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의 공법 국민투표, 영조의 균역법
    [역사의 한 페이지] 물금첩 한 장에 담긴 역사 의미
        2019년 09월 12일 11:2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역사의 한 폐이지] 연재 칼럼 링크

    경기의 수령 29명과 품관·촌민 등 1만 7천 76명은 모두 가(可)하다 하고, 수령 5명과 품관·촌민 합계 2백 36명은 모두 불가(不可)하다 하고….해도의 수령 17명과 품관·촌민 등 4천 4백 54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7명과 품관·촌민 합계 1만 5천 6백 1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충청도의 수령 35명과 품관·촌민 6천 9백 82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송인산과 도사(都事) 이의흡과 수령 26명과 그밖에 품관·촌민 등 1만 4천 13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강원도는 수령 5명과 품관·촌민 등 9백 39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0명과 품관·촌민 등 6천 8백 88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경상도에서는 수령 55명과 품관·촌민 등 3만 6천 2백 62명은 모두 가하가 하고, 수령 16명과 품관·촌민 3백 77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전라도에서는 수령 42명과 품관·촌민 등 2만 9천 5백 5명은 모두 가하다고 말하고, 관찰사 신개와 도사 김치명, 그리고 수령 12명과 품관·촌민 등 2백 57명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옵는데,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백 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백 49명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2년 8월 10일자 기사 중

    때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600년 전인 세종 12년(1430년) 토지세제 개정과 관련하여 ‘국민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위 실록 기록은 담당 부서인 호조가 ‘국민 투표’ 결과를 세종에게 아뢰는 장면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런 형식의 ‘국민 투표’는 당시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그렇다고 국민 찬반 투표를 대충한 것도 아니었다. 이 투표에 대한 지시가 처음 내려진 것은 그 해 3월이었다. 세종은 토지세제 개혁을 추진하여 수확량 10분의 1을 징수하던 기존의 정률세제 방식을 대신하여 토지 1결당 쌀 10두(斗)를 걷는 정액세제 방식인 공법(貢法)을 마련하고 그해 3월 5일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투표 결과를 보고받은 날이 8월 10일이므로 이 투표 한 번에 총 5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사진]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공법(貢法) 제정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인터넷 사진)

    기간만 놀라운 것이 아니다. 1430년 호조의 결과 보고에 따르면, 새 법에 대한 찬성이 98,657명, 반대가 74,149명이었다. 이를 더하면 모두 172,806명이 자신의 의사를 표한 것이 된다.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당시 조선 인구는 70만 명 정도였다 하니 대략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실제 경제 활동인구를 고려한다면 여성과 노비,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호주(戶主)들이 이 찬반 투표에 참여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찬반 투표 이후의 일이다. 반대표가 만만치 않았던 탓일까? 세종은 이 공법의 원안을 여러 번 고친 후 최종 이 법을 확정 시행하게 되는데, 그 걸린 시간이 무려 14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종 26년(1444년) 공법은 마침내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토지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다시 한 해의 풍흉 정도를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의 9등급으로 나누어 그 해의 등급에 따라 토지 1결당 걷는 세금 액수를 최고 20두에서 최저 4두까지 차등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1결당 일률적으로 10두를 걷겠다는 원안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토지 비옥도를 6개 등급, 풍흉 정도를 9개 등급으로 나누어 더 정확히 세금을 매기겠다는 취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세종이 이런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백성들 어느 누구도 생산량과 무관하게 세금을 부당하게 많이 내거나 적게 내는 일 없이 공평하게 세금을 걷겠다는 세종의 민본주의 애민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종을 성군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머리에서 인용한 국민투표 결과 보고(報告) 장면은 훈민정음 창제만큼이나 극적이고도 위대한 장면인 것이다. 누군가 세종이 왜 훌륭한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 국민투표 이야기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는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

    세종의 말이다.

    그가 꿈꾼 나라는 그런 나라였다.

    그리고 세종은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것이다.

