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대풀이라는 이름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푸른솔의 식물생태] 등잔걸이 형상
        2020년 03월 26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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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등대풀이란?

    등대풀은 대극과 대극속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월년초)이다. 늦여름이나 가을에 싹을 틔워 땅에 엎드려 겨울을 나고 새 봄이 되면 줄기를 위로 올려 꽃을 피운다. 제주도를 비롯한 중부 이남의 해안 지대, 낮은 산지, 들과 길가 등에서 흔히 자란다. 대극속(Euphorbia) 식물답게 줄기를 자르면 흰 유액이 나오는데 이 유액은 독성이 강하다. 이 독성으로 인해 약재로 사용해 왔다.

    사진1. 군락으로 자라는 등대풀의 모습(전남 금오도)

    사진2. 겨울철 등대풀의 모습(전남 진도)

    사진3. 등대풀 꽃의 모습(전남 금오도)

    학명은 Euphorbia helioscopia L.(1753)이다. 1753년에 식물분류학의 태두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가 부여한 학명이다. 유럽에도 분포하는 종이다. 학명 중에 속명 Euphorbia는 로마시대 모리타니(Mauritana)의 왕 Iuba 2세의 시의(侍醫)였던 Euphorbus(BC 30~ AD 23)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액을 약용했는데 그리스어 eu(좋은)와 phorbe(식품)의 뜻이 있으며 대극속을 일컫는다. 종소명 heliscopia는 ‘해를 향하는’라는 뜻으로 식물체가 하늘을 향하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중국명은 泽漆(ze qi)이다. 잎을 자르면 흰색의 유액이 나오는데 이는 윤기(澤)가 있는 옻(漆)으로 본 것에서 유래했다. 일본명은 トウダイグサ(灯台草)이다. 일본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하였던 이름이기 때문에, 여기서 등대(トウダイ, 灯台)는 바닷가에서 야간에 배를 안내하는 현재의 서양식 등대(light house)가 아니라 옛날에 등잔을 받치던 받침대(=등잔걸이)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일본명은 꽃차례의 모양이 옛날에 사용하던 등잔걸이를 닮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말 이름이 ‘등대풀’이다. 일본명과 발음도 뜻도 매우 흡사하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명 토우다이는 망망대해에서 항해를 돕는 등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글명 등대풀은 일본명을 오역한 것이다.” [김종원,『한국식물생태보감』, 자연과 생태(2013), p.475 참조].

    “한국에서는 일본말의 등대가 등잔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고 누군가 알량하게 등대라고 번역한 것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등대풀이 된 것이다…(중략)…등대풀은 높은 언덕에서 꼿꼿이 자라는 식물이 아니라 땅에 납작 엎드려 살아가는 들꽃이다. 일본인이 붙인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모자라 제대로 번역도 하지 못했으니 손꼽히는 부끄러운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윤옥, 『창씨개명된 우리풀꽃』, 인물과 사상사(2015), p.133 참조]

    이들(이하에서는 편의상 “주장자“라고 한다)의 주장에 따르면, (i)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은 일본명 토우다이구사(トウダイグサ)를 번역한 것이고, (ii) 등잔걸이 풀이라는 뜻의 일본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번역을 잘못했으며, (iii) 그런 이름을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아래에서는 위 견해에 따라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유령처럼 떠다니는 저 명제가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과 옛이름

    (1)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의 등장

    사진4. 모리 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 조선총독부(1922), p.233 인용

    사진5.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p.106 인용

    주장자들이 말하는 일본명 도우다이구사를 등대풀로 오역(?)하거나 알량하게 번역(?)을 한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일제강점기에 가장 광범위하게 한반도(조선)에 분포하는 식물과 그 식물에 대한 조선명을 조사한 문헌은 일본인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에 의해 저술되고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식물명휘』이다. 그런데 <사진4>을 살펴보면 『조선식물명휘』의 해당 부분에는 한글로 된 조선명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그들의 조사에서 조선명이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글 명칭 ‘등대풀’이라는 이름을 선명하게 표기한 것은 1937년 조선인 식물학자들이 모여 한반도 분포 식물의 조선명을 수집·제정하고자 저술했던 『조선식물향명집』이었다. <사진5>를 참조하자. 주장자들이 오역(?)하거나 알량하게 번역(?)을 했다고 지칭한 주체는 다름 아닌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이다. 주장자들이 저술한 문헌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등대풀이라고 오역(?)하거나 알량하게 번역(?)을 했다고 언급된 그 주체가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이라는 점은 주장자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 그런데 해당 주체를 특정하지 않고 굳이 애둘러 말하는 것일까?

