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복과 칼이 있는 학교 풍경
    [역사의 한 페이지] 졸업사진으로 보는 3.1운동의 힘
        2020년 01월 24일 11: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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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편을 들어주신다는 그 말씀은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去勢)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이제 구주(歐洲)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 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新生)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 칼을 떼어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염상섭,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일본의 사쓰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대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일본법을 따르든지 아니면 죽든지…”라는 협박으로 통치를 시작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근엄한 표정, 토지조사사업을 하고 있는 일본인 관리들, 회초리를 들고 태형을 가하는 헌병경찰의 모습.

    그런데 여기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들의 모습이다.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된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한 [만세전] 주인공의 편지에 그려진 것처럼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은 학교 교사들이 칼을 차던 그런 시대였다.

    시흥공립보통학교 7회 졸업사진(1919년)

    필자는 일제 강점기 1910년대 졸업사진을 꽤 많이 수집하였다. 이 사진들에서는 다른 졸업식 사진들에 없는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제복과 칼 때문이다.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 칼 찬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친 일이 있었던가? 이번 글은 필자가 수집한 1919년 경기도의 어느 학교의 졸업 사진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당시 이 사진을 필자가 운영하던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그 사진이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교과서와 책에 실려 지금은 꽤나 유명해져 있다.

    이 사진을 수집한 때가 2005년경이므로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교차하여 걸린 2장의 커다란 일장기는 이 사진이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임을 웅변하고 있다. 사진에는 ‘시흥공립보통학교 제7회 졸업, 대정 8년 3월 25일’이라는 글이 박혀 있고 구석에는 경성의 카와하라(河原) 사진관 마크가 찍혀있다. 이를 통해 이 사진이 시흥공립보통학교의 1919년 3월 25일 제7회 졸업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시흥공립보통학교는 현재 서울시 금천구에 있는 시흥초등학교의 전신인데, 1919년 졸업 사진 촬영 당시에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었다. 이 학교는 1911년 개교했으므로 100년을 훨씬 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요절한 기형도 시인과 정치인 손학규 현 바른미래당 대표의 모교이기도 하다.

    [사진] 1919년 시흥공립보통학교 7회 졸업식 사진(박건호 소장)

    이 학교는 원래 사립 치명(治明)학교로 시작되었다. 치명학교의 정확한 설립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치명학교는 시흥군 동면에 있던 커다란 한옥을 학교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911년 7월 1일 공립학교인 ‘시흥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던 것인데, 학교 건물은 치명학교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사진 속에 배경이 바로 그 건물이다.

    지방 공립보통학교 건물은 대부분 군현이 합병되면서 쓸모없게 된 지방관청 건물이나 향교를 사용했는데, 시흥공립보통학교는 그 경우와 달랐다. 그런데 이 학교 건물이 있던 곳이 현재의 시흥초등학교 자리는 아니다. 1923년 6월 새 건물을 지어 현 위치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이 사진 속 한옥 건물은 작은 방이 4칸 있는 건물이었다. 1910년대 보통학교는 4년제였으므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매 학년별로 하나씩 교실을 썼을 것이다. 여기에 교무실과 소사 사택이 딸려 있었고, 교실 앞에는 100평 정도의 운동장이 딸려 있었다. 조선어, 일본어, 산술 등의 수업은 교실에서 했지만, 체육 수업은 이 운동장에서 이루어졌다.

