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 도시개발의 시범이자 반면교사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서울 도시개발의 출발점
        2019년 08월 05일 01: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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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광희문 밖 ‘황학동’, 공동묘지에서 만물시장으로의 변화”

    도시의 이질적인 섬, 여의도

    현대 도시개발의 역사에 따라 구역별로 계급화된 서울에서 여의도는 매우 특이하고 이질적인 공간이다. 서울 한가운데 자리잡은 한강 남측변의 이 섬은 주변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여의도동은 행정구역상 영등포구에 속해 있지만 공장지대와 서민계층의 주거지로 구성된 영등포의 다른 동들과 분리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강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도시경관, 계급, 문화, 정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강남에 가까운 이 고립된 섬의 정체성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여의도의 정체성은 대림동, 신길동, 문래동, 당산동, 양화동, 양평동 등 영등포의 다른 행정동들과 지형상 ‘섬’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샛강과 제방으로 자연적 경계가 나뉘어 있지만, 서울교와 여의교 등 짧은 다리는 이들의 생활권을 이어주는 데 무리가 없다. 여의도와 영등포구의 다른 동들은 지금처럼 사람이 살게 된 이유와 도시개발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분리된 것이다.

    서울에는 육지이지만 고립된 섬 같은 지역이 여의도 외에도 몇 군데 더 있다. 목동은 양천구 안의 신월동, 신정동이라든가 바로 인접해 있는 강서구 화곡동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광장동 역시 광진구 안의 중곡동, 군자동, 자양동 등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목동은 1980년대 안양천변에 제방을 쌓은 뒤 도시빈민들을 내쫓고 신시가지로 개발한 곳이다. 광장동 일대는 1970년대 제방 공사 후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택지가 된 구의지구 일대를 현대건설이 옛 경희궁 터였던 서울고등학교 자리를 서울시에 넘겨주는 대신 받아내서 1980년대에 거대 아파트 단지를 형성한 곳이다.

    이 두 곳의 형성과정은 여의도와 비슷한 데가 있다. 제방공사나 수면매립, 원주민 철거 등을 통해 새로 조성한 택지에 아파트 단지 중심의 거주지나 계획된 신시가지를 만든 후 경제적 여력과 교육열을 갖춘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 지역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의도는 1975년 완공된 국회의사당, 1980년대 초반 입주한 방송국(현재는 다른 곳으로 이사), 1980년대부터 활성화된 증권가와 금융가 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파트 단지 중심의 목동, 광장동과 다른 특성이 있다. 그러나 고층건물과 거대 아파트 단지 중심의 신시가지 개발을 통해 원래의 역사 및 주변지역의 정체성과 단절된 의미를 가지게 된 과정은 비슷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대에 이미 거의 완성된 시가지를 가지게 된 여의도의 모습은, 1980년대의 목동, 광장동을 비롯하여 훨씬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도시개발이 진행된 강남의 역사를 선취하고 있다. 현재 지어진 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여의도 아파트들의 재개발과 재건축을 둘러싼 상황은, 1970~80년대에 개발된 상류층 거주지역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경제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대 아파트 단지로 처음 개발된 여의도를 보면,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이촌동이나 이후 비슷한 전철을 밟은 지역들의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보인다.

    사진 1. 1974년 4월 4일 <동아일보>에 소개된 여의도 종합개발도

    비행장을 없애고 택지를 만들어낸 윤중제 공사

    과거의 여의도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시대에 왕의 목축장으로 쓰였던 이곳을 비행장으로 만든 이후, 몇 번의 이벤트를 알리는 뉴스나 외국인들의 방한 소식에 등장하는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1920년 이탈리아 비행기의 경유 비행, 1922년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유명하다. 1958년 김포공항이 생긴 이후 여의도 비행장은 공군기지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할 일은 더욱 없었다.

    그래도 여의도 비행장은 도심에서 매우 가까워서 1960년대 중반까지도 사람들의 시야에 일상적으로 포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발표된 김승옥의 소설 <환상수첩>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주인공의 눈에 포착된 여의도 비행장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했다. “영등포도 지났는지 창밖으로는 불빛이 드물게 흘러갔다. 멀리 비행장 있는 쪽에서 서치라이트의 비단결 같은 빛살이 밤하늘을 스쳐가고 또 스쳐가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할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고 법적인 권리도 없었던 시기의 여의도 비행장은 지금의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보다 지리적으로 훨씬 가깝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이름뿐인 공간에 불과했다.

