이라 할 언택트 시대론,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환경보호로 설정하는 그린뉴딜, 재난지원금을 계기로 목소리가 커진 기본소득론, 한계기업을 모두 국유화하자는 고전적 사회주의론. 그야말로 백가쟁명식 대안 경쟁이 뜨겁다. 코로나19 위기가 여러 정치세력에 자신의 대안을 선전할 기회를 준 셈이 됐다.

    하지만, 이런 대안들은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다. 최근 유행하는 여러 대안들, 특히 경제와 관련된 대안들의 문제점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짧게 비판해보겠다.

    (1) 언택트 사회

    최근 언론에서 가장 많이 소개하는 포스트-코로나 담론은 ‘언택트 사회’이다. 언택트(Untact)는 ‘접촉하다’라는 의미의 ‘콘택트(contact)’와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언(un)’의 합성어다. 사람들이 직접 만나지 않는 비접촉 서비스의 확대를 의미하는데,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자동화, 유통, 금융, 교육, 운송 등에서의 무인화, 디지털화 확대가 언택트 사회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이런 변화는 지금까지 4차 산업혁명론의 사례로도 많이 소개됐던 것으로, 언택트 사회는 사실 4차 산업혁명론을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언택트 사회 혹은 4차 산업혁명 전망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언택트 기술이 생각만큼 수익성이 높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감염병 방역 과정에서야 불가피하게 언택트 기술이 사용되겠지만, 방역 이후에도 이 기술이 지속해서 확산하려면 수익성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를 바꿀 정도의 기술 확산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그 기술을 채택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공지능 자동화와 디지털 기술이 이윤율을 높인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로 아디다스는 몇 년 전에 제조업의 대표적 노동집약적 공장인 신발공장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자동화했는데, 수년째 수익성을 맞추지 못해 사치성 고가 신발 생산이나 시장 수요 조사 차원에서만 공장을 이용하는 실정이다. 언택트 유통업의 세계적 상징이라 할 아마존은 수익의 70%를 유통이 아니라 아마존웹서비스(서버 구축 및 데이터 판매)로 벌고 있다. 더구나 언택트 유통업은 배달 부분에서 오프라인 매장에 버금가는 노동력도 이용한다. 언택트 유통업은 수익성에서나 노동을 절약하는 부분에서나 여전히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없다.

    언택트 사회의 도래가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란 점은 자본투자 감소와 수익률 하락이 세계 경제의 대세란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대 내내 세계 경제는 자본축적 둔화와 이윤율 하락 추세가 강해졌다. 신기술이 전면적으로 확산하려면, 그 기술이 적당한 자본투자로 충분히 인건비를 줄이면서, 동시에 생산량을 증가시켜 새로 투자된 자본이 충분히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자를 자본생산성의 상승, 후자를 국민소득의 증가라고 보통 말하는데, 현재는 둘 다 그야말로 ‘꽝’인 상태다. 새로운 기술의 전면적 확산은커녕 장기불황이 대세란 이야기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이런 양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2) 그린뉴딜

    최근 진보진영의 대표적 대안 중 하나가 그린뉴딜 정책이다. 친환경 투자를 대대적으로 늘려, 환경보호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하자는 주장이다. 그린뉴딜은 미국 민주당 진보그룹에서 소개된 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박쥐 서식지 파괴와 같은 환경파괴와 무관치 않고, 코로나19 복구를 위해 정부 주도 투자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근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이란 이름으로 집권 후반기 핵심과제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의 대안으로써 그린뉴딜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뉴딜의 원조인 1930년대와 현재는 경제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무시한다. 1930년대 대공황은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가운데 경제 제도가 그 혁신을 따라가지 못해서 발생했다. 반면, 현재 경제 침체는 생산성 상승이 장기간 둔화한 가운데 코로나19라는 외부 충격 탓에 발생했다. 비유하자면 1930년대는 건강한 상태로 감염병에 걸린 것이었고, 현재는 기저질환을 앓다가 감염병에 걸린 것이다. 둘의 처방이 같을 수 없다.

    사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세계 경제는 장기불황이 예상됐던 상황이었다. 20세기 초가 인류사의 도약기였다면, 21세기 초는 인류사의 쇠퇴기라 할 수 있는 시기다. 2010년대는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후 가장 형편없는 성장을 기록한 시기였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뉴딜이 오늘날에도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당시 뉴딜은 느닷없이 끊어진 성장의 흐름을 다시 잇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현재는 이어야 할 이전의 성장이 아예 없다. 뉴딜이 작동할 조건이 아니란 것이다.

    둘째, 그린 투자의 성격 때문이다. 그린뉴딜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투자가 핵심이다. 하지만 코로나19 구제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상당한 재정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모험적 투자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친환경 에너지는 상당 기간 에너지 비용을 상승시킨다. 그런데 기업 이윤으로 생산이 조직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군다나 대불황에 버금가는 위기 속에서 이런 비용 상승을 감당하는 투자는 지속성을 확보할 수 없다. 참고로 1930년대 뉴딜은 “비용을 절감하는 생산성 혁신” 속에서 이뤄졌다. 자본주의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뉴딜을 어찌 보면 자본주의와 상극일 수도 있는 ‘그린’과 결합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3) 기본소득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이 한 차례 지급되자 기본소득 주창자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한 번 해봤으니, 아예 이를 상시화하자고 주장한다. 정부가 국민 모두에게,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정해진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 기본소득의 요체다. 이런 아이디어가 최근 주목을 받는 것은 4차 산업혁명론과도 관련이 깊다. 4차 산업혁명 주창자들은 하나같이 인공지능 기계의 확대로 일자리가 사라질 테니, 국민의 존엄을 위해 임금을 대체하는 새로운 소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런 기본소득 정책은 근거도, 방향도 잘못된 대안이다.

