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일제시대 사회주의자들의 삶과 투쟁
    [①] 김만겸, 조선공산당 탄생의 보이지 않는 주역
        2019년 02월 26일 08: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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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100주년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일제시대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항일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화, 조직화를 위해 헌신했던 그 분투의 역사를 사람 중심으로 연재할 예정이다. <조선공산당 평전>의 저자인 최백순 레디앙 기획위원이 맡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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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공산당이 창당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러시아 볼셰비키, 보이틴스키(Grigori Naumovich Voitinsky)라는 인물이다. 10월 혁명 이후 보이틴스키가 맡은 직책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전권대표였다. 요컨대, 조선에 당을 창당하는 것을 지원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진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된 얼마 후, 보이틴스키는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요 목적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극동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원도 업무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보이틴스키가 중국으로 잠입하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했는데 까다로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것, 한국말을 러시아어로 통역할 수 있을 것, 그리고 중국어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 조건이었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인물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단서가 붙어있었다. 사상적으로 확실히 신뢰할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조건을 통과한 인물이 있었다. 김세레브랴코프. 김만겸이었다. 사상문제는 간단하게 통과됐다. 김만겸은 볼셰비키였다.

    최초의 임시정부는 상해임시정부 아닌 대한국민의회

    1919년 4월 설립된 상해임시정부는 가을이 들어서면서 거의 마비상태였다. 임시정부의 설립을 사실상 주도했던 의정원 의장인 이동녕은 ‘합의’에 대한 생각이 짧았던 데다 허상뿐인 다수파의 자리에 취해있었다. 조선을 떠난 망명객들의 상당수는 중국에 자리를 잡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해 연해주의 한인들도 적지 않았다. 1918년 봄에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창당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민족주의 좌파와 우파의 대규모 조직이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1919년 2월에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선포하고 중국과 조선, 그리고 미주까지 정부수립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임시정부는 상해가 연해주에서 탄생한 것이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추진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상해에서 연해주로 밀사들이 오가고 격론이 벌어진 끝에 몇 가지 타협이 이뤄졌다.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상해에 통일임시정부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연해주, 즉 국민의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이동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국민의회의 상징적인 지도자들이 상해로 이동해 임시정부의 주요직책을 맡는 것으로 긴 타협이 정리됐다.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는 인물로는 한인사회당을 이끌고 있던 이동휘와 국민의회의 지도자인 문창범 등이 대표적이었다. 임시정부의 국민총리로 추대된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내무총장으로 내정된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사실상 전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재정을 총괄하는 재무총장은 문창범이었다.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의 주력을 이끌고 상해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합의에 따라 국민의회도 최초의 임시정부를 해산하는 결단을 내리고 문창범 등이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한인사회당의 이동휘와 문창범이 상해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동녕은 합의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결정을 내렸다. 의회를 개최해 정부 구성을 변경하는 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안건은 간단했다. 정부 구성의 직제만 바꾼 것이다. (임시)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변경하는 안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이동휘는 격분했다. 어떻게 보면 직제를 승격한 것에 불과하고 변한 것은 없었지만 이동휘는 약속을 어긴다는 것을 용인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동휘는 취임을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국민의회파였다. 문창범과 국민의회는 곧바로 통일정부 수립을 부정하고 연해주로 돌아가 국민의회 재건, 곧 최초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인사회당이라는 정치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동휘가 계속 농성을 하면서 시간만 끌 수는 없었다. 이동휘는 국무총리에 수락하는 조건으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승만의 상해임시정부의 상주 취임을 내걸었다. 이동휘의 승부수를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상해에서 미국으로 서신들이 오갔지만 이승만은 분명한 확답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위태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무총장을 맡고 있는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상해로 오지 않을 경우 대통령 자리를 박탈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임정그룹의 승부수와 달리 최후통첩을 받은 이승만은 1919년 초 겨울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상해에 입성했다.

