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성의 위기와
    포스트모던 사상의 비판
    [원효와 맑스의 대화 ⑦] 이성과 계몽의 힘, 그리고 그 한계 인식해야
        2020년 08월 03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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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맑스의 대화⑥] 과학적 진리와 동양의 도(道)…”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근대성: 주술의 정원에서 계몽의 빛의 세계로

    인도 남동부 쿠리체두 마을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주류 판매점이 문을 닫아 술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손 세정제를 마셨다가 10명이 사망하였다.(<중앙일보> 2020년 8월 1일) 코로나 사태 이후 과학적 이야기에 곁들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치료 방법이라는 유튜브도 많이 떠다녔다. 과학적 사실에 어긋나는 가짜뉴스가 SNS 상에 난무했다.

    지금은 그런 이들이 극소수이지만, 중세 말기 유럽에선 극소수의 계몽철학자나 과학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술적 사고를 하였다. 두통이 심한 환자가 찾아가면 신부는 악마가 깃들어서 그렇다며 기도하거나 면죄부를 살 것을 요구했고, 그러고도 낫지 않으면 악마를 내쫓는다는 구실로 정으로 머리에 구멍을 뚫는 신부도 있었다.

    “연이은 흉작, 인구감소기, 기근과 전쟁 등의 요인도 있어서 정확히 추산하기 어렵지만, 1347년에서 1351년 사이 유럽에서만 인구의 거의 1/3에서 절반가량인 7500만 명에서 2억 명 사이의 사람이 페스트로 죽었다.(박흥식, <흑사병과 중세 말기 유럽의 인구 문제>, <영문 위키피디아>, ‘black death’) 온 유럽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시체가 썩거나 태우는 냄새가 마을을 뒤덮었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진단과 처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성직자는 이를 신의 형벌로 간주하고 기도가 부족하다며 대중을 교회로 내몰아 페스트가 더 빨리 번지게 했다.

    채찍질 고행파(Confraternities of Flagellant)는 신의 벌로 해석하고 채찍질로 자신의 몸을 때리는 고행으로 죄를 씻으라고 강요했다. “이들의 신입회원들은 33일과 3분의 1일 동안 매일 세 번씩 채찍질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으며, 이 도시 저 도시들을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페스트를 옮기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절제하며 행동했으나 점점 과격해져 인종대학살을 선동하고 유대인을 발견할 때마나 죽였다.”(존 켈리, <흑사병시대의 재구성>) 아무리 신앙심이 강한 신부라도 교황청에서 파견한 심판관이 이단이라고 결정하면 이단자로 추방하거나 죽였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처녀라도 마녀라고 심판을 내리면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페스트와 마녀재판에서 인류를 구원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이성과 과학이었다. “소빙기로 기온이 내려가고 사람들의 내성이 생긴 것도 기인하지만 영양을 개선하고 환자를 격리하고 검역을 실시하고 방역 등 공중보건 정책을 실시하면서 페스트 시대는 막을 내렸다.”(수잔 스콧, 크리스토퍼 던컨, <흑사병의 귀환>)

    이 소문이 퍼져나가고 정치집단도 차츰 과학적 대안들을 수용하고 실시하면서 교회의 권위는 무너지고 공론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혁명과 계몽사상, 산업화와 도시화, 보통교육, 금속인쇄와 출판의 대중화 등이 보태지면서 의식의 각성을 한 시민들이 교회 바깥에 시민사회를 구성하였다. 시민들은 책을 읽고 신문을 보며 살롱 등에 모여 모든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기회와 권력을 갖고서 과학과 이성에 근거하여 의견을 피력하고 토론을 하고 여론(public opinion)을 형성하고 때로는 합의(consensus)에 이르렀다. 부르주아의 공론장(public sphere)을 만든 것이다. 공중(public)은 공론장에서 합리적으로 토론을 하며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흑사병, 연금술, 면죄부, 마녀사냥으로 대표되는 어두운 주술의 정원에서 탈출하여 계몽의 빛이 환하게 비추는 세계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과학발전과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계몽의 환한 세상을 연 것, 70억 명 이상이 먹고 살게 한 것, 거의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고 평균 수명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 신분사회를 벗어나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존엄하고 평등한 것이 보편원리가 되고 헌법에 명시된 것,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대다수가 정치 행위와 문화창조나 향유에 참여하게 된 것, – 바로 이것이 근대성의 힘이다.

