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대첩=김좌진'
    [기고] 왜곡된 개인 영웅사관을 벗겨내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자
        2019년 10월 11일 03: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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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 머릿속에 박정희나 재벌들 얼굴이 떠오른다면 과연 그게 정상일까? 분명한 사실은 박정희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전태일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7명이 모여야 성냥불을 켜 담배를 피웠다고! 그만큼 독일 시민들의 검약한 생활자세와 성실한 삶이 오늘날 독일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독일의 인식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역사청산의 유무에서 갈린 때문이다. 독일은 종전 후 철저하게 나치 전범들을 처벌했고 역사적으로 단죄했다. 히틀러 집권 기간 독일이 정치대국, 경제대국, 군사강국이 되었을지언정 그것을 히틀러가 가져다 준 선물로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히틀러의 선전과 선동에 집단적으로 지성이 마비된 당대 독일 시민사회를 철저히 반성했다. 그리고 종전 후 나치 전범들에 대해 과감하게 역사 청산을 단행했고 지금도 나치에 협력했던 자들을 찾아내 법정에 세우고 단죄한다.

    무엇보다 독일 연방 차원이든 주 정부 차원이든 독일은 연방과 주마다 ‘정치교육원’이 설립돼 있다. 이른바 독일 시민을 대상으로 정치교육, 바로 민주시민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보이텔스 바흐 합의는 그런 노력의 결과이다. 오늘날 독일 중등학교에서 정치사회적 쟁점이 되는 현안들이 날것 그대로 교실 수업 현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자라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주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기 위함이다. 바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제1의 목표임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사회정의가 바로 서고 독일이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을 배반한 친일세력들이 해방 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 지배세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정의가 좌절된 것이다. 그 결과 학교교육은 철저하게 지배권력의 도구로 전락하여 편향된 정치교육! 바로 (반공) 이념교육으로 덧칠되었다. 수십 년 동안 강요된 ‘신민(臣民)교육’ 속에서 ‘한강의 기적’은 재벌이나 독재자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루 14시간씩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매일 죽고 싶다’던 전태일의 일기처럼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전태일들’을 국민의 기억 속에 집단적으로 망각시켰다. 제도교육과 제도언론을 통해!

    ‘한강의 기적’이 마땅히 그들 ‘수많은 전태일들’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학교교육이나 제도권 언론들은 하나같이 독재자 개인을 추앙하고 선전했다. 그리고 곁들여 대재벌 그룹 회장을 온갖 매체를 통해 신화화하여 동경하게 만들었다. 그런 잘못된 역사를 우리는 영웅주의 사관이라고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으로 기술하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젠 21세기이다. 역사를 개인 영웅사관으로 기술하고 암기할 때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봉오동전투의 실질적 주역을 밝혀내고 바로 세울 시점이다.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체는 몇 차례 학술세미나와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 최운산 장군을 비롯한 최진동-최치흥 3형제임이 밝혀졌다. 다만 역사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최운산 장군의 삶과 투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운산 장군

    왜냐하면 동만주 왕청현 봉오동은 일찌감치 1912년부터 최진동-최운산 형제들에 의해 군사요새로 갖춰진 공간이다. 북간도 제1의 거부이자 대지주였던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군 양성에 쏟아 부었다. 체코 병단 신식무기를 구입해 무장하였고 독립군들을 실전처럼 훈련시켰다. 봉오동 상촌에 3천 평 규모의 토성을 견고하게 쌓아 군사요새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봉오동전투(1920) 직전에는 최씨 형제가 양성한 ‘군무도독부’ 소속 병사만 670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봉오동엔 거대한 연병장이 있었고 수백 명이 숙식할 거처인 커다란 병영 막사 3개 동이 구축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왕청현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본부를 건설해 주었다. 그리고 왕청현 십리평에 북로군정서가 관할하는 단기 사관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세워주었다. 사관연성소 소장은 김좌진이고 교수부장은 몇 달 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교관에서 전출돼 온 이범석이었다. 이범석은 김좌진의 요청으로 약관의 나이에 북간도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온 것이다. 당시는 3・1운동 직후라 독립전쟁의 원대한 꿈을 안고 국경을 넘는 조선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체로 학력이 높은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을 정예군대로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던 인물들 가운데 그 중심엔 최운산 장군이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 최운산 장군 자택은 독립군 본부였기에 김좌진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이 머무르곤 했다. 군사회의가 끝난 직후에는 우마차에 군수품과 식량을 가득 싣고 각자 부대로 떠나곤 했다. 그 우마차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고 전한다. 그 많은 군수품과 식량을 최운산 장군은 사재를 털어 매번 아낌없이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면적인 물적 지원을 바탕으로 최진동 장군 – 최운산 장군의 군무도독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들 6개 부대와 통합해 ‘대한 북로독군부’를 창설할 수 있었다. 봉오동 전투(1920. 6. 7) 개시 3주 전인 1920년 5월 19일의 일이다.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 북로독군부’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바로 그 부대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 교과서엔 ‘대한 북로독군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 북로독군부’를 탄생시킨 최운산 장군(본명 최명길)에 대한 이름자도 서술돼 있지 않다.