    세종에게 공법이 있다면, 영조에게는 균역법이 있다

    몇 년 전 경매를 통해 조선 후기 문서 두 장을 수집하였다. B5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이 문서들은 동일한 형식의 문서로 제일 앞머리에는 ‘균역청위빙험사(均役廳爲憑驗事)’라고 되어있고, 발급 관청은 균역청이다. 하나는 어전(魚箭) 세 칸에 대한 세금을 안악환에게, 또 하나는 배 한 척에 대한 세금을 편양록에게 부과한 것으로 세금 징수와 관련된 문서였다. 어민들에게 발급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들을 수집한 이유는 이 문서들이 균역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균역청에서 발급한 세금 영수증으로 보통 ‘물금첩’이라고 부른다. 왼쪽은 안악환의 어전 3칸에 대해, 오른쪽은 편양록의 배 1척에 대한 것이다. 크기 세로 27.5, 세로 16.8cm이다. (박건호 소장)

    전분6등법·연분9등법의 공법에 세종의 애민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 균역법 역시 영조의 애민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영조도 애민사상이라면 한가락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균역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고, 때로는 신하들을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의 강력한 의지가 오롯이 담겨있는 법이 균역법이다. 이 문서들을 수집한 이유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 문서 속에는 영조의 눈물과 결기와 애민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세금 영수증이었다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균역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균역법이 왜 애민사상이 반영된 것인지, 어민으로 보이는 안악환과 편양록이라는 사람에게 세금을 매긴 것이 균역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자. 그러면 이 두 장의 세금 영수증들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건국 초기 군 복무 제도는 병농일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16세에서 60세사이의 양인 장정이 군 복무를 하였는데, 그 기간이 무려 45년인 것이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45년을 풀(full)로 한 것이 아니라 1년에 2개월씩 교대로 군복무를 했으니 평생 90개월 군 복무를 한 셈이다. 21개월 정도인 현재의 군 복무에 비해서는 매우 긴 기간이지만, 현재 휴전선 위쪽의 북쪽 젊은이들은 남자가 10년(120개월), 여자가 7년(84개월) 의무 복무를 한다니 그에 비하면 이해 안 되는 바도 아니다.

    그런데 군역 이행 방식에는 정군(正軍)이라고 불리는 이런 현역 복무병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현역 복무하는 정군이 두 달 동안 군 복무할 때 소요되는 비용을 대주는 보인(保人)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정군 1명당 보인 2명이 배정되는데, 이렇게 조선은 정군과 보인이 3인 1조가 되어 군 복무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종 때가 되면 군역 제도가 크게 개편되어 ‘군포 징수제’(‘군적수포제’)라고 하여 군인 한 사람당 16개월마다 국방세 명목으로 군포(軍布) 2필만 내면 군 복무를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실시된다. 이 제도 실시로 16∼60세 사이의 양인 장정은 이제 정군과 보인 방식으로 군 복무를 하는 대신에 군포 2필을 내면 되었다.

    이 제도 시행을 계기로 조선의 의무병제는 붕괴된다. 대부분의 양인들이 군포 2필을 내고 군 복무를 대체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현역 군인 수는 격감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내세운 이유도, 임진왜란 초기 육지에서 조선군이 연전연패한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처음 실시된 군포 징수제가 이후 점차 변질되면서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게 된다. 군인들의 명부인 군적(軍籍)이 문란해짐으로써 많은 폐단이 생기게 된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 17∼18세기에 그 폐단이 극심했다. ‘군적 문란’이라는 일종의 ‘군인 수 부풀리기’를 통해 백성들의 고통은 점차 커져갔고, 또 누군가는 그만큼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군적에 나이 들어 죽은 이의 이름을 빼지 않고 그대로 두고 군포를 징수하는가 하면(백골징포), 갓 태어난 아이의 이름도 군적에 올려 군포 납부를 강제하기도 하였다(황구첨정). 군적은 실제와 너무 달랐다. 게다가 가혹한 세금 때문에 이웃의 누가 도망가거나 친척이 도망가기라도 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몫까지 떠맡기는 경우도 많았다(인징·족징). 당시 민중들에게 조선은 과중한 국방세로 인해 그야말로 ‘헬 조선’ 그 자체였다.