    여의도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제방 공사와 1970년대 초반부터 유명해진 아파트 단지들 덕분이었다. 이 과정은 1970년 서울시 기획관리관으로 부임하여 일했던 도시사 연구자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권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일제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숱하게 홍수로 인한 수해에 시달렸던 서울시는 한강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도로를 쌓기 시작했다가, 그 결과 새로운 택지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고 한강개발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1967년 12월 27일부터 1968년 6월 1일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윤중제 공사를 마쳤다.

    사진 2. 1968년 윤중제 공사현장.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건축가 김수근 팀은 일본건축가 단개 겐조가 만든 <됴쿄 계획 1960>의 영향으로 입체적 도시를 구상하여 여의도 도시계획을 제출했으나, 이 계획은 그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여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5.16광장이 만들어졌고, 건축과 박병주와 손정목 기획관리관은 서울시의 재정난 때문에 새로운 여의도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을 포함하여 시범아파트를 비롯한 거대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진 연유 등에 대해 아직 손정목의 책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은 없다.

    사진 3. 김수근 팀의 여의도개발계획. 『공간』 19호에 소개된 기공의 “여의도개발 마스터플랜을 위한 전제와 가설”, 1969, 공간

    이 책에서 손정목은 “박병주와 내가 1971년에 구상한 그대로의 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벗어나지도 않은 시가지가 형성”된 여의도 개발에 대해 몇 가지 안타깝거나 후회되는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손정목은 여의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다. 1968년 김수근팀이 구상한 자동차는 지상으로 다니고 2층에 보행자 데크를 설치하는 입체적 도시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국회 지구 – 상업/업무 지구 – 시청/법원 지구의 분할은 몇 가지 수정된 채 유지되었지만, 시청과 법원이 들어오지 못했던 땅의 일부는 시범아파트를 포함한 아파트 단지가 갉아먹었거나 훗날 63빌딩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섬의 중앙축에 위치했던 상업/업무 지구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라고 지시한 5.16 광장에 의해 절단되어야 했다. 게다가 미학적으로 높이 평가하기 어려운 국회의사당 건물보다 주변 건물이 더 높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 때문에 여의도 서쪽은 더 고층화, 고밀도화되지 못한 채 ‘동고서저’ 상태로 남게 되었다.

    사진 4. 1973년 한창 건설되고 있는 국회의사당의 모습. (출처-국가기록원)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들은 허허벌판이었던 80만 평의 땅에 용도별로 구획화된 현대적 고층도시, 고밀도 도시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의도 도시개발에 대한 평가는 그럴듯하게 현대도시의 이상을 실현했다는 자랑스러움에 그쳐도 되는 것일까. 혹은 아쉬움과 부족함이 손정목이 포기했다고 밝힌 몇 가지 사항에 그쳐도 되는 것일까.

    사진 5.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여의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원래 5.16 광장으로 명명된 이 곳은 전쟁 시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 텅텅 빈 아스팔트 광장이었다. 최근 발견된 여의도 SEMA 벙커와 함께 여의도 도시개발에 분단체제가 미친 영향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출처-국가기록원)

    고층빌딩과 블록들을 오가는 가로(街路) 사이의 기억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까지 진행된 여의도 도시개발의 역사는 이 섬을 한국 땅에서 현대도시의 경관과 문화를 가장 먼저 실현한 상전벽해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여의도 하면 떠올리는 63빌딩, 국회의사당, 증권가와 금융가의 건물들은 정치의 중심이자 경제의 중심, 현대적 초고층건물의 밀집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단독주택가 없이 고층빌딩과 아파트 단지로만 이루어진 여의도 주거지역은 목동, 광장동, 강남이 제대로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새로운 삶의 방식을 형성시킨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태어나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일까.

    여의도 도시계획의 기본 원리는 오랫동안 현대 도시계획가들이 추구해온 원칙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각 지역들을 용도별로 구획하고, 자동차 이동 중심의 도로들을 바둑판처럼 건설하며,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블록들을 만들어 동선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주거지역은 근린주구의 원칙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특별히 새로운 원칙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원칙에 따라 건설된 도시의 모습과 삶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쉽게 접근할 이유와 안에서 밖으로 나갈 필요성이 차단된 폐쇄적 지역사회의 등장이었다.

