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이후의 세계와 ‘신성의 회복’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정찬의 「섬」을 다시 펼친다
        2020년 04월 05일 11: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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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기본소득 이야기가 한창이다. 조 단위 예산이 논의되면서 암담한 경제 전망을 우려하며 소비 진작을 위한 현금 지급이 시급하단 소리가 안팎으로 대두된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선진국, 시장 만능주의 신화가 깨지고 급진적이라 여겨졌던 논의들이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신자유주의 체제가 어떻게 유럽과 세계를 공멸시키는지 다소 비장한 경고가 담긴 예견을 내놓았다.

    새삼스럽지만 이미 기후위기와 불평등은 전 지구적 몰락을 가속화했고 폭염에 취약한 나라들은 해마다 수만 명씩 죽었다. 그간 신문 귀퉁이에서 비명횡사하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은 가시화되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선진국과 유럽, 중산계급의 턱밑까지 조여오는 감염 공포와 경기 불황이야말로 인류에게 신자유주의 폐해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고, 이제는 ‘공동체적인 것’의 도래를 말할 수밖에 없게 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사회주의’ ‘국유화’를 운운하면 빨갱이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다. 그 단어들 내부에 엄습했던 불온의 감각은 하루아침에 당면한 대안으로 여야 할 것 없이 21대 총선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70년 전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그 선언이 횡행하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다. 그간 습관처럼 써왔던 ‘구 동구권의 몰락’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조상(弔喪)하는 시절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4년에 발표된 정찬의 「섬」을 다시 펼친다. 소설 「섬」은 주인공 ‘나’가 친구인 정섭이 죽음을 맞이한 도시 모스크바로 찾아가 그가 죽기 전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되새기는 이야기다. 친구 정섭은 독일 유학 중 귀국했다가 그 길로 체포돼 5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1년 후 사면받아 출옥하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불행히도 정섭은 6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충격으로 고향에 칩거한 뒤 러시아로 홀연히 떠난다.

    러시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정섭이 죽기 전에 ‘나’에게 썼던 편지는 정섭의 부고 이후 나에게 도착한다. 뜻밖에도 정섭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급속히 부패의 길로 접어든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비통해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모스크바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정섭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나’를 마중 나온 것은 모스크바의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정섭의 동생이다. 정섭의 동생은 마르크스 광장에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스크바의 정신병원에 환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합니다. 실직과 가난으로 따스했던 인간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지요. 러시아 지식인들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은 러시아적 정신의 파괴입니다. 노동자의 사회주의적 정신세계, 따스한 인간관계, 물질을 우선하지 않는 가치관들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인들은 아주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절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 민중이 갖고 있는 거대한 힘에 대한 신뢰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결국 견디고 이겨내는 러시아적 정신에 대한 신뢰라고 할까요.” (165쪽)

    마르크스 광장에서 그의 동상을 보고 있는 ‘나’는 정섭이 보낸 편지에 빼곡히 적힌 모스크바의 역사를 다시 읽는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꺼져가는 인류의 심장 속으로 새로운 피를 공급했다. 그의 사상은 꺼져가는 인류의 심장 속으로 새로운 피를 공급했다. 그의 사상을 잉태시킨 당시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 그것이었다. 인간성의 본질을 이기심으로 파악한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상이다. 이기심의 물질적 현화인 소유욕의 치열한 경쟁을 토대로 자본주의는 발전해나갔다. 물신적 관능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에게 인간의 생명이란 자본을 위한 도구였다. (176)

    정섭은 ‘나’에게 “마르크스는 소돔과 고모라적 세계의 맨얼굴을 본 최초의 인간”이었다고 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혁명적 세계가 마치 종교적 환상과 꿈처럼 들리지만, 마르크스가 세운 세계야말로 “자신을 위한 욕망의 기쁨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욕망의 기쁨”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고 말한다.

