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화시대의 자본주의 :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연재 시작하며 ① '신자유주의 본질'
        2019년 05월 21일 06: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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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당시의 자본주의에 대해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 같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우리는 그간 이 문제를 별반 고려하지 않은 채 행동해 왔다. 하지만 변혁운동의 전진을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단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리라고 본다.

    본 글의 연구주제는 간단하다. 즉,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자본주의인가, 여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새로운 국제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였는가? 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된 본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신자유주의의 본질 ; 제2장 국제독점자본의 형성과 발전 ; 제3장 지구화시대 금융업자본 ; 제4장 현대제국주의 ; 제5장 다극화와 신국제질서.

    제1장 신자유주의의 본질

    1. 여전히 주목해야 할 신자유주의

    먼저 왜 신자유주의로부터 본 글을 시작하는지에 관한 이유부터 밝혀야겠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본 글의 연구대상은 바로 이 21세기 지구화시대의 현대 자본주의이며, 그것과 관련한 몇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 예컨대 현대 자본주의의의 발전단계, 그 주체인 국제독점자본의 형성과 발전, 현대 제국주의의 성격, 탈냉전 이후의 국제질서 의 이론적 문제의 규명을 주요한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또 이들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최종적으로는 한국사회성격을 규명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당대의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이전 시기의 자본주의가 ‘케인스주의’를 통해 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냈던 것과 비슷하다. 이 양자는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예컨대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자율기능을 강조하고 지구적 단일시장 형성을 위한 각국 경제의 자유화와 개방화를 적극 주장한다고 한다면, 케인스주의는 국가의 개입과 조절을 중시하면서 비교적 일국적 범위에서의 자본의 축적운동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신자유주의는 그 이전의 자본주의와 당대의 그것을 가름할 수 있는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중요하며 우리의 일차적 관심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어쩐지 그 전성기가 조금 지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008년 하반기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폭발한 이래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한창 기세를 떨치던 20세기 마지막 10년과 비교해도, 지금은 그때처럼 지구경제 일체화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며 각국의 경제개방을 사정없이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 대표주자격인 미국마저 최근에는 자국시장에 대한 보호주의 정책을 노골화하는 것을 보면,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유효한가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지금 당장은 이념이나 정책면에서 당대의 자본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기간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우리가 생활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계속해서 주도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현대 자본주의의 주도적 이념일 수밖에 없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구화’라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현실과 관련된다. 지구화가 지금처럼 우리의 현실생활의 자연스러운 기초가 되는 한, 신자유주의 역시도 우리의 신변에서 상당기간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양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의 지구화시대를 여는 데 있어 밉든 곱든 간에 신자유주의는 큰 공헌을 하였다. 어쨌든 이렇듯 현실에서 객관화한 지구화는, 반대로 이제는 신자유주의를 쉽게 우리 주변에서 떠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의 단일한 지구시장이 초보적으로 세워지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합법적이고 권위 있는 세계정부가 아직 세워지지 못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정치의 현실은 본질상으로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 같다. 이 경우 각국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냉혹한 이윤추구 논리와 자본 간의 약육강식에 입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시장논리에 입각한 합리적 규칙과 질서를 신자유주의는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정부의 개입과 조절이 없어도 시장은 자기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신화’의 전파자가 바로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임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자세히 보게 되면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원래 그 이론 속에 국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케인스주의에 대한 대립물로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시장’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를 전파할 무렵부터,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일국 범위 내의 균형 추구에 대한 회의적 시각과 함께 국제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동기가 강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당시 이들의 비판과 대안의 대상이었던 ‘국가’와 ‘시장’ 각각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먼저 ‘국가에 대해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의 비판이 겨냥한 것은 일반적 의미의 국가 기능이 아닌 케인스주의로 대변되는 국가, 즉 국가를 매개로 한 일국 자본주의의에 대한 체계화된 관리이다. 국가가 재정과 화폐정책 등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고질병인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 산업부문 간의 불균형, 소득격차 심화와 실업문제 등을 해결하고 이상적인 균형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요체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여기서 핵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국가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당시까지 대체로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있던 믿음 즉 국가의 적극적 경제관리를 통한 자본주의의 일국 차원에서의 균형 달성이 가능하다는 강한 믿음에 대한 회의를 의미하게 된다.

