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순이 남매는 왜 흥남부두에 갔을까?
    [역사의 한 페이지] 한국전쟁, 피난 그리고 이산가족
        2020년 03월 18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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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사진] 1950년 12월 24일 흥남부두 철수작전 당시의 흥남부두 장면이다. (국가기록원 사진)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고난과 아픔을 잘 그린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1,2절 가사이다. 이 노래는 현인이 불러 1950년대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노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금순이와 오빠는 전쟁 중 1.4후퇴 때 북한의 흥남부두에서 헤어졌다. 오빠는 다행히 배를 탔고 부산에 와서 지금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통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는 북쪽에 남았는지, 아니면 배를 탔는지 알 수가 없어 늘 마음이 무겁다. 전쟁통에 부모는 죽었고, 천지간에 혈육은 남매뿐이다. 오빠는 오늘도 부산 영도다리에서 초생달을 쳐다보며 헤어진 여동생이 살아있기를, 그리고 살아있다면 굳세게 버텨내어서 나중에 꼭 만날 것을 빌고 또 빈다. 남매의 뒷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금순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도다리에서 애타게 동생을 기다리던 오빠는 어찌 되었을까? 둘은 결국 만났을까?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이 노래가 최근 코로나19를 줄기차게 ‘우한 코로나’로 지칭하는 어떤 신문의 칼럼에 소환되었다. 시련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내용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가 대구에서 만들어진 것을 소개하면서 “굳세어라 대구·경북”을 외치며 끝나는 칼럼이었다. 코로나19 검사와 퇴치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빈정거림과 조롱만 빼면 그럭저럭 읽어 볼만한 칼럼이었다. 이 글을 보고 오래 전부터 쓰려다가 미뤄 둔 금순이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한국전쟁과 피난, 그리고 이산가족에 얽힌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와 《굳세어라 금순아》

    먼저 말 나온 김에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의 탄생 배경부터 살펴보자.

    이 노래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에 만들어졌다. 가혹한 전쟁의 고통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는지 이 노래는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만들어졌고 현인이 부른 이 노래는 ‘영도다리’와 ‘국제시장’이라는 가사 때문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기 쉽지만, 뜻밖에도 대구에서 만들어진 노래였다.

    이 노래가 창작된 곳은 대구 교동 시장에 있던 오리엔트레코드사였다. 오리엔트레코드사는 해방 직후였던 1947년 이병주가 악기사를 개편하여 설립한 곳으로 1층은 레코드사와 녹음실로 운영하고, 2층은 작곡가 박시춘의 부인이 ‘오리엔트다방’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작사가 강사랑은 여순사건에 관련된 인물로 오랜 도피생활 끝에 1950년대 초반 옛 친구이자 당시 오리엔트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일하던 박시춘에게 찾아와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때 강사랑은 오리엔트 식구들과 냉면을 먹으러 가던 중 피난민의 초라하고 지친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가사를 착상했다고 한다. 박시춘은 곧바로 이 가사에 곡을 입혀 드디어 《굳세어라 금순아》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노래의 녹음 장소는 2층의 오리엔트다방이었는데, 녹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낮에는 시끄러워서 밤 12시가 넘어 음반작업을 시작했고, 방음을 위해 군용담요를 여러 겹 엮어 사용했다고 한다. 불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늘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금순이 남매는 그렇게 추운 겨울날 왜 흥남부두에 몰려갔을까? 그들이 북한 땅을 떠나야 할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진]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에서 사용된 종이 표지판 (박건호 소장)