    [사진] 17∼18세기 당시 백성들에게 군역 제도의 변질은 큰 고통이었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 등 군인 수를 부풀려서 백성을 착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KBS [역사저널 그날] )

    양반들이 군포를 결사 반대한 이유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이 군포 징수제 하에서 군포라는 것이 상민들만 납부대상이었고, 양반들은 납부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군포 징수제 시행 이전만 하더라도 양반들 중 양반관료라든지 교육기관에 소속된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어 양반 다수가 면제가 되긴 했어도, 놀고먹는 양반들은 정군과 보인 방식으로 군역을 져야 했었다. 양반들의 일부는 실제 군역을 졌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군포 징수제가 시행되면서 양반은 그가 벼슬아치이든, 학생이든, 놀고먹든 관계없이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군포 납부 대상에서 통으로 빠지게 되면서 양반은 특권 신분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확고히 하였다. 군포 징수제 실시 이후 양반은 군역의 의무에서 일체 면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16세기 이후의 조선이었다.

    이렇게 신분에 따라 군포를 내고 안내고가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군포는 상놈이 내는 세금, 군포 내면 상놈”이라는 인식이 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적 문란으로 인한 군역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 구상에서, 양반들에게 군포를 어떤 식으로든 부담케 하겠다는 개혁안은 시도하기 매우 어려운 미션이 되었다. 그것은 양반들의 핵심 기득권을 건드리는 것이자, 콧대 높은 양반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반들에게 군포를 내라고 했을 때, 양반들은 이를 경제적 부담 때문이 아니라 ‘우리 양반을 감히 상놈 취급하다니.’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저항할 것임이 분명하였다.

    실제 17∼18세기 군역제도의 변질이 극에 달했을 때 양반에게 군포나 아니면 돈을 걷자는 취지의 개혁론들이 제기된 바 있다. 호포론(양반과 상민 구분 없이 호를 기준으로 포를 걷자는 주장), 유포론(모든 양반을 다 매길 수는 없지만 놀고먹는 양반만이라도 상민처럼 포를 걷자는 주장), 결포론(양반, 상민 구분 없이 토지를 기준으로 포를 걷자는 주장), 호전론(양반, 상민 모두에게 국방비 명목으로 돈을 걷자는 주장) 등등 많은 개혁안들이 제기되었으나 양반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매기겠다는 개혁안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양반은 군포 부담에 있어서는 ‘성역’이었던 셈이다.

    검찰 개혁을 하겠다는 정부에 맞서 최근 검찰이 보이는 행태를 보라. 기득권 앞에서는 치졸해질 수도, 품위 따위는 내팽개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득권이라는 것은 쉽게 내려놓기가 힘든 것이다. 검찰이 자신의 기득권 축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군포 부과에 대해 양반들이 기를 쓰고 저항하는 모습과 겹쳐져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SBS 사극 [비밀의 문]의 한 장면을 보자. 양반에 대한 국방세 부담을 둘러싸고 영조와 양반들이 홍화문 앞에서 맞장을 뜨는 장면이다. 양반들이 왜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홍화문 앞

    양반 유생들, 관짝을 옆에 놓고 엎드려 있고, “호전론은 불가하옵니다. 호전론은 불가하옵니다.” 연신 외치고 있다. 이때 영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양반 유생1: 호전론을 폐지한다는 약조를 먼저 해 주시옵소서.

    양반 유생2: 상것들과 한 묶음이 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영조: 나라 지키는데 신분이 무슨 소용이냐? 이 나라가 어디 양반만의 나라이더냐?

    양반 유생2: 군포를 내는 것은 상것들의 몫이옵니다. 양반들은 그들을 지도하고 순화하는 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되는 일이옵니다.

    영조: 군포는 왕실에서도 낼 것이다. 내탕금 한 푼도 쓰지 않고 군포로 다 밀어 넣을 수도 있 어. 우리 왕실에서도 모범을 보일 터이니 그대들은 부디 이 과인의 뜻을 꺾으려 들지 마라.

    양반 유생들: 아니 되옵니다.

    양반 유생1: 상것들과 한 묶음을 삼느니 차라리 (도끼로 관을 찍으며) 이 몸을 쳐서 관짝에 넣어주시옵소서. (유생들, 한 명씩 도끼로 관을 찍는다.) 강상의 도를 바로잡고자 함이옵니다.