    작가 정찬(사진=문학과지성사)와 코로나 사태 이미지

    작가 정찬은 정섭의 편지를 빌려 마르크스가 요구했던 혁명의 얼굴은 ‘공동체적인 것의 회복’이었음을 천명한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으로 대유되는 ‘신성의 회복’이다. 신성이 추방된 야만의 시대가 바로 지금-여기이며, 신자유적 패착이 낳은 세계, 따스한 인간관계 따위를 생각할 수 없고 개인의 극대화된 욕망 속에 저 혼자 살겠다고 남을 사지로 밀어 넣는 곳일 터이다. 정섭은 러시아 광장 한복판에 엎드려 문명의 야만성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가 도래했음을 슬퍼한다. 정섭의 죽음은 ‘모스크바를 향한 눈물’이자 인간적 품위를 잃은 세계에 대한 비극으로 대체된다.

    세계의 사상이 물질적 법칙성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고 믿는 유물론자들은 세계의 변화를 관장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인 역할을 일체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영원성은 신성의 부여 없이 불가능하다. 죽어서도 죽지 않는 레닌의 모습은 이미 신성한 존재이다. 인간의 지나간 삶의 자취를 훑어보면, 그 마르지 않는 피의 강물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어떤 생명 활동도 모순 없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비극적 인식에서 피할 수 없다. 인간이란 유토피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에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인가. (187쪽)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초월자에 의지해 공포를 좇는 사람들을 봐왔다. 정부의 강력권고에도 예배를 강행하며 예방수칙을 어기는 신도들은 그들의 신이 일러준 제1계명 ‘내 이웃 사랑’을 정작 외면했다. 또 다른 신은 어떠한가. 전 세계를 지배한 ‘시장의 신’은 수많은 사람과 생명들에게 사순절 고난, 끝나지 않는 십자가의 시간을 허락했다. 그 고혈로 짠 핏빛은총을 소수가 독점하며 지배력을 행사했다.

    이 땅에서 신은 오랫동안 침묵해왔는지도 모른다. ‘신성의 회복’은 공동체적인 것의 가능성을 다시 재고해 보는 일이다. 구 동구권의 몰락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승리이자 역사의 진화로 여기는 것은 ‘러시아 정신’에 대한 도구적 인식이자, 마르크스의 사상을 퇴락한 유물론으로 낙인찍고 역사적 상상력을 성급하게 차단하는 일이다.

    물론 도저한 이데올로기와 이론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 세울 수만은 없다. 철학자와 종교인 정치인들이 찾는 진실과 정의라는 말이 한낱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높은 이상이 투영된 체제나 제도는 실상 권력과 권력의 자리바꿈을 통한 일종의 게임에 불과했고 그 속에서 그들은 이기심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자신의 준거집단에 불리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폐기하면서 사회 곳곳에 비극을 낳았다. 그럼에도 앞서간 사상가들은 역사의 선(善)에 대한 확실성의 중지, 의구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사상이 텅 빈 심연이나 불확실한 세계와 마주하는 일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가치를 구축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역사가 그들의 사상이 애초에 실패한 것이며, 결여된 미몽이라 치부했지만 분명 거기엔 닳지 않는 의미가 내재 돼 있었다.

    예수의 부활과 구원은 죽음의 책형을 통해 이루어졌다. 진리의 실천은 반드시 희생제의를 수반한다. 현실과 이상을 마주 세운 진리 사이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는데 이웃에 대한 사랑만큼 난도 높은 혁명은 없다. ‘신성의 회복’은 여기에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 인류적 재앙 앞에서 나는 ‘공동체적인 것’에 대한 희구, 윤리에 대한 치열한 자기 성찰의 임계치를 올릴 수 있는 사상을 다시 재독 한다. 그 사상들이 구축한 세계를 상상해본다. 거기엔 강이 흐르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슬픔의 강” 마치 옛이야기 속, 신화 속에 잠들어 있는 그 슬픔의 강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슬퍼할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신은 진실로 슬퍼하는 이를 원한다.

    만일 세계의 모든 ‘말’이 타인을 향한 슬픔에서 시작될 수 있다면, 신은 아직 불타는 성전에 남은 의인을 보게 될 터이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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