    필자는 몇 년 전 경매에서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만든 표지판을 하나 수집했다. B4용지 크기 정도의 종이에 이미 색이 바랜 글씨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왼쪽 구석에 ‘5917’이라는 번호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983년 KBS에서 했던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 때 사용된 것으로 보였다. 내용은 1.4후퇴 때 평택에서 살다 헤어진 후 소식이 끊긴 딸 이금봉(54), 손자 이철수(35)를 찾는다는 것이다. 찾는 사람은 현재 춘천에 거주하는 아버지 이재원(74) 등 나머지 가족들이다. 이들의 원래 살던 곳은 함경북도 경원군 안능면이다. 딸과 손자의 나이는 헤어진 당시가 아니라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때의 나이로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역산해보면 1951년 1.4후퇴 당시 딸 이금봉은 21살이었고, 손자 철수는 2살 때였다. 갓 결혼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위 이름은 따로 없다. 피난 당시 사위는 함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4후퇴 당시 사위가 북한 인민군으로 전쟁터에 나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이미 죽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당시 사용된 종이 표지판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경매에 나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런 표지판의 내용들을 보면 1.4후퇴 때 헤어졌다는 사연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당시의 기록사진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도대체 1.4후퇴 때 이산가족은 왜 그렇게 많이 생긴 것일까? 또 하나 특이한 것은 1.4후퇴 때 북에서 남으로 피난 내려온 사람들, 요즘 말로 하면 탈북민들의 수가 아주 많았다는 점이다. 보통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오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북한은 당시 주 전쟁터가 아니었다. 그때는 주로 38선 이남의 남한 사람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1.4후퇴 때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피난 오는 일이 아주 많았다. 물론 이때 서울이 재함락되면서 남한 사람들 다수도 전쟁 초기처럼 다시 안전한 남쪽으로 피난을 가면서 피난 규모는 더욱 커졌다.

    1.4후퇴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의 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한마디로 엑소더스, 대탈출이었다. 이런 북한 사람들의 대규모 탈북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보통 이렇다. 1950년 10월 말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바뀌자 수 백 만의 북한 주민들이 공산당의 폭정이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단적으로 남으로 피난했다는 것이다. 어떤 설명에는 중공군의 지배를 피해 피난했다는 설명도 보인다. 이런 대규모 피난에는 비행기를 통해 뿌려진 전단의 영향이 컸다는 설명도 붙는다. 흔히 ‘삐라’라고도 불리는 전단지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경고하고 자유세계의 안정된 모습을 선전했는데, 이것이 공산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피난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유엔군과 국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했을 때 협조한 사람들은 아마 공산세력의 보복이 두려워 남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이 1.4후퇴 때의 집단 탈북을 ‘공산세계에 대해 자유세계의 승리’를 증명하는 사례로 써 먹고 있지만, 중요한 것을 하나 빼 먹고 있다. 공식적인 설명들이 빠뜨리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국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보자.

    [사진] 1.4후퇴 당시 북한 주민들의 대량 탈북에 대한 대한민국의 공식 설명은 공산폭정과 중공군을 피해서 피난한 것으로 되어있다. 두 장의 사진은 통일부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캡쳐한 것으로 전쟁기념관과 통일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원폭 문제

    한국전쟁 초기 국면에서 승기는 확실히 북한이 쥐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당시 유엔군의 주력은 미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의 허를 찔렀다.

    인천상륙작전! 육지에서는 북한군이 우세했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은 전쟁 초기부터 유엔군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1950년 8월 말 북한군은 거의 모든 전투 역량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고 서울을 비롯한 후방 지역에는 지역경비부대, 병참선경비부대 그리고 훈련이 덜 된 신편 부대가 산재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은 일거에 전세를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켰다. 또한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이 작전 직후인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수복하였고, 9월 말에는 38선 이남의 거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군에 부여한 최초의 임무는 “침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냄으로써 평화와 군사분계선을 회복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엔군은 작전지역을 38선 이남으로만 국한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진통일의 꿈을 가졌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에게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10월 1일 남한군은 3사단을 선두로 하여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다. 공격받던 전쟁에서 공격하는 전쟁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이에 10월 2일 중국의 외교부장 주은래는 남한군의 북진은 상관없지만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을 출동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는 미국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하지만 미군은 10월 7일 38선을 돌파하였고, 유엔도 이것을 사후 승인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0일 원산을 장악하였고 17일에는 함흥과 흥남, 19일에는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즈음 가장 큰 관심은 중국군의 참전 여부였다. 중국군의 참전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을 웨이크 섬으로 불렀다. 웨이크 섬의 회담 날짜는 10월 15일이었다. 이 회담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본인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북진통일을 위해서 군사작전에 제동이 걸려서는 안되므로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낮다고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낸다. 이 편지에서 맥아더는 북한뿐만 아니라 미래의 위협이 될 중국까지 견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인 확전론자였다.