    교사들 뒤에 서 있는 졸업생들은 총 19명이다. 1910년대 보통학교의 경우 따로 교복이 없어 검은색이나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여기에 교모(校帽)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사진 속 졸업생 총 19명 중 검정 두루마기는 7명, 나머지 12명은 흰색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를 통해 두루마기 색깔은 흰색이나 검은색 어느 것이든 상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흥보통학교 마크가 달린 교모는 19명 모두 동일하게 착용하여 이 학교 학생임을 밝히는 표식으로 삼았다. 머리는 모두 까까머리 형태인데, 사진에서는 모자를 썼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는다. 신발은 절반 정도는 짚신을, 나머지는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지금 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두루마기를 걸치고 교모를 쓴 보통학교 학생들은 당시 그 또래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1920년 통계를 보면 조선에서의 일본인 아동의 취학률은 92%이었는데, 조선인 아동의 취학률은 4%에 불과했다. 이런 복장의 보통학교 학생은 식민지 조선에서 그렇게 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진 속 학생들은 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는 것인데, 일부는 상급 학교인 4년제의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고등학교의 통합과정쯤 되는 당시 고등보통학교는 흔히 줄여서 ‘경성고보’, ‘평양고보’와 같이 ‘고보’로 불렀다. 그러나 1919년 당시 시흥군에는 고등보통학교가 한 군데도 없었으므로,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려면 주변의 큰 도시로 유학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시흥군의 보통학교 졸업생들은 고등보통학교가 있는 다른 지역보다는 진학률이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당시 생도(生徒)로 불렸던 학생들의 얼굴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같은 4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꽤나 커 보인다는 점이다. 어떤 학생은 20대 가까이 되어 보이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어떤 학생들은 10대 초반으로 보인다. 어차피 의무교육이 아니므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나이가 동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머슴의 등에 업혀오는 어린 꼬마 도련님이 있는가하면, 결혼하여 상투를 튼 애아버지 학생도 있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는 당시 보통학교 학생들의 나이 통계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1915년 3월 말의 평균 연령은 1학년은 11.4세, 2학년 13.0세, 3학년 14.5세, 4학년 15.1세이다. 이렇게만 보면 특별히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 연령과 최저 연령 통계를 보면 학생들의 나이 편차가 얼마나 컸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최저 연령은 1학년 6.7세, 2학년 7.1세, 3학년 8.8세, 4학년 9.5세였는데 비해 최고 연령은 1학년 23.2세, 2학년 25.7세, 3학년 25.8세, 4학년 28.6세였다. 최고 학년인 4학년을 기준으로 매우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한 교실에 30세 가까운 아저씨와 10살짜리 꼬마가 같이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상황도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럼 나이 차이가 나는 학생들끼리는 어떻게 대하고 어울렸을까? 학생들의 나이 차이가 크면 나이 어린 학생들이 연장자에 대해 높임말을 했을 것이다. 장유유서의 오랜 관습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크지 않다면 서로 말을 놓았을 것이다. 1910년대 보통학교를 다녔던 학생의 다음 증언을 들어보면 대략 당시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같은 학년이라도 나이가 서로 다른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의무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률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반에 나이 먹은 애들이 반말을 하며 높임말을 요구하자 우리 11살 동갑내기끼리 뭉쳐서 이렇게 말했지요.

    “야, 우리는 모두 1학년이고 함께 히라카나, 가타카나를 배우고 있어. 너희들이 우리보다 나을게 뭐 있어. 우리는 다 똑같아.” 나이 먹은 애들은 우리들보다 속도가 훨씬 더뎠어요.

    이상도(1910년 경기도 출생)의 증언, 『검은 우산 아래에서』, 힐디 강, 2011

    이어서 학생들의 성별을 보자. 이 사진 속 졸업생 19명은 모두 남학생이다. 왜 여학생은 한 명도 없는 것일까? 혹시 이 학교가 남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당시 보통학교는 남녀공학으로 남녀 학생이 한 반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급 학교의 경우에는 남학생들의 고등보통학교(‘고보’) 말고 별도로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가 있었지만, 보통학교에는 여학생을 위한 학교가 따로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자는 바느질 잘하고, 밥만 잘하면 된다는 낡은 인식에다가 남녀칠세부동석의 관습까지 겹쳐 여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학생은 안 온 것이지, 못 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시흥보통학교에 처음 여학생이 입학한 것은 1923년이었다. 한번 금단의 문이 열리자 그 이듬해인 1924년에 4명, 1925년에 7명, 1926년 9명 등 해마다 여학생의 입학이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다수는 남학생이었고, 여학생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재봉, 수예처럼 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 문제가 되었다. 초기 여자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들이 모두 남자 선생님들이라 특별히 재봉, 수예, 뜨개질 그리고 유희 등을 가르칠 때는 선생님들의 부인이 맡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사진] 1925년 시흥공립보통학교 제13회 졸업사진이다. 이 해 첫 여자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앞 줄 제일 오른쪽에 여학생이 보인다. 이 사진을 통해 시흥공립보통학교가 남녀공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시흥초등학교 백년사』 사진)