    물론 이들이 국가 대신 제시한 ‘시장’이라는 대안은 이 같은 일국 내 균형 달성을 아직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시장은 사실상 일국적 범위에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처음부터 ‘지구적 시장’을 명확히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시장을 얘기할 때 그 범위를 ‘국내시장’으로 제한한 적도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이미 19세기 중후반부터 본격적인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던 정황을 감안한다면, 그 시장 범위는 자연히 국제시장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라는 진정한 시장 기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시장주체 간의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이미 독점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국내시장이 아니라 오직 세계시장을 염두에 두었을 때라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가 본격 등장할 당시에는 종전 후 30여년의 발전을 거친 끝에 각국은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정밀한 국가경제관리체제가 상당 수준 완성단계에 있었다. 때문에 이 같은 기존의 익숙한 국가관리체계를 바꾸는 데 있어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관념의 전환뿐만 아니라 일선 관리집단 및 각종 이익집단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개방화 논리와 국제시장 역량에 대한 기대에 의거해 당시 국내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사회 각 방면의 케인스주의적인 관행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었다.

    국가는 잘 알다시피 ‘주권’으로 상징되는 영토와 국민을 그 기본요소로 한다. 그 같은 주권은 주요하게는 일국 내에서만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국제관계에 들어서면 국가의 권위는 사실상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때문에 이 시기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은 사실상 ‘개방경제’로의 대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이후 각국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개방화’ 논리와 결합되어 진행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사실상 신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일국적 범위에서가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균형의 달성이라는 점은 이후 신자유주의가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명백해 진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 등 선진 각국 자본들은 기존보다도 더욱 본격적인 해외투자에 열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도 이때엔 ‘지구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자본주의의 축적시대가 열렸음을 명확히 하였다. 이렇듯 1970년대 이후 역사 무대에 전면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처음부터 장차 지구화시대를 준비할 임무를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와 지구화, 양자는 처음부터 밀접한 상호 관련을 가졌다.

    2008년 하반기에 금융위기가 발발한 이후, 미국은 유럽연합과 다른 개발도상국의 강력한 항의와 요구에도 불구하고 금번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국제 금융투기세력에 대한 규제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또 유럽연합의 그리스 등 회원국의 채무위기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과 프랑스 등 채무국들은 사회보장비용의 축소, 정부 간소화, 노동규제 완화, 사유화 조치 등 이미 우리 눈에 익숙한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조치들을 해법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도 금번 위기탈출의 방향으로 향후 신자유주의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할 것임을 시사한다.

    한국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2005년에 미국과 체결한 한미 FTA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이미 45개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수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인데, 이는 한국의 개방화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현실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으며, 재벌기업들은 국제시장의 변화하는 상황에 발맞추어 노동자들의 밥그릇을 위협할 대규모 구조조정을 수시로 계획한다. 이렇듯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IMF)

    1. 국내 신자유주의에 대한 관점 비판
      ―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가?

    그간 신자유주의에 대해 국내 논자들은 각기 자기 나름의 입장을 표명해 왔다. 이들의 견해를 보면,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경제학 이론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상이자 정치적 실천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으며, 국가의 개입과 조절기능보다는 시장의 중요성과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일치한다. 또 신자유주의가 대외적으로 지구화와 개방화의 이념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있어서도 별반 이견이 없다.

    그런데 국내 학자들의 신자유주의의 본질과 관련한 견해를 볼 때 무엇보다 한 가지 주목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는 국제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금융적 축적이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라든지, 혹은 “오늘날 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주체는 재벌이 아니라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다.”라는 표현,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축적 전략에 따라 화폐자본이 주도하는 전 지구적 시장 위계 체계가 꼴을 갖춰갔다.”는 등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1) 이에 따르면 산업자본과의 관계에서 볼 때도 그것은 위의 금융자본에 비해 종속적인 지위에 놓인다. 예컨대 산업자본인 다국적기업은 금융자본이 자신의 금융적 이윤 실현을 매개하는 담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작금의 지구경제화 추세도,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이 보기엔 그 대부분 혹은 그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선 국제금융자본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개인의 재산권 보호에 대한 강조, 국가의 후퇴,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 등의 기본 원리도, 결국 따지고 보면 하루 사이에 수십억 내지는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자유롭게 이동해야 하는 국제 금융자본의 요구를 대변한다고 본다.(2)

    이렇듯 신자유주의를 주요하게는 국제 금융자본의 운동과 관련하여 바라보는 견해는 사실 국내만의 현상이 아니며 해외에서도 그 같은 견해가 많이 유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프랑스 좌파학자 장 크로드 드루나이(Jean-Claude Delaunay) 같은 사람은 아예 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금융독점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3) 필자의 생각엔 국내 집필자들의 상당수가 이들 해외 저자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국제 금융자본의 운동과 연관시킬 경우 다음과 같은 적지 않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째, 현대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자본의 운동을 지나치게 추상화하거나 신비화하게 된다. 먼저 위 논자들이 사용하는 ‘금융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금융자본은 ‘금융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즉 금융업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자본을 지칭하는 것이다. 위에서 드루나이의 견해를 소개할 때, “금융 및 그 파생상품의 발전으로 인해, 금융자본은 시간과 공간상에 있어(운운)”하는 부분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원래 ‘금융자본’이라고 하면 산업독점자본과 은행자본(오늘날에 있어선 금융업자본)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20세기 초 제국주의에 관한 논쟁이 한창일 무렵, 힐퍼딩이나 레닌 등과 같은 이론적 선각자들에 의해 확립된 이래 정치경제학계의 전통적 관례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금융자본을 간단히 ‘산업자본화한 은행자본’이라고도 불렀다.