    『조선식물향명집』의 제1저자 정태현은 1908년 수원농림학교 임학속성과(현 서울농과대학의 전신)를 수료하고 대한제국이 설립한 수원임업사업소에서 식물분류와 조림사업에만 몰두하여 『조선식물향명집』이 저술되던 1937년경에는 다수의 일본어로 된 문헌과 논문을 저술하고 발표하였다. 제2저자 도봉섭 역시 일본 동경제국대학 약학부를 유학하고 경성약학전문대학(현 서울약학대학의 전신)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이미 식물학과 약학과 관련된 다수의 일본어 논문을 발표한 때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본어 도우다이구사(トウダイグサ)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역(?)을 하고, 알량하게 번역(?)을 했다는 주장을 선뜻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단 주장자들의 주장이 그렇다는 정도로 이해해 보기로 한다. 그들의 일본어 이해가 정말로 알량하다는 것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어쨌든 여기서,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이 온전하게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 『조선식물향명집』(1937)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기로 하자.

    (2) 등대풀의 옛이름은?

    위에서 살핀 『조선식물명휘』(1922)에는 한자어로 ‘澤漆'(택칠)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은 ‘윤기가 있는 옻’이라는 뜻으로 현재의 등대풀에 대한 중국명과 일치하고, 실제로 옛적에 중국에서 널리 사용하였던 이름이었다. 우리에게도 약재명으로 전래되어 그에 대한 기록이 우리의 옛 문헌에도 남아 있다. 주요한 것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향약채취월령(1431) : 澤漆/柳漆
    – 향약집성방(1433) : ​澤漆/柳漆苗
    – 세종실록지리지​(1454) : 澤漆
    – 동의보감(1613) : 澤漆
    – 산림경제(1715) : 澤漆
    – 광재물보(19세기 초) : 澤漆/漆莖/五鳳草/猫兒眼晴草/綠葉綠花草
    – 물명고(1824) : 澤漆/柰莖/五鳳草
    – 선한약물학(1931) : 澤漆

    한약재를 다루었던 우리의 주요 문헌에 중국에서 현재에도 등대풀을 가리키는 澤漆(택칠)이라는 한자명이 수록되었는데, 왜 그 이름이 계승되어 현재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한약재에 조예가 있다면 금방 눈치를 챘을 것이다. 조선 초기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한약서를 정비하면서 편찬된 『향약채취월령』(1431)과 『향약집성방』(1433)에 한자명 ‘澤漆'(택칠)에 대한 향명(우리말)을 ‘柳漆'(유칠)과 ‘柳漆苗'(유칠묘)로 각각 기록했는데 여기서 ‘柳漆’은 한글명 ‘버들옻'(버들옷)을 이두식 차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 두 문헌은 초간본이 한글 창제 이전에 저술되었기 때문에 이두식 차자 표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버들옻’은 등대풀이 아니라 대극(Euphorbia pekinensis Rupr.(1859)>이라는 식물의 옛이름이다. 즉 澤漆(택칠)이라는 한자명을 등대풀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닌 대극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17세기 저술된 『동의보감』의 기록은 보다 더 뚜렷하고 명확하다. ‘澤漆'(택칠)에 대해 “此大戟之苗也”(이것은 대극의 어린 싹이다)라고 기록하여 택칠을 대극과 구별되는 별도 식물로 보지 않았음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허준의 독자적 견해가 아니라 중국에서 6세기경 저술된 『신농본초경집주』와 송나라 때인 1082년에 저술된 『경사증류비급본초』가 취하는 견해이고, 『동의보감』은 이러한 문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해 다른 주장이 있기도 했다. 19세기 실학자 유희가 저술한 『물명고』에는 “此別是一種草 而東醫以爲大戟苗 誤矣”(이것은 별도 종의 풀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동의보감은 대극의 싹으로 보았다. 이는 잘못이다)라고 하여 택칠을 대극과 구별되는 별도의 식물로 보았다. 즉, 澤漆(택칠)이 대극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현재의 등대풀을 일컫는 이름일 가능성을 연 것이다. 그러나 앞의 문헌들이 국가적 사업을 통해 편찬한 문헌이었던 반면에 『물명고』는 개인이 작성한 필사본으로 공적인 출판(간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널리 읽혀지지는 않았다.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및 『동의보감』이 옛 한의학 문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澤漆'(택칠)은 현재의 등대풀을 일컫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일부 소수의 견해가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달리 현재 등대풀을 가리키는 이름이 문헌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식물향명집』 저술 이전에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 없었고 자생지를 중심으로 각 지방마다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는 정도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3. 도대체 ‘등대’란 무엇인가?

