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맹장, 오동진 장군 회상①
    [기고]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 역사
        2020년 02월 14일 10: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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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오동진 장군에 대한 기고 글이다. 길어서 2회로 나눠 게재한다. 일독을 권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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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가 아님에도 대중의 기억 속에서 망각된 오동진 장군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은 일송 김동삼과 백야 김좌진, 그리고 송암 오동진 장군이다. 세 분 모두 1962년도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받았다. 김동삼 장군과 김좌진 장군은 연구논문도 몇 편 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 청산리 전투, 신민부, 아나키즘과 관련하여 연구 실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과 같은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오동진 장군은 연구논문 한 편이 없다. 길거리 지나가는 보통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김좌진은 알아도 오동진은 모른다. 식자층으로 그 범위를 넓혀도 김동삼은 알아도 오동진은 모른다. 역사교사나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오동진 장군을 아는 분은 극히 드문 게 우리네 현실이다. 물론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 김좌진 장군은 서술돼 나와도 오동진 장군은 없다.

    오동진 장군은 과연 어떤 분인가? 코뮤니스트가 아님에도 왜 대한민국에서 망각의 존재가 되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80년대 말까지 냉전 체제 아래 만주에 대한 지리적 접근의 곤란과 한반도 분단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이라는 왜곡된 고정관념이다. 아직도 『한국사』 교과서에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으로 기술돼 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피살과 관련해 ‘공산주의’를 이념적으로 두드러지게 부각시킨 것은 분단 상황에서 빚어진 남북 체제 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1992년 한중 수교로 만주와 중국대륙에 대한 사적지 답사가 가능해지면서 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그리고 의열단의 의열투쟁과 물산장려운동만 기억하던 192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군정부의 민정활동과 무장투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0년대 들어서 통의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이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2010년대 들어서 봉오동 전투의 현장이 봉오동 저수지가 있는 ‘봉오동 하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봉오동 격전지 현장은 봉오동 저수지에서 10km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봉오동 상촌’이었다. 더구나 봉오동 전투의 영웅은 홍범도 장군이라기보다 1912년부터 봉오동에 터를 잡고 독립군부대를 양성해 1920년 당시 이미 670명에 이르는 정예군대를 보유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 였음이 밝혀졌다. 봉오동 전투(1920. 6. 7) 당시 일제와 치열하게 교전한 독립군 부대 실체가 ‘군무도독부’를 주력부대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 였음도 학술대회를 통해 밝혀졌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6개 부대가 통합된 통합부대로서 봉오동 전투를 치렀다. 다시 말해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 제19사단 안천 월경추격대대와 교전 끝에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였다. 당연히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었고 최운산 장군은 참모장, 최치흥 장군은 작전 참모였다. 봉오동 전투 당시 김좌진 장군은 제1연대장, 홍범도 장군은 제2연대장, 오하묵 장군은 제3연대장이었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체는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었다. 남만주의 아나키스트 이회영처럼 동북만주 지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다. 북로군정서의 부대 숙영지인 왕청현 서대파와 단기 독립군 무관 양성을 위해 세운 사관연성소 기지터인 왕청현 십리평 역시 최운산 장군이 소유한 자신의 땅에 세워주었다. 2019년에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는 봉오동 전투를 ‘조선의 마지막 전쟁’이라고 대사를 읊지만 1920년 6월 당시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 제1회전’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4개월 뒤 독립군의 승리로 끝난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연장전’인 셈이다.

    사진설명 : 최운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운산 장군(본명 최명길)은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통합부대였던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존재이지만 아직도 교과서에 그의 이름은 실리질 않았다.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마찬가지로 ‘청산리 전투 = 김좌진’ 이나 ‘청산리 전투 = 북로군정서’ 또는 ‘청산리 전투 = 이범석’ 으로 서술돼 있는 것은 문제가 크다. 여기에는 철기 이범석 장군이 저지른 역사왜곡과 관련이 깊다. 이승만 반공 정권 아래에서 초대 국무총리,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한 이범석이 청산리 전투를 묘사한 저서, 『한국의 분노』(1947), 『우둥불』(1971)을 통해 역사를 왜곡한 탓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전개된 ‘ 청산리 전투’에서 전투 승리의 주체를 자신이 소속된 북로군정서 중심으로 기술하였고 심지어 김좌진 장군보다 이범석 자신의 활약상을 크게 미화시켰다.