    이 경우 금융자본이 최종적으로 획득하는 이윤의 원천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진다. 즉 그것은 근원에 있어 결코 생산과정을 떠날 수 없으며, 자본의 운동을 추상화하거나 신비화할 여지도 사라지게 된다. 이 같은 금융자본에 관한 정의의 정확성은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하면서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현대 금융기법에 의해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한 파생상품이 개발된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마치 그 같은 금융상품을 통해 자본이 생산과정과 유리된 채 무한정한 이윤증식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이 같은 금융상품 자체는 이윤(그 원천인 잉여가치) 창출이 불가능하며 결국 최종적으로는 산업생산과 같은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과정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4)

    두 번째는, 마치 산업자본과 금융(업)자본이 서로 대립되고 상호 배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양자관계를 이렇게 설정할 경우 금융자본은 전 세계를 무대로 금융적 착취를 감행하는 국제적 투기자본을 상징하게 되고, 산업자본은 상대적으로 국내에 기반한 생산자본을 의미하게 된다. 이리하여 대립전선이 국제금융자본과 국내 산업자본으로 설정되게 되며, 이들 양자가 사실상 ‘금융자본’이라고 하는 현대 독점자본의 최고의 발전형식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게 된다.

    또한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할 경우 신자유주의 시대에 있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주범은 국제 금융자본이 되고, 국내의 산업자본(재벌)은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국제 금융자본 때문에 손해를 입는 피해자로 변신한다. 실제 현실에서 이 같은 인식이 적지 않게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5) 결국 이 같은 주장은 국내 산업자본은 국제 금융자본에 맞서 타협하고 동맹을 맺어야할 대상이므로, 국내 산업자본을 대표하는 재벌과 ‘유럽 식 사회계약’을 맺으라는 노골적인 설득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듯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재벌과 타협하여 함께 국제 금융자본에 맞서자고 하는 주장은 일견 황당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만약 현재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주요하게는 산업자본과 대립되는 금융(업)자본의 이해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게 된다. 공동의 적에 맞서 그리고 주요한 적에 맞서, 상대적으로 덜 나쁜 대상과 연대 내지는 타협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간의 대립관계에 기반하여 산업자본에 대해 금융자본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확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에서 공감을 얻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에 입각할 경우 당대 자본주의 전반의 변화, 또 그것과 관련된 지구화 현상의 올바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리하여 ‘재벌과의 대타협’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설 자리를 주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왜 한국에서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금융자본’과 관련 속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인식이 유행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식상의 오류 때문만은 아니며,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실상 이들 논자의 개인적 한계를 넘어선 다른 무엇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즉 작금의 한국 진보운동 전반의 계급적·정치적 지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진보운동을 주도하는 주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금의 자본주의 위기를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때문에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대립시켜 보는 것이며, 산업자본이 주도하던 ‘케인스주의’ 내지 ‘복지국가’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오늘날의 현실을 주요한 비교대상으로 삼는다.(7) 이 같은 시각에는 이 양자가 모두 포함된, 이제 자신의 수명을 다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전반의 ‘총체적 위기라는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케인스주의식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보다는 그래도 조금 낫다는 식의 복고주의적인 것으로 귀결 되는 경향이 있다.(8) 이는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의 개량적 해결책에 머무르고자 하는 사민주의의 전형적인 정치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과 금융(업)자본은 모두 현대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양자는 사실상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또 케인스주의이든 신자유주의이든 모두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확립된 이론들이다. 결국 이들의 논의가 정작 본질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신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에 대한 논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여기저기 허물어져가는 낡은 집에 살면서 지붕의 새는 비를 막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벽을 땜질하는 것이 나은지를 놓고 고심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제 수명이 다해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고 고쳐봤자 수리비만 더 드는 낡은 집에 대해, 아예 허물어버리고 새로 멋진 집을 지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앞서 언급한 바대로 학파 이론이면서 또한 현실 정책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또 그것은 오래전 처음 탄생한 이래로 우리가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상당히 긴 시간을 거치면서 몇 차례의 자기변모를 겪어왔다. 때문에 이 같은 측면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의 진면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음 회에는 신자유주의가 포괄하는 이론적 입장뿐만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어온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초기의 학파이론에서 어떻게 이후 점차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지구화를 추진하는 현대 제국주의의 패권적 이념과 정책으로 전환하였는지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본문 주석]

    1. 이상 세 개의 인용문은 각각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과 기원》,p92;《쾌도난마 한국경제》,p237;《신자유주의의 탄생》,pp327-328에서 따왔다.