    (1) 일본명トウダイグサ(灯台草)의 유래

    도대체 등대가 뭐길래? 백배 양보하여 등대풀이 일본명 燈臺草(=灯台草, 토우다이구사)을 번역한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오역 또는 알량한 번역이라고 하는 것일까? 주장자들이 그렇게 보는 근거가 있다.

    <주의(1)> : 이 장에서는 논의를 편의를 위해 주장자들의 견해에 따라 우리말 ‘등대풀’이라는 이름이 일본명トウダイグサ의 번역어라고 가정하고, 그들의 주장대로 오역인지 여부만을 따져 보기로 한다.

    <주의(2)> : 일본식 한자 표현 灯台(등대)에서 ‘灯'(등)은 ‘燈'(등)의 간자체이고,’台'(대)는 ‘臺'(대)의 간자체이므로, 灯台(등대)와 燈臺(등대)는 같은 표현이다. 아래에서는 편의상 원문의 표기와 상관없이 모두 燈臺(등대)로 통일하기로 한다.

    사진6. 일본의 ‘語源由來辭典’ 중 トウダイグサ 참조 : http://gogen-allguide.com/to/toudaigusa.html

    일본의 식물명 유래나 어원을 밝혀 놓은 문헌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면 대부분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에 대한 유래 해설을 <사진6>처럼 하고 있다. 필자는 일본어를 전공을 다루어 본 적도 없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다지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알량한(!) 실력으로나마 번역을 해 보자. トウダイグサ(燈臺草)에서 ‘トウダイ'(燈臺)는 배의 항로 표지인 등대가 아니고 실내 조명기구로 사용하는 등대(등명대=등잔걸이)를 일컫는 말이고, 이 식물의 끝부분이 그릇(주발)처럼 생긴 잎이 있고 그 가운데 피는 노랗게 꽃의 모양이 기름으로 등을 밝히는 등대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 개략적 내용이다.

    그러니 일본명 ​ トウダイグサ(燈臺草)를 한글로 ‘등대풀’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면 안된다? 이 얼마나 알량한 해석과 이해란 말인가!

    잘 살펴보라. 일본어 トウダイ(燈臺)는 배의 항로를 안내하는 등대(light house)라는 뜻도 있고 실내 조명기구로서 등을 받치는 등명대(=등잔걸이)라는 뜻도 있는데, 식물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에서 トウダイ(燈臺)는 전자로 새겨서는 안되고 후자로 새겨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トウダイグサ(燈臺草)=등대풀이라는 번역(?)이 오역이라거나 잘못된 번역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우리말 ‘등대’에는 조명 기구로서 등대(등잔걸이)라는 뜻은, 현재 뿐만 아니라 『조선식물향명집』저술 당시나 그 이전에도 없었다는 것을 살펴서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리말에도 그런 뜻이 있거나 있었다면- 가사 번역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오역이나 잘못된 번역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일본어에서 ‘등대’의 뜻

    사진7. 일본의 Weblio 辭書 중 ‘トウダイ’ : https://www.weblio.jp/content/%E3%83%88%E3%82%A6%E3%83%80%E3%82%A4