    근대성의 위기: 소외, 불안, 폭력, 불평등, 기후위기의 심화

    하지만, 근대는 여러 모순을 파생하며 여러 위기를 낳고 있다. 산업화는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를 야기하였다.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38%가 멸종 위기에 놓였다. 기후위기로 슈퍼태풍, 가뭄과 산불, 기록적인 홍수가 일상이 되었다. 숲을 파괴하자 숲에서 박쥐나 원숭이를 숙주로 삼아 공존하였던 바이러스가 인수(人獸)공통의 전염병으로 변형하여 4-5년을 주지고 팬데믹을 일으키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물화(物化)와 소외, 불안은 더욱 심화하고 불평등은 상위 10%가 절반 가까운 부를 점유할 정도로 극단화하였다. 공론장은 서서히 해체되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형해화하였다. 근대를 이끈 핵심 테제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다. 이성은 도구화하고, 주체는 동일성에 포섭되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과학은 시장질서에 포섭되었다.

    이성은 도구화하고 있다. 지배자가 국민을 더욱 조작하고 통제하는 제도와 정책을 강요하면서 국가 전체의 효율적 발전이란 이름을 빌려 합리성을 가장할 때, 오로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적은 원료와 인력을 투입하여 가장 많은 생산을 이루고자 노동자의 작업리듬, 동선, 심리 등을 정확히 계산한 시스템을 운영하여 노동자들의 자율성과 연대를 깨고 그들을 스스로 복종하는 기계 부속품으로 삼을 때, 소비자들의 욕망과 무의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그들을 유혹하는 이미지와 상징으로 과잉소비를 이끌어낼 때 이성은 더 이상 계몽의 빛이 아니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성이 강화하면 할수록,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성의 도구화 또한 더 심화한다는 것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뉴턴의 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원리에 의해 무너지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물리학 분야만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보편타당성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양자역학은 전자나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고 관찰에 따라 변하며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밝혔으며, 초끈이론은 서로 모순 관계인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여 설명하면서 이 우주와 물질이 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끈의 진동에 따라 입자와 물질과 우주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했음에도 우주와 같은 거대한 영역에서 소립자와 같은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미지의 세계는 계속 불가지한 세계로 존재한다. 설명과 관리가 가능한 코스모스란 인간이 만든 객관적 준거에 따라 범주화한 허상일 뿐이고, 관측에 의해서 우주와 자연, 물질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원자의 성질을 결정하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동시에 알 수 없으며 그것은 관측에 따라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포스트모던, 이성과 주체, 진리를 해체하다

    사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No.5.

    https://en.opisanie-kartin.com/description-of-the-painting-by-paul-jackson-pollock-number-5-1948/

    폴록은 중세로부터 근대까지의 모든 서양의 그림이 2차원에 3차원적 풍경을 표현하기 위하여 원근법과 명암 등의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속임이자 3차원적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그는 2차원적 평면에 페인트를 마구 뿌려서 2차원적 묘사를 하였다. 하지만, 이는 무작위로 뿌린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생각하던 개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실제의 색은 무한하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세계 자체는 무한이고 혼돈(chaos)이다. 그러나 그리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구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인간은 명도와 채도 등의 객관적 준거를 설정하여 범주화를 하고, 범주화로 분별하여 코스모스(cosmos)로 만든 만큼 언어를 부여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얼마 전까지 주황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 무지개를 여섯 가지 색으로 보았다. 유럽 대다수 국가의 사람들은 지금도 파랑과 남색을 구분하지 않은 채 무지개를 여섯 가지 색으로 본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면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진실일까? 범주를 세분하여 빨강을 ‘진한 빨강, 아주 진한 빨강, 극도로 진한 빨강’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세계는 무한이고 혼돈인데 사람이 자신의 시각과 입장과 편의대로 나누었을 뿐이다. 아무리 범주를 더 상세히 나누고 그에 따라 언어기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를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러니 말로 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궁극적 진리가 아닌 것이다.

