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를 물들이는 정동,
    낭만적 이상과 기존 질서의 안식처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플래너리 오코너 「이발사」
        2019년 10월 08일 09:2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얼마 전 술자리에서 사케를 주문해 따가운 지적을 받았던 지인은 수화기 너머로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엔 집회에 안 왔다고 한소리 들었다는 것이다. 민족 어쩌고 하더니 얼마 안 가 세상이 온통 ‘조국, 조국’ 중이란다. 상사가 어느 쪽 지지자인지 몰라 입도 뻥끗 안하고 있는데 소위 진보정당 당원이라는 네 생각이 듣고 싶다는 것이 전화의 요지였다.

    “정치 얘기는 그냥 끄덕끄덕만 해. 누굴 설득할 생각일랑 하지 말고, 설득된다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그렇게 얼버무리고 통화를 끝낸다. 문득 소설 한 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플래너리 오코너 「이발사」는 내 대답의 이유를 분명히 해준다.

    플래너리 오코너와 그의 단편집

    주인공 레이버는 딜턴에 살고 있다. “딜턴은 자유주의자에게 가혹한 곳이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은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다. 1940년대 미국 남부 민주당 백인 예비선거 기간 레이버는 자주 찾는 이발소에 간다. 면도를 해주던 이발사는 자연스레 묻는다.

    “손님은 누구한테 투표하실 겁니까.”

    “다먼입니다.” 레이버가 말했다.

    “검둥이 옹호가세요?”

    레이버는 의자에 앉은 채 깜짝 놀랐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아뇨” 그가 대답했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저는 깜둥이 옹호자도 백인 옹호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레이버는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대학 교수인 친구 제이콥스는 이런 논쟁을 가볍게 묵살했다. 그래서 레이버는 잠자코 있었다.

    이발사는 거품 속에 깨끗한 길을 내고 레이버에게 면도기를 대며 말했다. “지금은 백인 편, 흑인 편 두 쪽밖에 없어요. 이 선거가 그렇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아요. 호크슨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150년 전에 그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새를 잡겠다고 보석을 던지고, 이로 말가죽을 벗긴 자들이라고 했어요. 검둥이가 애틀랜타의 백인 이발소에 가서 ‘이발 좀 해주세요’합니다. 물론 바로 쫓겨났지만 일부러 가는 거에요. 지난달에 멀퍼드에서 더러운 검둥이 세 명이 백인을 쏘고 그 집 물건 절반을 털어 갔는데, 지금 그자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감옥에서 대통령처럼 잘 먹고 있어요. 그자들이 사슬에 묶여 일하느라 더러워지면 어떤 얼어 죽을 검둥이 옹호자가 가서 보고 그자들이 노동하는 데 가슴 아파할지 모르죠. 어쨌거나 우리가 그자들의 마더 허바드를 없애고 검둥이들에게 제자리를 찾아 줄 사람을 뽑지 않는 한 좋은 시절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발사는 세면대 주변의 바닥을 청소하는 흑인 청년에게 소리쳤다. “들었니, 조지” “네” 조지가 말했다. 플레너리 오코너 「이발사」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25쪽)

    레이버는 무슨 말인들 하고 싶었지만 정작 아무 말도 못 한다. 레이버가 해야 할 말들은 이발사와 흑인청년 조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어야 했다. 레이버는 대학교수인 친구 제이콥스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제이콥스가 일주일 동안 흑인 대학에서 수업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해 준 것이 기억났다. 거기서는 깜둥이, 검둥이, 유색인, 흑인 같은 말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이콥스는 매일 밤 집에 와서 뒤창 밖에다 대고 “검둥이 검둥이 검둥이” 하고 소리쳤다고 했다. (26쪽)

    이발사는 검둥이를 혐오하며 노골적으로 분노했고 레이버를 추궁했다. 레이버는 의자 깊숙이 앉아 이발사에게 면도를 하러 왔음을 상기시켰다. 온종일 “그 바보 같은 대화”가 짜증을 불러왔고 레이버의 일상을 지배했다.