    일본어 사전에서 ‘トウダイ’을 검색하면 한자로 燈臺가 검색되고 그 뜻을 ‘항해의 도표가 되는 등화탑’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현재의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면 등명대(등잔걸이)의 뜻으로 등대가 사용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를 위하여 일본의 등대(light house)가 건설된 시기를 살펴보자.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식 건축 방식으로 등대(light house)가 건립된 것은 1869년(명치2년)에 칸논자키토우타이(観音埼燈臺)로 알려져 있다. 즉, 서양식 등대(light house)가 건설되기 이전에 사용된 トウダイ(燈臺)는 현재의 의미의 등대(light house)일 수 없고,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한 등잔을 받치거나 걸어두는 등잔걸이를 뜻했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일도양단으로 어느 지점에서 사용이 중단되거나 뜻이 일순간 바뀌는 것은 아니므로, 서양식 등대 건설이 시작된 1869년(명치2년) 이전의 トウダイ(燈臺)는 옛날의 등잔걸이를 의미했지만 그 이후에는 서양식 등대(light house)와 옛 방식의 등잔걸이라는 의미가 공존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가까울수록 과거의 등잔걸이는 전기불로 대체되면서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Weblio辭書에 나타난 것처럼 서양식 등대(light house)로 뜻이 고착화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トウダイグサ(燈臺草)라는 이름이 처음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은 데라시마 료우안(寺島良安, 1654~?)이 저술한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1712)에서 “澤漆俗云燈臺草”(택칠은 일본말로 ‘도우다이구사’라고 한다)라는 구절로 보인다. 18세기 초반의 일이므로 이 문헌에서 ‘燈臺草'(등대초)의 ‘燈臺'(등대)는 서양식 등대(light house)일 수가 없고, 옛날에 사용하던 용법대로 등잔을 받치거나 걸어 두는 기루로서 등잔걸이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語源由來辭典’이나 기타 문헌에서 トウダイグサ(燈臺草)의 유래를 위와 같이 해설하게 된 배경이다.

    (3) 우리말에서 ‘등대’의 뜻

    사진8.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중 ‘등대’ 참조 : https://ko.dict.naver.com/#/entry/koko/f0524b2518d4452a8ceda3a487f6fa32

    그러면 우리말은 어떠할까? 먼저 현재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면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뜻한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등대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인천 무의동에 소재한 팔미도 등대로 알려져 있다. 1906년에는 제주도의 우도에도 등대가 건설되어 점등이 되었다.

    우리말의 등대는 일본어처럼 옛적에 사용하던 등잔걸이의 뜻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문헌에서 1903년 이전에 등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를 살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등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등잔걸이의 뜻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トウダイグサ(燈臺草)를 우리말로 ‘등대풀’이라고 하면 오역 또는 잘못된 번역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최초로 등대가 건설된 1903년에서부터 등대풀이라는 한글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1937년 사이에 등대(燈臺)라는 말은 오로지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뜻했는지를 실제 문헌이나 자료를 통해 살펴 보면 이 역시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먼저 1903년 이전의 문헌을 살펴보자.

    – 박통사신석언해(1765) : 상과 盤과 찻반과 燈臺와 잔(상과 반과 찻반과 등대와 차)
    ​- 담헌서(1783) : 舖商林哥有黃錫燈臺 長數尺 可油可燭(포상 임가의 집에 황석으로 만든 등대가 있는데, 길이가 두어 자나 되며 기름을 쓸 수도 있고 촛불을 쓸 수도 있었다.)
    – 일성록(1788): 黑漆燈臺 2脚(검은 옻칠한 등대 2개)
    – 조선왕조실록(순조, 1832) : 蠟燭二十担, 燈臺三十(납촉 20십단, 등대 30개)
    – 한불자전(1880) : 등대 Manche de lanterne, manche de bois ou de bambou au bour duquel est suspenue une lanterne​(램프의 손잡이, 끝에 램프가 매달려 있는 나무 또는 대나무로 된 손잡이)

    ​이상의 내용을 보면 등대가 등잔걸이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중요 문헌만을 뽑은 것이므로 위와 같은 사용례는 훨씬 더 많이 있다. 파리외방선교회가 조선선교를 위해 만든 사전 종류인 『한불자전』은 한글 표현으로 ‘등대’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한반도에 최초로 서양식 등대(light house)가 건설된 1903년 이후 곳곳에 추가적으로 배의 항로를 알려 주기 위한 등대 건설이 가속화되었고, 1908년에는 등대를 관할하기 위한 소관 관청으로서 등대국(燈臺局)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 이후 ‘등대(燈臺)’라는 표현은 현재와 같은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일컫는 것으로 점차 그 의미가 변화하였다. 그러나 1903년에서 1937년 동안에도 여전히 과거와 같은 등잔걸이의 개념으로 ‘등대(燈臺)’를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존재했다. 대표적 자료로 당시의 『동아일보』를 살펴본다.

