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시사변’의 참사,
    가해자 ‘이르쿠츠크파’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중간파 군인을 회상하며 : 유동열 ④
        2020년 08월 07일 09: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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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유동열 ③ ‘한인사회당’에서 ‘이르쿠츠크파’의 길로

    국제공산당 전권위원 슈먀츠키는 1921년 5월 19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알베르트 라핀에게 보낸 전문에서 유동열을 ‘고참 한인혁명가이자 일본 군사학교에서 수학한 구 한국군 대령’이라고 정중하게 소개한다. 이와 다르게 소련계 한인으로 1945년 8월에 입북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한 경력의 김세일(김세르게이 표도르비치)은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제3문학사)’에서 군정위원 유동열을 매우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그렸다.

    이즈음 유동열이 부딪힌 가장 큰 어려움은 러시아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령관 칼란다라쉬빌리가 주재하는 회의가 러시아말로 진행됨에 따라 유동열보다는 또다른 군정위원인 최고려(최니콜라이)와 부사령관 오하묵(오가이) 같은 러시아계 한인들의 발언권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의 ‘마르트 오홀라’가 전권위원 자격으로 고려혁명군에 파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군대가 갖고 있던 태생적인 한계에 기인한다.

    당시의 고려혁명군이 유동열의 의견과 한인 2세들의 견해가 달랐을 때 그의 주장을 사령관에게 여과 없이 전달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때의 유동열을 가리켜 이인섭은 ‘역할이 없다’고 했고 김홍일은 ‘이르쿠츠크파에 이용되는 정치적 존재’라고 잘라 말하였으며 김세일은 ‘눈치만 살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였다. 김익렬이 쓴 ‘4.3의 진실’에 나오는 것처럼 해방 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통역정치의 폐해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최고려- 그는 자유시사변을 상해임정 교통총장 김규면에게 돈으로 매수된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자서전에 기록했으나 김규면은 상해에 간 적도 교통총장을 맡은 적도 없다. (사진출처-세계한민족문화대전)

    임시군정의회로부터 업무 인수인계를 받은 ‘고려혁명군정의회’는 6월 7일 대한의용군에게 마자노프에서 자유시로 부대 주둔지를 이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대한의용군 전원이 군회를 열어 ‘북간도 회군’을 결의하고 10일 마자노프를 떠나자 보치카료보 주둔 기병대와 인민혁명군 제12여단 병력 일부가 출동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고려혁명군 측이 석방한 대한의용군 사령관(연대장) 그리고리예프와 부사령관 김민선(김인노겐치 미하일로비치)이 양측을 설득하였다. 대한의용군은 일단 회군을 포기하고 13일 자유시에서 약 3.2~4.3Km 정도 떨어진 수라제프카로 주둔지를 옮겼다.

    분대장 이상의 지휘관 전원이 소집된 6월 19일의 전체 간부회의에서 결국 ‘고려혁명군정의회’와 고려혁명군을 중심으로 일치 단합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의 결정서가 채택됨으로써 지휘권에 대한 갈등은 일단 큰 고비를 넘겼다. 이제 대한의용군 측이 물리적인 결합에 동의했으므로 이르쿠츠크파와 칼란다라쉬빌리는 두 무장부대의 화합과 통합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내는데 주력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매일매일을 살얼음판에 발을 내딛는 것 같은 형국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26일 대한의용군의 조직을 와해시키고 이르쿠츠크파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목적을 가진 고려혁명군 편제를 확정함으로써 이러한 기대감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대다수의 한인부대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민병대(의병)였다. 그 안에는 사회주의, 공화주의, 복벽주의 등 여러 이념들이 혼재해 있었고 활동지역도 제각기 달랐으며 병력의 규모, 훈련의 정도, 전투 경험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통합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민병대인 이들에게 처음부터 정규군에 준하는 규율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애초에 무리였다. 이런 조직의 통합을 위해서는 갈등을 끌어안으려는 리더십이 필요했으나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인 라핀 같은 이는 칼란다라쉬빌리의 역할을 대한의용군이라는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로만 생각했다.

    대한의용군의 니콜라옙스크부대를 2연대로 편성하고 나머지 부대들을 이르쿠츠크파의 1, 3연대로 배속시키는 제25호 명령에 대해 27일 사령관(구) 그리고리예프와 군정위원 박일리야(박윤천)를 비롯한 대한의용군 대표들이 강하게 항의했으나 편제명령서는 철회되지 않았다. 대한의용군 측이 군인대표회의장에서 퇴장하자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심야에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렇게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가 결정되었다. 1922년 5월 27일자 독립신문에는 ‘고려혁명군정의회’ 3두회의에서 강제 무장해제를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 회의에는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 전권위원 오홀라, 기병대 지휘관 오세티아니도 참여한 확대회의였다. 슈먀츠키를 대신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과의 연락관계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오홀라가 29연대의 출동에 대한 교섭을 직접 진행하였다.

