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암에 뼈 묻겠다는 강남 소녀
    “대단하다는데, 누군지는 잘 몰라도”
    [당당히 앞으로 ③-1] 이보라미 전라남도 도의원
        2018년 10월 15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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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노회찬 의원이 남긴 마지막 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레디앙>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짐을 진 노회찬의 후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연속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세 번째로 이보라미 정의당 전남도의원을 만났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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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인터뷰 [당당히 앞으로 ②-2] 김혜련 전 경기도 고양시의원

    2018년 10월 8일 월요일. 이보라미 전라남도 의원을 인터뷰하기로 한 이날은 공교롭게도 그에게 중요한 어떤 것의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 의원이 대학로에서 만났으면 하면서, 사전 일정이 그곳에 있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가 만날 사람이 의사고, 장소가 서울대병원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이날은 5년 전에 수술 치료한 유방암 재발 가능성을 포함한 완치 여부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점검 날이다. 이날 검진은 두 번 나뉘어 진행됐는데 그 사이 시간을 인터뷰에 할애했다. 결과는 1주일 후인 16일에 나온다. 그날 그가 암과 공식적으로 영원히 작별을 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다.(<레디앙> 독자들께서 이 글을 읽을 때엔 결과가 막 나왔을 무렵이 된다)

    이보라미는 1968년 파주에서 태어났다. 만 50세. 하지만 기억에 없는 파주보다 어린 시절을 보낸 강남 서초 지역이 그에게는 고향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부모는 이 의원이 네 살 때 파주에서 강남으로 이사했다. 논현초, 서초중고, 중앙대를 강남 집에서 다녔다.

    경기 파주→서울 강남→인천→전남 영암

    사람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살았던 지역이다. 그의 나이라면 통상 전라도나 경상도, 충청도 등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 주변인 수도권에서 살다가 서울로 진입하는 코스가 ‘세속적’으로 성공에 가까운 삶이다. 그의 삶은 역방향을 따라 갔다. 인터뷰 도중에 물었다.

    “영암에는 언제까지 살 계획인가?”

    “아마 죽을 때까지?”

    강남 소녀가 뼈를 묻겠다는 영암까지 오게 된 저간의 사연을 들어봐야겠다.

    부모님은 파주에서 만나 결혼하고 이 의원을 그곳에서 낳았지만 두 분의 고향은 거기가 아니다. 아버님(1923년 생)은 황해도, 어머님(1930년생)은 함경북도 출신. 전쟁 통에 남쪽으로 넘어와서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이 의원이 네 살 때 강남으로 이사했다.

    천둥벌거숭이 어린애 시절 뛰놀던 강남이 그에게 고향으로 인식되는 건 당연한 일. 특히나 지금처럼 아파트 빌딩 숲이 아니었던 40여 년 전 강남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거기서 초중고를 다녔고, 아파트촌이 건설되는 것을 눈으로 봤다. 1987년 중앙대 화공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1990년 한라중공업(현 현대삼호중공업)에 입사했고, 이후 노조 간부 활동도 했다. 2006년 영암군 의원에 1등으로 당선된 이후 기초의원 연임, 광역 의원 1회 낙방 후 올해 재수해서 전남도 의원에 당선됐다.

    이보라미 의원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정의당 후보 중 비례가 아닌 지역 광역의원 유일한 당선자라는 이유로 그를 인터뷰하기로 하고 주변에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지만 답을 제대로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되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이랬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들어 아는데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알고 싶다.”

    전남도의회에서 발언하는 이보라미 의원(이하 사진은 이보라미 의원 페이스북)

    “살아 계셨으면 북 송이버섯 받으셨을 텐데”

    이광호 : 부모님과 파주 시절 이야기 간단하게 해 달라.

    이보라미 : 부모님은 이북 분이시다. 황해도, 함경북도다. 전쟁 때 내려오셨다. 파주에서 금촌리에 터를 잡고 살다가 거기서 두 분이 만났다. 지금은 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결혼해 아들이 있다. 전쟁 통에 혼자 내려오셨고,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내려오셨다. 살아계셨으면 이번에 북한에서 보내 준 송이버섯을 받았을 텐데. 두 분은 모두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파주에서 만나 결혼하고 좀 늦게 세 자매를 두셨다. 난 둘째다. 어머니가 38세, 아버지가 45세 때 나를 나으셨다.

