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부는 날이면 강남으로 가야 한다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조해진 「빛의 호위」와 철탑
        2020년 05월 13일 09: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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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견장을 가득 채운 기자들 사이로 긴장한 이재용의 얼굴이 나타났다. 고개 숙인 이재용 머리 위로 플래시가 터진다. 이재용 ‘대국민 사과’ 영상은 종일 포털 사이트를 채웠다. 여당 원내대표는 “눈속임 아니다”라며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연일 건조한 날씨에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화마가 산을 집어삼킨 어느 봄, 나는 자주 허공을 바라봤다. 새 한 마리가 맴을 돌고 있었다. 새도 둥지를 트지 않는 고공에서 339일을 버티고 있는 그가 생각나 자주 아득해졌다.

    빌딩 숲 사이로 ‘산 자여 따르라’ 익숙한 음과 가사가 울려 퍼진다.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 집회에서 기타를 동여맨 어떤 이가 다음 부를 곡명을 알려준다. 72m 위, 자신들이 부르는 곡명 대부분이 농성장의 높이를 나타내는 단위라고 했다. 1931년에 을밀대에 올라간 강주룡 열사부터 90년대 현대중공업 노동자, 한진중공업 김진숙, 쌍용자동차 해고자, 용산 철거민, 열병합발전소, 파인텍 노동자는 땅에서 살지 못한 이들을 대신해 철탑으로 올라갔다. 하늘과 땅 사이 벼랑 끝 노동자들은 한국사회의 ‘사이존재’로 극한투쟁을 이어나갔다. 땅에서 살기 위해 어떤 無에 직면해야만 했던 그들은 가까스로 온전해지기 위해 허공으로 향했다.

    김용희 농성을 신문에 게재한 것은 뉴욕 타임스였다. 4월 20일 타임스 국제면 머리기사에 실린 강남역 철탑 사진은 전 세계로 전달됐다. 독일 ARD는 5월 1일 메이데이 특집방영분에서 김용희를 보도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우리는 한국어 자막을 입힌 방송분을 찾아봐야했다. 진행자는 ‘강남 스타일’로 유명해진 한국에 또 다른 ‘강남’에 대해 말했다.

    “그가 포기하거나 타협해 철탑을 떠난다면 그것은 굴욕을 뜻한다. 그는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지키던 동료가 말했다. 그들의 카메라는 2020년 수천 마일 떨어진 강남역을 비췄다.

    한동안 다른 언어로 쓰인 흑백의 강남역 철탑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나는 거기서 세상에 필요한 피사체를 호위하고 감싸주는 기적 같은 빛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허약한 쇠바구니를 관통한 한 줄기 빛 말이다.

    조해진 「빛의 호위」는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 화자 ‘나’가 분쟁지역 보도사진을 찍는 권은을 인터뷰하는 이야기다. 권은은 어릴 적 친구가 준 필름 카메라를 접한 뒤, 사진에 입문했고 그 뒤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촬영했다. 팔레스타인에 날아든 폭탄에 권은은 다리를 잃었다. 병실에 방문한 ‘나’는 그제야 권은과의 인연을 기억해낸다. 어릴 적 같은 반 친구였던 권은은 가난했고 골방에 갇혀 지냈다. ‘나’는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를 훔쳐 권은에게 줬다. 비좁은 골방에서 카메라가 가둔 빛을 위안 삼아 외로움을 견딘 어린 권은이 오랜 세월이 지나 ‘나’에게 말했다. ‘고맙다. 카메라’

    안방 장롱에서 우연히 후지사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걸 품에 안고 무작정 권은의 방으로 달려갔던 건, 내 눈에는 그 수입 카메라가 중고품으로 팔 수 있는 돈뭉치로 보였기 때문이다. 권은은 내 기대와 달리 그 카메라를 팔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였으니까. 셔터를 누를 때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빛 무더기가 흘러나와 피사체를 감싸 주는 그 마술적인 순간을 그녀는 사랑했을 테니까. 그런데 셔터를 누른 직후 뷰파인더 속 그 빛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나면 권은은 알마 마이어처럼 더 외로워지고 더 쓸쓸해졌을까. 사진에는 담기지 않은 프레임 밖의 풍경처럼, 그 이야기는 지금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영역 속에 있다. 어쩌면 영원히, 권은은 그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로 방 안의 사물들을 찍다가 카메라에 담을 만한 더, 더 많은 풍경을 찾기 위해 조금씩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학교도 다시 다녔다. 학교로 돌아온 그녀에게, 하지만 나는 다가가지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216~217쪽)