    양반 유생2: 강상의 도를 허물고자 하신다면 전하께옵서는 군주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옵니다.

    영조: 군주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세 끼 밥이야. 지나친 군포 부담으로 세 끼 밥 해결 못하는 그런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군주의 자격이 있 단 말이더냐?

    양반 유생1: 군포마저 같이 부담한다면 반상의 법도가 무너질 것이옵니다.

    양반 유생3: 하면 이 나라가 오랑캐의 나라와 무엇이 다르옵니까?

    양반 유생4: 오랑캐국의 군주가 되려하시옵니까?

    양반 유생5: 폭군의 길을 자초하시는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영조: (뒤로 물러서며 넘어진다. 그리고 격노하며) 이놈들! 늬 놈들이 죽든 과인이 죽든 내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이야. 다시 한 번 떠들어 봐.

    [사진] 2014년 방영된 SBS 사극 [비밀의 문]에서 군역제도 개혁을 두고 영조와 양반들이 대립하는 장면이다. 한석규가 영조 역을 맡았다. (SBS 방송 캡쳐 사진)

    다소 과장되고 격하게 연출한 느낌을 주지만, 이 장면에서 양반의 논리는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왜 우리를 상놈 취급하느냐? 반상의 구별이 무너진다.” 이렇게 양반들에게 군포를 매기는 것에 대해 그들은 지배층으로서의 양반 신분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사활을 걸고 영조에게 대들었던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조는 양반들의 반발 속에서도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조건들을 절충한 세제 개편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게 우리가 아는 균역법이다. 당시 영조는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첫째. 상민들의 군포 부담을 줄여줄 것. 이건 비교적 쉽게 잡을 수 토끼였다. 둘째. 그러면서도 다른 곳에서 세원을 찾아 국가 재정 총량을 이전과 비슷하게 맞출 것, 셋째. 재정 부족분 보충을 위해 부득이하게 양반들에게 일부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다면 그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지울 것, 즉 군포만은 피해서 다른 걸로 지우는 것이었다. 이 고난도 3차 방정식을 풀기 위해 영조는 고심하였다. 당시 영조의 고심은 영조가 1750년 5월 19일 홍화문에서 신하들에게 했던 말에서 헤아릴 수 있다.

    오늘의 이 신민은 나의 신민이 아니라 곧 열조(列祖)와 성고(聖考)께서 사랑하고 돌보신 신민이다. 대저 부형(父兄)이 항상 아끼던 집물(什物)을 자제(子弟)에게 맡겨 주면 자제된 사람은 이를 아끼고 보호하여 혹시라도 손상시킬까 걱정해야 하는 것인데, 더구나 나의 억조 사서(億兆士庶)들을 어찌 한때 아끼고 보호하는 집물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바야흐로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데 잘 구제하여 살리지 못한다면, 뒷날 무슨 낯으로 돌아가 열조와 성고를 배알(拜謁)할 수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열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영조의 사명감과 애민정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의 이 백성이 자신만의 백성이 아니라 옛날 열조와 성군이 사랑하고 돌본 그 백성들이므로 함부로 할 수 없으며 도탄 속에 그대로 둘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1750년 7월 9일 영조는 신하들에게 군포부담을 2필로 1필로 줄일 것을 지시하면서 그 부족분 충당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달 초 9일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비국의 여러 재상들과 육조(六曹)·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접하고 특별히 군역에 대해 1필씩을 영구히 감면시키라고 명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호포·결포는 비록 시행할 수 없지만 감포(減布)하는 조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경 등은 보충할 방책을 구획(區劃)하여 가지고 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만날 생각을 말라”하였습니다.

    – 병조판서 홍계희가 왕세자에게 올린 균역에 관한 책자 내용, [영조실록], 영조 28 년 1월 13일 기사

    영조가 균역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호소하는 장면과 신하들에게 대책 없이 올 거면 자신을 만날 생각을 말라고 협박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균역법이란 것이 그저 그렇게 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조의 이러한 애민정신의 발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종의 공법, 영조의 균역법 이 법들이 내용은 다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애민정신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균역법으로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다

    균역법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먼저 16개월마다 내는 군포 2필을 12개월 당 군포1필로 감해줌으로써(減匹)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첫 번째 토끼는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 두 번째 토끼, 즉 반으로 줄어든 국가 재정을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충을 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해야했다. 그 해결 방법은 대략 다음의 4가지 방법을 활용했다.