    데리다는 언어기호와 진리가 차이(différance)라고 말한다. 불어에서 ‘différer’란 동사의 뜻은 ‘차이가 나다’와 ‘연기가 되다’ 뜻을 지니나 그 명사형인 ‘différence’는 ‘차이’의 뜻만 가지므로 ‘e’자를 ‘a’로 대치해서 ‘différance’란 낱말을 만들었다.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풀’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가지듯 세계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차이의 체계일 뿐이다. 그리고 나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 신과 인간의 중개자’ 등으로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한다. 또 ‘나무’를 ‘쇠’와 대비시키면 이의 의미는 ‘자연, 부드러움’ 등의 뜻을 드러내는 것처럼 한 기호에는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의미가 흔적으로 남아 있어 서로 ‘대리보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기호의 의미, 텍스트의 의미, 궁극적 진리는 동일한 것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언어기호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차이가 드러난 것, 차이의 체계 속에 쓰여져 드러난 것, 현존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여 일어나는 유희에 불과하다.”(Jacques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누구인가 진정 사랑하면 “사랑한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궁극적 사랑이 100이라면 세상의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사랑을 표현해도 80-90의 사랑밖에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움”이다.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으면, 기호로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궁극적 진리는 언어기호나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다. 이에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를 해체한다.

    인간 존재는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주인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자연과 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키는 실천의 주체이다. 하지만, 주체는 동일성에 포획되어 타자를 설정하고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였다. 다른 요인도 작용하였지만, 이성과 교양이 보편화한 근대에 대량학살이 끊임없이 일어난 근본원인 또한 동일성 때문이다. 주체는 일원성의 원리에 집착하여 다원성을 부정하고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는 것처럼 꾸몄다.

    포스트모던을 넘어: 토대의 변화 없이 해제는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차이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확정할 수 없이 끊임없이 연기해야 한다면, 히틀러나 전두환도 그런가? “우리는 해체의 미궁 속으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빠지고 만다.”(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일정한, 필연적인, 자신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관계,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인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생산관계의 전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실제적인 토대를 구성하며, 이 토대 위에 법적 · 정치적 상부구조가 구축되고 이 토대에 사회적 의식의 일정한 형태들이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토대의 변화 없이 해체는 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인간의 자유의 존엄을 훼손하고 이에 저항하는 맥락에서는 히틀러는 악이요, 천민자본주의와 독재체제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맥락에서는 전두환 또한 악이다. 모든 진리는 토대의 바탕에서, 역사 안에서, 맥락 안에서 진리로 규정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가치, 형이상학적 기초, 자아중심적 주체를 아직도 필요로 하는 체제에 도전하는 한 급진적이다. …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마디로 말해 후기자본주의의 물질적 논리를 떠받들고 이 사회의 정신적 바탕에 대해서는 공격의 화살을 겨누었다.(Terry Eagleton, The Illusion of 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체적 현실을 호도하고 사회경제적 토대를 경시했다. 이성의 변증법적 계몽성까지 부정했으며, 주체의 상호작용을 경시했다. 자아는 해체, 분할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실천적이며 변증법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해석의 불확정성은 시장의 다양한 상품성과 결합했다. “포스트모던의 역사종말론적인 사고는 현재와 분명히 다른 우리 앞의 미래를, 그 어느 날 축제의 한 원인으로 제시될 가능성을 직시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국 해결책이라기보다 문제의 한 부분일 뿐이다.”(Terry Eagleton, The Illusion of Postmodernism)

    아직도 무지몽매함이 지배하는 장에서 이성은 계몽의 힘을 갖는다. 합격발원기도를 명목으로 수백만 원을 받는 종교인에게 어떤 하나님이나 부처님도 남의 자식을 떨어뜨리고 내 자식을 붙여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할 때, 더 악랄한 고문을 해야 비밀이 나올 것이라는 고문관에게 그래서 터져 나올 말 몇 마디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진실은 뼈와 살 속에 들어 있지 않다고 설득할 때, 국가 안보를 이유로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위정자에 맞서서 그것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너희만의 안위와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라며 비판할 때 이성은 정녕 빛이다. 이성이 도구화를 부정하고 이성의 한계를 비판해야 하지만, 계몽으로서 이성은 아직 유용하다. 지양해야 할 것은 계산하고 유용성을 추구하는 목적적 합리성이요, 지향해야 할 것은 소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통적 합리성이자 계몽의 변증법이다.

