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공, 평화회담 재개하다
    [국공내전-54]) 획강이치···장제스와 리쫑런, 강남 분할통치를 꿈꾸다
        2020년 09월 23일 02: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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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쫑런, 국공 간 평화회담을 제안하다

    1949년 1월 21일, 핑진전역이 끝나고 베이핑이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갈 때 장제스는 국민정부 총통직을 내려 놓았다. 그의 실제 거취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어쨌든 국민정부를 대표할 사람은 총통 대리인 리쫑런이었다. 리쫑런은 취임 다음날인 1월 22일 공산당이 제안한 ‘평화회담과 관련한 8개항의 조건’을 기초로 회담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건국할 방침을 정하고 민주와 자유를 위해 노력하자.”고 밝혔다. 리쫑런은 샤오리즈(邵力子)와 장즈중(張治中) 등 다섯 명을 국민정부 평화회담 대표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리쫑런의 이런 행동은 장제스의 묵인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리쫑런과 장제스는 적어도 평화회담을 여는 데에는 뜻이 일치하였다.

    공산당이 제안한 8개항은 장제스의 ‘원단연설’에 대한 반격이기도 하였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1일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할 용의가 있으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하야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장제스는 성명에서 “국민정부 헌법을 유지해야 하며, 국민정부의 법통과 국군을 인정해야 한다.”는 등 5개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원단연설’에 대응하여 1949년 1월 14일에 시국성명을 내고 ‘평화회담을 위한 8개항의 조건’을 발표하였다. “1. 전쟁범죄자는 처벌한다. 2.가짜 헌법은 폐지한다. 3.가짜 법통은 폐지한다. 4.민주원칙에 따라 모든 반동군대를 개편한다. 5.관료자본을 몰수한다. 6.토지제도를 개혁한다. 7.매국조약을 폐지한다. 8.반동분자가 참가하지 않는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연합 정부를 성립한다. 난징 국민당 반동정권 및 소속 각급 정부의 모든 권력을 접수한다.”

    공산당의 8개항 조건을 그린 만화

    마오쩌둥은 성명에서 “인민해방군은 빠른 시일 내에 국민당의 남은 반동 군대를 섬멸할 것이며 장제스는 이미 말로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신속히 끝내고,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며, 인민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장제스의 국민당은 물론 국민당 지방정부와 군사집단과 평화적 담판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산당은 “8항 조건이 중국 인민의 공의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해야 진정한 평화와 민주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이 시국성명을 내고 얼마 뒤 장제스가 하야하고 공산당의 상대는 총통 대리인 리쫑런으로 되었다. 리쫑런은 취임하자마자 “정부의 사업목표는 평화의 실현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중공이 제기한 8항 조건에 대하여 정부는 즉시 논의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장제스나 국민정부의 처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1937년에 장쉐량과 공산당이 주도하여 성사시켰던 2차 국공합작이나 1945년 충칭 평화회담 분위기에서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1937년의 국공합작은 공산당에게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 옌안에 고립된 공산당은 장제스의 대토벌에 직면하여 있었다. 그때 ‘시안사변’이라는 돌발적인 사건이 없었더라면 공산당은 다시 한 번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였을 것이다.

    ‘시안사건’은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방침에 반발한 장쉐량과 양후청의 ‘병간’ 사건을 가리킨다. ‘병간’이란 무력을 앞세워 간하는 것이니 장쉐량과 양후청은 장제스를 감금한 뒤 공산당과 합작을 요청했던 것이다. 쑹메이링이 난징에서 날아오고 저우언라이가 주선하여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장쉐량은 저우언라이 등의 만류를 무릅쓰고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가서 평생 연금당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1945년의 충칭 평화회담은 완전히 미국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에 민주적인 연립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미국대사 헐리나 특사로 파견된 마샬이 국공 양당의 싸움을 억지로 말리며 회담장에 국민당을 반강제로 끌어 앉혔다. 회담에서 득을 본 것은 공산당이었다. 전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공산당은 내전을 피해야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한때 평화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을 기대하며 병력감축을 한 일도 있었다. 1946년에는 해방구 수도를 옌안에서 장쑤성 화이인으로 이전할 계획까지 세운 일이 있었다. 평화회담은 합의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공산당 해방구의 처리, 병력 감축등 실질적인 문제에서 벽에 부딪혔다.