    ​- 동아일보(1920. 05. 25.) : 今日은 四月初八日, 종로네거리에 불야성을 이루는 등대도 세울 것이오.
    – 동아일보(1920. 06. 04.) : 天主敎의 聖體擧動, 길이가 일척이 되지 못하는 등대에 금색이 찬란하고,
    – 동아일보(1925. 05. 01.) : 開城釋誕祝賀, 燈臺와 觀燈으로 裝飾하고(개성석탄축하, 등대와 관등으로 장식하고)
    – 동아일보(1926. 01. 16.) : 姦夫打殺, 방안에 걸렷든 등때(燈臺)를 벗겨 한문일의 골을 때렷든​
    ​- 동아일보(1935. 12. 01.) : 鷄鳴, 나의 燈臺, 등잔불 빨간 머언, 머언 山기슭

    이상의 내용을 보면, 등잔(불)을 거는 받침대 즉 등잔걸이의 뜻으로 등대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식 등대(燈臺)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보편화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등잔불의 사용이 계속되고 있었던 한에서는, 여전히 등대(燈臺)는 등잔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 소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일본어 トウダイ(燈臺)는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뜻하지만, 서양식 등대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등잔을 받치거나 걸어두는 등잔걸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리말 등대(燈臺)도 같으며 서양식 등대 건설이 본격화된 이후에도 최소한 1937년까지는 서양식 등대라는 뜻과 등잔걸이라는 뜻이 공존하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등대는 한자어 ‘燈臺'(등대)에 어원을 둔 말이고, 한중일의 동북아 3국은 오랫동안 한자어 문화권으로 같이 묶여져 있었으며 서양식 등대(light house)역시, 시기 차이는 있을지라도, 근세에 이르러 서양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것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웃은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지라도 객관적 사실로서 역사가 그러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의 유래가 서양식 등대(light house)를 닮았다고 해석되지 않고 옛날에 사용하던 등잔걸이를 닮았다는 것을 해설되듯이, 1937년 식물분류학에 근거하여 종(species)에 대한 국명으로 등장한 ‘등대풀’도 서양식 등대(light house)가 아니라 등잔걸이를 닮은 풀이라고 해석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이 쌀을 주식으로 한다고 해서 우리가 쌀을 주식으로 해서는 안되는다는 황당한 발상이 아니라면 말이다.

    여기서 잠정 결론은 이렇다. 백배 양보하여 우리 식물명 ‘등대풀’이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를 번역한 차용어라고 가정하더라도, 오역이거나 잘못된 알량한 번역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주장자들의 일본어 지식이 알량한 것이며,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오해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자, 이쯤되면 의심이 들지 않는가? 과연 우리 식물명 ‘등대풀’이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를 번역한 차용어라는 주장은 맞는 것일까?

    4. 등대풀 이름의 유래기

    (1) 등대풀에 대한 우리말 이름은 정말로 없었을까?

    사진9. 나카이 다케노신(なかい たけのしん),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 조선총독부(1914), p.59 참조.

    앞서 『조선식물향명집』저술 이전에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 없었을 것이지만, 자생지를 중심으로 각 지방마다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 왜냐하면 흰 유액에 약성이 있어 민속적인 자원식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부르는 명칭이 어딘가에는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더니, 하나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나카이 다케노신(なかい たけのしん, 1882~1952)은 동경제국대학(현 동경대학)에서 박사를 수료하고, 1913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한반도 식물조사를 촉탁받아 본격적인 탐사 활동을 벌렸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제1저자 정태현은 나카이 다케노신의 조수(안내역)으로서 그의 한반도의 조사활동을 도왔다. 그 과정은 일본인의 한반도 식물연구에 조력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근대 식물학을 조선인이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첫 조사 지역이 제주도와 전남의 완도이었다. 조사를 완료한 후에 조선총독부가 출판을 도와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는데, 여기에서 제주도에 분포하는 아래와 같은 식물을 보고하였다(<사진9> 참조).