    사진을 찍은 날짜를 살펴볼 차례다. 사진 촬영한 날짜는 대정 8년 3월 25일, 서기로는 1919년 3월 25일이었다. 2월 하순이 졸업 시즌인 현재의 졸업 시즌과는 한 달 정도 차이가 난다. 지금은 신학기가 3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2월에 졸업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1910년대 당시 학제는 지금과 달랐다. 당시는 3학기제로 4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1학기, 9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2학기,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가 3학기였다. 그러므로 3학기가 끝나는 3월 말이 졸업 시즌이 되는 것이다. 이 졸업 사진의 날짜가 1919년 3월 25일인 이유이다. 일본은 지금도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된다.

    제복 입고 칼 찬 교사

    그런데 필자가 이 사진을 수집한 것은 위에서 살펴본 1910년대 보통학교의 이런 저런 생활 단면에 대한 관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역시 교사들의 살벌한 복장 때문이다. 제복과 칼!

    서 있는 학생들 앞에 앉아있는 4명의 인물들은 모두 교사들이다. 당시에는 훈도(訓導)로 불렸다. 이들이 착용한 검정색 제복과 제모(制帽), 칼이 시선을 압도한다. 일제는 식민 통치를 시작하면서 지배자의 권위를 보이고 위압감을 주기 위해 군국주의적인 복제를 제정·공포하였다. 일반 문관은 물론 교사들까지 금테 제복과 제모 그리고 칼을 착용하게 된 연유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총독부 훈령 제52호(1911.6.6일자)를 통해 “직원 공무집행의 경우는 특히 소속장관의 허가를 받은 자를 제외하고 반드시 제복을 착용할 것”을 시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회초리 든 헌병경찰과 칼 찬 교사로 특징 지워지는 1910년대 폭력성의 상징체계가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복과 칼은 그 시대의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그 시대 권력의 폭력성과 무력을 응축해 보여주는 장치였다.

    의상은 단순히 하나의 장식품이 아니라 한 시대의 특징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기도 한다. 의상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권적인 대상이기도 했다.

    김은산의 저서 『기억극장』에서 나오는 대목이다. 이렇듯 교사의 제복과 칼은 정확히 1910년대의 시대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이런 교사들의 심상치 않은 복장에 대해 당시 학생들도 적지 않게 위협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학교를 다녔던 어느 학생의 증언이다.

    우리는 학교 앞에서 멈췄어요. 옷깃과 어깨, 허리, 팔목 부분에 금장식이 달린 눈부신 검은 제복 차림으로 허리에 칼을 찬 선생님 한 분이 나타나더군요. 모든 일본인 정부 관리들은 칼을 찼는데 교사들도 천황 폐하가 임명한 관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거예요. 열 살밖에 먹지 않은 아이가 그렇게 휘황찬란한 제복에 긴 칼을 찬 사람 앞에 서 있다면 누군들 놀라 자빠지지 않겠어요?

    강병주 증언, 『검은 우산 아래에서』, 힐디 강, 2011

    이제 사진 속 제복 입고 칼 찬 교사들, 그들에 대해 살펴보자. 모두 4명이고 학생들 앞에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들과 관련된 두 개의 의문점이 있었다.

    첫 번째, 그들은 과연 교실에서 칼을 차고 수업을 했을까? 10년대 ‘칼 찬 교사’가 있는 학교 풍경을 강조하다보니 일상생활도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으로만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교실 풍경을 상상해보건대, 여러 정황상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칼을 차고 생활하는 것이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을 다시보자. 주인공 이인화가 일본에서 귀국해 김천역에서 훈도인 그의 사촌형을 만나는 장면이다.

    형님은 망토 밑으로 들여다보이는 도금을 물린 검정 환도(環刀) 끝이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히는 것을 왼손으로 꼭 붙들고 땅이 꺼질 듯이 살금살금 걸어 나오다가, 천천히 그 동안 경과를 이야기하며 들려준다.