    권은은 ‘나’가 가져다준 카메라를 통해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얕은 빛이 바깥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느꼈다. 절망뿐인 삶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새로 존재하는 세계가 제 카메라 안에 들어왔을 때, 권은은 생성하는 빛의 발산을 좇아 자신보다 더 연약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릴 적 ‘나’가 권은에게 전해준 작은 빛은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힘을 선사했다. 권은은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빛으로 일렁이는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을 것이다. 「빛의 호위」는 한 개인의 아슬아슬한 삶의 빛이 내일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강남역의 밤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해가 진 지 한참이었지만 거대한 빌딩 숲, 사면을 둘러싼 대형 전광판에서 24시간 광고가 번쩍였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거친 빛 무더기가 강남역 사거리 철탑을 향해 쏟아졌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광고화면은 무서운 기세로 철탑을 조준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녘 나는 종종 그의 빼앗긴 밤과 잠에 대해 생각했다. 한산해진 거리에도 종일 토해낼 빛의 공세에 그가 잠시라도 눈을 감고 잠들 수 있을까. 입김마저 얼어붙게 할 추위, 숨막히는 폭염, 시종일관 귀를 때리는 소음과 자동차 매연을 온종일 들이마시며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는 그 평범한 몸의 신호에 그가 반응할 수 있었을까. 그의 쇠약해진 몸 안에 깃든 정신을 안식처 삼아 단 몇 분이라도 단잠에 빠질 수 있었을까. 다리를 펴볼 수만 있다면, 손을 뻗어 볼 수만 있다면 하고 몸이 보내는 생존의 신호를 그는 어떻게 달래고 있을까.

    밤이 깊을수록 강남역 네온사인에 눈이 시렸다. 나는 무심코 손 그늘을 만들어 철탑을 올려다보았다. 허약한 쇠바구니에서 빨간 불빛이 깜빡깜빡 이쪽을 향해 수신을 보내왔다. 여기 아직 사람이 있다고, 질식할 만큼 무참한 전광판 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399일째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도히려 그가 이쪽을 향해 보내고 있는 참담한 빛을 무연히 바라봤다.

    시인 유하는 자본주의를 오징어 집어등(集魚燈)에 비유했다. 오징어잡이 배에 켜 놓은 불빛을 향해 오징어들은 죽을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쇼윈도의 밝고 화려한 빛, 휴대폰을 열면 소음처럼 뿜어대는 온갖 광고에 넋을 잃고, 명멸하는 빛을 향해 제 스스로 빨려들어 가는 사람들이 다수인 세계, 이재용을 향해, 여당 원내대표와 대기업을 살릴 유력 정치인들을 향해, 플래시 세례를 퍼붓는 이곳이 한국사회의 집어등(集魚燈)이다.

    시시각각 강남역 철탑을 투명하게 만드는 이곳에서 하늘과 땅 중간에 정박한 ‘사이존재’들은 외친다. 눈앞의 환영을 거두고 어둠을 응시하라고,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야말로 칠흑같은 어둠이라고. 이 땅에 힘겹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 소리친다. 우리의 플래시가 향해야 하는 곳은 이재용이 아니라 김용희의 철탑이라고, 우리의 빛이 향할 곳은 실형을 면하기 위해 법을 어기지 않겠다며 영혼 없이 읊조리는 재벌 의 목소리가 아니라, 339일 지름 1m의 쇠바구니 틈에서 이곳을 보라, 소리치는 김용희여야 한다고 말이다.

    창백한 환영으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강남역에 김용희의 빛은 홀연하다. 「빛의 호위」 속 ‘나’가 결과를 짐작하지 못하고 건넸던 최선의 마음이 비좁은 골방에 갇혀 숨이 멎길 바라는 어떤 이를 다시 살게 했다는 것, 어쩌면 보이는 곳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실은 은신하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시선과 빛은 이제 어느 곳에 가닿아 무엇을 호위해야 할까.

    「빛의 호위 」작가 조해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삶에는 빛의 호위를 받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걸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많은 카메라들은 번쩍거리는 대기업 광고, 재벌, 정치인들을 향해 플래시를 떠뜨린다. 거짓과 가짜로 부유하는 컴퓨터의 window, 손에 쥔 작은 휴대폰에서 터져 나오는 왜곡과 기만의 언어들은 우리의 시선을 강남역 허공을 응시하지 못하게 감금시킨다. 욕망에 빠져 푸른 창에 얼비치는 빛에 잠식된 세계가 일으키는 착시 속에서, 어떤 이들은 제대로 보기 위해, 철탑으로 눈을 돌리고 직접 본 것을 다시 반사 시켜 세상에 비추기 위해 고투한다. 399일 동안, 그들의 빛은 강남역 철탑의 수신호를 초점화했다. 카메라의 빛으로 철탑을 담아내고, 빛을 메워 언어로. 목울대를 타고 울리는 투쟁의 가사로 그의 실존적 곤경이 곧 우리 삶 그 자체임을 증언했다.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했던 시인 유하는 눈앞의 찬란한 저 빛을 의심하라, 그건 곧 죽음이라 말했다. 세계의 거짓에 둘러싸여 희망에 대해 섣불리 속단하고, 자본의 착시로부터 외면당한 진짜 빛을 목격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안팎을 서성여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보기 방식을 거부하고 추방당한 이들의 존재성을 삶의 피사체로 삼기 위해서,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이 아니라 강남으로 가야만 한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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