    여의도의 첫 경제적 성공작은 1971년 시범 아파트였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로 인해 아파트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았던 시기에, 시범 아파트는 10평 안팎이었던 서민들 전용의 시민아파트와 다르게 20평, 30평, 40평 등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지어졌다. 게다가 최초로 10층 이상으로 올라간 높이에 도시가스, 중앙난방장치, 엘리베이터, 야외수영장, 조경 등의 시설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근린주구 개념에 따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주거지 인근에 배치하고 상가, 성당과 교회, 병원, 극장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시범아파트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이후 한국 아파트 단지 건설의 모범이 된 현대식 아파트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여의도에는 삼익, 은하, 한양, 대교, 공작, 수정, 삼부, 서울, 진주, 화랑, 목화, 장미, 미성, 광장 등 이름도 다양한 여러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섰고, 인구도 계속 증가했다.

    사진 6. 1978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전경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현대화된 넓은 평수의 여의도 고층 아파트들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상류층과 고학력자들이 입주했다. 손정목에 따르면 입주자의 70% 이상이 대학졸업자였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 고학력 집단이 밀집된 곳은 드물었다. 거주민들의 이러한 특성은 근린주구 원칙에 따른 주거지의 생활방식와 결합되어 더욱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시켰다. 근린주구 지역은 좁은 도보생활권 안에서 대부분의 생활 문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특별한 볼 일이 있지 않는 한 그곳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다.

    사진 7. 1971년 5월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전시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델하우스 개관 현장. 동부이촌동 아파트가 모델하우스 개관을 통해 성공을 거둔 이후, 모델하우스 개관은 입주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중요한 홍보행사가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의 ‘특수학군제’는 이를 더 공고하게 만든 매개였다. 1984년 강남 8학군이 사회문제화되기 이전에 여의도는 계급에 따라 학력자본이 상속되는 ‘특수학군제’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인근 영등포의 가난한 지역 학생들이 여의도의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의미인 동시에, 일단 여의도에 살게 되면 한강 북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붙어 있는 여의도국민학교, 여의도중학교, 여의도고등학교로 이어지는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교우관계의 폭은 여의도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여의도중학교 출신인지 윤중중학교 출신인지 갈리는 정도에서 끝난다. 여의도가 앞서 말한 목동, 광장동, 강남과 공유하고 있는 비슷한 특성 중 하나는 바로 높은 성적과 대학진학률을 자랑하는 ‘학군’의 존재였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비슷한 성장배경과 계급과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끼리 접촉하며 살아갈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여의도에서 계속 자란 사람들은 의식할 수 없지만, 이러한 지역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도시 경험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도 포함했다. 예컨대 1970~80년대 여의도 학생들은 다른 중고등학교 학생들처럼 교문을 나서면 펼쳐지는 문구점, 분식집, 서점과 같은 각종 가게와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 대신 학생들이 기억하는 것은 대로변의 고층빌딩과 여러 가게들이 입주한 상가건물이다. 여의도백화점, 라이프쇼핑센터, 한양쇼핑센터, 대교A상가, 우정상가, 홍우빌딩 등 다양한 건물들을 중심으로 그 안에 입주해 있던 가게들이 기억 속에 배치되어 있다. 우정상가의 아메리카나, 대교B상가의 모니카의 집, 장미상가의 문방구, 미주상가의 독일빵집, 63빌딩의 웬디스… 이것이 여의도 아파트 단지에서 성장했던 학생들만의 고유한 기억방식이다.