    정치, 문화 사회적 규범이 만든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은 감정의 저장소다. 특히 언어가 대상을 토막 내고 배제할 때 감정은 인지와 상호작용한다. 특히 고정된 관념이야말로 언어로 완성된다. 대상 전체를 포괄해 특정 집단을 범주화하거나 도식화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다. 사안 별로 말하지 않으면 일반화되기 쉽고 그 순간 대상이 지닌 표상이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그래서 언어는 대상이 속한 전체 개념을 규정한다. 이러한 언어가 가장 대립하고 격돌하는 장이 정치의 영역이다. 우호적 자기 이미지나 상대에 대한 적대를 구상하기 위해 정치적 어휘는 언제나 고안된다.

    레이버는 첫 대화에서부터 ‘검둥이 옹호자’라는 구조에 갇힌다.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전에 이발소 전체에 검둥이에 대한 혐오가 전제된다. 그 순간 인종 폭력은 당연한 상식이 된다. 마치 세상엔 검둥이와 검둥이 옹호자, 검둥이를 배척하는 선량한 백인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이발소에서 일하는 흑인 청년, 다른 손님들도 여기에 동조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자 레이버를 비웃고 적대한다. 무조건 우겨대는 이발사에게 무언가를 좀 읽어보라고 권하는 레이버는 고등교육을 받은 교수다. 레이버는 “왜 손님은 생각을 하지 않나요? 손님의 상식은 어디 갔나요”라고 비난받는다. 집에 돌아와 분노에 휩싸인 채 반박의 연설문을 준비하지만 모두의 비웃음을 산다. “내가 여러분의 우둔한 정신을 바꾸려 한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여러 번의 무지에 간섭하려는 것 같습니까?”라고 소리친 레이버는 이발사에게 결국 주먹을 휘두른다.

    이발소 사람들과 레이버 사이에 통제되지 않은 정동이 발현된다. 정치적 경제적 환경의 차이를 넘어서는 정동의 발현은 ‘검둥이’를 대상화 해 이발소 내부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있다. 레이버 또한 이에 쉽게 휘말린다. 대학교수 제이콥스는 발작적으로 논쟁을 거부한다. 모두가 부정의 정동에 포위된 셈이다. 때문에 정동 내에서 주체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적대로 혼용된 정치의식은 감정적 구별짓기를 통해 왜곡된 표상을 주입한다. 혐오와 증오를 정치화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정동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보통의 시민을 정치의 장으로 이끄는 계기는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와 희망,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민, 배려 등 감정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슬픔과 기쁨, 죄책감 등의 정서적 공명이 이질적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을 결합시킨다. 이러한 정동은 사적인 동시에 공적이며 근대적 개념의 합리성을 넘어 익명의 개인이 발행한 정서로 공감의 대오를 형성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의향에 따라서 생활하고 그가 인정하는 것을 인정하며, 자신이 배척하는 것을 배척하길 바란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정동은 다양한 타자들의 정서를 응축시켜 실천적 행동으로 이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정동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동은 또 다른 윤리가 되기도 하며 관계적 진동을 가져다준다. 감정과 이성을 대척점에 놓는 이분법적 사고는 폐기된 지 오래다. 숙의 민주주의에서도 공정하고 합리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자 하지만 감정이나 정서의 영역이 고도의 합리적 영역까지 이르러 총체적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과도하지 않은 감정적 상태나 느낌은 공적 합리성을 위해 핵심적인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동이 과도하지 않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실시간 검색어 경쟁에 매몰된 언론, 조회수 경쟁에 매몰된 페이지뷰, 무수한 팔로우 수를 거느린 유투버는 빠르게 이목을 집중시킨다.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정동으로 형성된 집단은 자주 격돌한다. 집합적 트라우마와 결핍, 이데올로기와 욕망, 감정 분출이 만나 히스테리적 적대를 양산한다. 내부 충돌과 외부의 경합 속에서 다원적이고 복잡한 개인은 몇 가지 정치 구호 아래로 해쳐 모여를 반복했다. ‘이게 나라냐’로 시작한 100만 촛불, 불매운동으로 촉발된 민족주의, 공교롭게도 네이밍의 중의성 때문에 복잡다단해진 ‘조국 수호’ 운동 등 격화된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우리’는 맥락에 따라 단일한 얼굴로 출몰한다. 불매운동으로 대변되는 민족감정은 ‘조국’ 정국에 이르러 시민적 권리를 충분히 누리는 엘리트적 감정으로 전환된다.

