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봉이 남긴 마지막 유서
    '묻지마라 갑자생·을축생'의 청춘들
    [역사의 한 페이지] "젊은 벚꽃으로 보람있게 죽으리"
        2020년 06월 26일 10: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아기 옆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떠나는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자고

    이 시는 윤석중이 쓴 ‘먼 길’이라는 동시로 아빠와 아기의 이별을 애틋한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어디 먼 길을 가느라고 아빠와 아기는 이렇게 안타까운 작별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한없이 사랑스럽고 평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이 시가 실은 가슴 아픈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훗날 윤석중은 1940년대 징용 떠나는 어느 집을 떠올리며 이 시를 썼다고 밝힌 바 있다. 동시 ‘먼 길’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 징용을 떠나는 아빠와 아기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이별 장면을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이별이 어디 이것뿐이었겠는가?

    일제 강점기 역사에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남녀 두 연인 사이 등 수많은 이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번 글은 일제 강점기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과 아내의 이별에 대한 것이다.

    태봉의 유언장

    최근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흥미로운 유언장 한 장이 올라왔다. 소화 20년(1945년) 7월에 ‘금강태봉(金岡泰奉)’의 이름으로 작성된 유언장이었다. 이 유언장은 정서체의 일본어로 쓰였는데, ‘금강태봉’이란 인물이 전쟁터로 징병되어 가면서 가족에게 남긴 것이었다. 민족말살통치기 징병제와 관련된 소중한 자료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유언장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응찰자가 없었던 덕에 손쉽게 자료를 낙찰 받고, 며칠 후 이 유언장을 실물로 보게 되었다. 75년 전 한 청년이 남긴 유언장을 손으로 만져보는 기분은 묘했다. 마치 이 종이 속에 글 쓴 이의 생명과 영혼이 깃든 것처럼 느껴졌다. 한지에 먹으로 정갈하게 쓴 이 유언장은 가로 39cm, 세로 18.5cm의 크기로 봉투 없이 그냥 접혀있는 상태였다.

    먼저 이 유언장을 쓴 ‘금강태봉(金岡泰奉)’에 대해 살펴보자. 일본어로는 음독했다면 ‘가네오카 타이호’ 쯤 되겠다. 그는 1940년 2월부터 6개월간 실시된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씨명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씨들이 주로 ‘金海(가네우미)’, ‘金岡(가네오카)’, ‘金田(가네다)’, ‘金本(가네모토)’, ‘金城(가네시로)’ 등으로 창씨 개명했으니 유언장을 쓴 이의 원래 이름은 ‘김태봉’이었을 것이다. 유언장을 쓰기 몇 년 전인 1940년경에 ‘김태봉’은 ‘금강태봉’(가네오카 타이호)’이 된 것이다. (씨명은 바꿨지만 ‘태봉’이라는 이름은 내지식이 아닌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으므로 ‘카네오카 태봉’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태봉은 유서의 마지막 부분에 쓴 자신의 이름 끝에 ‘金岡’이라는 자신의 일본식 씨명이 새겨진 도장을 단정하게 찍어 놓았다. 창씨 후 새로 새긴 도장이었을 것이다. 또한 유언장에 나오는 동생 이름이 ‘태규’인 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태(泰)’자를 돌림자로 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태봉이 남긴 유언장 (박건호 소장)

    태봉은 유언장을 쓸 당시 경상북도 안동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언장에서는 태봉이 어느 지역에 살았던 사람인지 보여주는 힌트가 몇 군데 있다. 먼저 유언장에는 그가 거래했던 ‘안동금융조합’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이 조합 이름을 통해 그가 안동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동생 태규가 입학한 국민학교가 ‘輞川洞(망천동)’에서 통학하기 멀기 때문에 학교 주변에 방을 구해주도록 아버지께 부탁드리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태봉 가족의 집이 ‘망천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봉은 유서에서 ‘망(輞)’자를 틀리게 쓴 것으로 보인다. ‘수레 車’변에 ‘언덕 岡’을 붙였는데, 그런 한자는 없을 뿐더러 안동의 지명에도 그런 곳은 없다. 비슷한 한자로 ‘수레 車’변에 ‘그물 罔’을 붙인 글자인 ‘망(輞)’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검색해보면 안동에는 망천동이라는 동네 지명이 보인다.)