    1.2미터 정도의 칼. ‘형님’은 그 칼에 익숙하지 않았고, 칼은 그의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쳤고, 그는 그 부딪침을 최소화하기 위해 살금살금 걸었던 것이다. 많이 불편했던 것이다. 비단 이 소설뿐만 아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의 로이 앤드류스라는 인물이 1912년 식민지 조선에 와서 찍은 영상이 SBS를 통해 발굴되어 뉴스로 보도된 적이 있다. 2016년 5월 7일자 뉴스였다. 필자는 그 영상 속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검정색 제복을 입은 교사가 보통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교사의 제복에 칼이 보이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라면 왼쪽 다리에 칼을 차고 있어야 하는데, 그 왼쪽 다리, 심지어 오른쪽 다리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교실이 아니라 백주대낮의 매우 공개적인 장소임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곳에서 칼을 차지 않았다면 교실 내에서라면 더더욱 칼을 차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시흥보통학교 졸업 사진을 보면 제일 오른쪽 교사의 경우 아예 칼이 없다. 졸업식은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던가? 이런 행사에 칼을 차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평소에 칼을 차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반증이 아닐까?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였다면 제복과 제모, 칼을 다 갖춘 후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다. 제복과 제모, 칼은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그 중 칼 하나를 빠뜨렸다고 그것을 심각한 법 위반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 복장은 공식 복장이고, 일상은 일상인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일제는 1913년에 학교 내에서 수업 또는 평상 업무를 하는 경우에 제정된 ‘수업복’을 입도록 허용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건대 1910년대라고 하더라도 교실 안에서는 학생들 앞에서 칼 찬 교사가 수업하는 것은 실제로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사진] 미국인 로이 앤드류스가 촬영한 1912년의 조선 풍경 중 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모습이다. 교사는 제복을 입었지만 칼이 보이지 않는다. (SBS 뉴스 화면 캡쳐)

    두 번째, 이 사진 속 교사들은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 하는 점이다. 1910년대 경기도 시흥의 어느 보통학교 교사가 4명이라면, 이들의 민족 구성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모두 동일한 제복을 입고 있어서 복장만으로 이들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의 민족 구성을 정확히 말 할 수 있다. 일본인 교사 1명에 조선인 교사 3명이었다. 그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일본인이고 그가 교장이다. 독자들께서는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하실 것이다. 필자가 관상학을 공부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가 이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우연히 수집한 또 하나의 졸업 사진 때문이다.

    시흥공립보통학교 8회 졸업사진(1920년)

    1919년 시흥공립보통학교 제7회 졸업사진을 수집한 지 약 10년이 지난 2016년 4월 필자는 경매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는 바로 수집했다. 시흥공립보통학교 제8회 졸업사진으로 촬영 일자는 대정 9년 즉 1920년 3월 18일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1919년 7회 졸업 사진보다 1년 후에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은 7회 졸업사진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학교 건물 앞에서 역시 교차된 일장기를 배경으로 찍었다. 교사의 수는 4명이고, 학생들의 수는 7회졸업생보다 5명이 적은 14명이다. 검은색 두루마기와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들이 각각 7명씩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이전과 달리 교모를 쓰지 않고 찍었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교모가 없어진 것은 아닐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두 벗고 찍었다. 7회 졸업 사진과 달라진 점은 또 있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보고 찍었다는 점이다. 사진사가 오늘 날의 얼짱 각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이전과 동일하게 카와하라 사진관에서 촬영했다.

    [사진] 1920년 시흥공립학교 제 8회 졸업 사진이다. (박건호 소장)

    이 사진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3.1운동 이후의 교사들의 복장 변화를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기존의 무단통치를 소위 ‘문화통치’로 통치 방식을 바꾸게 되는데, 이전의 통치가 채찍이었다면, 이제는 당근을 물리는 것이었다. 이때 관리와 교원의 복제도 바뀌게 된다. 정확히는 1919년 8월 19일부터 관리와 교원의 제복 착용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 8회 졸업 사진에는 이러한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교사들의 제복과 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민간인 복장으로 완전히 변신하였다.

