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항하는 인간 그리고 수인들의 연대
    [소설 한국사회] 알베르 까뮈 『페스트』와 코로나19
        2020년 03월 05일 0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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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12쪽)

    소설 『페스트』의 첫 문장이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전염병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렸다. 현실과 흡사하다 못해 마치 이 모든 것을 예언하듯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 모든 일정이 취소되면서 집에 앉아 확성기처럼 틀어대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국면을 보고 있노라면 곧 재앙이 당장이라도 들이닥쳐 집 현관문을 두드려댈 것만 같았다.

    거리는 휑했고 버스와 지하철에선 마스크 깊숙이 얼굴을 감춘 이들이 서로를 피하며 어떻게든 닿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내비쳤다. 마스크 없이 나선 나를 힐난하는 눈초리가 역력했다. 내릴 역을 셈하면서 혹시나 사래라도 들려 비어져 나올 기침을 단속하느라 침을 몇 번이고 삼켰다. 그날은 몇 배로 노곤했다. 귀가 후 손을 씻고 세수를 연거푸 했다. 종일 낯이 뜨거웠다. 마스크 없이 밖으로 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규칙이 지배하는 낯선 곳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무수한 상념이 달려든다.

    코로나19 발병 초기 청도대남병원 폐쇄 정신병동의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빠르게 늘었다. 10년 20년 지역사회와 격리된 폐쇄 병동이었기 때문에 전파가 쉬웠다. 방역 당국은 ‘코호트 격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나는 이 말이 낯설어 자주 찾아봤다. ‘감염 확진자가 발생한 의료 기관이나 시설을 전부를 봉쇄하는 조치’ ‘Cohort’는 ‘동일 집단’ ‘지지자’란 뜻이기도 하다.

    『페스트』의 오랑시는 도시 전체가 ‘코호트 격리’된 셈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조용한 해안 도시 골목길에선 느닷없이 비틀거리다 죽어 가는 쥐떼가 이따금씩 출몰했다. 죽은 쥐를 가장 성가셔하며 처리해야 했던 이는 아파트 수위였다. 의사 리유는 죽은 쥐들을 예의주시하며 자주 물었고 그럴 때마다 수위는 “이런 건 요컨대 수위가 걱정할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가 기계적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을 때마다 리유는 몸은 괜찮냐 물었고 어딘지 개운치 못한 건 사실이지만 일상적인 스트레스일 거라 답한다.

    『페스트』의 초점화자가 의사 리유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리유 주변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은 수위였다. 공장창고, 쓰레기통 주변, 하수구, 도랑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 수십만의 쥐떼 시체를 발견했지만 쥐잡이 담당과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으레 청결하지 못한 슬럼가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쯤으로 취급했던 탓이다.

    페스트가 발병하면서 소설은 정직하게도 가장 취약한 계층들부터 하나둘 죽는 상황을 보여준다. 쥐잡이 담당과에선 수거한 죽은 쥐가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고 보도했고 시민들은 안도했다. 오랑시는 흔히 말하는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쳤던 것이다. 점점 번져나가는 죽음의 행렬은 노약자, 노동자, 취약구역에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밑바닥 계급의 죽음은 화려한 관광도시 오랑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었다.

    “쥐들!” 하고 그는 내뱉었다. 푸르죽죽해진 입술은 촛농 같았고 눈꺼풀은 무겁게 아래로 처지고 숨은 단속적으로 짧아지고 멍울의 통증 때문에 사지가 찢기는 듯하고, 자기 몸 위로 이불을 끌어 덮고 싶어 하는 듯, 아니면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그를 끊임없이 불러 대기라도 하는 듯, 수위는 자리 속 깊이 몸을 쪼그리고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려 숨 막혀 하는 것 같았다.

    “죽었습니다” (35쪽)

    리유는 최초로 수위에게 사망선고를 하고 멍울 진 환자들의 상태를 심상치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신문은 조용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51쪽) 리유와 학자 카스텔은 조사 끝에 페스트라고 당국에 보고했고 오랑시는 이를 의심했다. 실시간 활기차게 움직이는 도시, 매일 축제가 열리고 관광객들이 여행 오는 도시에 ‘페스트’를 선언하는 일은 비현실적이었다. ‘페스트’ ‘페스트’ 전문가들이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워 그 단어를 우물거리는 순간에도 세상은 희생자 수십 명을 후려쳐 쓰러뜨렸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소설은 정직하게도 가난뱅이들의 죽음의 행렬을 전반부에 빼곡히 보여준다. 작품의 상당한 분량이 오랑시 하층계급의 죽음으로 채워져 있다. 페스트가 오랑시 전체의 문제가 되면서부터 시의 문이 폐쇄됐고 시를 탈출하려는 이들은 끝내 총살당했다. 물론 작가는 돈을 찔러 넣어 시를 미리 탈출해버린 우리가 흔히 예상할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들은 죽어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폐쇄 병동, 아무도 찾아주는 이가 없는 중증 장애인, 끼니와 돌봄이 끊긴 아이들, 하루 한 끼 무료급식을 먹기 위해 서너 시간을 달려왔던 노인들, 영문 없이 소식이 끊겨 방치된 채 홀로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우는 독거인들, 지금 이 상황은 194x년의 『페스트』를 잇는 2020년 한국의 이야기다.