    역사의 진실은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 부대 독자적으로 수행한 전투가 아니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의군부, 의민단, 신민단, 한민회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궈낸 위대한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청산리 전투’ 승리에서 가장 용맹스럽게 싸웠던 부대는 ‘홍범도 부대’ 였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부대이자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부대였다. 그럼에도 ‘청산리 전투’를 묘사한 이범석의 『우둥불』(1971)에는 홍범도 부대를 일본군 5만 대병력의 기세에 지레 주눅 들어 새벽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 부대로 기술돼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아나키스트’ 였던 김좌진 장군에 대해선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언급하지 않은 채 당시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청년에게 피살된 사실만을 크게 부각시킨 점이다. 이는 분단 상황에 갇혀 반공이념이 국시가 되었던 시대의 한계이자 정치적으로 불온한 의도를 감춘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1920년대 항일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다양한 사상적 조류가 혼재했고 이념 집단 간 갈등과 유혈충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항일독립군끼리 자행한 끔찍한 살육전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유혈 충돌은 일상적인 비극이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의열단 출신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쓴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1992) 117-118쪽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회영, 신채호를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한 정화암(본명 정현섭)은 하얼빈-해림시-영안현을 중심으로 같은 항일독립투사들인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전개된 살벌한 살육전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련지역(필자 주 : 아나키스트 본거지)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경비를 돌던 교민이 20여 세 가량의 청년공산당원을 잡아왔다. 하얼빈쪽에서 공산당 본거지인 영안현으로 가려면 해림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가끔 공산당원들이 해림역에서 체포되어 오는 수가 있었다. 체포되어 온 사람들은 거의 사살해 버렸다. 자루에 산 채로 묶어 넣고 다리 위에서 얼음이 언 강 위로 떨어뜨려 익사시키는 방법,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묶어 그 구덩이에 세워놓고는 흙으로 묻어 죽이는 방법, 넓은 벌판으로 데려가 도망치게 하고는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방법 등 서로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공산당원이라고 잡혀온 그 청년도 순진하고 총명하게 생겨 아까웠다. 언제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청년을 설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들어 볼 결심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시(山市)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사이 그 청년은 사살되어 버렸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아까운 목숨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절친했고 북간도에 최초로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함께 세웠던 독립운동가 정순만조차 연해주 지역 같은 항일독립운동가들 파벌 싸움 속에 도끼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한족총연합회 회장에 추대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이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 항일 청년에 의해 피살된 사실은 비통한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참극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반공 이념에 질식된 분단 사회에서 아나키스트를 적시하지 않은 채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을 살해한 자가 ‘공산주의자’ (코뮤니스트)라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켜 온 정직하지 못한 우리네 현실에 있다. 놀라운 일이지만 현실은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을 이웃사촌 정도로 생각해온 게 대한민국의 지나온 역사이자 부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뮤니스트도 아닌 공화주의 계열 민족주의자 오동진 장군이 『한국사』 교과서에 한 줄 기록조차 없이 그동안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망각된 연유에는 냉전과 분단이 빚은 시대 배경을 안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본다. 겨우 2000년대에 들어서서 통의부-참의부-정의부가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수백 회에 걸쳐 일제와 교전한 항일무장투쟁의 치열한 기록들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의부 4대 참의장 김승학과 정의부 6중대장 정이형에 대한 인물 연구가 햇빛을 보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들어서 생긴 일이다. 자, 그렇다면 송암 오동진 장군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그분의 삶과 죽음을 간략하게라도 복기해 보자.

    오동진 장군이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된 동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대성학교 단기 사범과를 2년 만에 졸업하였다. 더구나 평양 유학은 오동진 장군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접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민족학교인 대성학교 졸업 후 고향 평안북도 의주로 돌아와 일신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아울러 기독교를 열성적으로 전파해 마을 전체를 크리스천으로 전도하기도 했다. 일신학교 교사 생활은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통해 일신학교를 강제 폐간시키면서 교사로서 생활을 접었다.