    진압 측이 대한의용군을 명령에 불복종하고 반란을 일으킨 폭도로 간주함에 따라 이 작전의 방향은 처음부터 폭동의 조기진압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로써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이라는 애초의 취지는 사라져버렸고 ‘무장해제’는 이들을 제압함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되어버렸다. 또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제29스바보드니연대에 병력투입을 요청함으로써 사령관 칼란다라쉬빌리는 진압작전의 주도권을 29연대장에게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는 고려혁명군이 임무를 수행할 역량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휘하에 지휘부와 의견이 다른 부대가 있으며 예상되는 피해규모도 더 커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

    적위군의 장갑열차 – 철도가 발달한 유럽과 만주의 전쟁에서 많이 애용됐던 철갑차량이다. 수라제프카에 도착한 이같은 장갑열차가 대한의용군을 향해 포탄세례를 퍼부었을 것이다.

    인민혁명군 제2군사령관 쇼리쉐프의 반란 진압 명령 제1147호가 제4사단장 파다예프를 거쳐 제29스바보드니연대장 말리예프에게 하달되었다. 진압작전에는 인민혁명군 측의 제29연대 1,000여명과 장갑열차 2대가 포함된 장갑부대, 고려혁명군 측의 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 합동민족연대 500여 명, 기병대 300명이 동원되었다. 인민혁명군 측은 대한의용군 전체 인원 1,500명 중에서 진압에 맞선 병력은 1,000명으로 추산했다.

    28일 새벽 2시에 29연대가 수라제프카의 대한의용군 주둔지에 접근하면서 대치가 시작되었고 오후 2시 20분경에 실제적인 진압작전이 단행되었다.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의 전권위원 ‘마르트 오홀라’의 보고서에는 28일 저녁 7시 30분경에 작전이 종료된 것으로 나오는데 29연대장 말라호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오후 8시 17분에 가서야 전투상황이 산발적으로 바뀌었으며 인민혁명군 제2군사령관 쇼리쉐프의 보고서에는 저녁 11시에 대한의용군 측의 마지막 항복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진압군 측의 피해상황은 매우 경미하다. 오홀라의 보고서에는 사망 1명, 부상 9명이고 쇼리쉐프 보고서에 나오는 29연대의 피해상황은 전사 1명 , 중상 2명, 경상 1명이다. 오홀라의 보고서에 나오는 대한의용군 측의 피해상황은 사망 36명, 익사 60명, 행방불명 60명, 무장해제 860명이다. 최고려의 자서전에는 약 100명이 죽은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양측 피해규모의 압도적인 차이는 대한의용군이 반란군이 아니며 오히려 무력 충돌을 적극적으로 피했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가 된다.

    야코프 트랴피친(1897~1920) –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파르티잔으로 니콜라옙스크에서의 민간인 학살 혐의로 처형되었다. 대한의용군의 니콜라옙스크부대가 트랴피친의 휘하에 있었던 사실은 진압군 측에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대한의용군 전체가 ‘트랴피친파’, ‘아나키스트집단’으로 매도되었으며 심지어 2군사령관 쇼리쉐프는 한인들을 ‘부랑배’, ‘파충류’라고 비하하였다.

    쇼리쉐프는 진격명령을 내렸을 때 대한의용군 측이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고 보고했지만 의군부 기관총부대 지휘관 김재규가 사수들에게 기관총 열쇠를 지급하지 않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29연대가 대포와 기관총 같은 각종 중화기를 동원하여 대한의용군을 공격하였다. 쇼리쉐프 2군사령관과 말라호프 29연대장 모두 대한의용군이 마지막 총알까지 쏘며 완강히 저항했다고 보고했으나 김승빈은 산병선상에서는 양측 모두 발견된 시신이 없었다고 전함으로써 격렬한 충돌의 발생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참고] 산병선(散兵線 Skimish Line) – 최일선의 병사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흩어져서 포진한 전투대형)

    김승빈은 또한 29연대가 총검백병전을 감행한 곳으로 추정되는 벌판에서 시신 33구를 수습했는데 만약 죽은 병사들이 러시아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희생을 최소화할 수도 있었을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익사자와 행방불명자가 많았던 것도 대한의용군이 적접적인 맞대응을 자제하고 소극적인 저항을 선택한 증거가 된다. 여러 사람의 회고에서 동지의 총에 죽는 대신 자결과 강물에 몸을 던진 병사들이 속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진압군이 소총수의 엄호 아래 행동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다는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부의 보고서는 억지주장에 가깝다.

    제야강 – 아무르주의 주도 블라고베셴스크와 스바보드니를 흐르는 강이다. 대한의용군의 퇴각로였던 이 곳을 기병대가 장악하면서 많은 독립군들이 죽어갔다.