    공산당은 회담에 응하며 국내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끌고 갔다.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계속 판을 깨려는 것으로 비쳤으며 결국 합의내용을 깨뜨리고 본격 내전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공산당은 내전의 와중에서도 회담으로 계속 득을 보았다. 화중 해방구에서 공산당은 조정기간에 공격정보를 입수하여 조직적인 철수준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동북에서 국군이 승승장구할 무렵 동북 민주연군은 휴전협정을 통해 기사회생하였다. 쓰핑에서 하얼빈까지 밀린 린비아오 휘하의 동북 민주연군은 휴전으로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쑹화장까지 민주연군을 추격하던 두위밍 휘하의 국군은 눈앞에 적을 두고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내전을 확대하는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불만을 품고 원조를 중단하는가 하면 광시파를 움직여 장제스를 낙마시키기에 이르렀다.

    리쫑런, ‘획강이치(劃江而治)’를 구상하다

    1949년 2월 14일, 국민정부 총통 대리인 리쫑런은 샤오리즈를 위시한 16명의 평화회담 사절단을 베이핑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비행기를 타고 베이핑에 도착하였다. 회담대표들을 개인 자격으로 가게 한 것은 회담에 대한 중공 측의 태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개인자격이라고는 하지만 행정원에서 회담대표 파견을 결의했으며 리쫑런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당 회의에서도 회담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리쫑런과 장제스는 협정을 통해 공산당과 정권을 남북으로 나누어 갖고자 하였다. 즉 창장을 경계로 하여 통치하는 방안을 중국에서는 ‘획강이치(劃江而治)’라고 부른다. 그렇게 하여 성립된 대치상황을 ‘남북조 국면’이라고 하였다. 중국 역사에서는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예전에 동진은 진나라가 북쪽의 이민족들을 피해 창장 남쪽으로 피난하여 세운 왕조였다. 송나라도 금나라에 밀려 창장 남쪽에 남송을 세웠으며 항저우에 도읍을 정하였다. 리쫑런과 바이충시의 최대 목표는 창장 이남의 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여 궁극적으로 장제스의 권력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1949년 3월 상순, 리쫑런은 회담대표인 류페이(劉斐)와 회견하였다. 류페이(劉斐)는 국방부 군사고문으로 광시계 주축 중 한 명이었다. 리쫑런은 류페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의 주화론은 세 가지 유리한 조건이 있다. 전국 민중들이 평화를 원한다. 입법원 다수 위원도 평화를 주장하며 미국 대사 스튜어트도 미국이 우리의 평화방안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미국의 태도를 소련이나 중공이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류페이가 리쫑런에게 회담에 대한 복안을 물었다. 리쫑런은 내심을 털어 놓았다. “나는 ‘획강이치’를 생각한다. 공산당도 결국 만족할 것이다. 동남쪽 반벽강산(半壁江山)을 보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류페이는 회의를 나타내었다. “당신은 획강이치를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러자 리쫑런은 “당신은 안심하고 가서 담판에 임하라. 나에게 방법이 있다. 장제스를 넘어뜨리기만 하면 된다. 공산당이 저렇게 넓은 지역을 차지했는데 금방 소화가 안 될 것이다. 동남쪽을 확보할 수 있다면 기울어진 민주연합정부의 기초를 다시 세울 수 있다.”하고 대답했다.

    리쫑런과 바이충시는 담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군사적으로도 획강이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회담시기에 일체의 군사행동을 멈추고 3개월에서 6개월의 시간을 벌면 150만명에서 200만명까지 신병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병력면에서 우세한 국면을 만들면 해방군의 도강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우한 하류의 창장 이남 지역에 난징정부가 보유한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육군은 100만명이 있었고 공군과 해군은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신병을 계속 보충하기만 하면 총병력 300만 이상을 보유할 수 있었다. 리쫑런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질과 양에서 밀려 (국민정부가) 결전을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창장을 지킬 수는 있었다. 광시계 몇십만 정예가 창장 방어에 가세하면 공산당과 삼년이나 오년 정도는 대치할 수 있었다.”