    궁극적 진리는 언어를 떠난 곳에 있는데 언어 없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딜레마에 대해 성인과 현인들이 숱한 번민과 사색 끝에 도달한 해결책은 “말을 방편으로 삼되 말을 떠나 진리에 이른다”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는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말씀하셨다.”(<금강반야바라밀경>) <원각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떠나라”라 비유가 나온다. 장자도 <장자> 「외물(外物)」 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지붕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고 했다. 이처럼 여러 성인과 현인들이 은유만 달리 할 뿐, 궁극적 진리(언덕 저 편, 달, 물고기, 지붕)가 인간의 의식과 기호 저 너머에 있지만, 언어기호(뗏목, 손가락, 통발, 사다리)를 방편으로 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대신 언어기호로 궁극적 진리를 지시한 다음에는 이에서 떠나서 진리를 바로 대할 것을 천명하였다. 원효는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의어(義語)이지 문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말이 마땅히 진실한 뜻에 맞아 단지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어(文語)이지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말이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이기에 진실한 뜻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뜻의 이치와 원리에 맞게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은 곧 뜻의 말이며, 뜻이 없는 범부의 말과는 다른 것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하고 완벽한 사랑이 100이라면 세상의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말을 끊어 버리고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이 이치를 알고서도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깨닫지 못한 일상의 세계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지향하는 것이다. 다른 방안은 말없이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는 기호로 사랑의 시를 쓰는 것, 상대방이 그 이전의 영화나 소설에서 본 것조차 사랑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사랑 행위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듯, 일상에서는 문어를 써서 세계의 의미를 즉자적으로 드러내되, 의어를 통하여 그를 해체하고 궁극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 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이 펼쳐진다.”(Jürgen Habermas, The New Conservatism) 유토피아가 환상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있어야 우리는 현재를 바라보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기에 별을 따라 걷는 나그네처럼 그를 고대한다. 끝난 것은 특정한 시대의 유토피아며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이다. 합리성이 있어야 유토피아는 꿈에서 현실로 내려오며, 유토피아가 있어야 이성은 기존 체제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비전이 될 수 있다. 계몽적이면서 소통적인 합리성이 있기에 우리는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으며, 유토피아의 비전이 있기에 모순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를 올바로 분석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모든 진리는 역사 안에서 규명되지만, 그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아니라 과거의 흔적을 담긴 현재와 미래와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현재를 선택하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근대성의 모순과 위기를 비판하되 그 너머를 사유하고, 근대성을 부정하고 탈근대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되 근대성의 성과는 수용해야 한다. 의미의 해석과 판단과 실천의 주재자로서 주체는 살리되, 동일성의 배제와 폭력은 지양하여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눈부처-주체를 추구한다. 이성의 도구화는 부정하되, 계몽성은 계승하여 소통적이고 리좀적인 이성을 추구한다. 전 지구차원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대를 성찰하고 자연 및 온생명과 상생하는 지구촌을 만든다. 진리가 곧 권력이고 이의 절대성이 폭력임을 인식하고 진리의 상대성이나 불가지성을 인정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진리와 허위를 구분하고 허위와 투쟁한다. 과학으로 주술과 미신을 퇴치하되, 과학이 야기한 역기능을 성찰하고 자연과 같은 과학, 무질서와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과학을 추구한다. 세계화와 트랜스내쇼날의 흐름을 알지만, 국가의 부조리와 무능, 폭력에 맞서서 우리를 위한 공화국으로 개조하는 운동을 한다.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해석하고 판단하되 너와 내가 함께 더 참답게 실존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하여 결단한다.

    무엇보다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장체제를 옹호하는 데 이용되었음을, 자본주의 체제가 거의 모든 근대성의 위기를 낳은 동인임을 직시하고 근대성을 벗어나는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실천에 나선다.

    하늘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오늘도 장대를 들고 더 가까이 하늘로 오르려 비상을 한다. 저 언덕 너머에 진리가 있음을 알고도 ‘지금 여기에서’ 물살에 휩쓸리고 있는 중생을 태우기 위하여 뗏목을 돌린다. 욕망은 신기루, 진리가 허상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고 보고 있는 우주가 양자요동이 빚어낸 복사물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이르지 못하기에 그를 향하여 나아간다. 기다리는 것이 정녕 오지 않기에 기다리듯이.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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