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십니까 내가 죽습니다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황정은 「복경」
    2019년 12월 04일 03: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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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의 부고가 들려왔다. 밖에선 앵콜을 외치는 수천 명의 관객이 있다. 어둠이 그를 잡아당긴다. 희뿌예지는 무대 위에서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니 노래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전주가 시작됐다. 열과 성을 다해 마이크를 움켜쥔다.

지난 24일 가수 아이유는 콘서트 중 구하라의 비보를 접했다. 힘겹게 무대 위에 오른 아이유는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아니 불러야 했다.

“보이십니까 내가 웃습니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 병을 갖고 있다. 자의와 상관없이 터진 웃음 때문에 밟히고 쫓겨난다. 그는 코미디언이 돼서 진짜 웃음을 선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그를 비웃었다.

아서처럼 한국 사회에는 웃음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할 직업이 많다. 감정 노동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사측이 내건 어떠한 경우에도 ‘미소 짓는 인간’이란 지침에 맞게 자신을 일그러뜨려서라도 웃어야 한다. 그중 연예인, 아이돌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늘 카메라 앞에서 즐거운 표정을 짓고 윙크와 하트, 손키스를 보내며 웃음을 생산해낸다. 피나는 연습과 훈련의 고통 속에서 눈물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 위에 올라 관객의 환호를 끌어내고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 과도한 ‘웃음노동’은 길거리에서 사적 공간에서 SNS까지 실시간으로 연장된다. 아이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대중이란 소비자에게 위로와 열정, 행복을 선사해 왔다.

그러므로 너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매일 웃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웃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웃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는 인간입니까. (189쪽)

황정은의 「복경」은 감정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잘 울지 않는 아이였던 ‘나’는 백화점 판매원이 된다. 고객들의 요구에 계속 웃음과 미소로 화답해야 하는 나 역시 웃음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매일 웃고 있으니까, 곤란하고 불편할 때 나는 항상 웃고는 했으니까.” 웃는 수밖에 없는 ‘나’는 죄송하다고 하거나 웃음 지으며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헬조선 을’ 의 전형적 삶을 살아온 ‘나’는 지독한 고객들이 분노를 퍼부을 때마다 “뭔지 모르게 인간 아닌 것이 소리를 내고 있다,라고 생각해야 흉측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웃으며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웃는 것을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경험하는 인간, 화가 날 때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릴 수 있는 인간과 자기 얼굴에 흡착된 ‘웃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느낀다. 고객과 애초에 인격적 관계를 기대하지 않은 ‘나’는 매출 높은 팀장에게 ‘도게자’에 대해 배운다.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야. (…)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201쪽)

누군가 인간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는 인간 아닌 무엇이 돼야 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일하다 떨어지거나 스스로 떨어졌다.

한때 무수히 쏟아진 오디션 열풍 속에 혹독한 아이돌 고시를 통과한 연예인들이 쏟아졌다. 문화산업은 모두의 기대였다. 금융위기 후 신성장동력으로 성장한 문화산업은 해외 진출을 목표로 아이돌 생산 시스템을 가속화했다. 장기간에 걸친 훈련, 성형수술, 다이어트, 3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까지 고강도 트레이닝은 필수였다. 특히 아이돌의 사생활은 생산 시스템의 효율성 측면에서 관리됐다. 연습생 시절을 걸쳐 데뷔할 확률은 1% 미만이었다. 합숙을 통해 공적 개인적 생활양식을 통제했다. 그중 누군가 압박을 못 이겨 자살하면 ‘자살예방교육’을 아이돌 트레이닝 과정에 포함시키는 식이었다.

이들은 마치 ‘공장 조립라인 (seabrook, 2012, 10, 8)’이었다. 과도하게 표준화되고 합리적인 상품으로 출고된다. 마르크스의 노동 소외는 필연적 결과물이다. 오랫동안 통제된 감정노동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되고 자기 충족적이며 노동자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기도 했다. 아이돌, 연예인은 자기 자신이 상품이기에 자기로부터 탈각됐다. 여기에서 젠더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남성 아이돌보다 걸그룹에게는 절제되고 수동적인 감정표현만 허락됐다. 이들에게 대중은 가부장 권력과 흡사했다.

걸그룹으로 대표되는 아이돌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기호로 소비되곤 했다. 철저히 남성 시선내의 여성으로 평가됐는데 치마, 화장 안경을 일일이 지적받고 검열 당했다. 국민 여동생 같은 명명이 그 예이다. 남성의 응시 욕망이 만들어 낸 스펙터클 안에서 여성 연예인은 물신화됐다.