    이후 오동진은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당시 상업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방편이자 민족 운동가들의 연락거점으로 활용되었다. 1919년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출연하여 평안북도 삭주군에 민족학교 '배달의숙'을 설립했다. 그리고 몸소 교사가 되어 '배달의숙'에서 계연수, 최시흥과 함께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역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오동진이 30세 되던 해 3・1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활활 타올랐다. 오동진의 고향인 평북 의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동진은 3・1만세 운동 당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송암 오동진 장군이 항일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된 계기는 김산, 조봉암, 김성숙 등 여느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3・1 만세 운동이었다. 3・1 만세 시위를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고종 독살설은 오동진 장군에겐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3・1 만세 시위 당시 일제의 체포를 피해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 1919년 4월 ‘광제청년단’을, 그리고 1919년 11월엔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했다. 오동진은 ‘대한청년단연합회’ 교육부원으로서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강연회를 주도했다. 1920년 7월에는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대한광복군 총영’을 조직해 총영장이 되었다. ‘대한광복군 총영’ 은 오동진 장군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시작한 항일독립군 조직으로 상해 임시정부 소속이었다. 제국주의 통치의 전위 기관을 폭파하고 반민족 친일파를 처단했으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대한광복군 총영’ 시절 오동진 장군은 1920년 한 해 동안 국내로 진격해 일제 군경과 교전한 기록이 78회에 이르고 경찰관 주재소 56개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의 최전선인 면사무소, 경찰관 주재소를 비롯해 행정기관 20개소를 파괴했고 일제 군경 95명을 사살하였다.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제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에 대한 습격은 국경지방 일대, 일제의 식민통치 기능을 거의 마비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오동진 장군의 ‘대한광복군 총영’ 의 특기할 만한 사건은 3・1 혁명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 여성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여장부 안경신 의사의 평안남도 도청 폭파 사건이다. 오동진 장군은 미국 상하 의원단 일행이 동양을 시찰하면서 조선에 들른다는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하여 7월 ‘대한광복군 총영’ 결성 직후, 소속 대원들을 신의주, 평양, 서울 등 3개 지역으로 결사대를 편성해 조선에 침투시켰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는 처음 권총과 전단지 4만장, 그리고 폭탄을 휴대하고 7월 15일 광복군 총영을 출발했다. 임신한 상태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넌 여장부 안경신 의사는 평안북도를 지나 청천강을 건넜다. 그러나 평양으로 가는 길목인 평안남도 안주에서 일제 경찰의 검문을 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안경신 의사 일행은 검문하던 일경을 사살하고 8월 1일 목적지 평양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8월 3일 밤 안경신 의사는 치마에 숨겨 놓은 폭탄을 꺼내 평안남도 도청을 향해 힘껏 던졌다. 순식간에 굉음과 함께 평남 도청 건물 일부와 도청 옆 건물인 평양경찰서 건물 벽을 박살내버렸다. 평양경찰서 벽이 박살나면서 일본인 경찰 두 명이 파편에 맞아 즉사했다. 안경신 의사의 투탄에 이어 결사대원들은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을 폭파했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원들의 투탄 사건은 3·1 만세 시위의 패배를 딛고 일으킨 통쾌한 거사였다. 3·1혁명이 잔혹하고 처참하게 진압되었음에도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조선 민중은 야만적인 식민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여전히 불같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사진설명 : 안경신. 오동진 장군이 세운 대한광복군 총영 소속 결사대원으로 그리고 임신부의 몸으로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져 일제를 무력으로 응징했던 여장부 안경신 의사 (출처 : 국가보훈처)