    – 학명 : E. Helioscopia, L.(Euphorbia helioscopia L.)
    – 일본명 : ​トウダイグサ(도우다이구사, 燈臺草)
    – 조선명 : トゥデクル(한글 재구성 : 도-데쿨)
    – 분포지 : 平野ニ 多シ(평야에 많음)

    학명과 일본명 그리고 분포지를 살피면 나카이 다케노신이 기록한 식물은 현재의 ‘등대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카이 다케노신이 기록한 조선명 ‘トゥデクル'(도-데쿨)은 1913년경 당시 제주도에서 사용하던 등대풀의 우리말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등대풀에 대해 현존하는 지방명(향명)은?

    사진10.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국립국어원(2020) 중 ‘등대풀’ 참조

    국립국어원이 정리 및 관리하고 있는 ‘우리말샘’에 따르면 등대풀에 대한 방언으로 제주 지역에서 ‘도데쿨’, ‘등디쿨’, ‘등디풀’과 ‘등지풀’로 부르고 있거나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제주도 방언에 관한 아래의 문헌에서 ‘등대풀’을 부르는 방언을 조사한 것으로 추가적으로 확인되는 이름이 있다.

    * 참고 문헌

    – 석주명, 『제주도 방언집』, 서울신문사출판부(1947) : 도데쿨
    – 강영봉, 「제주도 방언의 식물이름 연구」, 『탐라문화5』(1986) : 도데쿨, 등듸쿨, 등듸풀, 등지풀
    – 김한주, 『제주도 식물의 지방명과 민간약 이용에 관한 조사』, 제주대 생물학과 석사학위논문(2000) : 도데쿨, 등듸쿨, 등듸풀, 등지풀
    – 현평호·강영호 편저, 『표준어로 찾아보는 제주어 사전』, GAK(2014) : 등듸쿨, 등듸풀, 등지풀

    이상의 문헌과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을 종합해 보면 등대풀에 대한 방언으로 제주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도데쿨’, ‘등듸쿨’, ‘등디쿨’, ‘등듸풀’, ‘등디풀’, ‘등지풀’이 있었거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쿨’은 풀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므로 ‘쿨’과 ‘풀’을 같은 말로 보면 어두의 ‘도데’, ‘등듸’, ‘등디’와 ‘등지’가 남는다. 모두 등대(燈臺)와 어형이 큰 차이가 없이 등대의 뜻을 가진 지역 방언형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등대풀이라는 한글명은 トウダイグサ(燈臺草)라는 일본명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으로 제주도에서 ‘등대풀’이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을 채록해 그 이름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도데풀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문헌에서 등대풀의 향명(방언)은 나카이 다케노신의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1914)에서 최초로 기록된 ‘トゥデクル'(도-데쿨)이다. 그런데 이 도데쿨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제주방언사전'(​http://www.jeju.go.kr/culture/dialect/dictionary.htm)은 ‘도데쿨’에 대한 해설에서 “등대풀, ‘도데’는 일본어 totai에서 온 것”이라고 하여 우리말로 보지 않고 일본명에서 유래했다는 취지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아 어떠한 이유에서 이렇게 판단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도데쿨의 도데(トゥデ)와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의 도우다이(トウダイ)가 어형과 발음이 유사하고, 우리말 표현을 최초로 기록한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가 일본인 나카이 다케노신에 의해 저술된 점이 논거일 것으로 짐작된다.

    도데쿨의 도데가 일본어 トウダイ(totai)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제주 방언과 일본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연구 자료과 더불어 1910년대 당시의 방언과 식물명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지 않아 정확히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가능한 가설을 수립하고 당시의 정황이나 이후의 방언 조사 기록 등을 근거로 가설의 타당성 여부를 확인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도데쿨의 ‘도데’가 일본명에서 온 것이라면 그 가능성은 (i) 채록자인 나카이 다케노신이 의도적 또는 실수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일본어로 대체를 했거나, (ii) 제주 지역에서 이미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일본어로 된 말로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에서 기인할 것이다.