이를 늘상 각자도생, 사회적 조건의 불평등에 대한 구조적 모순만으로 이야기하기엔 안이한 접근이다. 여기엔 명백히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시민이 될 수 없는 젠더폭력이 존재한다. 여성 연예인들은 아내, 여동생, 등 사적 재산이거나 배타적 소유물로 간주돼 왔다. 여성 연예인 담론에는 언제나 외모, 성적 평판,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추문이 따랐다. 이때 성적 금기의 주체인 ‘오빠’ 가 등장한다. ‘오빠’의 질서를 위반하는 여성 아이돌의 행동과 자기표현의 자유는 무수한 음담패설과 사이버 성폭력의 집합장소였다.

많은 필자들이 이러한 여성혐오 현상을 일베와 루저들의 패배론적 분노 표출로만 해석해왔다.여기에도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작동한다. 생각해보면 언론과 악플러가 주조해내는 담론은 피해자다움의 외피를 쓴 일방적인 여성성의 강조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전근대적 여성성을 소환하면서 현실의 구속력을 행사했다. 최근 성폭력 사건에 관한 판결만 봐도 남성들의 공모와 연대가 공공연히 현실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가령 된장녀 개념녀 이 두 가지 여성혐오에는 경제적 자립능력 즉 더치페이 하는 개념녀와 순결을 유지하고 오빠의 명을 따르는 수동적 존재에 대한 갈망이 들어있다. 소속사, 기자, 판사, 악플러로 자리를 바꾸는 남성젠더의 전방위적 공격으로 가부장적 전선을 구축하는 동시에 공공연한 여성혐오를 통해 수행적이고 집합적인 수동적 객체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폭력이다.

도대체 이것은 정태입니까 동태입니까. 일종의 짐승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웃늠, 웃늠이라는 짐승. 왜냐하면 이것이 내 얼굴에 나타날 때마다 나는 얼굴째 빨아 먹히는 것 같으니까. 보이십니까, 내가 웃습니다 (207쪽)

황정은 「복경」에 ‘나’는 웃음의 가면을 써서 벗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상황을 ‘웃늠’으로 표현한다. 웃는 그것, 흡착돼서 웃는 얼굴에서 달아날 수가 없는 아이돌, 연예인 노동자들의 사적 감정이란 데이트 폭력, 불법촬영, 협박 착취의 재물이 된다. 사생활이 폭로되고 온전한 법적 판결을 받지 못해도 순응적 주체로 현재를 긍정하며 관객과 팔로워들을 향해 웃음 지어야 한다.

웃음이라는 살인적 형식이 내면화되면 자기의식, 주체성에 시선이 개입해 들어온다. 가십거리가 돼 줘야 하고 어떠한 불편한 요구에도 웃음으로 일관해야 한다. 이때 얼굴과 신체를 통해 경직된 표현규칙을 익히고 나면 이제 자기 자신은 오로지 상품으로 시장의 요구에 지속적으로 반응한다. 이처럼 유연한 착취에 공모해 온 소비자들은 여성 아이돌의 유명세와 돈은 불공정한 자원의 분배이자 여성성의 대가라 여긴다. 선망과 질시의 복합적 감정은 여성 아이돌이 겪는 불운을 오로지 피해 당사자에 대한 의구심과 비난으로 환원한다. 거기엔 안전하게 욕망할 수 있는 성적 대상에서 이탈한 연예인을 처벌하자는 집단 폭력이 있다.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귀하다는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는? 그것은 어떻게 하게 되는 생각일까, 하고 생각하느라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그것은 어떻게 느끼는 것입니까? 사람이 날 때부터 존귀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학습되는 것입니까?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존귀합니까. 나는 그냥 있었는데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요.(…) 가만히 있어도 존나 귀하다면 그것은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202쪽)

이곳을 떠나버린 두 연예인에게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의 얼굴은 여성성과 웃음이라는 가면을 쓴 가짜 인간-여성이었다. 그들이 느꼈을 수치는 다시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결심이자 상실이다. 이 세계가 강요하는 그럴듯한 ‘인간’의 표정은 ‘얼굴째 빨아 먹히는’ 표정의 인간 아닌 그 무엇이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레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들”, “완벽한 증인들”, “비인간”을 호명한다. 결국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빼앗긴 자들은 “몸이 죽기 전에 이미 죽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증언을 할 수 없는 비인간을 위해, 죽음은 그들을 대신해서, 대리로 말을 한다”고 했다. 웃음 뒤에 숨은 증언 불가능한 상태를 견디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익사해야 했던 그들의 죽음은 이미 시대의 중요한 증언이 된 것이다.

보이십니까 내가 죽습니다.

필자소개
여미애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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