    군인 출신이지만 정치적 감각마저 뛰어난 이동휘는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다. 이승만이 조선을 미국의 한 주로 편입해달라는 청원을 한 것을 들어 대대적인 탄핵에 돌입했다. 임시정부는 순식간에 절반으로 갈라졌다. 내각의 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구성된 임시정부의 차장들은 이동휘를 지지했지만 이동녕 등의 임정 주류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동휘는 탈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다.

    상해로 넘어 온 보이틴스키와 김만겸은 이 새로운 흐름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그룹과 신한청년당의 지도자인 여운형과 조동호 등이 참여한 ‘한인공산당’이라는 좌익블록이 상해에 건설됐다. 상해임시정부를 뿌리채 바꾸어야 한다는 목표가 같았던 한인공산당은 전혀 다른 문제로 와해됐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에서 받은 ‘자금’이 문제였다.

    왼쪽 위 원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상해(구글 지도)

    1918년 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창당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은 그 지역 볼셰비키 지도자인 김 알렉산드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탄생했다. 당을 창당한 이동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곧바로 대표단을 코민테른에 파견한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한인사회당이 조선의 유일한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러시아사회민주당(볼셰비키) 하바롭스크 당 서기인 김 알렉산드라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승인절차는 유보되었다. 독립운동 세력인 러시아의 연해주와 상해, 그리고 국내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었고, 그 중의 하나를 ‘유일한’ 사회주의당으로 확정하는 것은 코민테른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이동휘라는 신뢰할만한 인물과 체계적으로 당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게다가 김 알렉산드라의 보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을 가능한 방법으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는 자금 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4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이른바 코민테른 자금이 한인사회당에 지원되었다. 새로운 블록인 한인공산당이 탄생하면서 보이틴스키와 김만겸에 의해 소문 속의 자금이 비(非) 한인사회당 사람들에게도 그 실체가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과 조동호 등은 자금이 한인공산당의 공동의 자산으로 사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동휘의 생각은 달랐다. 자금은 한인사회당에 지원된 것이기 때문에 한인사회당그룹만이 집행권한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테면 통합정당을 만들었는데 참여한 과거의 정당이 자신들의 자산은 자신들 정파에게만 독점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인사회당그룹은 한인공산당에서 발을 빼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당이 아니라 협의체에 불과했다는 주장마저 제기되었다. 격분한 것은 여운형과 조동호만이 아니었다. 보이틴스키와 김만겸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혁명에는 자금이 필요하다. 그것도 이국땅이라면 더 절실한 문제였다. 보이틴스키는 코민테른을 움직여 상해에 새로운 자금을 투입했다. 이들은 상해에 사회과학연구소라는 코민테른 연계조직을 설립하고 여운형과 조동호가 관여했다. 연구소에는 조선공산당 청년트로이카 김단야와 임원근, 그리고 박헌영이 유급상근자로 활동했다. 박헌영은 이때부터 코민테른의 아이들로 관리되면서 조선의 당 건설에 대한 대표권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해가 바뀐 1921년, 코민테른이 이르쿠츠크에서 대규모의 극동민족대회가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그룹과 사회과학연구소의 움직임은 급변했다. 두 그룹의 목표는 하나였다, 코민테른 조선지부, 즉 조선의 유일당을 승인받는 것이 목표였다.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하던 이르쿠츠크의 한인사회주의자들은 그해 5월 초, 독자적인 고려공산당을 건설했다. 이들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들의 흐름을 간파한 이동휘가 얼마 후 상해에서 한인사회당을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을 건설했기 때문이었다. 이동휘의 당은 상해파라고 불렀다.

    이르쿠츠크파는 당의 지도부로 김철훈, 김만겸, 한명세 등을 선임하고 빠르게 상해지부를 포함한 시베리아 지역의 당 조직을 구축했다. 극동민족대회가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되는 것을 기회로 대회를 주도하며 유일당을 선점하려는 계획은 극동국가의 대표단들 도착이 늦어지면서 대회가 연기되며 차질을 빚었다. 대회가 연기되고 레닌이 극동 대표단들과의 면담 의사를 밝히면서 자연스럽게 장소는 모스크바로 변경됐다. 이르쿠츠크파의 홈경기 이점이 희미해진 것이다.