    안경신 의사 투탄 사건 이외에 ‘대한광복군 총영’ 이 일제와 교전한 전투 상황은 치열했다. 1921년 6월 26일 오동진 장군 일행은 관전현(寬甸縣) 누하(漏河) 산중에서 일경과 교전했으며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작전을 펼쳤다. 오동진 장군은 일제 식민통치의 전위이자 조선 민중을 탄압하는 일선 기관인 벽동경찰서 삼서주재소, 삭주군 순사주재소, 학회주재소, 후창군 동흥주재소, 무산군 장삼주재소를 습격했다. 이어서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삭주군 관회면사무소, 소귀면사무소, 초산군 영림창 사무소를 파괴했다. 그리고 친일관리인 후창군수와 자성군수를 처단한 뒤, 문학빈, 공주선, 이능학을 평안북도 벽동군에 파견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6월 오동진 장군은 양기탁, 김동삼과 함께 서로군정서를 중심으로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된 '대한 통군부'를 조직하였고 두 달 후 통의부로 확대, 발전시켰다. 오동진 장군은 군정부(軍政府) 성격인 통의부에서 교통부장, 재무부장, 민사부장을 담당했다. 1924년에는 통의부 군사부장 겸 사령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남만주에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을 보호하고 민족반역자들이 세운 일본민회, 보민회, 일진회를 파괴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통의부는 결성 직후 내부 분열과 갈등이 심각했다. 명색이 통일기구로서 면모를 지닌 통의부였지만 지향하는 이념과 조직 인선과정에서 이견과 갈등이 첨예하게 충돌했다. 통군부 시절에는 복벽주의 성향이 강한 채상덕, 이웅해, 전덕원 등복벽주의 계열 항일지사들이 조직 운영에서 주도권을 발휘했지만 통의부로 개칭되면서 공화주의 성향을 지닌 양기탁, 김동삼, 오동진, 현정경 등이 지도부로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통의부 중앙지도부는 공화주의 성향을 표방한 반면, 통의부 무력기반인 의용군 중대병력은 복벽주의 성향이 강렬했다. 태생적으로 통의부 조직 자체가 이원적 형태를 띤 조직체계로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1922년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가 이후 통의부 – 의군부로 분열되는 과정엔 공화주의와 복벽주의 이념 간 갈등과 불화가 내재돼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섬멸하고 대한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이 항일독립운동의 목표라고 굳게 믿었던 복벽주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자 분투했다. 대한독립단의 채상덕, 이웅해, 전덕원이 그런 부류 인사들이었다. 특히 유림의병장 출신 유인석의 문하생이었던 전덕원은 상투를 틀고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으며 의병대원증을 언제나 품안에 소지하고 다녔다. 그들은 통의부가 썼던 공화정체 이념을 담은 '민국'이란 표현을 부정하고 황제 연호인 '융희'연호를 고집했다.

    전덕원 등 복벽주의 계열 항일독립지사들은 통군부 시절 자신들의 무력 기반을 발판으로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통의부로 조직이 확대 개편되면서 주류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이념 갈등이 내재된 상태에서 조직 인선에 불만을 품고 전덕원 등 복벽주의 계열 항일독립지사들은 1922년 10월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저질렀다. 1922년 10월 14일 야심한 밤에 통의부 중앙지도부를 습격하여 김창의(통의부 선전국장)를 살해하고 양기탁 등 선배 항일독립지사들을 구타 감금하는 하극상을 연출한 것이다. 급기야 해를 넘겨 1923년 2월 통의부에서 이탈한 전덕원 등 복벽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의군부'라는 항일무장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양기탁, 김동삼, 오동진 등 통의부 중앙지도부에선 의군부와 다시 재통합을 추진하였다. 의군부 전덕원과 친했던 이천민(통의부 군사부장)을 내세워 화해를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통의부는 지방대표자 회의를 열어 의군부 소속 항일독립지사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적극적인 토벌정책으로 선회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슬픈 일이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항일독립군들 간에 끔찍한 살육전이 전개된 것이다.

    1922년 12월 공화주의 계열 통의부와 복벽주의 계열 의군부 항일독립군들끼리 전투를 벌이며 상대편에 대한 복수전이 전개되었다. 그 참극의 상징적 사건이 통의부 김석하 부대가 의군부 유격대장 이경일을 처단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통의부에서 이탈한 의군부 항일독립군들은 수시로 압록강 너머 국경수비대를 공격했다. 의군부 유격대(대장 이경일)는 평안북도 의주군 청성진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부장 우치다(內田能孝)를 사살하고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면사무소와 세관을 깡그리 불태우는 빛나는 전과를 세웠다.

    이후 의군부 유격대는 통신선을 절단해 일제의 전화 교신을 차단한 뒤, 조선 군중을 동원해 밤새도록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의군부 유격대 소속 항일독립군들은 국내진공작전을 마치고 의군부 본대로 귀대하던 도중 통의부 무장 병력과 맞닥뜨리면서 참극이 발생했다. 통의부 중대장 김석하 부대는 의군부 유격대와 교전 끝에 유격대장 이경일을 사살하고 그들이 노획한 군자금과 무기를 탈취했다. 동족 간 그것도 항일독립군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인 유혈상잔이었다.

