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려진 존재들을 만나는 여행
    [책]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구정은/후마니타스)
        2018년 12월 08일 12: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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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 두고 쓰던 물건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무덤이, 공원이, 때로는 도시 자체가 버려진다. 죽음도 역사도 버려진다. 시간이 흘러 잊히는 것도 있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감추는 것도 있다. 버려지는 것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하지만 책을 쓰며 느낀 가장 큰 역설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폐기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버려진 존재들을 만나는 여행

    이 책은 여행기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를 위해 세웠다는,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 정원 유적에서 시작된 여정은 지구 곳곳을 거쳐, 터키의 고즈넉한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끝난다.

    글쓴이의 시선은 영화롭고 평온한 곳보다는 파괴되어 간신히 남은 흔적들과 버려지고 외면당한 것들에 오래 머문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유적에 서려 있던 압도감은 미군의 침공과 이슬람국가(IS)의 유적 파괴 앞에 빛을 잃고, 자신의 터전에서 버텨 내지 못한 ‘난민’의 삶은 망망대해를 넘고도 깃들 곳을 찾지 못해 두 번, 세 번 거듭 무너진다.

    2015년 9월 세 살 난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가 짧은 생을 마감한 터키의 해변이 더는 평범한 휴양지일 수 없듯이, 버려진 존재들을 만나는 여행은 익숙했거나 보이지 않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찾아간다.

    오랜 국제부 기자 생활을 바탕으로 쓴 이 책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은 ‘버려지고 잊히는 모든 것들’을 향한 시선, 주관을 되도록 배제한 서술을 날실과 씨실 삼아 엮은 글로 채워졌다. 이 스산한 이야기들은 끝내 버려진 존재들과 이제 우리 곁에 없는 생명들의 삶을 기억하고 상상하며,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의 의미를 환기한다.

    책임지지 못할 물건들로 뒤덮인 지구

    만들어 내는 만큼, 파내는 만큼 버려진다.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게 마련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은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 채 버려진다. 비행기, 공항, 자동차, 배, 기차, 우주선, 놀이공원도 쓰레기가 된다. 전쟁이 파괴한 마을(스페인 내전 당시 벨치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중서부의 오라두르 쉬르 글란), 욕망이 만든 유령도시(디트로이트, 포드란지아, 군칸지마)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어떻게 버려지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책임지지 못할 물건들로 지구를 뒤덮고 있는 사이, 그에 따른 위험을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약한 존재들이다. 땅과 숲이 위협받으면서 그 안에 사는 생명은 절멸로 내몰린다. 고향을 잃은 소수 부족이 사라지면서 언어도, 그 안에 담긴 지혜도 사라진다.

    바다를 덮은 플라스틱은 미드웨이 환초의 앨버트로스와 바다거북, 갈매기와 물고기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대가로 치른다. 첨단을 좇아 그보다 더 빠르게 폐기되는 전자 쓰레기 유독 물질을 지닌 채 미국과 유럽을 떠나 동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로 가고 이를 재활용해 살아가는 이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캐나다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생활쓰레기는 필리핀으로 ‘수출’되어 갈등을 빚는다. 이 책은 책임지지 못할 행위를 하는 이들과 그 책임을 떠안는 이들이 대개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성찰하게 한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또 버려지는 상품

    곁에 두고 쓰던 물건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시간이 흘러 잊히는 것도 있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감추는 것도 있다. 버려지는 것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하지만 가장 큰 역설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폐기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노예제를 다룬 책들은 ‘21세기에 노예가 존재하는 건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존재 자체가 지워지거나, 쓰이다 버려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자유 난민’이라고 불리지만 21제곱킬로미터 면적에 불과한 섬에 한정된 자유를 누릴 뿐인 나우루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볼타 호수의 가혹한 노동에 지쳐 생기를 잃은 아이들,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월마트 주차장에서 여름철 열기를 이기지 못해 차 안에서 숨진 ‘인신매매 트레일러’의 사람들이 그렇고,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와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도 이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책에 소개된 노예, 난민, 이주민, 미등록자, 불법체류자, 무국적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버리고 지우고 폐기하는 존재이자, 버림받고 지워지고 폐기당하는 존재이기도 한 우리, 인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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