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노조에 떼인 퇴직금
    받아내기 분투 2년차 기록
        2020년 09월 23일 1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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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카에게 들려주는 이모 분투기⑦] 끝나지 않은 에필로그 : 2라운드의 종 울리기 전 등 국제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가 퇴직금을 떼인 후 이를 받아내기 위한 국내와 국제를 오가는 분투기를 연재했던 정옥순 씨의 후속 연재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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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노동조합에 떼인 퇴직금 받아내기 1년의 분투
    그 이후 다시 1년, 아직 끝나지 않은 – 기고를 시작하며

    1년이 흘렀다. 기준점은 2019년 10월 28일. 그때 고용노동부 서울남부지청의 한 근로감독관은 ‘국제식품노조연맹(IUF)의 퇴직금체불 사건’에 대해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출석에 불응하는 피진정인에 대한 조사를 더 강구해보지도 않은 채 진정인-필자 일방의 주장을 채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법 위반사항이 없다’며 내사 종결했다. 그 이후 1년의 경험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결론은?! 퇴직금을 받았냐고? 아직은 아니다. ‘개인은 조직을 이길 수 없다’는 확고해 보이는 명제를 기억하며, 가자지구 서안장벽을 향해 무모해 보일 정도로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년의 마음과도 같았던 지난 1년이었다. 마침내(!) 나는 꿈쩍 않는 IUF를 향해 던져볼 만한 의미 있는 돌멩이 세 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과 돌멩이 세 개 중 하나를 최초 던진 후의 얘기인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면 ‘1년 이상 한 곳에서 일한 사람은 누구나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 여전히 편법이 난무하는 것은 논외로 하자.) 그러나 외국적 요소가 있는 사용자의 경우, (내 경우처럼) 퇴직금을 안 주려고 버티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것을 바로잡고자 여럿의 소송과 판결이 있었다는 것을 ‘추가 1년의’ 과정에서 배웠다. (관련 학위는 없더라도 경험만이 위대한 스승이라는 진리를 믿고 있으니 이 경험과 배움은 다음 돌을 놓게 해 나를 건너게 할 것이라 믿고 있다.)

    작년 10월 말, ‘나약하게’ 대한민국의 법치가 작동되지 않는 (내 수준의) 현장을 목격했다. IUF 사무총장과 아태지역총장은 한국의 근로감독관이 보낸 ‘피진정인 출석요구서’에 아무런 반응 없이 무시했다. 이에 대해 근로감독관도 달리 쓸 수 있는 수가 없었다는 것을 과정에서 알게 됐다. 이를테면, (한참 뒤 내 사건을 담당했던 그 감독관과 통화를 하고 보니) 그에게도 처음으로 마주한 ‘장벽’ 3종 세트였다(고 생각한다). 서울과 제네바/자카르타 간의 물리적 거리와 언어장벽이 둘이요, 마지막은 관련 법 (집무)규정 혹은 선례가 전무했던 것. 내 앞에 놓인 장벽도 만만치 않지만, 일선에서 격무에 치이는 근로감독관의 고충 또한 적지 않다고 이해한 순간이랄까.

    어쨌든 대한민국의 강행규정을 가볍게 무시하는 외국 사용자들이 ‘벌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도록, (물론 궁극적으로는 퇴직금 수령을 위해) 아쉬운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 정부의 신문고였다. 작년 초와 중반 2차례 외교부와 고용노동부를 처리기관으로 정해 넣었던 신문고 민원과 그 결과를 갖고 ‘도전’했던 것이 노동부 진정이었다. 결과의 유/불리를 떠나 1차 도전을 해봤기에 ‘안 되면 될 때까지 한다’는 정신으로 다음 행보를 취할 수 있었다.

    2019년 11월 초 통상 3차 신문고 민원의 처리기관은 다시 고용노동부. 노동부진정 사건이 무의미하게 종결된 이유를 (내 수준의 경험으로) 주장하는 한편, 형사고소를 진행할 경우 (이제는 선례가 된 내) 진정 사건처럼 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달라는 주문이 주된 내용이었다. 답변을 받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규정대로라면 15일 혹은 적어도 3주 내에 결과 통보를 해야 한다. 그러나 역시 선례가 없다보니 담당자는 숙고했다(고 생각했고 나는 충분히 그렇게 느꼈다). 그의 숙고가 옅어지지 않도록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화로 내 민원을 환기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기다리면서 지난해 해봤던 여러 일들의 ‘후속 대응’으로 다른 일을 찾아 또 했다. 이 또한 4차, 5차 신문고 민원을 통해서다. [외교외전]에서 인용됐던 ‘좋든 싫든 조국은 조국’이라는 말을 기억하며 개인이 아닌 국가 시스템의 무게를 IUF에 어떻게든 가 닿게 하고 싶었던 게 이유였다.

    그렇게 3차례 추가 국민신문고 민원의 결과지를 들고 2020년 7월 2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 [퇴직금청구의소]를 제기했다. 내가 구한 세 개의 돌멩이 중 첫 번째 투석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국제소송이다. 제기 후 2개월이 훌쩍 지났지만 소장의 ‘해외 송달’부터 난항이다. (법원이 보정권고/명령한) 문제를 처리하면서 ‘시스템’을 내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하는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경험하고 배운 것, 또 좋은 이들을 알게 돼 도움을 받은 것은 (이 일을 했기에 얻을 수 있는 큰) 곁가지 수확이다. 한편, 국내 민사소송에서 내게 유리한 판결이 나더라도 이의 (해외에서의) 집행 여부는 별개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리한 판결’이 내게는 당연히 좋다. 민사소송에 더해 IUF의 체불 퇴직금 지급을 강제하기 위한 추가 방법 강구는 다른 두 개 돌멩이의 투석이다. 아마도 ‘민사소송 판결’의 전후가 될 것이다.

    앞서 쓴 내용이 이번 기고에서 다룰 대강으로 대략 네 댓 차례로 글을 올릴 계획이다. 이 글을 읽게 될, 혹은 읽어 줄 이들의 응원을 부탁드린다.

    이후 연재 순서 (가제)

    1. 쪽팔림은 나의 힘-사람 냄새, 3차 국민신문고 민원(고용노동부)
    2. 어떤 실수, 선명한 기억의 2014년 2월의 어느 날 (체불퇴직금의 원인)
    3. IUF가 다국적 기업인가요? 4차 국민신문고 민원(산업자원통상부)
    4. 우연한 대화가 던진 보석-국가 간 조약과 국제공조법의 발견, 5차 국민신문고 민원(법무부)
    5. [국제노동조합에 퇴직금 받아내기 싸움] 국제소송이 되다.

    필자소개
    전 IUF 아태지역 한국사무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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