    우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본소득 정책은 기술변화가 초래할 미래를 지나치게 과장한다. 인공지능 발전으로 자동화가 확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산업 사회에서 인구 다수가 실업자인 상태로 산업혁명이 이뤄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기술발전은 노동을 절약(노동생산성 향상)하면서 동시에 노동을 증대(생산량 증가)해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예상하는 고실업 산업혁명 시대는 자본주의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20년 6월에 있었던 YTN의 기본소득 찬반 여론조사 결과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기본소득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이후 국민적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은 생산과 분리된 분배론이란 결정적 결함이 있다. 결과적으로 복지 축소로 이어지든, 아니면 재정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사진은 2020년 6월에 있었던 YTN의 기본소득 찬반 여론조사 결과이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은 생산과 소득의 관계를 무시한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기본소득은 분배만 생각하지 생산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경제이론에 미달하는 것이다.

    예로 신고전파는 소득을 생산에 대한 기여로 규정한다. 소득을 높이려면 생산에 더 많이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이 생산을 자극하는 유인책이 된다. 케인스주의는 생산적 투자를 자극할 소득을 이야기한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이 위험한 설비투자에 나서야 경제가 성장하는데, 정부는 기업이 설비투자에 집중하도록 금융소득을 규제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윤율 동역학을 통해 생산과 소득의 모순을 분석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이윤은 착취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착취가 줄면 투자가 줄고, 고용이 줄면, 노동자 소득이 감소한다. 소득을 얻기 위해 착취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처지이다. 이런 이론을 전제로, 신고전파는 생산성에 비례하는 소득을, 케인스주의는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소득을, 마르크스주의는 임금소득의 모순을 지양할 변혁을 내세운다.

    그런데 기본소득에는 어떤 생산이론도 없다. 오직 분배만 있다. 이러한 정책은 복지이론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복지이론은 노동시장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임금(사회보장 지출에서 사회보장 세입을 공제한 것) 제도를 설계한다. 독일처럼 낮은 시장임금과 높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고, 스웨덴처럼 높은 시장임금과 낮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금을 나눠주겠다고 한다. 분배의 대상과 방법만 있지, 시쳇말로 “소는 누가 키우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부가 실제로 기본소득을 원칙대로 실시한다면, 결국 세입 증가 없는 세출 증가라는 딜레마에 부딪혀 파산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이후 정부 부채가 급증한 상황을 감안하면, 기본소득은 더더욱 국가 경제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4) 국유화 계획경제

    거리두기 정책으로 한계기업이 속출하자, 선진국 모든 정부가 기업에 광범위한 지원을 시작했다. 선진국 모두에서 대출, 보증, 자본주입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이 사용 중이다. 규모도 국내총생산의 10~20%에 이를 정도로 크다. 이렇게 정부 지원이 확대되자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 정치세력은 이 기회에 국유화 계획경제로 나아가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유화 경제는 소련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증명된 것처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다. 법인기업 중심의 미국 자본주의에 뒤처졌거니와 평등과 자유라는 현대의 지향을 추구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미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쓴 바 있어, 여기서는 요점만 정리하겠다.

    우선, 국유화 계획경제는 정부의 실패를 교정할 방법이 없다. 시장의 민간기업은 이윤율에 반응해 생산과 투자를 조정하지만, 계획경제의 국유 기업은 생산과 투자가 효율적인지, 지속 가능한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국유 기업의 관리자와 노동자가 국민경제 전체를 조망하며 생산과 투자를 기민하게 조정할 유인이 없다면, 과잉투자와 노동 낭비를 방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국유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하며 막대한 부채로 중국 경제 전체에 부담이 되는 상황이나, 해외 경쟁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분식회계로 관리자와 노동자가 함께 이득을 보았던 산업은행 소유의 대우조선이 최근 사례이다. 국유화 계획경제의 전제조건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생산 현장에서 대안적 윤리와 동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를 당의 선동과 도덕적 책무로 해결하려다 실패했었다. 21세기의 국유화론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음으로, 국유화 계획경제에 적합한 정치체제는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정치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계획경제에서는 통일성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계획이 중구난방이거나 우왕좌왕하면 안 되니 말이다. 그런데 통일성에는 정부의 막강한 권력이, 그리고 일관성에는 계획 입안의 주체인 당의 독재가 필요하다. 소련이나 중국에서 전체주의 정부와 공산당 독재가 재생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계획경제에 적합한 정치체제가 전체주의 국가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국유화론은 정치체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자신들은 다르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회피할 뿐이다.

    (5) 소결

    포스트-코로나 담론의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 후반부터 이어지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이윤율 위기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 그린뉴딜, 기본소득 같은 대안들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몇 가지 기술혁신이나 정부 역할의 변화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부당하게 전제한다. 하지만 2010년대 이윤율이 반등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윤율 하락 속에서 언택트 기술 투자, 그린뉴딜, 기본소득은 기업과 정부의 부채만 늘릴 가능성이 크다. 둘째, 경제 법칙 또는 역사적 경험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경제를 분배 문제 또는 소득 재분배 문제로만 접근한 일종의 반(反)경제학이 이론적 기초이다. 국유화 계획경제는 소련의 실패를 우연한 일탈로 해석한, 역사에 대한 무지에 다름아니다.<계속>

    필자소개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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