    사진 8. 여의도의 상가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우정상가, 홍우빌딩, 여의도백화점, 대교B상가. (출처- 여의도넷)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분식집, 오락실, 만화가게, 당구장 등 학생들을 유혹할 만한 가게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매우 안전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빌딩과 상가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가게들을 찾아내고 그 장소들을 토대로 학교 바깥의 생활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온갖 가게들을 학교 앞에서 몰아낸다고 해서 학생들이 그런 장소들에 오염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이 학생들의 기억을 삭막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여러 건물들 속에 숨겨진 만남과 즐거움의 장소들을 찾아내고 방문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의 우정, 입소문 같은 것들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여의도 학생들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이 다양한 가게가 있는 번잡한 통학길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용도별로 구획된 블록들을 가로지르는 대로들, 대로변의 고층빌딩에 숨겨진 가게들, 아파트 단지 사이의 주차장과 녹지 사이를 걸어 다니던 기억이라는 사실이다. 도시의 하이라이트가 화려한 쇼윈도우, 다양한 상품들, 복잡한 길, 이질적인 사람들의 바쁜 걸음 같은 활력에 있다는 통설을 떠올려보면, 여의도 학생들의 추억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여의도는 손정목의 말대로 분명히 새로 건설된 “도심”인데, 이곳의 밤은 시끌벅적한 유흥가가 없는 적막한 시공간이다. 이곳은 폐쇄적이기 때문에 밥값과 술값이 비싸고, 해가 지고 직장인들이 퇴근하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의도 한가운데 자리한 증권가와 각종 사무실이 있는 건물들은 밤마다 직장인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 전형적인 도심공동화 현상을 겪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현재는 카카오 택시 등의 등장으로 사정이 달라졌지만, 한때 한밤의 여의도는 택시가 가려고 하지도 않고, 택시를 잡을 수도 없는 고립된 섬이었다. 인적이 끊기고 상점의 불이 꺼진 밤의 거리는 위험하기 마련이지만, 다행히 여의도는 안전한 편이었다. 미국 도시의 다운타운처럼 슬럼화되거나 우범지대가 되기 좋은 조건을 가졌으나, 서울의 치안이 전반적으로 좋았던 데다가 여의도가 부유층들의 거주지였던 덕분이다.

    또 다른 여의도 만들기에 대한 의문

    지어진 지 50여 년을 향해가는 여의도 아파트는 이제 오래된 것이 내뿜는 분위기, 사람들의 손길이 묻은 사물들, 추억을 상기시키는 옛 디자인들, 훌쩍 커버린 울창한 나무들을 품고 있다. 시간의 축적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선사한 인간적인 흔적이다. 그러나 여의도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은 더 늦게 지어진 강남의 아파트들이 재건축되는데 더 오래된 여의도의 아파트 재건축은 왜 지지부진해야 하는지 불만이 많다. 용적률이 더 높은 아파트를 올려서 부동산 가격을 올려야 하는 조바심을 무시하는 서울시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마찬가지로 여의도 신도심의 고층빌딩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은 오래된 도심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쾌적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새로 지어진 건물일수록 더 좋고 더 비싼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동일한 감각에 기반하고 있다.

    아직도 특유의 철옹성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여의도의 도시계획은 과연 성공적으로 실현된 것일까? 마천루의 사무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63빌딩과 LG트윈타워 같은 랜드마크 등이 있지만, 누구나 자주 갈 만한 곳은 아니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커다란 도서관을 포함하고 있지만 외진 곳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권위주의적으로 빛나고 있다. 자동차의 원활한 소통을 중시해서 몇몇 일방통행로를 가지고 있는 여의도의 도로교통체계는, 이곳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목동의 일방통행로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처음 여의도에 들어간 사람들을 당황시키곤 했던 일방통행로와 독자적인 교통체계는 이곳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스스로 폐쇄적이고 독특한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렵다. 도시의 거리가 선사하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는 풍경과 다양한 상품들이 끊임없이 유혹하는 거리, 높낮이가 다른 건물들과 낡은 간판들로 가득찬 거리를 무질서와 혼돈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러한 사람과 상품과 새로운 흐름을 자신의 생활반경에서 자꾸 몰아내고 싶기 마련이다. 여의도의 거주민들이 이제 서울 시민들에게 활짝 열린 여의도 고수부지에 몰려드는 외부인들의 소음과 쓰레기를 불쾌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외부의 활력이 스며들 여지는 점점 줄어들기 마련이다.

    지방의 소도시에도 여의도 같은 아파트 단지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행정가들은 이러한 신도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지 아파트 단지를 더 짓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모두 똑같은 직사각형의 건물과 일직선의 도로와 고층빌딩과 상가들로 가득한 거주지를 더 짓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서울에는 서로 다른 건축 디자인와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건물들, 빌딩 뒤에 숨어 있는 골목, 다양한 종류의 가게들이 어디에든 존재하고, 서로 출신과 계급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수시로 안전하게 이루어지는 지역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질서와 혼돈이 아니라 다양성과 활력의 포용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석철, 『여의도에서 새만금으로』, 2003.

    서울특별시 한강건설사업소, 『여의도 및 한강연안개발계획』, 1969.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 2』 , 한울, 2003.

    손정목,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2』, 한울, 2005.

    안창모,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여의도의 소외와 개발」, 『도시설계』 42, 2010.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유강은 옮김, 그린비, 2010.

    필자소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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