    하나는 재정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정부는 불필요한 관청을 없애고, 관리의 녹봉을 줄이는 등 재정 다이어트를 해서 씀씀이 자체를 줄였다. 또 하나는 선무군관포를 새로 신설하는 것이었다. 양인 중 부유한 자들 중에 편법으로 군포를 내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찾아내어 ‘선무군관’이라는 직책을 주고 군포를 걷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는 이전에 주로 왕실에서 따로 받아쓰던 어장세, 염전세, 선박세 등의 잡세를 부족해진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여전히 부족분이 있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양반들에게 일정한 부담을 지우고자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 번째 토끼도 잡아야했다.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부담을 지우는 방법, 즉 군포 매기는 것을 상놈 취급 받는 것쯤으로 이해했던 양반들에게 군포를 피하면서 부담을 지우는 방법, 그래서 만든 것이 ‘결작’(結作)이라는 세금으로 토지 1결당 쌀 2두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군포 대신 쌀로 양반에게 부담을 지우는 묘책을 찾은 것이었다. 물론 양반의 반발이 안 생길 리야 없겠지만, 그 반발은 군포를 매기는 것에 비한다면 매우 적은 것이었다. 군포 대신 쌀을 통해 나름 양반들의 체면을 세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2필을 1필로 감면해주고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는 방안에 대한 위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다음의 도표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균역법 시행 전후 국방세의 수입 구조를 비교한 것이다.

    균역법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다. 근사하지 않은가?

    상민의 군포 부담은 그것대로 줄이면서도, 국가 재정은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지 않았으며(속된 말로 ‘똔똔을 맞추었으며’), 국가 재정 부족분을 메우는 과정에서 양반 기득권층에게 일부 부담을 지우면서도 군포 대신 쌀을 선택함으로써 양반의 반발을 최소화했다. 균역법은 이렇게 영조의 애민정신과 개혁정신이 조화롭게 잘 구현된 법으로, 영조의 ‘눈물’과 ‘협박’없이는 나오기 힘든 법이었다.

    세종의 공법과 영조의 균역법 제정 과정을 보면 ‘개혁’이라는 것이 혁명 보다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개혁이 혁명 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혁명은 강력한 힘으로 한 방에 모든 것을 뒤엎는 것이라면, 개혁이라는 것은 여러 계급과 계층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장기간의 시간과 공을 들여 조율해야하기 때문이다. 애정과 인내심, 의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개혁이다.

    충청도 어부 안악환과 균역법

    이제 앞에서 소개한 문서로 돌아가 보자.

    어민 안악환(어전 3칸)과 편양록(배 1척)에게 발급된 세금 징수 문서는 균역법 시행과 관련된 것이다. 이 문서의 발급 기관이 균역법 시행 주체 기관인 균역청으로 되어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원래 어민들이 내던 세금 즉 어장세, 선박세, 염전세 등은 잡세라 하여 주로 왕실에서 따로 받아쓰던 것이었는데, 균역법 시행과 함께 균역청에서 걷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기존 군포 2필을 1필로 줄여주면서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는 과정에서 영조는 왕실 등에 잡세의 양보를 요청했다. 이 결과 잡세는 국고로 환수되었다.

    두 문서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안악환을 문서를 통해 만나볼 것이다. 편양록 문서는 워낙 글씨를 날려 써서 해독이 쉽지 않아서 안악환을 선택한 것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안악환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체로 구성한다. 다소 사실과 다를 수도 있으나 큰 사실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사실과 맞지 않는 일이 있다면 안악환 씨에게 양해를 구한다. 문서가 들려주는 그 시절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러하다.

    균역법이 시행되고 몇 해가 지난 어느 해였다. 충청우도에 안악환이라는 어민이 살았다. 지금의 충청도는 남도와 북도로 구분하지만, 당시는 흔히 금강을 기준으로 충청좌도와 우도로 구분하였다. 이때 좌우의 기준은 임금이 계시는 한양 기준으로 했으므로 충청우도는 바다와 접한 곳이고, 충청좌도는 바다와 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민 안악환은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충청남도의 바다와 접한 어느 지역에 살았던 어부였다. 태안, 보령, 서천쯤이 될 것이다.