    이광호 : 강남에 이사 간 것은 70년대 초다. 그땐 본격 개발 이전이라 지금의 강남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 부모님은 왜 강남으로 이사를 가셨나?

    이보라미 : 아버지께서 강남이 개발될 거라는 걸 아셨던 것 같다.

    이광호 : 파주에서 초등학교 선생님 하시던 분인데, 어떻게?

    이보라미 : 그러니까요.

    이광호 : 왜 그렇게 생각했나?

    이보라미 : 어렸을 때 기억으로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면 아버지께서 ‘강남은 공장 같은 건 절대 못 들어온다. 청정 지역으로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다.’ 이런 말을 계속 하셨다.

    이광호 : 대단한 혜안을 가지셨다.(웃음) 이사 갔을 당시 강남은 어떻게 기억하나?

    이보라미 : 우리가 이사 갔을 때는 아파트가 없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아파트가 막 생겼다. 우리가 처음 살았던 곳은 강남역 근처인데 집 네 채가 있던 시골 동네였다. 바로 옆에는 그냥 논이었다. 얼마 후 서초동 개인 주택으로 이사 갔다. 지금 삼호아파트가 있는 동네다. 부근에 산과 논밭이 있었다. 거기서 스케이트 타며 뛰놀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사 간 후 생긴 삼호아파트에 가수 조용필 씨가 살았다. 그게 너무 좋았다. 이제는 산도 논밭도 없어지고 다 아파트가 들어섰다. 나는 고향을 물어 보면 강남이 먼저 떠오른다. 파주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당시 새로 들어서기 시작한 강남 지역 아파트에는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일부 주민들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연예인이 산다는 소문을 냈는데, 그러면 집값이 올라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용필은 ‘오빠부대’를 처음 만든 초특급 연예인이었다. 그래선지 삼호아파트 주민들은 ‘조용필은 물러나라’고 데모까지 했다는 소식을 당시 유행했던 주간지가 전했다. 사생팬(특정 인기연예인의 사생활, 일거수 일투족까지 알아내려고 밤낮없이 해당 연예인의 일상생활을 쫓아다니며 생활하는 극성팬을 지칭)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들면서 만든 소음과 소란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사무직 노동운동 하겠다, 다짐

    이광호 : 파주에서 강남에 집을 사고 이사 온 건가? 교직은 어떻게 했나?

    이보라미 : 부모님은 학교를 퇴직하고 집을 사서 강남에 오셨다. 아버지는 부동산업을 하셨다. 근데 돈은 많이 벌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이광호 : 1987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공대 화공과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이보라미 :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좀 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중에 수학, 과학 쪽으로 점수가 좋았다. 아버지께서 내게 과학자가 돼 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그게 뭐냐 여쭤 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화학 쪽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나는 화학과 개발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게 공학인 걸로 알고 화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다음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전공 관련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웃음)

    이광호 :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 특별한 해다. 대학 4년 어떻게 지냈나?

    이보라미 : 스무 살 당시 어렸음에도 우리 사회 구조적 문제를 모두 고민하고 엄청 열정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혼자 고민을 다 안고 있는 것처럼 살았구나, 그것이 다인 것처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학생운동을 경험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학교 입학해서 집회 현장에 나갔는데 거기서 들려오는 풍물 소리가 그렇게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풍물패에도 가입했다.

    살던 곳이 강남이어서 그런지 기존 체제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 같은 것도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자본주의 시스템에 살다 보니 알지 못했던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자각 같은 것들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 이런 생각이 나를 학생운동에 발 디디게 했다.

    이광호 : 노동운동에 대한 생각은 어땠나?

    이보라미 : 당시 학생들은 공장 등 현장에 투신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졸업하지 않고 공장에 들어가는 선배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일종의 반항심 같은 것이 있었다. 왜 생산 현장만 가는가, 거기만 사람 있는 게 아닌데, 사무기술직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사업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87년 시민항쟁에 넥타이부대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4학년이 되면서 졸업 이후 취업하고 사무직 노동운동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광호 : 졸업 후 계획대로 회사에 취직했는데.

    이보라미 : 우리 때만 해도 대학 졸업 후 취직하는 게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 취업문이 넓었다. 인천에 있는 한라중공업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회사를 골라가는 조건이었다. 그 가운데 신입사원 모집 광고에 ‘남녀 차별이 없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는데, 거기가 한라중공업이었다.