    가설 (i)은 일제가 1930년대 후반경부터 조선어를 쓰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고 창씨개명을 통해 이름을 강제적으로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정책을 펼쳤던 것과 연관지어 흔히 그럴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카이 다케노신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종을 발견해 세계식물학계에 자신과 일본의 수준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에 주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식물의 조선명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조선어에 취약했던 그가 채록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기록들은 자주 했지만, 의도적으로 일본어로 왜곡한 사례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가 조선명을 기록했던 조사서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조선명을 기록한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1914)와 『지리산 식물조사 보고서』(1915) 그리고 일부 목본식물에 조선명을 남긴 『조선삼림식물편』(1915~1939) 전체를 살펴보아도 의도적으로 조선명을 일본명으로 대체한 식물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나카이 다케노신이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조선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실제 제주 방언과 다른이름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조선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등대풀의 경우 그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먼저 석주명(1908~1950)은 1947년에 『제주도방언사전』을 저술했는데 실제로 2년간에 걸쳐 제주도의 방언을 조사한 내용을 정리 및 그 뜻을 해설하고 그 중에 일본어에서 유래한 방언을 별도로 정리했다. 석주명은 『제주도방언사전』에서 나카이 다케노신과 동일하게 “도데쿨 등대풀”이라고 기록해 등대풀의 제주 방언이 도데쿨이라는 명시하였다. 또한 이 도데쿨이라는 이름을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따라서 석주명의 조사 기록이 오류가 아니라면 나카이 다케노신의 기록을 오류로 보기 어렵다. 게다가 만일 일본어 ‘トウダイ'(燈臺)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제주 방언이 있었는데 나카이 다케노신이 이를 잘못 알고 표기한 것이 トゥデ(도데)이었다면, 현재 여전히 남아 있는 ‘등듸’, ‘등디’와 ‘등지’등의 제주 방언에 비추어, 그 말 역시 등대에 가까운 제주 방언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도데쿨이라는 이름은 등대풀과 유사한 방언에 근거해서 채록한 이름이 될 것이다.

    ​나카이 다케노신이 의도적 또는 실수로 인해 실제 제주 방언과 다른 ‘トゥデクル'(도데쿨)을 채록된 것이 아니라면 남은 가설 (ii) 즉, 당시 제주도에서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를 수용하였고 이것이 변형되어 ​トゥデクル(도데쿨)이 만들어 졌고 이 이름이 채록되었다는 가설은 어떨까? 그러나 이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카이 다케노신이 ‘トゥデクル'(도데쿨)을 제주 방언으로 확인한 것은 1913년경이었는데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합병한 1910년 8월 29일부터 불과 3년이 경과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강제 합병을 사실상 거의 마무리지은 1910년 5월경에 『화한한명대조표』를 고시하고, 1912년에는 『조선주요삼림수목명칭표』를 고시하여 임업 관련 업무를 다루는 관공서로 하여금 수탈의 대상이 될 주요 수목에 대한 명칭을 일본명으로 사용할 것으로 강제했는데, 이들 대상에는 등대풀을 포함한 초본식물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외 식물에 대한 일본명 사용을 강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본명을 기본으로 하고 제주 방언인 ‘쿨’을 포함한 토착화된 말이 만들어져 외부인에 의해 채록될 만큼 보편화화가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달리 나카이 다케노신의 1913년경 탐사 이전에, 식물에 대한 일본명과 분류학에 정통하면서 일본명을 굳이 제주에 퍼트려 일상적 용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일본인이 제주도에 있었거나 그러한 사건이 있다는 기록이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1910년 이전에 제주와 일본이 교류 과정에서 ‘トゥデクル'(도데쿨)이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주도가 상대적으로 내륙에 비해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오랫동안 잦은 교류로 인한 것이다. 이 과정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와 영향의 문제이다. 제주어가 일본어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즉 만일 이러한 경우라면 ‘トゥデクル'(도데쿨)은 일본명의 번역어가 아니라 상호 교류의 결과 형성된 제주 방언으로서 제주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역사와 언어에 대한 깊고 넓은 추가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살펴 본 것을 이유로 도데쿨은 제주 지역에서 등대풀을 일컫는 제주어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제주어는 우리말의 일부분이기도 하였다. 또한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등대풀’이라는 이름은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인 제주 방언을 조사하여 조선명으로 정한 것으로 추론된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제1저자 정태현(1882~1971)은 1913년경 나카이 다케노신을 수행하여 도데쿨이 채록되는 제주도의 그 현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17년에도 제주도를 탐사했다. 서문과 사정요지에서 밝혀 놓았듯이 “수십년간의 조선 각지에서 실지 조사한 수집향 향명을 주로 하”여 조사하고 기록한 것이 『조선식물향명집』의 조선명이었다.