    교사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의 인물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나이가 나머지 3명에 비해 가장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일하게 양복을 착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특유의 콧수염도 그런 심증을 굳게 한다. 나머지 교원 3명은 자신들이 입은 흰색의 한복 두루마기를 통해 자신이 조선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앞에서 필자가 4명의 교사 중 한 명만 일본인이고, 3명은 조선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명확히 확인해 보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를 검색해보았다. 당시 공립학교 교사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역시 그랬다. 필자가 조선총독부 직원록 자료 중 ‘시흥공립보통학교’를 검색한 결과 1919년과 1920년 이 학교에는 기무라 주토쿠(木村重德), 지영태(池泳泰), 최의순(崔義淳), 윤지병(尹址炳) 등 4명의 교사가 근무했다. 1919년과 20년 졸업사진 두 장 속에 나오는 이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4명인데 사진 속 교사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중 일본인 기무라 주토쿠는 4명 중 유일하게 양복을 입고 있던 그 인물일 것이다. 기무라 교장은 1918년에 이 학교에서 와서 24년도에 경기도 죽산공립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긴 것으로 나온다. 한복을 입은 조선인 교사 3명에 대해서는 지영태(池泳泰), 최의순(崔義淳), 윤지병(尹址炳)이라는 이름은 확인할 수 있으나, 사진 속의 세 인물 각각의 이름을 구별할 수는 없다. 데이타베이스에는 당시 기무라 주토쿠와 지영태는 훈도, 나머지 최의순과 윤지병은 부훈도로 구분되어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7회 졸업 사진의 4명의 교사와 8회 졸업 사진의 4명의 교사가 동일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데이타베이스에서 이 인물들의 이름을 보고서야 그들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것을 금방 눈치 채지 못했을까?

    역시 제복과 칼 때문이었다. 7회 졸업 사진 속의 교사들은 모두 권위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8회 졸업 사진 속에서 그들은 매우 유순하게 보인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로 사람들이 달라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제복의 힘이고 칼의 권위였다. ‘대일본 제국’은 이를 정확히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제복과 칼을 통해 제국의 권위와 힘을 과시하고, 그들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사진] 1919년과 20년 졸업사진 속 시흥보통학교 교사 네 명의 모습을 비교한 것이다. 각 사진에서 좌는 1919년, 우는 1920년인데 모두 동일인을 찍은 것이다. 왼쪽 위의 사진 속 인물이 일본인 교장 키무라 주토쿠이며,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조선인들이다.

    이런 제복의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조선인들의 거족적 저항인 3.1운동이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제복도 사라지고, 그에 딸린 제모와 환도도 사라졌다. 그것은 권위의 붕괴였다. 여기에 8회 졸업 사진 속 학생들이 교모를 벗은 채 사진을 찍어야 했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훈도들이 모자를 벗었는데, 너희 생도들만 모자를 쓰니 이상하다. 그러니 너희들도 같이 벗어라.” 이런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제복과 칼이 사라진 직후 교사들의 당혹감을 우리는 사라진 학생들의 교모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교모를 벗고 사진을 찍으니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학생들의 두발 형태인 까까머리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7회 졸업생들이 교모를 쓰고 찍는 바람에 확인할 수 없었던 보통학교 학생들의 두발 형태였다.

    어쨌든 시흥공립보통학교 1919년 7회 졸업사진과 1920년 8회 졸업사진, 이 두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교사 복장의 극적인 변화처럼 3.1운동의 힘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아끼는 이 두 장의 사진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명의 생도는 어디에?

    마지막 남은 의문이 하나 더 있다.

    작년에 시흥초등학교 총동문회에 연락을 해서 『서울 시흥초등학교 100년사』라는 책을 어렵게 구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2011년도에 발간한 책자였다. 이 책에는 각 연도 졸업생의 수가 표로 만들어져 있다. 이 표를 보면 제 8회 졸업생의 수는 14명으로 사진 속의 수와 일치한다. 그러나 7회 졸업생의 수는 20명으로 나오는데, 졸업 사진 속의 학생 수는 19명이다. 한 명이 모자란다.

    그렇다면 사라진 1명은 어디에 갔을까? 또 그는 누구일까?

    이 궁금증이 쓸모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매우 중요한 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담길 수도 있는 것이다.

    7회 졸업식이 거행되고 졸업 사진을 찍었던 날짜를 기억해 보자. 1919년 3월 25일이었다. 당시는 3.1운동이 시작된 후 3주가 지났을 때였다. 3.1운동은 3월 1일 하루로 끝난 운동이 아니었다. 최소 6주, 길게는 두 달 정도 이어졌던 운동이다. 그러니 3월 25일경이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였다. 3.1운동이 시작된 서울의 만세 시위에 호응하여 곧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때 시흥군이 포함된 경기도 20여 개 군(郡) 중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기도의 만세 시위가 절정을 이룬 시기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이었다. 졸업 사진을 찍은 시점이 바로 그 때였다.