    대한의용군에 비친 유동열은 온통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김동한과 김아파나시(김성우)가 트로츠키에게 보낸 서신에서 유동열은 다른 지휘부와 같이 현장에서 지휘를 한 것으로 나온다. 이 서신의 작성자들은 유동열을 조선혁명운동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인민혁명군 총사령부의 보고서에는 대한의용군이 유동열을 일본의 주구이며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그러나 유동열이 김홍일이 인솔한 군비단의 자유시 입성을 가로막았다는 점에서 그가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입장만 전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간도지역 11개 단체 대표 22명은 ‘성토문’을 발표하여 이르쿠츠크파가 무력을 동원하여 대한의용군을 강제로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6백여 명의 희생자를 냈음을 폭로한 후 유동열 등 이르쿠츠크파 지도자 16명의 죄를 규탄하고 철저한 징계를 약속함으로써 복수의 뜻을 내비쳤다. 성토문에 맞대응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도 ‘선포문’을 발표하였으나 그 내용에는 여러 허점이 보인다. 익사자를 제외함으로써 전체 사망자 수를 축소하려 하였고 주동자 75명 이외에는 모두 방면하였다고 하였으나 428명이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아 아무르주의 삼림지대인 ‘우수문’이라는 곳에서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벌목작업에 투입되고 있던 사실은 은폐하였다.

    이르쿠츠크파는 사변의 실마리를 자파의 자유대대와 대한의용군 간의 경쟁과 세력 다툼에서 찾으려고 하였는데 이는 양비론을 펼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경감시키려 한 것이다. 두 세력의 알력은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산하 조선위원단의 1921년 11월 ‘조선문제 결정문’에서도 나오는 지적사항이다. 그러나 이 결정문에는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가 분파 갈등의 조정 역할을 하지 않고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특별한 지지를 함으로써 오히려 갈등을 촉진시켰고 대한의용군 병사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던 이르쿠츠크파도 긴장을 완화시킬 생각 대신 분파적 색채를 띠는 명령으로 긴박감을 조성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상해파는 분파 선동의 책임과 총사령관 칼란다라쉬빌리의 사전합의된 명령을 불이행했다는 점이 과오로 지적되었다.

    조선위원단은 ‘자유시사변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투옥된 군인들의 석방 권한을 이 위원회에 일임함으로써 이르쿠츠크파 고려군사혁명법원의 반란죄 판결을 사실상 부정했다. 이어 1922년 4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와 중앙총회가 출당한 상해파 당원들을 모두 복권시켰다. 조선위원단은 상해파를 무혐의 처리하되 이르쿠츠크파의 책임은 묻지 않는 정치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세력의 연합을 촉구한 셈이다.

    이렇듯 많은 희생을 내며 출발한 고려혁명군의 성격은 점차 원래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는 7월 5일 ‘조선국경지대로 출정한다’는 기존 방침을 취소하고 고려혁명군에게 자유시에서 이르쿠츠크로 회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동공화국과 일본과의 실무교섭이 지난 7월 3일에 이루어졌고 12일에는 일본이 원동공화국에 정식 협의에 응할 뜻을 전함에 따라 고려혁명군은 8월 5일부터 원동공화국을 떠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8월 26일 원동공화국과 일본의 종전회담인 ‘대련회의’가 개최됨으로써 고려혁명군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향후 진로를 놓고 내부갈등이 일어났다. 정규군으로의 편입을 반대한 칼란다라쉬빌리가 10월 9일 총사령관 직위를 떠나자 ‘고려혁명군정의회’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유동열은 10월 28일 여단급으로 규모가 축소된 고려혁명군 제1여단 부설 사관학교(6개월 과정)의 임시교장에 취임하였으나 불과 20일도 채 지나지 않은 11월 15일 그만두었다.

    이인섭 – 최고려는 일제의 간첩(상해파)이 조직에 침투하면서 종파싸움이 일어났다고 주장했으나 이인섭은 러시아내전에서 뒤늦게 사회주의자가 된 원호(러시아 입적)가 이르쿠츠크파로 변신해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인 여호(러시아 미입적)와 계급 갈등을 이어간 것을 종파의 기원으로 보았다. (사진출처-독립기념관)

    상해파는 9월 25일 연해주 이만(달네레첸스크)에서 ‘고려의용군사회의’를 조직하고 유동열이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자유시 입성을 불허했던 군비단을 중심으로 산하에 3개 중대 규모의 대한의용군을 재건하였다. 대한의용군은 12월 2일 이만전투와 이듬해 2월 10일 볼로차예프카전투에 참전하는 등 1922년 10월 ‘연해주해방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대한의용군이 고려혁명군으로 강제통합되었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대한의용군을 지지한 장교들은 고려혁명군 측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여전히 독립전쟁을 갈망했으나 싸우지 않는 고려혁명군에 불만이 많았던 연대(3월 5일부로 축소 재편) 내 친상해파 장교들은 1922년 3월 18일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 중 이다물, 김표도르 등 여러 명이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한인무장부대 통합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고 상해파에 대한 공세는 중립파의 상해파로의 쏠림과 상해파의 결속력 강화로 이어졌다.

    1921년 9월 성토문에 서명한 조응순을 중심으로 한 13명이 하얼빈에서 결사대를 만들어 이르쿠츠크파의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암살에 나섰다. 이들은 12월 상해에서 안병찬과 원세훈, 김만겸과 이성(이재복)을 노렸다. 이들 중 이성이 계영화가 쏜 권총에 다리를 맞았으나 목숨만은 건졌다. 결사대는 다음 목표인 유동열을 응징하기 위해 서간도로 향했다. 그러나 계획이 미리 노출되었던 것인지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동열을 향한 결사대의 암살 계획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

    필자소개
    국방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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