    망천동은 안동시 임동면에 있는 동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임당리와 통합하면서 망천동이라 하였고 1932년 임하현에 속했다가 다시 임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망지내라고도 불리는 망천동은 1980〜90년대 임하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었고, 그 곳 주민들은 근처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 명칭은 그대로 망천동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안동 청년 태봉은 누구에게 이 유언장을 썼던 것일까?

    수신자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 누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 문맥상 자신의 아내에게 쓴 것으로 보인다. 유언장 제일 첫 문장이 ‘남기고 가는 명자(明子; 아키꼬)’를 잘 키워 국민학교를 마칠 수 있기를 당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나 동생 태규보다도 먼저 어린 딸 ‘명자’에 대한 걱정부터 적어 놓은 것이다.

    유언장에 나타난 태봉의 가족 구성은 이렇다. 태봉에게는 아내와 딸 명자가 있으며, 자기 바로 밑에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태규’라는 동생이 있고,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살아계신다. 태봉은 아내에게 부모에 대한 봉양, 동생 태규와 외동딸 명자에 대한 당부 몇 가지를 유언장에 적어 놓았다. 이 유언장은 시종일관 아내에 대한 당부로 되어 있지만, 제일 끝부분만 부모에게 직접 “마지막으로 두 분 양친(兩親)의 장수와 오랜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깍듯한 존댓말로 인사를 고하고 있다. 태봉은 장남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전선으로 떠나야 했던 그는 딸의 양육 문제, 부모에 대한 봉양, 동생에 대한 뒷바라지, 아내에게 닥칠 경제난 등 여러 가지 고민으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당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남기고 떠나는 딸 명자는 꼭 국민학교를 졸업시킬 것

    둘째.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효도하고 집안의 화목을 도모할 것

    셋째. 동생 태규가 집에서 학교 통학하기 힘드니 아버지와 의논해 학교 앞에 방을 구해줄 것.

    넷째.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집안의 전답은 절대 팔지 말 것.

    다섯째. 집안 대소사로 의논할 일이 있으면 사촌 형과 의논할 것 등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태봉은 자신이 입던 옷을 잘 세탁해 햇볕에 소독한 후 동생 태규에게 줄 것을 당부하는 부분이다. 집안의 경제 형편을 헤아려야 하는 장남의 책임감과 함께 그의 섬세한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자신이 다시 입을 수도 있는 옷인데 굳이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에게 물려주라고 한 것은 그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글의 앞머리에 쓴 “나이 드신 부모님께 되도록 효도하기 바라오. 명령을 잘 지키고 집 안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해준다면 나도 구단(九段; 저승)에서나마 기쁘겠소”라고 쓴 부분에서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언장을 썼던 시점과도 관련이 있다. 태봉은 1945년 7월 징병을 떠나면서 이 유언장을 썼다. 1945년 7월이면 이미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로 희망보다는 절망, 삶보다는 죽음이 가까웠던 때였다. 이 때 쓰는 유언장이라면 혹시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적는 형식적인 글이 아니었다. 전쟁터에 가면 거의 죽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태봉이 전선으로 떠나던 1945년 7월은 어떤 상황이었던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6개월 후인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의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 전력과 최정예 해군 조종사 대부분을 궤멸시킴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그 후 승기를 잡은 미군은 1945년 2월 도쿄에서 1200킬로미터 떨어진 이오지마(硫黃島)를 점령한 데 이어 그해 6월에는 오키나와까지 점령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일본 본토 상공에 미국의 B-29 전폭기들이 나타나 거의 매일 주요 도시들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7월부터는 안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산 등 한반도 남부에도 미군의 공중 폭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미 전세는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병하는 태봉은 전쟁에 나가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 자결 소식은 그에게 큰 공포심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미군 1만 2500명, 일본군 9만 4000명, 주민 9만 4000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 군인들 외에 주민들이 이렇게 많이 죽은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집단 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도의 공포심으로 변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집단 자결을 선택했던 것이다. 전쟁 말기 세상은 마치 한 폭의 지옥도와 같았다.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치열한 전쟁 상황에서 안전하게 살아 돌아 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가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태봉뿐만 아니라 그 당시 징병되어갔던 식민지 조선 청년들 대다수의 생각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 당혹스러운 점은 태봉의 유서 곳곳에 보이는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출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한 번에 화려하게 지는 보람 있는 젊은 벚꽃