    (4) 참고사항: 중국의 등대와 등대초는?

    사진11. 중국의 ‘搜狗百科’ 중 ‘灯台’ 참조 : https://baike.sogou.com/v8405731.htm?fromTitle=%E7%81%AF%E5%8F%B0

    앞서 ‘燈臺'(등대)는 한자어로 한중일이 한자문화권으로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중국이 정말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그 뜻을 공유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최근의 중국어 단어와 어휘를 해설하는 ‘搜狗百科'(수구백과)에서 간자체 ‘灯台'(등대)를 검색하면 등잔걸이(油灯的底座)와 서양식 등대(灯塔, light house)의 뜻을 함께 해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한국와 일본에 개방이 비해 늦었기 때문에 최근의 사전에서도 옛말인 등잔걸이가 함께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燈臺(등대)라는 말은 한자어로 한중일이 모두 등잔걸이의 뜻으로 사용하였고, 서양식 등대(light house)가 도입되어 건설되면서 점차 그 뜻이 변화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燈臺草'(등대초)로 중국의 옛 문헌을 찾아 보면 정확히 어떤 식물을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송나라 때의 『경사증류비급본초』(1082)에도, 명나라 때의 『본초강목』(1596)에도 이름이 발견되며, 현재 중국에서는 ‘燈臺菜'(등대채)를 돌나물과의 Sedum amplibracteatum K.T.Fu(1974)을 일컫는 다른이름이기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燈臺'(등대)를 식물의 형태가 등잔걸이를 닮았다고 보아 식물명에 사용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일본에만 고유한 것도 아니다. 과거 한자를 공유하던 문화권의 각국에서는 ‘燈臺'(등대) 즉, 등잔걸이는 그 형태가 비슷한 식물을 일컫는 것으로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5. 결론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은 이른 봄에 줄기를 세워 그 끝에서 여러 꽃이 피어 나는 모양이 마치 옛날에 등으로 불을 밝힐 때 사용하던 등잔걸이라는 뜻의 등대(燈臺)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으로, 제주에서 사용하던 방언을 채록한 것으로 추론된다. 일본명 トウダイグサ(燈臺草)가 우리말 등대풀과 같고 그 유래가 유사하기는 하지만, 과거 문화의 상호 교류라는 측면에서 더 연구와 규명이 필요할 뿐, 우리의 식물명 등대풀이 일본명을 오역한 것도 나아가 번역한 것으로 이해될 것도 아니다. 앞서 한반도를 살아간 옛사람들이 사용하던 이름이 우리의 식물명으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외세에 국권을 빼앗기고 글과 말마저 상실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해방을 맞았지만 일제의 앞잡이로 민족과 민족 문화를 탄압하며 호가호위하던 자들은 해방정국의 어수선 과정에서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였다. 그 역사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로 내면의 아린 상처로 남았다. 이러한 아픈 상처와 현실은 친일이라는 호명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살피지 않고도 쉽게 호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식물향명집』은 비록 과학은 일본으로부터 이식받아 배운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우리 이름(조선명)만은 실제로 조선 민중이 사용하고 불렀던 실제 이름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더불어 역사와 전통으로 계승된 문헌에서 찾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수록된 식물명은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었기에 함부로 친일을 거론하거나 번역이니 오역이니 따위를 언급할 대상이 아니다.

    알량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 문헌의 몇 문구를 얼기설기 엮어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호도하여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만들고 책을 파는 따위의 행위가 일시적으로 우리의 귀를 멀게 하고 눈을 가릴 수 있다. 그들이 찾지 않으며 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식물에 대한 이해와 우리의 문화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어딘 가에 숨어 있던 기록과 자료들은 서서히 그러나 끈질기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진정으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준다.

    2020년 3월 22일에 쓰다.

    푸른솔의 식물생태 이야기 연재 칼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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