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온기로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 진천성당
    [그림 한국교회] 애민병원 등 가난과 질병 퇴치, 근대교육에 힘을 쏟아
        2020년 07월 31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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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1일, 친구목사들과 청주에서 명성교회 불법세습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한 후 방문한 대한성공회 충북 진천성당은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여기 고모댁에 왔을 때 넉넉하게 대접받은 기억을 해보면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란 뜻의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에 동감이 되는데, 혁신도시 조성으로 최근에 기록적인 인구증가가 있다니 지금도 살기 좋은 곳인가 봅니다.

    1890년에 첫발을 디딘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은 서울과 강화도에서부터 선교영역을 넓혀갔는데, 2대 단아덕(Arther B.Turner) 주교는 1905년, 충청북도 진천을 중부내륙의 선교거점으로 택하였습니다. 단 주교는 1907-1910년 YMCA 회장을 맡아 이상재 선생과 윤치호 선생의 항일운동을 뒷받침하며 기독교연합세력 형성에 힘쓰고 회관을 신축하였습니다.

    그가 가르친 신앙원리는 민족사랑이었습니다. 첫째,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둘째, 성공회 신자들은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절대로 동참해서는 안 되고, 불의와 싸우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기복적인 신앙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한 동기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또 자치와 자립을 강하게 추구한 덕에, 진천성당 주임사제 김호욱 신부에 의하면 교우들이 굉장히 주체적이고 헌신적이라고 합니다. 한옥성당 앞에 서 있는 기념비가 자랑스럽습니다.

    진천성당은 1907년 단아덕 주교에 의해 파송된 선교사 김우일(Wilfred N. Gurney) 신부로부터 시작됩니다. 김 신부가 1908년 성당을 건축하지만 1920년 소실되었습니다. 현재 성당의 원형은 선교사 유신덕(George E. Hewlett) 신부가 1923년 다시 지은 ‘성모와 성 요한 성당’으로, 1974년 소방도로 개설에 따라 방향을 틀어 다시 지어졌다가, 2002년 11월 해체하여 현재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고, 국가등록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의료와 교육을 중시한 성공회선교에 따라 진천에도 병원이 들어섰습니다. 강화도 온수리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노인산(Arther F. Laws) 의사 부부가 진천으로 와서 애인병원(愛人病院)을 세운 것입니다.

    1923년 통계에 따르면 세례 신자 940명에, 주일학교 출석 어린이가 250명에 이르렀고, 가장 신도가 많았던 시기에는 재적교인이 3,000명이나 되어서, 주일에는 성당 마당에 큰 가마솥을 5개나 걸고 밥을 지었습니다. 이 밥을 먹은 이들 중에는 충북지역에서 의병운동을 하던 이들이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인에게 낯선 성공회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게 한 동력을 김형석 교수께서 올해 초에 펴낸 책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김형석, 두란노, 2020. 1. 29)에서 찾았습니다.

    “인식에서 상징을 강조하는 종교는 보통 체험에서의 신비를 말한다. 둘은 거의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적 신비주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신비주의에 머물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내게 종교나 불교와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신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적 체험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인식에서는 계시로서의 진리가, 삶에서는 사랑의 체험이 기독교적 본질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은 이렇게도 존귀한 것이며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탐구되어 온 진리와 사랑에 대한 해답을 주는 종교이다.“ (147, 149쪽)

    진천성당의 사랑의 실천은 애인병원으로 나타났고, 기독교 본질인 사랑의 실천이 교회를 왕성케 한 것입니다. 애인병원은 입원실과 수술실까지 갖춘 근대의료시설인데다, 노인산 의사의 의술이 뛰어나 외지의 환자들까지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특히 애인병원은 안과까지 있고 영국에서 많은 약품을 조달 받아, 진천뿐 아니라 여러 곳의 병자를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진천성당은 활동폭이 넓어 광혜원과 음성, 무극, 청주, 충주, 여주, 안성 등지까지 교세를 넓혀갔고, 그래서 진천성당은 한국 성공회의 3대 요람 중의 하나로 새 성당을 크게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애인병원은 1941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정책에 따라 폐쇄되었습니다.

    1908년 학당과 수녀원을 설립하였던 진천성당은 1912년에 신명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인 이상설 선생을 비롯한 항일 인사들이 많아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였고, 결국 193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삼수학교로 강제 흡수당합니다. 진천성당은 1929년 진천유치원을 세워 유아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가난과 질병 퇴치, 근대교육에 힘을 쏟은 결과 진천성당이 크게 부흥한 것입니다.

    그림=이근복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한옥성당은 충북지역 선교의 거점역할을 목적으로 건축된 충북지역 최초의 성공회 건축물이며, 이후 성공회 성당건축의 모델이 되는 동서건축의 융합형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면에서 건축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대한성공회가 선교 초기부터 한국문화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선교지역 토착화’라는 선교원칙에 힘썼던 결실입니다. 진천성당에 앞서 지어진 강화성당이나 온수리성당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 한옥 성당이고, 일제강점기까지 지어진 성공회의 성당은 대부분이 한옥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기와로 팔작지붕을 올린 한옥성당의 내부로 들어가 보니, 가로로 긴 한옥을 세로축으로 전환하여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공간을 조성한 방식에서 성공회 선교 초기의 정신이 잘 드러났습니다. 정면 4간, 측면 8간, 32칸으로 동쪽에 출입구, 서쪽에 제단을 두었고, 2열 10개의 목조 열주에 의해 자연스럽게 회중석(會衆席)과 측랑(側廊)이 구분되는 삼랑식(三廊式) 공간으로 이루어져,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나무기둥들이 서양성당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천장의 목조 가구(架構)도 그대로 드러나서 작지만 성당 내부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서양의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적 요소를 살아난 것입니다. 창호 역시 높은 창을 두는 서양요소를 접목시켜서, 한국의 전통사찰 건축방식과 서양 성당의 융합입니다.

    그날 우리를 안내한 김 신부님의 말에 의하면, 목재들은 백두산 전나무로 뗏목으로 압록강을 거쳐 여기까지 운반하였다고 합니다. 만져보니 세월을 잊은 듯 단단하였고, 가난하고 병든 식민지 백성들을 보듬고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튼실한 사랑이 전해지는 듯 하였습니다. 제대 오른 쪽에 작은 부속 예배실이 있고, 김 신부님이 건반을 두드리니 음색이 여전한 거울이 달린 고풍스러운 영국제 오르간과 옛 사진들이 오랜 역사를 증언하였습니다.

    한옥성당 옆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새 성당이 있습니다. 김 신부님을 따라 들어간 예배당은 깔끔하고 우아했습니다. 함께 차를 마신 사무실은 옛 병원의 수술실을 옮긴 것인데 각종 도구들이 많았습니다. 김 사제가 성당과 정원을 돌보고 가꾸는 물건들입니다. 진천성당은 지난 113년 동안 의료와 교육, 문화의 중심이 되어 지역사회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주보에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합니다.”고 한 대로, 교회묘지를 굽어보는 두 팔 벌린 예수님처럼 지치고 힘든 이들을 품어주어 주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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