    대일본제국 만만세”

    화려하게 폈다가 지는 벚꽃처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장렬하게 바치겠다는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는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저런 구호야 관용적인 것이라 치부한다 하더라도,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다. 유서의 후반부에는 그가 아내에게 안동금융조합에 예치되어있는 돈을 찾아서 ‘국방헌금’으로 내 달라고 당부하는 대목이 나온다. 보통의 경우라면 저렇게 모은 돈은 가족의 생계에 보태 쓰라고 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을텐데 말이다. 자신의 옷까지 깨끗이 씻어서 동생에게 물려주는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을 고려할 때 더더욱 그렇다. 그게 아니라면 남기고 가는 외동딸 명자의 훗날 학비에 보태라고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왜 그가 유언장에서 대일본제국의 만세를 부르고, 소중하게 모은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라고까지 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행위들은 그의 진심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 유언장이 개인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훈련소에서 징병을 떠나기 전 일률적으로 쓰게 한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유언장을 보내기 전 거치게 될 검열을 의식하고 썼기 때문이었을까?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사실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고, 태봉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

    [사진] 태봉의 유언장의 끝부분으로 안동금융조합의 저금을 찾아 ‘국방헌금’을 내라는 대목과 “일제히 스러져 보람 있는 젊은 벚꽃, 대일본제국 만만세”라고 쓴 부분이 보인다.

    다만 태봉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조국 일본’을 옹호했다고 해서 그를 무작정 전범 부류로 취급할 수는 없어 보인다. 조심스럽지만 태봉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그에게 조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나고 일본인으로 교육받고 일본인으로 사고하는 청년이었다. 글씨체나 문장 표현으로 보아 태봉은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10대의 나이에 학교에서 늘 그의 조국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당시 신문들에는 연일 징병을 독려하고 찬양하는 총독부와 지식인들의 글들이 넘쳐났고 불리한 전황을 뒤집기위해 총후보국(銃後報國)에 힘쓰자는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당시는 그들의 조국 일본이 서양 제국인 영국,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전세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 자결 소식을 들은 젊은이라면 그가 출병해 싸우는 것은 조국 ‘일본’을 지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방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사진] 일제가 징병을 미화하고자 선전용으로 발행한 엽서(독립기념관 소장)

    식민지 조선 청년들이 자의든 타의든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그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쳐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저 역사는 매우 슬픈 것이지만, 저 마저도 결국 우리가 껴안아야 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저 당시 참전한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그냥 싸잡아서 비판하기는 그래서 힘들다. 열심히 달려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따도 그것이 일본의 영광이 되고 말았던 손기정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쳐 총 들고 싸우는 것도 결국 일본의 안위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으니 식민지 청년들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분명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복잡다단한 심경으로 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다. 태봉의 유언장은 그 많은 심경 중 하나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묻지마라 갑자생

    처음부터 징병제가 실시된 것이 아니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8년에는 ‘육군특별지원병제’라는 이름으로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후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1943년부터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지원병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제는 1943년 3월 1일 징병제를 공포하고, 이듬해인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행했다. 이에 따라 1944년에 만 20세가 되는 조선인 청년들은 모두 징병 대상이 되었다. 1944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에 걸쳐 제1기 징병 신체검사가 실시되어 대상자 26만 6225명 가운데 20만 6057명이 검사를 받았고, 이 가운데 4만 5000명이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제2기 검사는 1945년 2월부터 5월에 걸쳐 실시되어 4만 5천명이 조선군 및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징병자 가운데는 9만 명의 현역병 이외에도 상당수의 보충병이 존재했다. 이들은 근무대, 농경근무대 등 다양한 형태로 동원되었다.