    [사진] 인천 자유공원에 서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배경으로 찍은 각종 기념사진들이다. 한국인들에게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건호 소장)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인은 믿을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허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력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언제까지 본인의 전략을 뒷받침해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거센 반발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도 불사할 것입니다.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중국까지 전선을 확전하기를 원했다. 10월 15일 태평상의 작은 섬 웨이크에서 한 시간 반 동안 이루어졌던 회담에서 예상대로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맥아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이 터진 첫째 혹은 둘째 달에 개입하였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저들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주에 집결한 30만 병력 중 기껏해야 5만~6만명 정도가 압록강을 건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중공군이 만약 평양으로 남진하려고 하면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떼죽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참전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이 참전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리고 참전한다고 해봐야 위협적인 수준이 아닐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폭풍처럼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 앞에서 북한군은 사실상 저항을 포기하였다. 대부분의 전투는 총격전이 아니라 일방적 후퇴였다.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중국으로 도망가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도록 권고할 정도였다. 10월 하순 유엔군은 청천강 이북으로 진입하였고 10월 26일에는 남한군 제 6사단이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였다. 미군은 그 해 크리스마스를 고국에서 보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위협을 느낀 중국은 미국의 만주 일대에 대한 폭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다가 급기야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 아래 인민지원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0월 말 드디어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11월부터는 소련 미그기가 청천강 이북 국경지방에 나타났다. 소련군은 소련의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했다.

    [사진]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이 사용한 컵으로 위에 ‘항미원조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爲國)’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고, 국가를 보위한다’는 뜻으로 그들의 한국전쟁 참전 명분이 담겨있다. 지금도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박건호 소장)

    중국군이 참전하자 맥아더는 1950년 11월 5일 압록강 철교 폭파를 결심했다. 이미 한반도에 참전한 중국군이 3만 4000명, 만주에 대기 중인 중국군이 41만 5천명이었다. 중국군이 언제든 압록강 철교를 건너올 수 있다고 판단한 맥아더는 이날 국방부에 철교 폭파 작전 승인을 요구함과 동시에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에게 즉각 공습 준비를 지시한다. 강이 얼면 중국군의 압록강 도하가 쉬워진다고 본 만큼 하루라도 빨리 폭파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앞으로 몇 주 안에 그리고 압록강이 얼어붙기 전에 다리를 폭파하여 중국군을 몰아낼 수 있다면 6.25전쟁은 끝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음날인 11월 6일 미국 정부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모든 군사 작전은 한반도 내에서만 수행하며 중국과의 국경을 포함해 만주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입장으로, 압록강 철교를 폭파할 경우 생길 문제점을 고려해 반대했다. 게다가 이날 미 합참의장은 맥아더에게 보낸 긴급 전문에서 만주 부근 폭격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맥아더 장군에게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때부터 워싱턴과 맥아더의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밀리기 시작한 유엔군은 11월 28일 전면적인 후퇴를 결정했다. 맥아더는 이날 “전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의 주역은 미군과 중국군 양군으로 바뀌었고, 국군과 인민군은 조역이 되었다. 이어 맥아더 원수는 1950년 12월 3일 서부, 동부 전선의 모든 유엔군 부대는 38선으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북진작전에 제동이 걸릴까봐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해 온 맥아더는 이제는 말을 바꾸어 ‘중공군이 개입했으니 이길 가망이 사라졌다. 이기고 싶으면 중국을 때려야 한다’는 확전(擴戰)의 논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이즈음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했다.

    트루먼 대통령도 북한과 만주지역에 대한 원폭 투하를 신중히 검토했다. 최근에 공개된 미 극비문서를 통해 미국은 개전 초기부터 종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원폭 투하를 고려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트루먼 행정부는 6.25전쟁이 발발한 후 이튿날부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전쟁수행계획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엔군의 전면적 후퇴가 하달되기 직전인 11월 3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기자회견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극비 문서로만 존재하던 원폭 투하 계획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이 회견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군사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어떠한 수단도 다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기자가 물었다. “원자탄도 포함되는가?”

    트루먼: 우리가 보유한 모든 무기가 다 포함됩니다.
    기자: 우리가 보유한 모든 무기라고 말했는데, 원자탄 사용을 실제로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트루먼: 원자폭탄의 사용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고려되어왔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트루먼은 ‘현지 사령관의 책임 아래 핵이 사용될 것’이라고 덧붙임으로써, 미 정계는 물론 국제 사회에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왔다. 원자폭탄 사용이 임박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 국무부는 「원자탄 사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서둘러 작성했고, 합참은 원자탄 사용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미국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미군의 참변을 방지하는 유일한 물질적 수단이 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음.

