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국제연대’를 생각하다
[정의당 청년당원 오키나와 기행②] 불굴관·공산당
    2019년 09월 10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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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청년당원의 오키나와 기행①] 이 시기에 웬 오키나와?

오키나와의 진보정당을 찾아서

일본의 추석인 오봉(お盆) 연휴의 기간은 우리에게 광복절이고, 그들에게는 종전기념일인 매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4일 정도다. 아르바이트 일정과 기타 당 활동 등을 피해서 잡은 급한 여행 일정은 8월 16일부터 8월 19일까지. 하필 딱 겹친다. 연휴에 이어지는 주말로 인해 실질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거나 공식적으로 어딘가를 방문할 만한 시간은 마지막 날인 19일 월요일뿐이었다.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 이번 오키나와 방문은 동아시아의 노동자와 민중, 진보적 시민사회 간의 국제연대를 모색하는 데에 그 의의를 두었다. 제국주의에 맞선 헤노코 투쟁 현장 방문도 같은 목적이었고, 평등과 평화라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좌파 정당 간의 활발한 교류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당 대 당 차원의 공식 행사가 아닐지라도 진보정당 당원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이어진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정의당 청년당원의 입장에서 오키나와 현지 진보정당과의 교류는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였다.

자민당의 무덤인 오키나와에는 강력한 야권연대가 꾸려져 있다. 사회민주당이 제1당의 자리에 있고, 그와 연대하는 중도좌파 지역 정당 사회대중당이 있다. 전신 역사부터 따진다면 오키나와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일본 공산당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니고 있다. 이 중 지역적, 역사적 특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회대중당과 제도권 내 가장 좌파적이라 할 수 있는 공산당 두 곳을 방문하여 대화와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한 것이 본래의 정당 교류 계획이었으나, 아쉽게도 연휴와 겹친 여행일정 상 공산당밖에 방문할 수가 없었다.

저항 운동과 진보정치의 산실, 불굴관(不屈館)

공산당과의 만남 전, 잠시 시간을 내어 방문했던 곳을 함께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이 곳을 알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굿즈 판매를 통해 헤노코 투쟁을 후원하는 시민단체 사무실이 나하에 있다는 정보를 검색을 통해 입수했고, 헤노코 주민들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던 차에 기념품이라도 구하려 방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단순한 시민단체 정도로만 알고 찾아간 그 곳이 압제에 대항해 온 오키나와 민중과 진보정치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을 줄은.

항구를 면하고 있는 나하 시 북서쪽 해안가로 걸어가다 보면, 수없이 서 있는 평범한 사무실 중 하나에 ‘후쿠츠칸(不屈館)’이라는 이름의 작은 박물관이 있다.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불굴관’. 무엇을 전시하고 있기에, 도대체 어떠한 정신이 담겨 있기에 불굴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것일까. 2013년 세워졌고 올해로 개관 6년째를 맞은 이 곳은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상징 세나가 카메지로(瀬長 亀次郎. 1907~2001)에게 헌정된 박물관이다.

불굴관은 작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박물관이다.

그렇다면 세나가 카메지로는 도대체 누구인가. 해외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는, 특히 오키나와 같이 국가가 아닌 일개 지역에 대해서는 더욱 단편적인 정보만을 주는 한국 포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봤자 결과는 채 한 페이지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전후 오키나와의 현대사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전후 오키나와의 첫 정당 오키나와 인민당(沖縄人民党)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세나가 카메지로는, 미군정이 가한 공안탄압으로 수십 명의 당원들이 체포된 오키나와 인민당 사건(1954) 당시 함께 구속되었다. 이후 풀려난 그는 초대 민선 나하 시장(1956~57)직을 수행하다 또 다시 미군정의 탄압에 의해 직위해제 및 선거권 박탈에 처해진다. 연금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 속에서도 군정 해소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계속 싸운 그는,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이후 인민당을 흡수한 일본 공산당 소속으로 20년간 중의원을 지냈다. 우리 역사의 김대중과 권영길을 합쳐 놓았다면 저런 인물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부족한 사전조사에서 기인한 무지의 소산으로 인해 오키나와 현대사에 대해 정말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다는 것이 박물관을 관람하며 새삼 느껴졌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인물이다. 게다가 마침 오키나와 공산당을 방문하기 직전, 공산당 소속의 대표적 정치인을 알게 되다니.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미군 압제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택한 ‘일본으로의 복귀’라는 노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오키나와 내에서도 수많은 정치적, 역사적 논란이 존재한다. 그럴 법도 하다. 미군기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으니. 그러나 결과주의적 평가를 내려놓고 보았을 때 사회주의자로서 – 혹은 이념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의 카메지로의 일생을 보며, 필자는 수많은 위협과 억압에 맞서 끝내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강한 경외심이 들어 왔다.