    1943년 징병제 실시가 공포되자 어용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이것이야말로 내선일체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찬양하면서 ‘징병제 실시 신궁봉고제’라는 해괴한 행사를 열고, 징병제 실시를 감사하는 시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는 징병검사에 합격한 장정에게 징집영장을 발부함과 동시에 그의 집에 장행기를 꽂아 ‘영예의 집’으로 떠 받들었다. 천 명의 사람으로부터 바늘 한 땀씩을 받아 ‘무운장구’라고 쓴 복띠를 차면 총알이 비켜간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돌면서 온통 천인침(千人針,‘센닌바리’)를 만드느라 거리는 분주하였다. 이렇게 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은 조선에 있는 여러 훈련소에서 짧은 기간 훈련을 받은 뒤, 각지의 전선으로 보내져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사진] 위는 길거리에서 천인침을 만드는 모습을 담은 일제 강점기 엽서(박건호 소장), 아래는 실제 징병 간 군인들이 착용했던 천인침의 모습이다. (덕수궁미술관 소장)

    징병제는 해방 직전인 1944년과 1945년 두 해에 걸쳐 실시되었다. 징병제 시행 첫 해가 되는 1944년에 만20세로 첫 징병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1924년 갑자생이었다. 이들은 아주 심각한 결함만 없으면 신체검사에서 거의 대부분 합격되어 전선으로 내몰렸다. 또한 1945년 해방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 이들을 맞이한 것은 가난과 혹독한 좌우 이념 대립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그들은 또 다시 징집 대상이 되어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웠으며, 휴전 후에는 궁핍한 시절 가족 부양을 위해 노심초사해야만 했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이 말은 20세기 한국 역사에서 가장 혹독한 시절을 겪었던 1924년생들을 일컫는 말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25년 태어난 을축생도 그 처지가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1945년에 만 20세가 되어 징병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다. 태봉이 1945년에 징병되었다는 것은 그가 1925년 을축생이었다는 뜻이니 그는 ‘묻지마라 을축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징병 대상이 되는 조선 청년들 모두가 다 순순히 전쟁터에 끌려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징병을 회피하고자 시도했다.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 숨는 사람, 호적을 고쳐 나이를 속이는 사람, 아예 국외로 도망가 광복군에 합류하는 사람, 징병으로 갔다가 탈출하는 사람 등등….

    고 김대중 대통령도 1924년 ‘묻지마라 갑자생’이었다. 그는 1924년 1월 6일생이었으므로 원래 징병 1기로 동원되었어야 했는데, 전쟁터에 가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그가 어떻게 징병을 피했는지에 대한 회고가 나온다.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젊은이들이 전선으로 끌고 갔다.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눈물을 뿌리며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나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바꾸었다. 그건 아버지의 기지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일본군에 뺏기지 않으려고 여러 궁리를 하셨다. 일제는 아무나 군대로 끌고 갔다. 모두 징집을 피하려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적보다 실제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나이를 높여 징집을 피하려 했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의 나이를 낮춰 징집을 늦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원래 나이로는 징병 1기였는데 3기로 징병 시기가 늦춰졌다. 실제로 우리 면에서 호적 정정 신청을 낸 사람 중 유일하게 나만 받아들여졌다. 덕분에 나는 군대에 끌려가지 않고 해방을 맞았다. 실로 극적이었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삼인) 1권 53페이지-

    ‘묻지마라 을축생’ 태봉은 시기상 징병 2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5년 2월부터 5월 사이에 실시된 신체검사를 마치고, 주소지 근처의 훈련소 생활을 수료한 후 1945년 7월 전선으로 떠났을 것이다. 떠나기 직전 그는 아내에게 편지 형식의 이 유언장을 남겼다. 일본이 패망하기 대략 한 달 전이었다. 종전이 아직 한 달 정도 남았으므로 그가 젊은 시절의 김대중처럼 극적으로 참전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쟁터에 나갔던 그가 이후 살아 돌아왔는지 아니면 어느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불귀의 혼으로 남았는지 그 사정까지 알 수는 없다.

    태봉이 남긴 유언장 전문을 붙인다.