    -1950년 12월 4일 미 합참이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한 비망록 기록

    이어 12월 9일에는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자유 재량권을 요구했고, 12월 24일에 워싱턴 합참에 보낸 전문에서 그는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군수품을 공급하는 중국 내 산업시설을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휩쓸어버릴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전문에서 그는 북측 전장과 만주와 연해주 등 21개 도시가 포함된 폭격 목표물을 파괴하기 위해 34발의 원자탄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계획을 이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에 달하는 중국 장개석 국민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이제 전쟁의 관심은 미국이 과연 원폭을 사용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만약 미국이 원폭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사용한다면 소련은 이에 대응하여 유럽에 원폭을 사용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고작 5년 만에 3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원폭투하 계획은 소련의 상응한 조치를 우려한 영국의 저지와 5억 명의 서명을 받은 ‘스톡홀름 호소문’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반전 여론으로 결국 무산되었다.

    이 즈음 미 합동참보본부의 한국전쟁 종결 복안(1951.3.27.)이라는 비밀문서가 작성되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전선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향후 전쟁에 대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한 것이었다. 유엔군 철수, 38도선에서 현상 유지, 전쟁 확대 등이 검토 대상이었다. 여기에서 미 합동참모본부는 최종적으로 한반도 문제는 더 이상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38선 부근에서 휴전을 고려해야 한다는 정책 의견을 내놓았다. 이제 전쟁은 확전이 아니라 정전(휴전)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었다. 이렇게 전쟁의 큰 방향이 확전이 아니라 정전으로 바뀌면서 원폭 투하를 주장한 강경론자 맥아더는 해임되고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맥아더의 해임은 매우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 대한 해고를 명령하는 긴급 전문을 보낸다.

    미 합중국 대통령이며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귀하를 연합군 최고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하게 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함

    정전을 결심한 미국에 대해 북진통일을 신조로 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반발하였다.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 중국, 북한 사이에 휴전회담이 곧 시작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4후퇴와 이산가족

    그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1.4후퇴 당시 대규모 피난에 대해 살펴보자. 전쟁의 전개 과정을 살필 때 언급한 1950년 11월 30일의 트루먼 대통령 기자회견을 기억할 것이다. 원자폭탄 사용도 고려하고 있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나온 직후 북한 지역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때가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지 고작 5년 뒤라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두 발의 원폭에 대략 24만 명이 죽었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옆 나라 일본이다. 게다가 원폭을 최초로 사용한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한 말이라 그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첫 번째가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다. 북한 주민들이 원폭 투하를 단순히 뜬소문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당시 역사학자로 한국전쟁 당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김성칠의 일기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일기에는 전쟁 중 원폭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4일의 일기이고, 또 한 번은 1950년 12월 4일의 일기이다. 먼저 8월 4일의 일기를 보자.

    어디서 나온 말인지 미군이 원자탄을 쓰기로 하였다는 풍설이 파다하다. 더러는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삐라를 주워 보았는데 서울서 40리 밖으로 피란가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더라고…….그러니 서울에 원자탄을 던질 심산이 아니겠는냐고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유언(流言)도 있다. 이 말에 속아서 하루는 정릉리 사람들까지 보따리를 이고 지고 피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 8월 4일 일기에 등장하는 원폭 사용 소문은 특별한 근거가 없어 보인다. 북한군 치하로 들어간 지 벌써 5주째로 접어드니 사람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빨리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소문들이 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4개일 뒤인 12월 4일자 일기에 언급된 원자폭탄 이야기는 이와 다소 다르다. 시점으로 보아 11월 30일의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관심이 원자폭탄의 투하 여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12월 4일자 일기이다.

    중공군의 대량 참전이 전해지고 UN군의 평양 철수가 소문 만에 그치지 아니한 어제오늘 원자탄을 쓰느냐 않느냐하는 문제가 항간의 이야기 거리로 되어 있다. 서울신문은 하루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사진] 눈보라 속의 1.4후퇴. 당시 북한 주민들의 피난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화제와 관심이 원자폭탄 사용 여부에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남한 사람들이야 그래도 서울신문의 주장처럼 남의 일처럼 여길 수도 있는 것이었겠지만, 그 사용 가능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면 이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북한 지역에서 대탈출이 시작된 것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수백 만 명의 피난민 행렬이 생겨났다. 이미 미 공군의 소이탄 공격으로 북한의 많은 지역이 불타고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거나 다쳤다. 여기에 원폭 투하 가능성이 언급되었으니 누군들 생존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정치적 목적보다는 원폭을 피해 피난을 선택하게 된다. 이념보다는 생존을 위한 피난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시기 북한 주민들의 대규모 탈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실 것이다. 그런데 이 피난 과정에서 왜 그렇게 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을까?

