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변화시키는
    꿈을 실현하려는 멀티교회
    [그림 한국교회] 공주 ‘꿈의교회’
        2020년 01월 20일 04: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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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직이 무기한 연기됐다는 문자를 받았거든요. 애들하고 크리스마스 케익을 딱 사가지고 오는 시점이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족이었습니다.” “약속을 못 지키는 아빠가 됐어요. 지금 어린 딸이 둘이 있는데… 멋진 자동차 만드는 아빠 모습 보여주지 못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한 가슴 아픈 발언입니다. 올해 1월 6일에 복직될 예정이던 노동자 46명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무기한 휴직 통보를 받았습니다. 2009년, 사측은 쌍용차 사태 당시 해고된 노동자 전원에게 복직을 약속했고, 2018년 9월에 노·사·정의 합의로 꼬박 10년을 기다린 첫 출근이 눈앞이었지만,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로 한순간에 복직의 꿈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꿈을 심는 교회가 있습니다. 공주 ‘꿈의교회’(안희목 담임목사)로 “모든 신자가 사역자로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의교회는 최초 한국침례교회 중 하나로, 성경무오설, 성경해석의 자유, 만인제사장설의 신앙전통으로 창립된 공주침례교회의 바뀐 이름입니다. 2017년부터 ‘멀티교회’로 전환하였는데, 침례교 선교 초기에 복음이 필요한 여러 지역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소한 개념인 멀티교회는 여러 교회들이 독립교회로서 담임목사가 있고 독자적인 행정과 재정을 운영하며 사역을 전개하되, 한 비전과 한 사명을 갖고, 같은 본문으로 동일한 주일설교를 합니다. 대형교회의 지교회나 지성전 개념과는 다릅니다. 교회가 대형화하는 것을 막고, 지역을 기반으로 건강한 중소형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장점을 내세우며, 교회 본질과 사명에 집중하고, 복음적 가치를 위해 협력하고,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함께하는 선교적 교회를 지향한다고 표방합니다. 성경의 초대교회가 멀티교회 형태였다고 거울로 삼습니다,

    한국 침례교회는 한 소녀의 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96년, 사무엘 씽 집사의 외동딸인 엘라 씽은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에게 주어질 유산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쓰이길 원하여, ‘엘라씽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설립되었습니다. 여기서 1895년에 한국으로 파송되어 서울에서 복음을 전하던 폴링(Edward Clayton Pauling)은 대교단이 각축하던 서울을 떠나, 공주와 강경에 선교 스테이션을 마련하였습니다.

    한동대 류대영 교수는 저서 『한국기독교의 역사』(한국기독교역사연수소, 2018. 9.14)에서 “조선 개신교회를 주도한 영미권 주류교단의 틈새에, 각자 독자적으로 힘겨운 선교를 해야 했다.(69쪽)”고 썼습니다. 더구나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는 보수적이었고, 샤머니즘과 미신으로 유명한 계룡산이 옆에 있고, 유교와 양반문화의 아성(牙城)이란 지역 특성과 재정적 어려움에다가 5년 동안 선교 결실이 없자, 1901년, 엘라씽선교회 선교사들은 미국으로 철수하면서 모든 것을 캐나다 독립선교사인 펜윅(Malcolm C. Fenwick)에게 이양합니다. 그는 공주로 내려가 충청권 사역을 신명균 목사에게 맡깁니다. 공주침례교회는 신명균 목사와 황상필 목사의 사역의 결과로 실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송현강, 『대전충남지역 교회사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51-52쪽).

    신 목사는 공주를 중심으로 12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1903년 2월에 침례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공주성경학원을 설립하여 교단 지도자들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1906년 펜윅은 ‘대한기독교회’를 창립하고 교단의 기틀을 다지지만, 1917년 일제의 포고령 거부로 성경학원이 폐교되고, 1944년 5월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교회가 폐교되었습니다. 또 1950년 한국전쟁 때, 교회가 인민재판소로 사용되며 다시 폐교되자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옮기거나 신앙을 포기하였습니다. 이 후 부임한 장일수 목사는 1953년에 산성동으로 교회를 이전합니다. 이후 침례신학대학교 1회 졸업생인 노영식 목사를 청빙하였고 성장하고, 1966년 교회를 건축했지만 내부에 분란이 생겨 사임하였고 교회는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공주침례교회가 어려움에 처하자 안중모 목사는 부흥하던 교회를 떠나, 1971년 12월에 부임합니다. 당시 아이들까지 27명의 교인이 전부였지만 전도와 성경 공부에 매진해 3년 만에 교회학교 포함 500여명으로 성장합니다. 1983년 용전동에 새 교회당을 건축하고 교회명을 꿈의교회로 바꿉니다. 류대영 교수는 1960년대 2백여개에 불과하던 침례교가 1990년대에는 10배로 성장했다고 기술하였지만(앞의 책 320쪽), 중소도시의 지역적 한계에 성장이 답보하자, 안 목사는 젊은 지도자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62세에 조기은퇴를 단행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안희묵 목사가 1999년 9월에 취임한 후 공주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꿈의교회’로 개명하였습니다. 2004년에는 “좋은 교회를 넘어 위대한 교회”로의 2014비전을 선포하고 나아가던 중, 2008년 11월, 대전 꿈의교회를 개척하고 멀티교회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2012년 4월, 세종 꿈의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듬해 12월, 종교부지에 교회를 건축 후 부흥합니다. 2017년 6월 세종시 새롬동에 글로리채플을 설립하고 오랫동안 안희묵 목사와 동역한 김준태 목사를 담임목사로 세웠고, 2019년 1월에는 배창효 목사를 공동 담임목사로 세워 멀티교회의 비전을 구체화하여 아름답게 목회를 계승합니다.

    현재 꿈의교회 공동체는 6개(공주, 대전, 세종교회와 글로리채플교회, 비전선교회교회, 글로벌꿈의교회)가 멀티교회가 되어 안희묵 목사가 대표목사로 섬기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성도들에게 자랑이 되며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착한교회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림=이근복

    이번에 교회사진을 찍는데 송창희 집사께서 수고하였습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사역하던 때(1983-1990) 만났는데, 지금은 공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본당에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옆 건물의 아카이브에서 공주침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신학자인 안용성 목사(그루터기교회 담임)는 『로마서와 하나님 나라』(새물결플러스, 2019. 2. 19)을 출간했습니다. 복음서와 로마서의 중심주제가 똑같이 하나님 나라임을 규명하여 속죄론의 틀에 갇혀있는 바울신학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킴으로, 한국교회에 만연한 이원론을 극복하고 믿음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신앙개혁의 길을 열었습니다.

    “로마서를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의미다….. 이 책은 로마서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이며 십자가의 속죄는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수많은 행성 가운데 하나임을 보일 것이다.”(26쪽)

    하나님 나라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꿈인 까닭에 이 책이 참 소중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생명, 평화, 공의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구현되어 나가길 꿈꾸어 봅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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