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생활의 새로운 투쟁
    [낭만파 농부] 돼지농장과 천막농성
        2019년 08월 22일 09: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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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서가 내일모레,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올 여름도 힘겹게 지나왔지만 지난해에 견줘 그래도 양반이다.

    논배미에서는 벼이삭이 고개를 내밀었다. 출수기, 이 때는 물을 흠씬 대줘야 낱알이 튼실하게 여문다. 다시 물을 대느라 종종거리고 있다. 한편으론 햇볕이 조금 누그러진 틈을 타 예초기로 우거진 논둑 풀을 쳐낸다. 아직은 더위가 가시지 않아 자주 작업을 멈추고 숨을 몰아쉰다.

    올해부터는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심어놓았더니 자꾸만 열린다. 토마토, 고추, 호박, 가지, 심지어 녹두가 이렇게 바삐 익을 줄 몰랐다. 따내고 따내도 금세 검은 빛을 띠는 꼬투리가 늘어만 간다. 녹두를 담아 말리는 소쿠리는 날이 갈수록 수북해진다. 핑계가 하나 늘었다. “햇녹두로 부친 빈대떡 잔치 벌여요!”

    오늘은 “올해 마지막 방아를 찧겠노라” 단골 소비자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두 달이 지나면 햅쌀이 나온다. 그 때까지 일용할 양식을 주문하시라는 기별이다.

    땅 파서 먹고사는 농사꾼의 삶이란 게 이렇다. 뭐 중뿔날 게 있겠냐마는.

    그런데 올해는 좀 유별난 여름을 나고 있다. 군청 들머리에 천막을 치고 ‘캠핑’을 하고 있다. 지난 6월에 ‘소풍’을 다녀온 뒤로 대응수위를 한 단계 높인 것이다. 다름 아닌 돼지농장 문제다.

    업체쪽이 8월 중에 농장 재가동을 위한 인허가 신청서류를 제출하리란 정보를 입수했다. 군청 항의방문을 함께 했던 단체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번에는 천막농성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업체쪽에는 “농장 재가동은 꿈도 꾸지 마라!”, 군청에는 “결코 인허가를 내줘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커다란 몽고텐트 한 동을 세운 지 이제 보름이 가까워 온다. 월요일이던 어제는 내가 당번이라 온종일 천막을 지키다 왔다. 한여름, 찜통더위 속에서 천막을 지킨다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물론 옥상에서,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이들에 견줘 그야말로 ‘캠핑’에 지나지 않지만 ‘선수’가 아닌 시골 ‘아마추어’들에겐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일흔을 훌쩍 넘겨 여든을 바라보는 동네 어르신들이 일주일에 하루씩 뙤약볕에 나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쨌거나 우리는 아마추어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겁 없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한때, 내가 이 나라를 대표하는 ‘투쟁조직’ 출신이라는 것에 주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쟁은 개뿔, 내 활동분야가 ‘데스크’였다는 걸 알고부터는 심드렁해졌다. 누가 뭐라 그랬냐고!

    사실 갑갑한 건 외려 내 쪽이다. 이리 팔자가 꼬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신선이나 되어볼까”하고 똥폼 잡고 내려온 지 10년도 안 돼 다시 투쟁이라는 아주 익숙한 상황에 놓였으니 말이다. 하긴 누굴 탓하고, 팔자를 탓할 일도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운명이라 해야겠지.

    돼지농장만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구가 밀집되지 않은 시골이라서 생태환경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구조물이 널려 있고, 자꾸만 늘어간다. 악취를 뿜어내는 공장식 사육시설, 사료공장, 퇴비공장에, 침출수로 땅을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는 매립장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악취에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귀촌인들은 가슴을 친다. 청정한 자연환경, 맑은 공기를 찾아 시골로 내려왔는데 “이 모양으로 살자고? 내가 미쳤지!” 차라리 도시에 살 때가 나았다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골이 유토피아일 수는 없으니 모자란 것은 채우고, 맘에 들지 않는 것은 고쳐나가는 그 과정이 시골살이의 참맛 아나겠나. 생태환경을 제자리도 돌려놓는 일 또한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래서 죽자 사자 목숨을 거는 대신 싸움 자체를 누리자는 것이었다. ‘소풍’ 가듯 군청을 항의방문 했고, 지금은 ‘캠핑’ 하듯 군청 잔디밭에서 천막농성을 벌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군청 출근시간 30분 전에 피케팅을 하고, 티타임을 가진 뒤 책을 보거나 판각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군청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참 더울 때는 에어컨이 켜진 시원한 군청 민원실에서 돌아가며 더위를 식히고 퇴근시간에 맞춰 피케팅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출퇴근 농성’이다. 당연히 공유일도 건너뛴다. 반평생을 투쟁조직에 몸담았지만 이렇듯 널널한 천막농성은 처음이다.

    이지바이오. 손꼽히는 국내 유수의 농축산재벌에 맞서는 한적한 시골사람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랄까. 설령 힘에 부쳐 싸움에 지더라도 우리는 그 다음 수를 찾아 다시 싸울 수밖에 없다. 이 곳이 몸을 부릴 마지막 터전이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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