    남쪽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오다보니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불가피하게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겠다. 놀이공원 같은 곳에서 사람들 속에 치여서 미아가 발생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단순한 이유 말고 또 따져봐야 될 것이 있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이다. 처음 전쟁이 터졌을 때의 피난은 여름이었다.

    그런데 1.4후퇴가 있었던 때는 12월과 1월 추운 겨울이었고 북한은 통상 남한보다 훨씬 춥다. 때로는 눈보라 속에서 피난을 가야되는 상황이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가사는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린아이부터 90대 노인까지 포함되어 있을 가족이나 친족 구성원들이 한꺼번에 남하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도 있었을 것이고, 고령의 노인에, 환자도 있을 수 있었겠다. 그러니 ‘우리들은 상황보고 날 풀리면 내려갈 테니 너희들부터 먼저 내려가거라’, ‘병든 할아버지를 우리가 모시고 있을 테니 너희들만 피난 갔다 오너라’, 아니면 ‘준비되는 대로 먼저 떠나거라. 우리는 내일 모레 떠나겠다. 부산의 영도다리에서 보름 뒤에 만나자.’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내려오는 계획도 세웠을 것이다.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그들은 몰랐다.

    북한에서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북한대사관 공사의 증언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역사적 사실과 상당히 부합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증언에는 김일성이 핵 개발을 시작하는 근원적 이유도 한국전쟁 중 있었던 원폭의 공포와 북한 주민들의 탈출 때문이었다고 밝히는 대목도 눈에 띈다.

    북한에서는 이때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만주 또는 한반도 북부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김일성도, 모택동도, 스탈린도 그 첩보를 믿지 않았지만 북한 주민들은 원자폭탄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채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내가 북한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그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미국이 원자탄 쏘면 다 죽는다.’

    ‘식구들 모두가 피란을 갈 수는 없으니 아들만이라도 살아남아 대를 이어라.’

    이것이 당시 북한 주민들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물론 원자폭탄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유를 찾아 월남한 피란민도 많은 것으로 안다. 남한 사람 대부분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6.25전쟁 이후에 태어난 내가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확언할 수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시 원자폭탄에 대한 북한 주민의 공포심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핵무기에 대한 북한 주민의 공포심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본 것 같다. 당시 북한 노동당의 주민 통제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느슨했다. 당에서 아무리 ‘미국은 절대로 원자탄을 쏘지 못한다. 남으로 내려가지 마라’고 선전해도 피란민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들을 모두 총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피란민 행렬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김일성은 핵무기의 위력을 절감했다. 물리적, 군사적 위력이 아니라 인간에게 미치는 심리적 위력에 대해서다. 김일성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심하고 핵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42페이지에서

    [사진] 1.4후퇴 때 어느 할머니의 증언으로 당시 왜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는지에 대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보인다. (통일부 유튜브 채널 캡처)

    다수의 사람들은 잠시 원폭을 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피난길을 떠났다. 그러니 가족의 일부를 남겨놓고 떠났던 것이다.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도 다수 등장하는 말이다.

    “잠시 피했다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때 헤어진 이후 헤어진 가족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 피난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알았으면 그들은 다른 결정을 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같이 내려오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다 같이 안내려오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

    1.4후퇴 때 왜 그렇게 많은 북한 주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또 그 당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긴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해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공산세계에 대한 자유세계의 승리를 말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므로 껄끄러운 진실을 굳이 대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동맹인 미국의 원폭 투하 계획까지 언급을 해야 되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산가족문제의 근원적 책임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이니 그들에게 책임을 다 지우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중요한 것은 이산가족 1세대 대부분은 고령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눈물을 남북의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닦아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만이라도 자유로운 방문을 허용해 줘야하지 않을까?

    [사진] 한국전쟁 발발 4개월 전에 찍은 어느 가족의 기념사진이다. ‘단란이룬 식구들’이라고 써 놓았다. 그러나 전쟁 후 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전쟁의 광풍을 피해 이 단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박건호 소장)

    <참고한 글>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1993

    이흥환, 『미국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 삼인, 2003

    김태우, 『폭격』, 창비, 2013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 2018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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