    바이충시는 또 다른 광시계 회담대표인 황샤오홍(黄紹竑)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장 북안에 남겨둔 경비부대 외에는 모두 남안으로 후퇴하였다. 우리가 공군과 해군의 엄호 아래 창장에 의지한다면 공산군이 강을 건널 수 없을 것이다.”

    3월 31일 저녁, 리쫑런은 총통부에서 회담대표단을 위해 환송연을 베풀었다. 그 후 그는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창장 방어문제를 의논하였다. 회의에서 ‘징후항(京滬杭: 난징과 상하이, 항저우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경비사령관인 탕언보와 화중의 군정 책임자들이 각 부대에 창장을 엄히 방어하라고 명령하기로 하였다. 해군은 강을 따라 경계하기로 하였고 공군의 정찰과 교통 및 보급등 문제들을 정하였다. 그리고 참모총장인 구쭈통이 예비병단을 긴급히 편성하여 강 방어의 후속부대로 삼기로 하였다.

    밀사 류중룽(劉仲容), 마오쩌둥에게 ‘획강이치’를 제안하다

    개인자격을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샤오리즈 등은 난징 정부의 공식적인 사절단이었다. 공식적인 사절단으로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 리쫑런과 바이충시는 중공쪽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믿을만한 특사를 보내기로 하였다. 류중룽(劉仲龍)은 ‘시안사변’ 뒤 2차 국공합작 기간 동안 오랫동안 통일전선 업무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공산당 지도부와 친분과 신뢰관계가 있었다. 비밀리에 옌안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광시계가 신임하는 중공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었다. 1949년 3월초, 류중룽이 비밀리에 북상하려 할 때 바이충시는 그에게 중공의 속셈을 확인하고 ‘획강이치’의 의사를 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류중룽이 “마오쩌둥이 대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었다. 바이충시는 “국군 주력이 이미 섬멸 당했지만 강력한 공군과 수십척 군함을 가진 해군이 있소. 중공이 도강을 하고자 하면 손해를 입게 될 거요.” 하고 대답했다.

    베이핑 비행장에 도착한 난징쪽 대표단(앞줄)

    3월 하순, 류중룽은 베이핑에 도착하였다. 철도선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겨우 도착한 것이다. 그날 저녁 마오쩌둥은 샹산(香山)에 있는 솽칭(双清)별장에서 그를 만났다. 류중룽이 온 목적을 말하자 마오쩌둥이 웃음을 거두고 대답했다. “바이 선생이 우리에게 강을 건너지 말라고 하는데 그건 안되는 일이오.” 류중룽은 마오쩌둥을 설복시키려고 하였다. “바이 총사령은 당신들이 도강에 쓸 수 있는 병력이 60만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장은 자고로 천험의 방벽입니다. 국군이 육해공군으로 입체방어를 하면 당신들의 목선이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마오쩌둥이 대답했다. “60만이 아니고 100만이오. 그리고 민병 100만이 더 있소. 우리의 민병은 국민당의 민병과는 다르오. 전투력이 있어요.” 마오쩌둥은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강남의 광대한 인민들은 우리가 강을 건너기를 바라고 있소. 그때가 되면 공산당의 힘이 더 커질 거요. 이것은 바이 선생이 생각하지 못한 거요. 반동의 군사가는 지금껏 인민의 위대한 역량을 알지 못했어요.”

    4월 2일 저녁, 마오쩌둥은 다시 류중룽을 회견했다. 마오는 장즈중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담판대표들이 이미 창장 북안에 온 것을 이야기했다. 마오쩌둥은 류중룽이 난징에 돌아가 리쫑런과 바이충시에게 대세에 따를 것을 권하라고 하였다. “광시계 부대가 출격하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의 도강을 막지 않으면 우리도 그들에 대응하지 않겠소. 장래에 구체적인 협상을 기다리지요. 장제스 직계부대도 출격하지 않고 우리의 도강을 막지 않는다면 보장할 수 있습니다. 리쫑런 선생이 주가 되어 잠시 그들의 부대번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후 협상에 따라 처리하는 거지요.”