    장애인단체, 인권단체 등의 국가인권위 긴급구제 요청 기자회견

    때마다 홀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빈다는 말이 송구한 사회. 그래서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비는 모든 명복은 참혹하기만 하다. 일상성에 매몰된 도시, 기계적이고 반복된 습관 속에서 느슨하게 얽혀있던 사람 간의 고리는 감염병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제 나름의 질서를 갖춘 문명의 외관은 무수한 간과된 죽음을 하나의 스캔들로 치부해왔음을 상기시킨다. 이에 언론을 뒤덮은 ‘최악의 사태’는 비용 편익을 운운하는 일이다. 경기불황, 급락한 GDP. 암담한 시장, 비용 그리하여 비용.

    비용 편익을 위해 조성된 비인권적 수용시설, 장애인, 노약자, 사회적 약자들은 모두 비용 때문에 취약해진다. 부당·초과노동에도 생계를 포기할 수 없어 일터로 내몰리는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각종 서비스 노동자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내몰린 채 매일매일 가해지는 위협과 사투한다.

    하지만 『페스트』의 리유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희생과 봉사로 연대하는 ‘보건대’를 만든다. ‘보건대’를 만들기까지 인간의 놀랄 만큼 어리석고 사악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페스트로부터 ‘반항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기까지의 지난하고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내적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고 말하는 파늘루 신부마저 보건대에 합류하는 힘은 ‘어린아이의 죄 없는 죽음’을 목격한 뒤였다.

    “그 외침은 단순히 어린애의 외침만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모든 인간의 하소연, 세월 저쪽에서 와서 인간 역사의 종말과 더불어서야 끝나게 된 비판적인 익명의 외침이다.” (38쪽)

    어린아이의 죄 없는 죽음은 세상 모든 약자들의 죽음이다. 부조리에 대한 많은 고전문학이 약자의 죽음에 대해 신에게 묻는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이반의 말을 빌리면 “진리를 얻는 데 필요한 고통의 몫을 다 채우기 위해서는 어린애들의 고통까지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지금 당장 못 박아 말하거니와 이 진리는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저항한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세상을 죽어도 사랑할 수 없다”는 리유의 절규와 일맥 하는 외침이다.

    까뮈는 페스트의 원제를 ‘페스트’가 아닌 ‘수인들’로 붙이고자 했다. 죽음이 필연적이란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지상의 수인들이다. 수인들의 연대는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고통과 죽음을 당연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실천을 통해서만 존재 가능한 ‘우리’를 일깨운다. 그것이 만약 종교인의 언설대로 신의 뜻이라면, 그런 신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반항하는 인간의 정치적 각성이 아닐까.

    응당 우리가 맞닥뜨릴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신에게 가해질 예상 손해를 계산해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가해지는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분노를 표출할 배후 집단을 지목하고 추상적 공포를 분풀이할 ‘적’을 찾는데 혈안이 된 상태일 것이다. 현현하는 적대 속에서 속수무책 죽어 나가는 사람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힘으로 출구를 찾을 길 없어 주저앉아버리거나 비좁은 병동의 철문 사이에서 바깥의 상황을 몰라 그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그렇게 강압과 은폐로 둘러싸인 사회의 저편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허물어져 가는 사람들을 어느 재난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일로 미뤄두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때론 공모하고 방기했던 근본적 가치가 무엇인가, 타자와 ‘나’가 연결돼 있다는 완벽한 상호성이다. ‘나’와 ‘너’가 구별 없는 상태, 그가 있는 곳에 내가 있다는 윤리의식이야말로 연대적 우리로의 이행을 복원한다.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 자원봉사자들, 광주정신으로 병상을 마련하겠다는 이들, 어려움을 나누자고 십시일반 모금하는 이들, 마스크 몇 장이라도 나눠쓰자며 여기저기 손을 내미는 이들. 이는 모든 시대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을 힘겹게 지탱하는 이들과 함께 “절망적이지만 단조롭고 꾸준한 노력들”을 함께 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 존재지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공동체는 답해야 한다. 실시간 보도되고 있는 모든 약자의 죽음에 동의하지 않는 일, 폐쇄되고 격리된 사람들의 죽음을 새삼스러운 일로 호명하고 그러한 죽음을 정당화하는 비용의 논리를 거부하는 일. 이제 거두절미 정치가 답해야 할 일이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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