오해는 마시라. 가정집만한 소규모 박물관인 불굴관은 세나가 카메지로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박물관의 부제인 ‘오키나와 민중사 박물관’이 말해 주듯이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한 영웅의 모습을 다루는 곳은 아니다. 지긋한 연세의 여성 분이셨던 관리인 한 분은 이틀 전 헤노코에 다녀왔다고 이야기하자 반색을 하시며 영어 자막이 있는 비디오를 틀어 주셨다. 헤노코가 있는 오우라 만(大浦湾)의 해저 풍경으로 시작하는 비디오는 카누를 동원한 해상 시위에도 불구하고 강행되는 공사, 미군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 추락사고 현장의 모습을 지나 1940년대부터 이어진 미군의 압제와 현민 투쟁의 역사를 다룬다. 정치인 카메지로와 오키나와 인민당, 일본 공산당의 행적은 수십만 오키나와 민중의 삶과 싸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40분 가량의 비디오에서 가장 인상 깊게 느껴졌던 부분은 캠프 슈와브 앞에서 수십 년간 주점을 하며 무수히 많은 미군들을 만나 온 노인의 인터뷰, 그리고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미군들을 함께 추모하는 오키나와 현민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만난 수만 명의 미군 개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이들이었고, 또한 그들 자신 역시도 그러했다. 도대체 그 어떤 구조와 억압이 이토록 인간적인 사람들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는 투쟁이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헤노코 기지 앞 농성장에 혼자 앉아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갔다.

박물관을 지키던 분들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 지긋하신 분은 오키나와 기독교대학(沖縄キリスト教学院大学)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신다고 한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학교로 초대하여 학생들도 만나게 해 주었을 텐데, 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서로 아쉬워했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몇 종류의 기념품을 구입하고, 헤노코에 놓고 온 것과 같은 당 배지를 기념으로 드렸다. 멀리 한국에서 이런 당의 당원들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연대하고자 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수 있도록.

박물관 관리인 분들과 함께, 서로의 뱃지를 달고 찍은 사진

박물관을 나서며 불굴관의 ‘불굴’이라는 단어는 수많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은 세나가 카메지로라는 한 인물을 상징하지만, 또한 분명히 그것은 지금까지도 평화를 깨뜨리려는 제국주의적 시도들에 대해 단호히 맞서고 있는 오키나와의 민중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혼자 해 보았다. 그 불굴의 정신은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고, 또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는 이들이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어느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어 줄 터이다.

일본 공산당을 만나다

나하 시가지는 매우 아담하다. 지하철의 역할을 하는 모노레일(유이레일) 라인이 있지만, 굳이 타지 않아도 걸어서 웬만한 곳은 다 찾아갈 수 있다. 한 개의 노선이라 곳곳을 커버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도 하다. 숙소에서 불굴관까지, 불굴관에서 북쪽 나하 항구의 초입까지의 길도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고생하긴 했지만 모두 합쳐 도보로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바다로 연결되는 하천을 건너면, 그 곳에 멀리서도 보이는 붉고 거대한 ‘일본 공산당’ 간판의 오키나와현 공산당사가 있다.

오키나와현 공산당사는 먼 거리에서도 너무나 잘 보인다

일본 공산당은 1922년 창당되어 오는 2022년이면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정당이다. 수많은 이들이 일본에는 공산당이 수십 년간 합법 제도권 정당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국적으로 10%의 고정 지지율을 받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대표되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공산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그토록 강렬한 거부감을 한국인들에게 각인시켜 놓았으니. ‘사회당’, ‘노동당’은 괜찮아도 아직 ‘공산당’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게 우리 사회다.

우리나라 동사무소만한 새하얀 2층짜리 건물에 떡하니 박힌 거대한 ‘日本共産党’은 지나가는 관광객의 눈길마저 사로잡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한편으로는 참 부럽기도 하다. 정의당의 중앙당사도 독립된 건물이 없는데, 오키나와 현만을 관할하는 일개 광역시도당의 사무실이 이 정도라니! 씁쓸한 질투심을 애써 밀어넣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년의 당직자 분이 여기 앉으시라며 반갑게 맞아 주신다. 명함을 받고서 알게 된 이 분의 정체는 일본공산당 오키나와현위원회 위원장 대리직을 맡고 있는 츠루부치 켄지(鶴渕賢次) 씨다.

일본 공산당 오키나와 현 위원장 대리 츠루부치 켄지 씨와 함께

자리에 앉아 번역기의 도움을 빌린 서툰 일본어로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한국의 사회주의자고, 진보정당 정의당의 당원입니다. 일본 공산당의 평화를 위한 활동에 관심이 많아 오키나와 현 위원회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칸코쿠노 샤카이슈기샤’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니 허허 웃으시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츠루부치 씨다. 통역이 없는 관계로 번역 어플을 이용하여 짧게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여행 일정 중 이 때만큼 통역의 부재가 아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츠루부치 씨는 메모지를 가져와 한자를 통한 필담(筆談)의 형태로 자신들의 입장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세나가 카메지로부터 하여 오키나와 인민당에서부터 현재 일본 공산당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오키나와 공산당은 현의회에 6석의 의석과 중의원 1석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핵심적인 이슈이자 연대 사안은 역시나 헤노코를 비롯한 미군기지의 문제라 한다. 한국에도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것처럼 이 곳에도 기지가 많고, 오키나와 현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함께 간 일행이 미군 기지가 있는 용산에 산다고 이야기하자 서로간의 공감대가 자연스레 형성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혁명에 대한 일본 공산당의 입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혁명적 사회변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현 정세에서의 무리한 폭력 혁명이 아닌,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 그들은 이것을 ‘민주주의 혁명’이라 지칭한다 – 가 이루어져야 하고, 일본 공산당이 집권하여 정치혁명과 사회개혁을 이룬다면 과학적이고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된다는 이야기.