    마오쩌둥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바이충시 장군은 부대지휘를 좋아해요. 그의 광시계 부대는 얼마 안돼요. 십여만명 정도입니다. 장차 회담이 성공하여 중앙 인민정부가 국방군을 설립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계속 지휘를 맡길 것입니다. 그에게 30만 군대를 맡길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재능을 발휘해야 국가에도 좋지 않겠소? 바이 장군이 우리보고 강을 건너지 말라고 하면 그건 안됩니다. 우리가 강을 건너면 그는 고립되므로 창사(長沙)로 물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시로 물러날 것이오. 우리 군자협정을 합시다. 바이충시가 출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삼년 동안은 광시로 들어가지 않겠소.”

    저우언라이도 류중룽에게 권했다. “인민혁명은 전 중국에서 빠르게 승리할 겁니다. 인민해방군은 곧 창장 이남으로 밀고 내려갑니다. 리쫑런, 바이충시 두 분에게 이야기하세요. 국공 쌍방의 담판은 이미 시작되었소. 그들이 협정에 서명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강을 건넙니다. 그들이 우리의 도강에 동의하면 무엇이든 대화할 수 있어요. 저항한다면 불행한 일이지요. 그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시오. 우리가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광대한 인민이 우리 쪽에 있으므로 그들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

    국공이 베이핑에서 평화회담을 열고 있다.

    4월5일 저녁, 류중룽은 비행기로 난징에 돌아갔다. 리쫑런, 바이충시에게 경과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였다. 이쫑런은 가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더 상의하자고 이야기하였다. 바이충시는 마오쩌둥이 획강이치를 거절했다는 말을 듣더니 안색이 변하였다. “그들이 반드시 강을 건 너고자 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소. 무슨 대화를 더 한단 말이오?”

    류중룽은 마오쩌둥이 말한 바이충시의 부대지휘 문제를 이야기했다. 바이충시는 즉시 거절했다. “나 개인의 거취를 생각할 때가 아니오. 지금은 긴급한 시기요. 공산당이 화평에 성의가 있다면 즉시 군사행동을 중지해야 하오. 강을 건너면 안됩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겠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소. 도강문제는 모든 문제의 전제요. 중공이 강을 건너 전투하고자 하면 회담결렬은 피할 수 없소.”

    장제스, 담판에 적극 개입하다

    장제스는 총통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국민당 총재였다. 정부와 군에 그의 측근들이 포진하고 있어 국민정부의 실권은 장제스의 수중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장제스는 하야하기 전에 부대배치와 함께 창장 방어 지휘관들을 임명하였다. 탕언보를 징후항 (京滬杭: 난징과 상하이, 항저우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경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장쑤성과 저장성,안후이성등 세 성과 난징, 상하이, 항저우등 거점 도시의 지휘권을 주었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하순경 시커우에서 창장 방어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창장의 방어구역을 두 개의 전구로 나눴다. 후배이성 이창(宜昌)에서 후커우(湖口) 서쪽까지는 바이충시가 맡게 하고 40개 사단 25만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후커우 동쪽에서 상하이까지는 탕언보가 지휘를 맡았다. 탕언보 휘하에는 75개 사단 45만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창장 방어선에 군함 172척, 비행기 230대를 배치하여 육군과 합동으로 방어선을 고수하게 하였다.

    장제스는 은퇴 후 2개월이 넘도록 거의 매일 명령을 내렸다. “전쟁에 대비하며 회담에 응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창장 방어의 작전 부대배치를 진행하였다. 국방부장 허잉친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12개 훈련 사령부를 신설하고 신병을 보충하였다. 그동안 해방군에 의해 섬멸되었던 직계 부대의 사단편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을 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장제스는 천리푸(陳立夫), 구정강(谷正鋼) 등 국민당 내 측근들을 통해 자신의 의도대로 회담을 끌고 가려 하였다. 장제스와 리쫑런은 뿌리깊은 정적이었지만 “창장을 경계로 하여 국공이 나누어 통치하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장제스는 리쫑런에게 여러 차례 중공과의 담판을 지지하며 ‘남북조 국면’을 이야기하였다.