    대회 내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는 자신들의 활동내용을 강조하면서 상대방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보이틴스키의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를 엄호하면서 상해파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이르쿠츠크파의 주요 지도부들이 러시아에서 태어났거나 귀화한 원호인(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상당수의 핵심활동가들이 볼셰비키 당원이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각국의 사회주의 대표들이 포함된 코민테른 집행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하나로 힘을 합칠 것을 주문했다. 트로츠키까지 나서 중재에 나섰지만 양파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코민테른은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에서 통합당대회를 개최할 것을 통보했다.

    1922년 11월 열린 통합당대회는 시작부터 파국이었다. 후퇴와 합의라는 정치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이동휘는 이르쿠츠크파가 파견한 대표단의 자격을 여러 이유를 들어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오로지 숫자에 의한 표결로 대회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김만겸은 코민테른의 주문사항을 상기시키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이동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회 첫날, 통합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격분한 이르쿠츠크파는 대회를 이탈해 치타로 이동한 독자적인 당대회를 진행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보고를 접한 코민테른은 더 이상 묵과하지 않았다. 양파의 해산을 통보하고 이후 독자적인 당건설 시도는 누구도 금지한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의 전후면(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만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난 원호인이었다. 그곳에서 중등과정(김나지움)을 졸업했다. 당시에 김나지움을 졸업했다는 것은 경성의 보성고보를 졸업한 것처럼 엘리트임을 의미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한인들이 건설한 신한촌의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에게 자신은 가본 적도 없는 조국의 미래를 가르쳤다. 몇 년 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러시아신문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변경)이 경성주재 기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어와 우리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는데다 뛰어난 필력을 가진 김만겸을 신문사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김만겸은 1911년부터 1912년까지 경성에 주재하며 일제의 만행을 눈으로 체감했다. 일제도 우리말을 쓰는 이 수상한 러시아인의 행보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작성한 기사를 빌미로 일제는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김만겸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경대표부의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측면해서 지원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의 한인들에게 통문이 돌기 시작했다. 1917년 봄에 연해주에서 개최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순탄하지 않았다. 총회 서두에서 귀화한 원호인들은 귀화하지 않은 여호인(러시아 국적인 없는 한국인)들의 대표권을 박탈해버렸다. 대회에 참석한 김만겸은 통합당대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원호인들이 사회혁명당을 옹호하며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태도에 실망했다.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김만겸은 주저 없이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고려공산당 양파를 해산한 코민테른도 조선의 혁명을 방관만 할 수 없었다. 1923년 2월 코민테른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꼬르뷰로(고려총국)를 설치했다. 상해파의 이동휘와 윤자영, 이르쿠츠크파의 김만겸과 한명세를 위원으로 임명하고 마지막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느슨한 실책은 보이틴스키를 책임자로 지명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코민테른의 극동총국도 이르쿠츠크파의 일관된 조력자였다. 상해파가 계속 불리한 위치에 놓이자 이동휘는 탈퇴와 고려총국의 파산을 선언했다.

    상해파의 탈퇴로 고려총국이 마비되자 고민을 거듭하던 코민테른은 당이 아니라 고려총국의 국내부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치타에서 이르쿠츠크파의 독자 당대회 말석에 앉아있던 김재봉이 경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고 있었다. 2년 후 조선공산당 초대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에게 국내부 대표권이 쥐어졌다. 이르쿠츠크파의 김만겸과 한명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스탈린의 대숙청기에 김만겸은 반혁명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만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동지인 한명세와 사돈지간을 맺었다. 김만겸과 한명세의 후손들이 모스크바에 살아있다. 언론에 따르면 몇 년 전까지 김만겸의 손녀인 맹타이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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