    게다가 수많은 자료들은 당시 보통학교 학생들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심지어 3.1운동 와중에 거행된 졸업식장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렇다면 당시 시흥의 만세 시위에 참가한 시흥공립보통학교 학생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 때 잡혀 감옥에 갇혔다면 또는 태형으로 집에 몸져누워 있었다면 그 학생은 7회 졸업식에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졸업 사진을 찍기 5일 전인 3월 23일에는 시흥군 북면 양평리에서 탄원기씨의 주도로 400여명의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벌였으며, 이날 영등포 당산, 노량진, 양평리 등지에서도 모두 1,200여명의 주민들이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한 일도 있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기사가 하나 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10일자는 3월 7일에 있었던 시흥의 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업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시흥 보통학도 휴교’란 제목의 이 기사 전문은 이렇다.

    7일 오전 11시경에 보통학교 생도 전부가 동맹 휴교를 하고 만세를 부른 후에 헤어졌음으로 주모자 다섯 명을 인치해 엄중히 설유를 하야 깊이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이튿날부터 출교하겠다고 맹세하였다더라.

    [사진] ‘시흥 보통학도 휴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매일신보 1919년 3월 10일자이다. 붉은 테두리 친 부분이 해당 기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검색자료)

    이 신문 기사에서 말하는 보통학교가 어딘지는 정확하지 않다. 꼭 집어서 시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학교가 아니라 시흥군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업을 했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만약 두 번째의 가정이 맞다면, 시흥공립보통학교가 동맹 휴업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게 된다. 당시 시흥에는 시흥공립보통학교를 포함하여 6개의 공립보통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작년 2019년 2월에 문을 연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당시 경찰 자료들을 포함하여 3.1운동 관련 자료들을 폭넓게 검색할 수 있다. 위 매일신보 기사에서 말하는 ‘시흥 보통학도’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검색어 ‘시흥공립보통학교’로 검색한 결과 관련 자료가 여럿 나온다. 그 중의 자료 하나.

    시흥군 시흥공립보통학교 생도 120명 전부는 3월 7일 오전 11시 넘어 동맹휴교를 하고 만세를 부르며 퇴산(退散)하였다. 이에 주모자 5명을 연행하여 설유(說諭)한 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며 다음날부터 등교한다는 뜻으로 맹세함으로써 돌려보냈다.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共7冊 其7

    매일신보의 보도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 자료에서는 학교 이름을 꼭 찍어 ‘시흥공립보통학교’로 밝히고 있다. 당시 시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3.1 운동의 일환으로 동맹 휴업을 하고 만세 시위를 했다면 주모자 5명은 대부분 최고 학년인 4학년 즉 졸업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3월 7일의 동맹휴업과 3월 25일 7회 졸업 사진을 찍을 때까지의 기간에 학교와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3.1운동의 가장 뜨거웠던 시기를 통과하고 있을 즈음 촬영된 졸업 사진에 학생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학생이 3.1운동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 사진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사연과 비밀이 담겨있는 것이다. 필자가 밝힌 것은 이만큼이다. 나중에 또 누군가가 빠진 한 명의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를 기다리며 이만 총총.

    <사족>

    필자에게는 마음의 빚 같은 것이 있었다. 작년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라고 온 나라가 난리였다. 많은 행사가 열렸고, 신문과 온라인에 많은 글들이 쏟아졌다. 필자 역시 시흥보통학교 졸업 사진 2장을 소재로 한 글을 통해 그 열기에 숟가락 하나 얹어보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다 2020년을 맞고 말았다. 그렇다고 3.1운동 200주년이 되는 2119년까지 기다릴 수는 도저히 없을 터, 그냥 체념하고 있다가 음력으로 치면 아직 2019년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설날이 오기 전에 후다닥 글을 써 보리라 결심한 것이다. 급하게 써느라 내용이 다소 거칠고 필설이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이점 독자들께서는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곧 설날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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