    이광호 : 차별 있는 곳에 가서 싸워야 되는 거 아닌가?(웃음)

    이보라미 : 그러네.

    이광호 : 입사 당시 노조가 있었나? 설계실로 들어간 걸로 아는데.

    이보라미 : 생산직 노조만 있었다. 내가 입사 2년 후 사무직 노조가 생겼다. 생산직 노조 운동은 활발했다. 그때 단체협약 체결을 앞두고 파업을 예고한 상태였다. 내 입사 동기가 50명 정도 됐다. 입사 후 한 달에 한 번씩 동기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도 가입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그렇게 결정했다. 그해 파업에 우리도 동참했다. 1997년 하반기 회사는 지금의 전남 삼호읍으로 이전했다. 이전 직후 갑자기 부도가 났으며 이후 현대중공업이 인수했다.

    현대삼호중공업은 1977년 인천조선이 모태다. 인천조선은 정주영의 동생인 정인영이 창업한 한라그룹 계열사였다. 1990년 한라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2년 본사를 인천에서 전남 영암군 삼호읍으로 옮겼다. 1997년 IMF 여파로 한라그룹이 부도났고 그 여파로 한라중공업도 1998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법정관리 기간 동안 위탁 경영했던 현대중공업이 2002년 정식 인수(인수 당시 이름은 삼호중공업)했으며, 2003년 회사 이름을 지금의 현대삼호중공업으로 바꿨다.

    노동자 출근 시기의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 선전활동 모습

    경상도에 울산, 전라도에 영암 만들려

    이광호 : 그 시기 노조 집행부를 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보라미 : 현대중공업이 인수한 후(법정관리 위탁 경영) 1998년 제안을 받고 노조 조사통계부장 일을 했다. 부도 이후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는데, 당시 힘이 셌던 노조의 집행부는 파업에 동참하지 않으면 모두 다 제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사무직은 거의 제명당했다. 내 경우 그 시기 어머니가 투병 중 돌아가셨다. 병 간호 위해 서울에 올라왔던 때인데 노조는 정상참작 없이 제명했다. 이후 2003년 다시 노조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고 내 경우처럼 어떤 사정이 있었던 사람들도 있는데 다시 노조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해에 사무직은 일괄적으로 노조원으로 복귀시켰다.

    사실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 사무직 노조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간 곳에는 운 좋게 이미 생산직 노조가 있었다. 동기 모임은 내가 의도적으로 조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모임에서 노조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이었다.

    이광호 : 만37세 때인 2006년 민주노동당 후보로 영암군 의원에 출마했다. 왜 지역 연고 없고 여성이고 노인들이 볼 때는 어린애였을 텐데 어떻게 출마를 하게 됐나?

    이보라미 : 출마 당시 노조 집행부를 마치고 현장에 복귀한 상태였다. 그때는 내가 여성 후보라는 것, 연고가 없는 후보라는 것, 나이가 비교적 어리다는 것이 선거에서 중요하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 정치에 대해 잘 몰랐다. 울산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활발했고 성과도 있었다. 낙선은 했지만 국회의원도 출마시키고 하는 걸 그걸 보고 부러웠다. 전남에도 삼호중공업 노동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고 고민했다.

    경상도에 울산이 있다면 전남은 영암 삼호중공업이 있다, 여기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꽃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선거의 선자도 모르면서 그 생각 하나로 출마했다.

    이광호 : 노조에 ‘나 출마하겠다’고 먼저 말했나?

    이보라미 : 그랬다.

    이광호 : 노조가 뭐라고 했나?

    이보라미 : 노조에도 민주노동당 활동을 같이 한 사람들이 있었고, 다 좋다고 했다. 주위에서 권유도 많이 있었다.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금방 수락하고 노조에 얘기했던 셈이다.

    이광호 : 첫 출마에 26.97% 득표로 1위에 당선됐다. 당시 후보는 몇 명이었나?

    이보라미 : 4명이 나왔다.

    이광호 : 소속 정당은?

    이보라미 : 민주당 2명, 열린우리당 1명, 민주노동당 1명이었다. 2명 뽑는 선거구였고.

    노동자 조직 투표, 1위 당선시켜

    이광호 : 이 지역 ‘여당’ 후보가 난립되긴 했지만 1등 당선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이유가 뭐라고 분석했나?