    19세기 후반 권리를 박탈당한 가난한 대중에게 정치적 자유에 기초한 시민의식보다는 혈연적 동질감에 호소하는 민족주의가 더 큰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촉발된 정동이 이뤄낸 피의 투쟁은 절차로서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체제로 귀결됐다. 무제한적 사적 소유와 상속권, 공적 영역까지 사적 주도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과 계급의 공존이 용인되고 첨예한 사회갈등은 헌법에 테두리 안에서 유지되며 권력은 거대 양당에 적극적으로 이양됐다. 체제가 만들어낸 박탈감, 모멸감은 다시 체제 안에서 이완되고 일정한 보상을 단계화해 자연스럽게 봉합된다. 일상에서 시시각각 헬조선의 실체를 체감하지만 내부에서 외부를 상상하기 어렵듯 주류적 결핍에 쉽게 투항한다. 이에 현대판 성장 ‘신화’를 좇으며 환상의 동일시를 통해 헬조선의 재생산 구조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야 만다.

    자본은 실시간 지배 정동을 탐색해 왔다.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호와 선택을 고려하고 생산방식은 활용 조율돼 왔다. 자본은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문화와 소통의 매개 속에서 집합적 주체성을 형성한다. 자본은 관리된 정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힘을 활용해 왔다. 복잡하게 얽힌 개인은 사회 실재와 맺는 상상적 관계를 실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국가, 민족 등 거대 주체로 인격화된 대의는 단일 주체와 큰 차이가 없다. 정동에 의해 임의적으로 상정된 ‘우리’는 다양하게 침투하는 이질적 공세에 동요한다. 실상 파편화되고 흩어져 파악되지 않는 다자들은 서로의 불확정성을 견뎌내지 못해 특정 역사와 경험을 절대화한다. 마치 트럼프의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라는 숙주를 먹고 반민주주의를 표상하듯 대중과 의회는 자본에 계획대로 정동에 의해 관리되고 법을 매개로 시민들의 의견과 의지 형성에 합리적 프레임을 제공한다.

    “경제학 그 자체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경제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정동의 능력은 정동 그 자체가 공장만큼이나 하부구조로서 후기-자본주의 시스템의 진정한 조건, 본래적 변수라는 것을 의미한다.”(Massumi, 1995:106).

    정동으로 결합된 집단은 일사불란하게 집단지성, 대중지성의 양태로 언어적 지적 차원의 정동 노동을 생산하며 공론의 장에서 감정적 압력점을 끌어올린다. 당파적 지지를 수행하는 익명의 시민들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 아비투스는 사회를 움직인다. 이렇게 틀 지워진 정동은 중간계급의 감정생활, 경제적 관계 교환의 논리를 따르는 광범위한 운동이 산출한 문화가 된다. 정동은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 권력, 정체성 투쟁의 각축장에 호명된다. 이 뜨거운 참여는 경제적 팽창과 함께 강화된 계급 내에 머물러 있다. ‘정의’와 ‘수호’라는 낭만적 이상을 유지하는데 일조하는 반면 시장을 구성해온 기존 질서의 안식처가 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정동에 동참하지 못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솟아나는 감정에 반응하고 거기에서 기쁨과 슬픔조차 느낄 수 없는, 역사와 집단의 테제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언어를 잃은 광장 밖에서 달라질 게 없는 생존의 위협을 매일 견뎌야 하는 이들.

    여전히 침몰하는 세계의 비탈에 서서 유실돼 온 또 다른 미완의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 정동(情動. affect)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외부 사물(외부의 몸)이 인간의 몸에 일으키는 변화로 인하여 몸의 능동적 행동능력이 증가·
    감소하거나, 촉진·저지될 때 그러한 몸의 변화를 몸의 변화에 대한 ‘생각’(idea)과 함께 지칭하는 것이 정동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III부 ).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