    통의부-참의부 분열과 참극은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과 관련이 깊다

    항일독립투사들 간 유혈 살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통의부와 의군부 간 적대적 관계와 대결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동안 중립을 지켜오던 통의부 1중대장 백광운(일명 채찬)은 1923년 6월 통의부에서 이탈하여 참의부를 결성했다. 백광운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백서농장 농감까지 지낸 보배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열혈 항일투사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 직할부대를 선언한 참의부 1대 참의장 백광운은 통의부 6중대장 문학빈에게 1923년 9월 피살되었다. 이보다 한 달 앞서 1923년 8월 통의부 제5중대장 김명봉이 통의부 무장부대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피살되었다. 김명봉이 이끈 통의부 제5중대는 백광운 부대보다 조금 늦게 통의부를 이탈하여 참의부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통의부와 참의부 간 적대적 관계는 남만주 한인사회를 두고 상호비방전으로 전개되었다. 통의부는 참의부를 향해'광복대업의 반역자'로 맹비난했다. 참의부는 통의부를 향해 상해 임정을 부인, 파괴하는 '국적(國賊)'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통의부를 "야욕의 소굴"이라며 모욕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참의부는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통해 통의부를 비난하는 기사와 성명서를 게재하며 난타전을 벌였던 것이다. 실제로 참의부 백광운은 매달 김승학이 운영하던 『독립신문』사에 거금을 찬조하였고 『독립신문』은 이에 호응해 통의부를 비난하는 기사와 성토문을 실었다.

    사진설명 : 김승학. 상해임시정부 직속 무장부대 참의부 제4대 참의장 김승학(일명 김희산)이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직후 모습. (출처 : 독립기념관)

    통의부와 참의부 간 적대적 관계와 대결은 이전 통의부와 의군부 간 이념대결과는 결이 달랐다. 같은 공화주의 계열임에도 매우 적대적인 대결상태를 연출한 것이다. 여기에는 국민대표회의(1923)가 결렬되면서 전개된 상해임시정부의 분열과 관련이 매우 깊다. 실제로 백광운의 참의부 건설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이 깊었다. 상해 임시정부 학무차장이자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이던 김승학은 통의부 분열과 갈등이 진행되던 와중에 제1중대장 백광운과 제3중대장 박응백에게 선을 대었다.

    임정 고수파로서 상해 임정 요인 김승학은 1923년 12월 2일 백광운과 김원상을 만주에서 상해로 불러들인 것이다. 통의부 중대장 백광운이 통의부 1중대, 2중대, 3중대를 중심으로 조직한 참의부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직후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참의부 본래 명칭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 참의부’(大韓民國 臨時政府 陸軍駐滿 參議府)였다. 그러나 1923년 1월 ~ 6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당시 김동삼, 오동진을 비롯한 통의부는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배격하고 임시정부를 고쳐서 다시 쓰자는 개조파에 속했다.

    그런 연유로 국민대표회의가 성과 없이 무산되자 통의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임시정부로서 자격이 없다며 그 존재를 부정했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임정 산하 육군으로 자리매김한 참의부와 임시정부 존재 자체를 부인했던 통의부의 충돌은 전체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 속에서 어쩌면 예견된 참사였을지도 모른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고 그에 따른 전체 항일독립운동 전선이 분열되는 것과 통의부-참의부 분열은 관련이 매우 깊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이후 임시정부 개조파가 권력을 장악한 뒤 이승만 탄핵과 함께 정부조직을 내각책임제로 개편했다. 그리고 통의부를 계승한 정의부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했다. 이어서 통의부를 계승한 정의부와 북만주 항일세력인 김좌진의 신민부, 그리고 참의부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정의부 김동삼, 오동진, 이탁, 그리고 신민부 김좌진은 국무위원 참여를 거부했다. 특히 임시정부 참여를 두고 정의부 내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의 분열은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정의부 출신 이상룡조차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국무령을 사임할 정도로 당시 임시정부는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거족적인 3・1 만세 운동의 희생을 딛고 성립된 통합 임시정부는 이승만(기호파)-안창호(서북파) 파쟁과 외교독립론 – 무장독립론 등 독립운동 노선 상의 다툼으로 대립과 갈등만 낳은 채 단일한 운동대오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정치정세는 1923년 상반기 내내 열렸던 국민대표회의의 결렬로 이어졌고 이것은 고스란히 남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의 분열과 불화, 그리고 같은 항일독립군들끼리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다. 1923년 6월 상해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며 참의부 조직을 건설한 통의부 5중대장 김명봉과 통의부 1중대장 백광운의 연이은 죽음 이면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과 관련이 깊다. 결국 남만주 항일무장단체인 통의부와 참의부 간 대결은 불화를 넘어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연출한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고교 교사, 저서 <미래 100년을 향한 근현대 인물 한국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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