    ‘대한 북로독군부’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고 연대장으로 김좌진, 홍범도, 오하묵이 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공보처에서 발간한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1985)에는 사령관을 홍범도로 기술하고 있다.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오히려 홍범도는 전투 도중 봉오동 남산 쪽으로 퇴로를 찾는 일본군과 교전을 중지하고 부대를 독단적으로 이동시킨 잘못을 범했다. 자신들은 "빨치산이지 정규군이 아니기에 전략과 전술이 다르다"며 일방적으로 퇴각한 것이다. 그러자 그 일로 일본군 퇴로를 막고 있던 봉오동 남산 쪽 신민단 소속 독립군들은 끝까지 일본군에 싸웠지만 수적 열세로 전멸하는 참사를 겪었다. 그리하여 봉오동 전투가 종료된 이후 홍범도는 사령관 최진동 장군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요컨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 북로독군부’이다. 그리고 ‘대한 북로독군부’의 핵심 주력부대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세운 ‘군무도독부’이다. 실제로 1920년 3월에서 6월까지 함경북도 온성군과 종성군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던 부대도 대부분 군무도독부였다. 군무도독부는 봉오동 전투 이전에도 36차례 조선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를 잔뜩 긴장시켰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개인을 영웅시하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역사의 진실과 거리가 먼 태도이다. 역사의 진실은 봉오동 전투 7년 전부터 봉오동에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구축해 온 최씨 3형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다가오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훈련시켜 온 최진동 장군을 비롯해 최운산, 최치흥 3형제들이다. 최씨 3형제가 봉오동 전투의 진정한 주체이자 역사적 인물들이다.

    청산리전투 기념 사진

    다음으로 ‘청산리 전투=김좌진’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형성된 계기는 해방 직후 북로군정서 출신 이범석이 쓴 『한국의 분노』(1947)에서 연유한다. 『한국의 분노』(1947)는 이범석이 중경 임정 시절 중국어로 쓴 『韓國的 憤怒』(1941)를 해방 직후 김광주가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한 것이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대첩’으로 묘사하며 백운평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를 언급한 전투 회고록이다. 문제는 이범석이 청산리전투를 북로군정서 중심으로 기술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부대 활약상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보다 이범석 개인을 더 크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종전 후 일제 관헌 자료들을 몽땅 가져갔던 미국이 60년대 말 미 국립문서 보관소에서 기밀을 해제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우리나라도 1970년 국회도서관장이 직접 미국에 가서 청산리전투에 대한 자료를 복사해 오고 일본 정부도 미국으로부터 돌려받은 당시 관헌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공개한 마이크로필름 자료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별칭) 부대 말고도 다른 독립군 부대들이 청산리전투에 참전해 일본군과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부대를 비롯해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본명 최명록)의 군무도독부, 의민단들 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 2만 토벌대에 맞서 격렬히 전투를 벌인 것이다. 『우둥불』(1971)에서 이범석은 일본군 5만의 공세라고 했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이범석은 1971년 회고록 『우둥불』(1971)을 발표한다. 『우둥불』(1971)은 청산리전투를 묘사한 『한국의 분노』(1947)에다 더 살을 붙여서 장을 덧대면서 분량이 4배 이상 늘어난 책이다. 문제는 『우둥불』(1971)에서 이범석 스스로 자신이 속한 북로군정서 이외에 다른 독립군 부대들도 처음으로 언급한 사실이다.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 최진동 부대, 의민단이 소개돼 나온다. 그러나 『우둥불』(1971)에서 이범석은 또 다시 역사 사실을 왜곡했다. 청산리전투 전날 합동작전회의가 열려 각 부대별로 작전지역을 분할했는데 5만 명이 넘는 일본군 대병력에 압도되어 이튿날 새벽에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다. 『우둥불』(1971) 가운데 「청산리혈전」 관련 내용 일부를 들여다보자.

