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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어온 교회, 해남읍교회
    [그림 한국교회] 이준묵의 섬김·봉사
        2020년 05월 28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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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굴곡진 근현대사에서 서구에서 전래된 기독교교회들이 100년을 넘어 지역사회에 튼실하게 존속하는 것에 대해,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서일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때마침 사단법인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이 펴낸 ‘평화세상’ 5월호에서 이를 명쾌하게 규명해주는 논문을 읽었습니다. 이 단체는 제가 1999년 6월에 친구목사들과 북한에 식량을 보내기 위해 중국 연변에 갔다가 만든 ‘한민족선교정책연구소’의 후신입니다. 두만강변에서 황폐한 북한 마을들을 바라보고, 1992년 한중수교 후 남한 사람들이 저지른 초청사기문제를 대책하는 조선족사기피해자협회를 방문하고, 탈북자들을 만난 후, 북한과 한민족 선교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을 모아 연구소를 만들어 10여 년간 소장으로 일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세미나와 연구도서 발간, 조선족과 탈북인 자녀, 북한 주민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법인의 사무총장 홍상태 박사의 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섬김과 봉사”에서 몇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2천 년 전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에 있었던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고 수나 조직에 있어서 여타 종교에 비해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미미했던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로마의 국교가 될 정도로 그 영향력을 넓히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성장의 기저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떤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인간대접을 받지 못해도 교회에 가면 환영해주고 평등한 세상을 경험하며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가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hospitality)였다. 신약성서에서 환대는 교회와 기독교인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의 역할을 하였다. 환대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세상과 이웃을 향한 섬김과 봉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환대는 곧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교회의 본연의 역할이었음을 교회의 역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의 메시지가 아닌 교회가 하는 사회적 행동을 보고 평가하게 된다. (……) 교회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과 더불어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회복하게 될 때 처음 교회가 사람들에게 매력이 되어 자연스런 성장으로 이어졌던 것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이 아닌 예수의 마음과 초대교회의 환대의 정신으로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게 될 때 성장은 자연스레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런 논지대로 해남읍교회의 이준묵 목사의 섬김과 봉사의 사역(1945-1981년 시무)이 해남군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교회가 튼실하게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한 일화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땅끝마을 해남의 산골소년 오영석은 공부를 잘 했지만,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학교에 갔지만 지게를 지고 풀을 베던 소년은 어느 날 하나님 앞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너무나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하소연이었습니다. 소년은 ‘하나님 전상서’라고 쓴 편지를 우표도 붙이지 못한 채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편배달부는 이 편지를 신망이 높은 목사에게 전했습니다. 그 분이 이준묵 목사님이었고, 사택서 공부한 소년이 훗날 한신대 총장이 된 오영석 교수입니다.

    이준묵 목사님은 해남읍교회에 부임하자마자 YMCA와 삼애농민학원을 설립하여 땅 끝 해남을 ‘희망의 땅’으로 일구어 갔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농촌’, 세 가지를 사랑하는 ‘삼애’는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는 ‘광주의 성자’ 강순명 목사의 독신전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고아들을 계속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1953년 등대원을 설립해 날품을 팔아 고아들을 대신 보살폈습니다(서거 전까지 700명을 돌봄). 그리고 삼애농민연수원 등에서 영농기술을 보급했으며, 해남유치원부터 시작해 해남고등공민학교, 호만고등기술학교, 해남수성경로대학, 천진어린이집, 해남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을 설립하거나 운영하여 해남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종교를 넘어선 해남 지역공동체의 등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가 서넛에 불과한 마을도 놓치지 않고 돌보고 교회를 개척하여 1966년 해남동부교회와 해남남부교회, 1983년 미암교회 등 50여개로 불어났습니다.

    매일 새벽 뒷산에 올라가 기도했던 이 목사님은 날이 밝으면 수도자에서 농촌의 혁명가로 변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형 이문환은 호남비료공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공장인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한 당대 제일의 사업가였지만, 이 목사님은 늘 집에서 스포츠머리로 깎고 남들이 버린 국민복을 기워서 입고 자전거로 먼 길을 다녔습니다. 한신대 이사장과 기장총회장을 지냈지만 도시교회로 옮기지 않고 외진 남도에서 평생을 사역하여, 덴마크엔 농촌부흥을 이끈 그룬투비가 있었고, 한국엔 이준묵이 있다고 회자되었답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에도 항거하여 교회는 민주화운동의 산실로써 해남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해남읍교회는 1905년 9월, 해남읍 고도리의 방기남 집에서 김내도, 한명숙, 임봉록 등이 예배를 드렸고, 1910년 하위렴(W.B.Harrison)선교사와 김영진에 의해 정식교회로 조직되었습니다. 그 후 임봉록·이복덕 부부는 전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 발전의 기초를 놓았고, 주초를 끊고 믿음을 열심히 실천하며 해남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그러자 생활이 어려운 무당들도 많이 교회에 출석하여 사람들은 해남읍교회를 당골집회소라고도 하였다고 하니, 설립 초기부터 환대하는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저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현암사, 2019)에서 “인간의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가능해진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120쪽) 이 말처럼 해남읍교회는 지극한 사랑을 통해 해남의 구원역사를 편 것입니다.

    올해는 시민 저항의 숭고한 역사인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입니다. 광주항쟁은 전 세계에서 민주화운동의 모범이 되고 있지만, 막상 국내에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왜곡과 비방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해남으로 이어졌고, 해남의 민중항쟁은 완도와 강진, 나주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림=이근복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지난 5월 9일, 해남읍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거의 5시간이나 걸린 먼 길이었지만,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생기 넘치는 산천경개와 남한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월출산 산행의 추억으로 행복하였습니다. 혼자 밤기차 타고 광주로 가서 영암으로 이동하여 해남행 시외버스를 타면 운전기사가 친절하게 월출산 입구에 내려주었고, 구름다리를 건너고 천황봉과 억새밭을 지나 도갑사로 하산하곤 하였습니다.

    여전도사님의 안내로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니 뜻밖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시절, 첫 에큐메니칼 신학생해외현장훈련에 참가했던 양성진 한신대 신대원생이 부목사로서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토요일인데도 김영봉 담임목사님이 나오시어 교회역사 자료를 건네었고 본당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는 교회”라는 표어에 걸맞게 김영봉 목사님이 교우들의 신앙을 선한 삶으로 인도하여, 해남읍교회의 아름다운 환대사역은 더욱 아름답게 꽃필 것입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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