    유언장

    남기고 가는 명자(明子)를 잘 길러서 국민학교는 꼭 졸업시켜 주시오. 다음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모님(관련된) 일이오. 나이 드신 부모님께 되도록 효도하기 바라오. 명령을 잘 지키고 집 안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해준다면 나도 구단(九段; 저승)에서나마 기쁘겠소.

    동생 태규(泰圭)도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망천동에서는 아이들 교육이 심히 불편할 거요. 아버지께 부탁해서 통학이 편리한 지점에 이사를 해 주도록 하시오.

    조상님으로부터 전해지는 토지는 어떠한 곤란함이 있더라도 팔지 않도록 하고, 집 안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때때로 사촌 형과 의논하시오. 내 의류는 깨끗하게 세탁하고 햇빛에 소독하여 동생 태규에게 주시오.

    그리고 안동금융조합에 약간 저금한 것이 있으니 찾아서 국방헌금으로 내 주시오. 저금통장은 책상 서랍에 들어 있소.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장수와 오랜 행복을 기원합니다.

    일제히 스러져 보람 있는 젊은 벚꽃,

    대일본제국 만만세

    이상 (以上)

    쇼와 20년 7월 일   금강태봉(金岡泰奉)

    또 한 장의 유언장

    징병 떠나는 남편이 아내에게 남긴 유언장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한 점 전시되어 있다. 태봉의 유언장과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내친 김에 이 유언장도 잠시 살펴보자. 이 유언장은 일제 강점기 남편 수일(修一)이 징병되면서 두 아이를 홀로 양육해야하는 아내에게 남긴 이별의 편지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상황이라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봉처럼 ‘유언장’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당시는 이런 유언장을 남기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편 수일은 몸이 허약해서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었는데, 현역 전투병과는 다른 병종으로 징병된 것으로 보인다. 앞의 태봉이 아내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 온 전답을 절대 팔지 말라고 유언한 것과 달리, 수일의 유언장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동산을 팔아서 가계에 보태라고 당부하고 있다. 떠나는 가장의 입장에서는 남기고 떠나는 처자의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다만 태봉과 수일의 유언장 모두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정작 아내에 대한 따뜻한 위로와 애정을 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혼자 두고 떠나서 미안하다라든지, 몇 년 되지 않은 신혼 생활 동안(떠나는 태봉과 수일의 나이는 만 20세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고마웠고 또 저승에 가서라도 사랑하겠다는 말을 왜 적지 않았을까? 반드시 살아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내에 대한 당부 말고 이런 부부 사이에 할 수 있는 애정과 신뢰의 표현이 단 한 줄이라도 있었다면, 남은 아내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유언장

    대일본제국의 남자로 태어나서 신체가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고로 제2 국민병역에 편입되었소. 이번에 국가간성으로서 부름을 받은 것은…(해독불가)…흔쾌하기 이를 데 없다오. 충분히 각오는 해둔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내가) 출정하고 없을 때 신불(神佛)과 조상에 대한 제사는 결코 게으름 피우지 말기를 바라오. 그리고 각별히 몸조심하여 큰 딸 카네오(金夫) 양육에 힘쓰고 부끄럽지 않은 상속인 또는 여성으로 길러주시오. 그것이 제일(第一)의 부탁이오. 또한 나약한 여성의 몸으로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음대로 일도 못하고 여러모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빠지는 일도 있을 것이오. 그 때는 친척 어른들과 상담하여 부동산이라도 매각하여 가계에 보탬이 되도록 해주시오.

    아내에게 수일이

    이 유언장에도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야하는 수일의 애잔한 마음과 무거운 슬픔이 묻어 있다. 전쟁은 이렇게 온통 가족들을 뿔뿔이 갈라놓고 말았다. 징병으로 끌려가서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던 갑자생, 을축생 그 청년들의 명복을 빌며 글을 맺는다.

    [사진] 일본 큐우슈우 탄광에 강제 징용되어 혹사당하다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의 품에서 나온 가족사진. 징병되어 전선으로 떠났던 태봉과 수일의 품속에도 이런 가족사진이 있었을 것이다. (독립기념관 소장)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