    “국민회에서는 홍범도와 안무, 의군부에서는 최진동(일명 명록) 등등이 군대를 데리고 8일 밤 도착했다. 4백여 병력이 온 국민회 군대가 가장 많았고 의군부에서는 약 2백 명, 한민단은 약 1개 중대 병력이, 본래 군대가 2백도 채 못 되는 의민단에서는 일부 모험대원만 보내왔다. 8일 밤 작전회의를 열고 김좌진 장군을 총지휘로 홍범도, 최명록(필자 주 최진동) 두 분을 부사령관으로, 여행단장이었던 내가 전적 총지휘, 즉 전투사령관으로 부서를 정했다. (중략) 그런데 9일날 새벽에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모두들 떠나가 버렸고 다만 한민단 1개 중대만 남아 있었다. 3개 단체는 아무 말 남기지도 않고 밤의 장막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서와 임무 배당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불만도 있었겠지만 5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戰意)를 상실한 게 확실하다.”( 『우둥불』(1971) 89쪽)

    이범석 모습

    청산리전투에 대한 이범석의 역사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여 피하고 싶을 정도로 경계했던 홍범도 부대를 형편없는 부대로 묘사한 다음 대목이다.

    “홍범도 부대가 이탈한 지 3일째 되는 날, 일군에게 포위를 당해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추운 밤에 우둥불 하나 올리지 못한 채 굶고 떨면서 운명을 체념하고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천수평의 적이 우리에게 기습을 당해 포위망이 터진 것이다. 도의적으로 말하더라도 응당 거기서 책응(策應)하여 적을 협격했으면 전과가 더욱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살 길을 터 준 줄만 알고 그 격전 틈에서 홍범도 부대는 계속 안도현 쪽으로 궤주(潰走)하고 말았다.”( 『우둥불』(1971) 90쪽)

    이범석 자신은 북로군정서 지휘병력을 이끌고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병력을 괴멸시켰다고 자화자찬하며 당시 전투상황을 기술하였다. 이 또한 과장된 서술이다. 당시 이범석이 새벽에 공격한 일본군은 수색 기병대 1개 소대병력에 지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범석의 주장에는 심각한 역사왜곡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홍범도 부대를 가리켜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치졸하게 도망친 군대로 묘사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노획한 무기들이 홍범도 부대가 도주하면서 획득한 것이라고 악선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범석의 회고나 억지 주장과 달리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용맹스럽게 싸운 전투부대였다. 일본군 전투보고서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청산리전투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만이 아니라 홍범도 연합부대를 비롯해 안무 부대, 최진동 부대, 의민단, 한민단, 의군부들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승리한 독립전쟁임을 명확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비극을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왜곡되거나 사라진다. 아직도 한국사 교과서에는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으로 개인 영웅사관에 기초해 있다. 이제 잘못된 역사 사실을 바로 잡아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인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를 제대로 기술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청산리전투 역시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이나 이범석 개인의 역사로 화려하게 부각시킬 것이 아니다.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다른 독립군 부대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산악 지형과 유격전을 이용해 야간이나 새벽에 일본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승리한 치열한 독립전쟁이었음을 제대로 기술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청산리에 일찌감치 거주해 터를 닦았던 조선인 이주 동포들의 눈물겨운 지원과 첩보 제공이 아니었다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기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더 이상 개인 영웅사관으로 교과서를 기술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제가 저지른 경신대학살(1920)은 청산리전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 백 수 천 독립군들을 먹이고 일본군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청산리, 어랑촌에 일찌감치 삶의 터전을 닦았던 조선인 민중들이다. 빛나는 청산리 전투 승리 뒤엔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무명의 항일 독립군 전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경신참변(1920)으로 일컫는 간도 한인들의 참혹한 희생과 고통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상암고 교사. '우리역사에서 사라진 근현대 인물한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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