국적을 불문한 상당수의 좌파들로부터 우경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일본 공산당이고 특히 선거를 통한 집권 자체를 혁명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는 이야기이지만, 훨씬 더 개량주의적인 정당에서 이제야 ‘민주적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참고할 지점들도 있는 담론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 변혁의 시작이 오키나와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확고한 표정으로 물론이라고 대답하며 오키나와 민중이 보여 주는 아래로부터의 힘을 역설하는 그에게서는 강렬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한일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일의원연맹에 속한 국회의원들이 일본을 방문해 자민당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을 때, 자유한국당 모 의원은 ‘공산당밖에 우리 편인 당이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자유한국당이 공산당을 칭찬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 해프닝까지 있었을 만큼 일본 공산당의 아베 정권에 대한 반대, 그리고 한국에 대한 연대의 입장은 확고하다. 그것은 인터뷰 자리에서도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츠루부치 씨가 인터뷰 내내 강조했던 이야기는 ‘아래로부터, 노동자와 민중의 힘을 통해 아베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한일 간의 진보적 국제연대가 필요하지 않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공산당과 우리 간의 견해는 일치했다. 얼마 전 정의당의 박예휘 부대표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 발표한 일본 민중에게 전하는 메시지(링크)를 전달하며 입장에 대한 의견을 묻자, 돌아온 반가운 답은 ‘우리의 입장과도 완전히 동일하다!’였다. 공산당과의 짧은 만남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에 대한 작은 희망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너무 과장일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공산당이 없다. 반공법의 폐지와 국가보안법의 개정 이후 이제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당을 만드는 데에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공산주의라 하면 낡디 낡은 프레임부터 씌우고 보는 사회다. 일본 공산당은 이름만 공산당인 개량주의 정당이라고 엄청난 공격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가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합법적으로 제도권에서 지지를 받아 좌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회라는 것을, 그리고 수십 년 간 그들이 쌓아 온 탄탄한 기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직자 분들의 시간을 뺏는 것이 죄송하고, 우리 역시 비행기 시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인터뷰를 길게 진행할 수는 없었다. 언어의 한계 역시 명확하게 느껴졌고. 마지막으로 츠루부치 씨에게 부탁한 것은 부대표의 메시지에 대한 답장과 더불어 정의당과 당원들에게 보내는 짧은 연대의 메시지였는데, 비록 짤막한 메모지만 의미 있는 내용이 담겨 있기에 많은 당원 동지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러분의 정의와 용기에 경의를 보냅니다. 일본 공산당도 (여러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여러분과 손을 꼭 잡고 세계 평화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오키나와 공산당으로부터 받은 짧은 연대의 메시지

여행을 마치며

어떤 여행이든지 돌아올 때의 아쉬움은 마찬가지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나하 국제공항에서 다시 비행기에 오르며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하루만 더 있었더라면 훨씬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는 다시 올 일이 있겠지. 그 때는 이 칼바람 같은 한일관계가 훈풍으로 바뀌어 있기를 바라면서.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인 학생들 수십 명은 도쿄에서 독립 선언식을 가진다. 엄혹한 일제 치하였던 만큼 그 주동자였던 최팔용, 백관수 등은 연행되어 가혹한 수사를 받고 기소된다. 일본의 인권변호사이자 사회주의자였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자청하여 이들의 변호를 맡고, 이후로도 일제의 거센 탄압 속에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민중과 연대의 길을 걸었다.

2편에 걸친 오키나와 기행을 마무리하며 백 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금 상기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는 ‘NO JAPAN’ 현수막이 나부끼고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은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본 민중과의 연대는 절실하다. 압제에 대항한 오랜 투쟁의 역사를 지녔고 지금도 싸워나가고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은 특히나 더욱 그렇다. 후세 다쓰지가 그러했듯이 군사적 긴장을 심화시키며 갈등을 조장하는 집권자들의 행보에 맞서 자신들의 현장에서 싸워 나가는 이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란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다시 보고 싶은 나하 시내의 밤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를 행선지로 정한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또 우리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정의당과 한국의 노동자, 민중들이 그 길에 함께하도록 필자 역시 현장에서 더욱 노력하고자 한다. 비록 국적은 달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함께한다는 연대 의식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게 아니겠는가.<끝>

필자소개
정의당 국민대 학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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