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와 도둑맞은 자아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
        2019년 08월 13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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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의 성장을 이끈 초기 리더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는 미국의 강연에서 페이스북을 “도파민에 의해 작동하는 단기 피드백 순환고리”(short-term, dopamine-driven feedback loop)라고 규정하고 페이스북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괴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담론과 협력이 사라지고 왜곡된 정보와 거짓만 남았다.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지구적 차원의 문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기사 또한 페이스북을 통해 읽고 있는 지금 문득 페이스북 이용자 수를 찾아봤다. 페이스북은 작년 기준 월간 이용자 수가 20억 명을 돌파했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 인터넷 이용 인구의 3분의 2가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페이스북 메신저 이용자도 12억 명이 넘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모든 인터넷 이용자가 쓰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제 존재를 규정하는 많은 철학은 ‘세계-내-존재’에서 ‘미디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를 말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접속과 동시에 거대한 세계가 한꺼번에 손바닥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세계-sns-존재 ’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팔리하피티야의 말처럼 피드백 중독은 조회수 및 좋아요 증상이다. ‘좋아요 요정’이란 별칭도 있을 만큼 ‘좋아요’는 초를 다툰다.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페이스북, 트위터는 일종의 디지털 소셜 플러그인이다. 접속과 동시에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거나 지속적으로 자신을 노출한다. ‘좋아요’는 실시간 숫자로 명기되며 인맥의 유지를 확인시켜준다. 온종일 스마트폰 속에서 무수한 소통이 이뤄진다. 개인 계정은 확장적 자아로 기능하면서 네트워크에 접속해 교류하고 지속적 관계 맺기를 확인받는다. 누가 클릭해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라도 하다는 듯 불안한 침묵은 ‘좋아요’로부터 구원받는다. 실제로 ‘좋아요’를 했니 안했니로 상대의 감정과 관계의 진척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에드거 엘런 포 「도둑맞은 편지」는 그런 의미에서 기표가 어떻게 주체를 형성하는지 보여준다. 파리 경시청장인 G씨는 뒤팽과 화자를 찾아와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느 날 왕비는 누군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고, 이 편지를 받고 나서 왕비는 무척 놀란다. 이 표정을 지켜본 장관은 직감적으로 편지가 왕비에게 무척 중요한 편지라고 느낀다. 장관은 왕비의 편지를 훔친다. 이 편지를 빌미로 왕비를 압박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왕비는 파리 경시총감을 불러 장관이 훔쳐간 편지를 되찾아 오도록 한다. 이에 경시총감이 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진다. 결국 편지를 못 찾자 경시총감은 탐정 뒤팡에게 도움을 청한다, 뒤팡은 장관의 집에 들어가 벽난로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편지를 찾아 들고 나온다.

    「도둑맞은 편지」는 기표가 주체이며 기표가 곧 주체의 운명이란 점을 포착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왕과 경찰의 시선이 있고 영리한 척 하지만 편지를 눈앞에서 강탈당하는 왕비와 장관의 시선이 있으며 결국 장관은 똑같은 방식으로 눈앞에서 그 편지를 도둑맞게 된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는 일종의 진실이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우회해 어딘가에 도달한다. 편지는 편지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사건을 발생시킨다. 여왕의 편지가 무언가 대단한 비밀을 숨겼다고 판단한 장관이 편지를 옮기고 또 다른 곳으로 편지가 옮겨질 때 편지가 담지한 주관성은 상호 주관성의 과정을 거쳐 전혀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편지의 순환에 따라 인물들의 역할은 바뀌지만 편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동일하다. 기표의 속성인 반복과 순환이 거듭되면서 주체가 경험한 사건, 편지가 담지한 진실은 사후적으로 구성되고 편지의 이동에 따른 편지라는 기표가 주체의 삶에 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비유한다.

    이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여왕도 뒤팡도 아닌 편지다. 편지는 누가 어떤 내용을 전하려고 왕비에게 보냈는지 끝내 알 수 없다. 오로지 편지를 둘러싼 주체들 간의 긴장과 갈등이 순환된다. 편지의 순환은 인물들 간의 상징적 협약과 파기를 만들어낸다. 독자는 편지의 이동을 쫓으며 도난당한 편지가 어디 있느냐에 주목하고 암묵적으로 편지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라 얼핏 짐작할 뿐이다.

    라캉의 분석대로 「도둑맞은 편지」는 언어와 의식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왕과 장관은 자신들이 편지를 소유했다고 믿지만 사실 편지가 주체를 소유한 셈이다. 편지에 묶인 두 주체는 ‘현전(現前)하면서 부재하는 편지’의 실체에 속박된다.

    접속과 동시에 소셜 네트워크에서 무한 발행되는 기표의 상호작용이 현실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여기서 기표는 대상의 본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상징적 의미를 산출했고 기호로 소비됐다. 디지털 공간을 점령한 기표가 여론 질서를 만들고 그가 만든 기표와 이미지들이 무한 증식된다. 사람들은 ‘좋아요’를 통해 불안을 달랜다. ‘좋아요’를 통해 고독을 떨쳐내고 세계와 ‘나’의 연약한 고리를 붙잡는다.