    3월 31일, 난징정부 회담대표로 선정된 장즈중이 시커우로 갔다. 장제스에게 회담의 복안을 이야기하고 의사를 묻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창장 이남의 몇 개 성 확보를 협상 최저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북과 동북은 중공이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4월 1일, 난징정부 회담대표 장즈중, 샤오리즈, 류페이 등이 베이핑으로 가서 담판을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신분으로 광저우 중앙 당부에 지시하고 당의 명의로 리쫑런에게 집행하도록 압박하였다. 장제스가 지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회담에 앞서 정전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2)공산군이 언제 도강하든 즉시 회담을 중단하고 공산당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회는 장제스가 지시한 회담관련 방침을 통과시키고 중공의 도강에 반대하였다.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회는 장제스의 뜻에 따라 ‘회담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회담의 지도와 결정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 구성원 중 다수가 장제스의 뜻에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스탈린, 회담에 개입하고 창장 경계에 사실상 찬성하다

    1949년 원단, 마오쩌둥은 그의 글 ‘혁명을 어디까지 진행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1949년은 매우 중요한 한 해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창장 남쪽으로 진군하여 1948년보다 더욱 위대한 승리를 획득할 것이다.” 마오쩌둥이 ‘획강이치’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복병이 소련에서 나타났다.

    1월 10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의외의 전문을 보내 왔다. 난징정부가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 등에 중국 내전을 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통보한 것이다. 스탈린은 전문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답변하려고 한다. 소련은 과거와 현재 모두 중국내전의 중지와 평화 실현에 찬성해 왔다. 지금 조정에 동의하기 전에 중공의 의견을 묻고 싶다. 중공이 소련의 조정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알고 싶다. 소련 정부는 중공에 중국의(국민정부의) 조치가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에게 소련의 의사는 뜻밖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도 중국에서 ‘남북조’를 만들려 한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4년 전에도 공산당에게 국민정부와 맞서 싸우지 말라고 권하였다. 중일전쟁 끝무렵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만주에 출병한 날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 도적에 대한 최후의 일전’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공산당 휘하 팔로군과 신사군에게 일본 침략군을 공격하고 항복을 받으라고 명령하였다. 8월 12일, 장제스는 팔로군에게 전진을 멈추고 독자행동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마오쩌둥에게 충칭에 와서 국가대계를 상의하자고 전문을 보냈다. 이때 스탈린은 전문을 보내 중공이 장제스와 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 만약 중국에 내전이 발생하면 중화민족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때 마오쩌둥은 성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우리보고 혁명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1949년 1월,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권고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에게 보낸 회신전문에서 완곡한 어조로 거절하였다. “소련이 난징정부에 회신을 보낸다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당신들이 1월 10일 전보에서 언명한 입장, 즉 조정작업에 참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할 것입니다. 국민당은 우리를 호전분자라고 욕할 구실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국민당에 불만을 품고 인민해방군이 빨리 승리하기를 기대하는 광대한 인민 군중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나중에 여러 차례 이 일을 말하여 항상 마음에 두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1949년 4월 11일 마오쩌둥은 담화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는 창장을 건넜으며 미국은 출병하지 않았다. 중국에 남북조는 출현하지 않았다.”

    1955년 1월, 저우언라이는 주소련 대사로 부임하는 류샤오(劉曉)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군사, 정치형세가 매우 좋았다. 우리는 강을 건너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전 중국이 해방된다. 소련은 우리에게 내전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는데 사실상 ‘남북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두 개의 중국을 원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10대 관계를 논한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스탈린은 중국에 잘못을 했다. 해방전쟁 시기에 혁명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내전이 벌어지면 중화민족이 멸망할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내전이 일어나자 우리를 반신반의하였다. 싸움에서 이기자 우리가 티토처럼 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1949년과 1950년 소련이 우리에게 주는 압력이 컸다.”