    이보라미 : 노동자들의 조직 투표가 이뤄진 점이 작용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중공업 사택으로 2,500세대였다. 하지만 그 지역 투표율은 50% 미만으로 낮았다. 낮은 투표율이었지만 75% 이상 나를 지지해 줬다. 몰표가 나온 거다. 사택 유권자들은 나를 알아서 찍어 줬다. 하지만 그 표만 가지고는 1위 당선에 조금 모자랐다. 그 부분은 지역의 민주노동당 지지표가 당선에 기여해 줬다고 봤다. 대불공단에도 많은 세대는 아니지만 노동자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었다. 그들이 민주노동당을 보고 지지해 줬다고 본다.

    이광호 : 개인보다 당을 보고 찍어 준 거네.

    이보라미 : (웃음) 그렇다.

    이광호 : 겸손하게 말은 했지만 선거에서 후보 변수는 중요하다. 아무리 당을 지지해도 후보에 문제가 있으면 낙선하거나 고전한다.

    이보라미 : 2002년 이전 지방선거에서 내가 나온 지역에 삼호중공업 노조 위원장 출신 후보가 출마했었다. 그는 부도 이후 72일 파업을 이끌었고, 회사를 다시 정상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분이다. 이 지역에서는 거의 모두가 아는 후보였다. 그는 무소속 노동자 후보로 나왔고, 민주노동당 후보는 없었다. 그 분이 낙선하고 내가 당선된 이유가 뭔가? 이 차이가 후보 변수라고 본다. 내 경우 사무직이지만 생산직과 두루 잘 알고 지내면서 ‘케미’가 좋았다. 설계실에서 업무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이런 점이 득표에 도움을 준 것 아닌가 생각했다.

    올 지방선거에서 고 노회찬 의원과 함께 선거운동하는 모습

    공무원 누른 노동자 돌쇠들

    이광호 : 돌쇠봉사회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보라미 : 2008년에 만들어진 노동자들의 봉사활동 단체 이름이다. 영암군 의원 당선 후 내가 이 지역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다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지역민 만나고 다니다 보니 원래 이곳에서 사시던 분들은 자신들이 고기 잡던 곳 인근 허허벌판에 큰 공장이 들어선 것이다. 그분들이 볼 때 삼호중공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에 비해 돈 잘 벌고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지역을 위해 내놓은 것도 없고. 그분들에겐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다.

    농민들이 이런 이질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노동자와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고, 이 문제를 푸는 데 역할을 하는 게 내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다. 가을 추수철에 지역을 다녔다. 다른 곳도 그렇지만 농민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들이다. 트럭에 볏가마니를 싣고 수매하는 곳에 왔는데 짐을 잘 내리지 못하는 것을 봤다. 젊은 사람들이 도와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살이 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의 지역 운영위에 농민들의 고충을 전달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논의 결과 매일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도 평소 안 하던 일 하면 몸살 난다, 그러니 오랫동안 봉사를 하려면 하던 일을 하면서 도와줘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용접을 비롯해서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기술로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어머님이나 할머니들은 혼자 수도도 못 고친다. 우리는 어르신 마님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는 ‘돌쇠’가 되자는 뜻으로 돌쇠봉사회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돌쇠봉사회 활동을 하면서 지역 어르신들이 가지고 있던 노동자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이 많이 없어졌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삼호중공업 노동자와 대불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도 함께한다. 회원은 3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 줄었다.

    이광호 : 돌쇠들이 한 일을 조금 더 소개해 달라.

    이보라미 : 처음에는 모기장 갈아드리는 일을 많이 했다. 어머니들께 염색도 해드렸다. 어르신들은 칼도 못 간다. 그래서 집안마다 칼이 10자루 이상 됐다. 새 칼을 사야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칼갈이 역할도 했다.

    이런 일은 작은 것 같지만 적잖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염색을 해 드리면 “시집 와서 지금까지 이런 대접 생전 처음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럴 땐 울컥한다. 봉사를 한다고 갔지만 우리가 더 따뜻해져서 돌아온다. 그분들은 또 받으면 꼭 베풀어야 한다며 음식도 내오고 뭐든 주려고 한다. 우리는 민폐를 끼칠까 봐 막걸리와 두부를 가져가 함께 먹었다. 꾸준히 이 일을 하다 보니 우리의 진정성을 알아 주셨다. 영암군에서도 돌쇠봉사회 소식을 듣고 봉사단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하지만 만족도를 비교해 보면 공무원이 돌쇠를 따라오지 못한다. 어르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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