    한병철은 ‘좋아요’를 면역 반응이라 했다. 무한 ‘좋아요’는 어떤 측면에서 긍정성의 폭력이다. 같은 것의 창궐이자 증식은 면역을 없앤다. ‘좋아요’를 통해 타자와 간격을 좁히다 못해 일체를 꿈꾼다. 경계가 사라지고 갈등이 사라진다. 타자가 사라진 세계에서 자아는 구별 불가능하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한병철)

    소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실상 기본적으로 정보 처리 용량에 한계가 있다. 대부분 모든 정보를 탐색하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떠오른 몇 가지 주관적 정보를 가용한다. 자신의 기억 용량에 맞게 선택적 정보를 처리 판단한다. 지각의 뿌리에는 이런 환경이 조성돼 있다. 정보 외에 기존에 품었던 믿음, 의견, 생각 인상 느낌이 가용할 만한 확실성으로 작동한다.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은 어떤 판단에 있어 객관적 정보가 아닌 주관적 감정에 바탕에 둔다는 사실은 무수한 실험을 통해 확인됐다. 가령 같은 경기를 봐도 대체로 심판을 편파적으로 느끼곤 하니 말이다.

    과잉 소통은 언어의 해방이 아니라 언어의 창살인지도 모른다. 몰이해는 몰시간성에 온다. 사안이나 대상에 대해 즉각적 피드백이 쏟아지는 시대에 스스로 생각하기 전, 빠른 피드백이 발생한다. 이래서 진영 논리는 간편하다. 상대의 프레임을 운운하며 스스로 가용할 만한 프레임을 옮긴다. 각자가 속한 집단적 표상을 공고히 하고 포지션에 맞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편집적으로 모아 서로의 유대를 강화한다. 자아는 자신이 본 것, 안 것, 믿어온 것만을 진실로 간주는 데. 이는 일종에 “생각은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은 되어진다”는 의미에서 파생 실제를 만든다.

    메시지의 전체주의는 소비사회의 오랜 산물이다. 미디어 독해력을 갖기란 소비 인간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다. 소비사회에서 자아는 지속적으로 자본의 기표와 코드에 포획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실시간 소비사회의 기표 속에서 계산, 소멸된다. 미디어 내의 기표에 함몰돼 파생 실제의 틈을 발견하지도 깨부술 의지를 갖기조차 어렵다. 자아가 불안한 관성과 침묵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도록 곳곳에서 모든 힘이 동원된다. 평소 팔로우해 온 셀럽, 페친, 트위터 유저의 진단과 예측을 무조건 흡수하고 그의 판단 아래, 정보의 통제를 넘어 생각의 통제를 가속화한다.

    마치 거울 단계 이론처럼 공유와 리트윗을 통해 자아를 보고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를 가용해 편리대로 이해한다.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어 하는 ‘나’ 대신 누군가 이어 붙인 ‘상(想)’을 보고 본질을 파악한다. 소속감과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필연적인 소외가 발생하지만 결국 자발적 소외다. 나의 ‘자아’는 sns의 몰시간성에 의해 타자와 거리를 상실한 채 어쨌거나 당신이 그렇다면 나도 그렇다고 여기는 편이 손쉽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 하는 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공간이다. 한병철 『타자의 추방』 (60쪽)

    디지털 세계에선 일사불란한 기호와 스테레오 타입의 유희가 펼쳐진다. 갈등은 소거되고 의미의 변증 따윈 성가신 일이다. 종북, 토착 왜구, 한일전, 손쉽게 피아를 가르고 나누기 좋은 언어들이 부유한다. 자아는 고립의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적’을 갈망하고 요청한다. 자기선전을 주입하고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논리에 매끄럽게 포섭된다.

    자아는 일종의 세계와 ‘분리불안’을 앓는데 여기에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가 요청된다. 평소 팔로우했던 사람의 논리에 저항 없이 미끄러지기 위해선 무조건적 신뢰, 가라사대 급의 언설이 필요하다. 이때 따져 묻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 곧바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소통이란 명목하에 갈등은 유예되고 부정성을 제거한 채 회색 빛깔의 대중이 되는 일이 차라리 간편하다. 도무지 부딪히고 마모되며 성장할 시간 같은 건 없다. ‘좋아요’는 그런 시간을 추방한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타자는 얼마든지 ‘추가’되고 다른 의견을 가진 타자는 ‘삭제’ 될 수 있는 환경이다. 때문에 sns는 대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흔히 sns를 의미 있는 논쟁의 장이라 하는데 실상 논쟁을 너무나 쉽게 피하도록 해준다. 자신과 비슷한 타자로 둘러 쌓인 환경에서 기표는 얼마든지 남용된다.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 돼 돌아오는 소리에 안식을 얻고 자기 자신의 반사된 얼굴에 ‘좋아요’를 누르는 일종에 자기 중독에 빠진다.

    이제 여기에 나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닮은 것들과 소통하느라 정신 팔려있는 동안 도둑맞은 자아는 결국 매끄러운 스마트폰의 표면 속으로, 관심을 둘러싼 경쟁 속으로, 자주 추락한다. 그럴 때마다 안락한 디지털 영토에서의 도둑맞은 ‘자아’는 권력 기표의 집단적 요구에만 부흥하는 이른바 파쇼적 형상으로 자주 출몰할 뿐이다.

    필자소개
    여미애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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