    회담에 대한 국공 양당의 태도

    공산당은 회담에 대하여 의견이 통일되어 있었다. 영수인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회담의 구체적인 전략, 전술까지 세워서 대비하였다. 공산당은 2월 14일 국민정부 평화사절단과 만난 자리에서 ‘텐진 방식’과 ‘베이핑 방식’을 제시하였다. 베이핑 시장으로 내정된 예젠잉이 두 가지 방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우리는 당연히 베이핑 방식을 원한다. 리쫑런 총통도 민족의 이해와 인민의 이익을 위해 8개 조항을 받아들이고 장제스와 결별하라.”고 이야기했다.

    텐진 방식은 해방군이 텐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례를 말한 것이었다. 즉 무력으로 공격하여 항복을 받는 것이니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베이핑 방식’은 푸쭤이와 공산당이 담판으로 베이핑과 국군을 접수한 일을 말한 것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난징쪽 대표가 가타부타 찬반을 말하기는 힘들었다. 내용은 그렇더라도 회담대표에 대한 공산당의 태도는 매우 성의가 있었다. 베이핑 시장으로 내정된 예젠잉은 물론 푸쭤이, 덩바오산까지 나서서 사절단과 회견하였다. 린비아오, 네룽전 등 핑진전역의 최고 지휘관들도 함께 접견하였으며 장제스 치하에서 민주인사라 불리던 인사들 400여명과 함께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2월 22일, 사절단은 중공 중앙이 있는 핑산현 시바이포로 가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접견했다. 양쪽은 평화회담 및 남북간 통항, 우편업무등에 대하여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평화회담이 열린 베이징반점

    저우언라이오른쪽)와 예젠잉

    양쪽 공식대표뿐 아니라 지역의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접촉이 이루어졌다. 2월 12일, 류보청과 천이는 허난성 신양(信陽)에서 바이충시가 보낸 사자 리슈청(李書城)을 접견하였다. 두사람은 리슈청을 통해 바이충시와 국민정부 후베이성 주석 장두룬(張篤倫)과 허난성 주석 장쩐(張軫)의 태도를 알아보려 하였다. 류보청과 천이는 리슈청에게 공산당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을 끝까지 진행한다.”고 강조하고 푸쭤이의 예를 거듭 이야기했다. 즉 바이충시도 푸쭤이처럼 공을 세우면 환영할 뿐 아니라 우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장쩐, 장두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대하고 기용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공산당은 이처럼 위 아래의 방침이 통일되어 있었지만 국민정부쪽은 그렇지 못하였다. 국민정부 내부는 복잡하기 짝이 없어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국민정부 사절단중 대표격인 장즈중, 샤오리즈 등은 회담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천리푸, 구정강 등은 내각에서 물러나겠다고 위협하며 리쫑런을 압박하였다. 행정원장인 쑨커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쑨원의 아들인 그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 하였다. 리쫑런이 베이핑에 사절단을 파견할 때 쑨커는 1949년 2월에 갑자기 행정원을 광저우로 이전하였다. 그러자 장제스도 천리푸에게 입법위원도 함께 광주로 가라고 종용하였다. 난징에 있는 리쫑런이 협상결과를 만들어도 법률적으로 인준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리쫑런은 나중에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장씨가 막후에서 조종하고 CC계(CC계 중앙구락부(Centrai Club)의 약칭으로 국민당의 장제스 직계파벌중 하나)와 쑨커가 연합하여 나를 공격하게 하였다.” “난징과 광저우에 정부가 각각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양쪽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3대 전역에서 일패도지한 직후에 국민당안의 암투가 대체로 이러하였다. 리쫑런이 광저우로 쑨커를 찾아가 겨우 설득하여 그는 난징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중앙당은 여전히 광저우에 있었다. 게다가 쑨커는 3월에 사직하였다. 리쫑런은 허잉친을 후임 행정원장에 임명하고 싶었으나 장제스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허잉친이 장제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부득이 리쫑런은 시커우에 있는 장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제스는 “나는 은퇴한 사람이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리쫑런이 사람을 시커우로 보내 요청하고 허잉친도 직접 가서 의사를 물으니 비로소 장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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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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