    안악환은 집 근처 어살 3칸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에 말장을 빽빽이 쳐서 길게 담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을 어살 또는 어전(漁箭)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어살이 어업의 주요 형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괜찮은 어살은 한 번에 잡히는 생선으로 무명 500필 정도의 수입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좋은 목에 있는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는 옛말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어살을 세 개나 가지고 있던 안악환은 큰 부자였을까?

    그러나 그게 꼭 그런 게 아니었다.

    큰 수익이 나오는 어살을 특권층이 가만 둘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실과 권세가들이 다투어 차지해 어민들로부터 이익을 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성종 때 호조판서 구치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살은 본래 관청과 백성에게 주어서 진상에 대비하게 하고, 또 먹고 사는 방도로 삼게 했는데, 지금 종친과 권세가들이 함부로 결조(結造)하여 관민의 이익을 빼앗으니 원래 법을 제정한 뜻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금지하소서.

    – [성종실록], 성종1년 2월 13일자

    성종이 이 건의를 수용하여 왕실과 권세가들의 어살 독점을 금지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영조 때 기준으로 보자면 어살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왕자나 공주의 집안, 곧 궁방(宮房)이었다. 여기에 중앙과 지방의 각 아문 등이 소유한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안악환은 어살 3칸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으나, 이 어살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궁방 소유이거나 아니면 여러 아문의 소유였던 것이다. 게다가 차인(差人)이라고 불리는 중간 관리인의 과도한 수탈과 여러 기관의 중복 징수도 어민들의 삶을 힘들게 한 요인이었다. 숙종 42년 비변사의 보고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각 곳의 차인이 번갈아 와서 중복으로 징수하는데, 꼭 매나 호랑이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강과 바다에 출몰합니다…….어민들의 손에는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으니, 하늘에 울부짖고 원망하는데, 모든 곳이 다 그러합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익은 그들에게 바치고 안악환은 생계 유지나 변변히 할 정도였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과 세도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영조 때 균역법이라는 법이 새로 시행되면서 정부는 모든 궁방과 아문들의 어살을 몰수하여 균역청에 소속시키고, 백성들이 어살에서 올리는 수입의 일부를 균역청에서 걷게 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균역법 시행에 따라 재정 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동시에 바닷가 어민들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균역법 시행으로 어민들의 세금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영조도 뒷날 이 조치에 대해 “균역법 실시 이후 바닷가 백성들이 어깨를 쉴 수 있게 되었다”고 자평하였다.

    [사진] 김홍도의 풍속화 중 ‘고기잡이’이다. 어살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살로 물고기를 잡았던 안악환도 그림 속의 어부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안악환은 올해 어장세를 내기 위해 관아에 들렀다. 세금을 내니 관에서는 영수증 명목으로 무언가를 준다. 매년 어장세를 내고 받았던 ‘물금첩(勿禁帖)’이라는 문서였다. 물금(勿禁)은 ‘해당 문서를 소지한 자의 특정한 권리나 행동을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와 동시에 그러한 권리를 가지기 위해 상응하는 세금을 납부하였다는 문서를 말한다. 이중(二重) 과세를 막기 위해 발행한 영수증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악환이 받아 든 물금첩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균역청에서 증빙한다.

    충청우도에 사는 안악환이 가진 어살 3칸에 대하여 세전(稅錢) 삼백량을 납부(捧上) 받았으니 지방관과 각 아문과 궁방 각 청에서는 중첩해서 세금을 부과하지 말라.

    균역청 (날짜 정보 누락)

    삼백량이 꽤 큰돈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세금을 내고도 어살이 궁방 소유일 때보다는 안악환의 살림살이는 이전보다 나아졌다. 저 한양에 계시는 임금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라고 악환은 생각했다. 균역법이란 법이 시행되고 몇 년이 지난 근래의 생활 처지가 이전보다 나아져서 다소 여유가 생긴 것이 삶의 큰 위안이 된다. 악환은 부지런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서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어와 지친 악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