    2. 예컨대,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재산권 보호와 국가의 후퇴,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을 주장한다. 이것은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에 따른 자본이동의 자유화(재산처분권의 확대) 및 변동환율제(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로의 이행과 직접적인 친화성이 있다. “지주형,《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과 기원》,pp88-89.

    3.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금융독점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한 결과이며, 작금의 정보기술혁명은 금융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을 위한 기술과 생산력 기초를 제공하였다. 금융독점자본주의 조건하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적 진보를 실현하였으며, 자본의 가치형식은 화폐자본과 금융자본의 이원구조로 변화하였다. 이 같은 금융자본의 발전은 상품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결과이고 금융상품은 가장 추상적인 상품이 된다. 1980년대 이래 자본주의경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변화가 발생한 곳이 바로 이 금융영역이다. 금융 및 그 파생상품의 발전으로 인해, 금융자본은 시간과 공간상에 있어 자본의 사용가치 생산에 대한 전면적이고 중단되지 않는 유효한 통제를 실현하였으며, 이로부터 자본의 증식 즉 자본의 이윤극대화를 실현하게 되었다. 이상 《全球化与新自由主义》,pp97-98참조.

    4. 위의 논자들이 모호한 금융자본의 개념을 사용하여 생산과정과의 관계를 불명확하게 함으로써, 이들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갖가지 ‘신화’가 설자리를 얻게 된다. 예컨대 금융(업)자본은 독자적이고 무한한 이윤창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창출하며, 또 전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운동하기 때문에 이로써 하나의 지구적 금융자본가계급을 탄생시키게 된다느니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일국적 틀 내에 갇혀 있어야 하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전선이 무한히 확대됨으로써 전 지구적 금융계급을 적으로 삼아야 하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5. 예컨대, “초국적 금융 자본은 재벌과 노동자들을 함께 공격하거든요. 재벌에 대해서는 핵심 역량에 집중하지 않고 사업을 다각화해서 주식 가치를 떨어뜨린다며 압력을 넣습니다.”운운 하는 식의 글이 그것이다. 《쾌도난마 한국경제》,pp85-86.

    6. 다음 글을 보자. “유럽 식 사회 계약이죠. 족벌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신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허용하고 세금도 많이 내라는 겁니다. 사실 특정 국가에 뿌리박고 있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타협하지 않으면 일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초국적 금융 자본가들은 그런 타협에 머리를 싸맬 필요가 없어요. 투자한 주식만 돈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 뒤에는 다른 나라에 투자하면 그만이니까요. 반면 이탈리아의 피아트나, 스웨덴의 발렌베리, 한국의 삼성 같은 재벌 가문들은 ‘투자한 돈만 돌려받으면 우리 나갈게.’ 하는 식으로는 못합니다. 때문에 노동자들과 타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죠. “위위 책,p86.

    7. 한국 사민주의자의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 인식은 다음을 보면 잘 나타난다. “결국 (주: 영국)보수당 18년 집권 이후 등장한 사회는 새로운 지구 자본주의와 직결된 금융적 축적 체제가 기존 국민-대중 경제의 잔존물과 공존하는 어색한 결합물이었다.”장석준,《신자유주의의 탄생》,p332. 이글의 저자는 그 같은 현실인식의 기초 위에서, 향후 좌파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앞으로 좌파 정치 운동이 주로 어떠한 노선을 취하게 될지 따져보자. 아마도 가장 유력한 길로 떠오르는 것은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복원일 것이다.……하지만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공식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으로는 결코 이러한 약속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즉, 사회민주주의만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복원하기도 힘들다. 전후에 일국 케인스주의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브레턴우즈 체제라는 초국적 케인스주의 덕분이었다. 그러한 지구 질서를 새로 갖추지 않고서 복지 국가를 복원·확대하거나 새로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자면 먼저 지금 존재하는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를 철저히 해체해야만 한다.……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필자는 이 비전이 다시 한 번 정치 운동의 주된 관심사이자 고민거리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위의 책,p334. 이 글의 필자는 말로만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을 얘기할 뿐이다. 그가 동경하는 전후 케인스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었던가?

    8. 필자는 2009년1월20일 노회찬 마들연구소가 주최하는 “이명박 정부 1년 평가: 2009년 대한민국, 위기 진단과 해벌 찾기” 주제의 공청회에 방청객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케인스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한 발표자(모 대학교수)에 대해, 필자가 케인스주의는 ‘재정적자’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파산한 낡은 이론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자, 그에 대해 이 발표자는 “한국사회는 그 같은 케인스주의조차 아직 실행해보지 못했다.”라는 취지로 응답했다.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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