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다른 두 세계의 만남
    글 읽는 선비와 세 가지 칼을 찬 무사
    [책]『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박상휘/ 창비)
        2018년 10월 14일 04: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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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일본은 무엇이었나? 영원한 이웃 일본과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작업은 언제나 이 질문에서 시작하게 마련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한다’(맹자·주자)고 여기던 조선 문인들은 ‘호전적’이며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무사의 나라, 에도시대 일본과 마주해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눈빛과 표정, 몸짓·태도에서 무엇을 읽어냈을까?

    이 책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년간의 일본 견문기 35종을 바탕으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추적해 조일관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저자 박상휘는 문학교류에 치중해온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딛고 이념·제도·풍습·종교·문화·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일본사회를 이루는 총체적 기반을 당대 조선의 눈을 빌려 탐험한다. 전란을 겪으며 적대와 혐오, 반감을 품고 시작한 교류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애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이해와 공감의 장으로 들어선다. 조선 문인들은 한편으로 경탄하고 한편으로 경계하는 가운데 문명세계의 일원으로서 이웃 사회와 함께 살아가기를 꿈꾼다. 이 책은 ‘우월한 유교문명의 전파자’ 조선 대 ‘선진문물의 수용자’인 낙후한 일본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해와 교류의 상대로서 조선과 일본을 발견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재일교포 3세로 일본과 한국에서 수학하고 현재 중국 중산(中山)대학에 몸담으며 동아시아인들의 교류상을 연구해온 저자는, 정밀한 통찰력으로 170여년에 걸친 시대의 기록을 솜씨 있게 엮어 일방적 전파가 아닌 상호 교감과 교류의 파노라마를 그려냈다.

    글 읽는 선비와 세가지 칼을 찬 무사,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세계의 만남

    조선과 일본은 얼마나 다른 나라인가? 임진왜란이 있기까지 조선은 200년간 단일한 통치이념 아래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400년 가까이 크고 작은 내전을 거치며 만인이 만인을 경계하는 전국(戰國)시대를 살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정반대의 관점을 낳았다(제1장 삶과 죽음). 또한 조선과 일본은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제3장 제도, 제4장 통치법)부터 생활태도와 풍속(제5장 사치와 번영, 제6장 기술, 제10장 문화와 풍속), 교육과 학습방식(제7장 문자생활, 제8장 문풍)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근본적이고 상징적인 차이는 생명관에 나타난다.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1597년부터 3년간 일본에서 억류생활을 한 강항(姜沆)은 일본 무사에게 묻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만물이나 같은 법인데,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죽음을 즐기고 삶을 싫어하는가?’(27면) 조선이 예와 도를 중시하는 선비–사대부의 사회였다면 일본은 죽음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무사사회였다. 남자들은 상대를 죽이거나 방어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자결할 목적으로 항시 대·중·소 세가지 칼을 차고 다녔으며(28면), 싸워 얻은 흉터는 명예고 피하다 얻은 흉터는 치욕이었다(92면). 가족간에도 경계심을 풀지 않아 부자·형제도 칼을 차고 만나며, 공격당할까 두려워 잔치가 있어도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41면). 섬기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의(義)의 근본이라는 이런 생각은 한편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져 잔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 사절이 가장 혐오한 것은 할복과 시검(試劍, 시체를 대상으로 칼날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다움의 근본으로 보는 유교의 관점에서 이런 일본의 풍속은 차마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천하에 일본 사람 같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200년간 평화를 유지해온 막부사회의 비결을 배우다

    이토록 다른 사회를 조선 사절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선 사절들은 일본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거대한 이질적 공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댄 교류가 이어지자 자연스러운 감정적 유대가 생겨난 것이다. 위화감과 반감의 한편에서 싹튼 이런 정서적 공감은 일본사회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바탕이 되었고, 일본의 발전상에 비추어 조선을 성찰하게 되면서 조선 개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에게 일본은 기본적으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존재(55면), 집단적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동성혼(同姓婚)과 이성양자(異姓養子), 신불숭배처럼 미개한 풍습에 천리(天理) 없는 정치를 펴는 나라였다. 극히 일부 승려와 관료 외에는 장관도 글을 아는 사람이 없고, 사대부의 나라 조선과 달리 무사 우선, 양병(養兵)이 국가운영의 기본인 사회였다. 관료는 실력에 따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었다. 천황은 이름뿐, 실권은 쇼오군이 쥐고 지방정치는 쇼오군의 위임을 받은 다이묘오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치하기를 좋아해 비천한 사람도 힘이 있으면 한도 없이 화려하게 꾸미고, 지기를 싫어해 늘 남과 경쟁했다(154면).

    그런데 이런 나라가 어떻게 200년 가까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면서 날로 부강해지는가? 조선 사절들은 그 원인을 오랜 세월 다각도로 탐색하면서 조선의 번영에 도움이 될 점을 찾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 배움이 생겨났다.

    우선 제도적으로는 군사와 농민을 분리 운영함으로써 항시 군사동원이 가능한 점, 주요 관직은 선발하여 종신토록, 심지어 대를 이어 맡김으로써 업무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인 점, 실권을 장악한 쇼오군이 참근교대(參勤交代) 등을 통해 다이묘오를 적절히 관리하는 점, 신분제가 깊이 뿌리내려 “비록 세상을 뒤덮는 용기와 만고에 떨칠 재주가 있어도 또한 상업·공업·농업에 뜻을 굽히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금도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122면) 점 등이 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근간임을 사절들은 통찰했다.

    또한 분수를 지켜 생업에 성실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사찰과 신사, 다이묘오의 저택 등은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그 한편에서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이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또다른 축임을 짚어냈던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자며, 열심히 자기의 힘으로 먹고산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천하에 일본 사람 같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원중거, 161면).

    한편, 식습관과 관련해서는 조선 사람이 하루에 먹는 양이 일본 사람의 3일치에 해당한다거나(159면) 일본의 보통 사람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한 끼에 밥 두어홉에 반찬도 두어 가지에 불과해(157면) 조선 사람보다 식사가 훨씬 간소하고 대체로 소식한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보여 흥미롭다. 물자가 풍부한데도 생활을 절제하는 민중이 국력을 밑받침하고 있다는 사절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능숙한 대외무역과 탄탄한 기술력,
    조선의 개혁론자들을 자극한 일본의 경제발전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전개된 대외무역과 이를 통해 축적된 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에 힘입어 발전을 거듭한 17, 18세기 일본의 기술력은 무엇보다 사절들이 주목한 면이다. 16세기부터 일본은 활발한 대외무역을 벌였고 그 중심에는 무역항 나가사끼가 있었다. 세계 35개국과 교역하던 아란타(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일본이 일찍이 선진문물을 수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세기 초부터 조선 사절들은 나가사끼 무역에 주목했고 1763년의 계미통신사는 일본이 중국과 직접 무역함으로써 중개무역으로 얻던 조선의 이익이 급감했음을 뚜렷이 인식하게 된다. 국제경제의 일원으로서 조선의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조선 후기 유몽인, 안정복, 이덕무 등을 거쳐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서 해외통상론으로 이어진다. “일본이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해 바다 가운데에서 세력을 떨치는 까닭은 능히 외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며(170면) “우리나라는 산천이 좁고 막혀 있으며 땅에서 나오는 산물이 많지 않은데다 다른 나라와 재화를 통하지 않”아서(169면)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런 논의가 조선에서 힘을 얻어 실질적 조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나라의 부와 함께 정교하고 탄탄한 기술력은 국민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바탕이었다. 일찍이 조선 기술자를 데려가 선진기술을 배워야 했던 낙후한 일본은 17세기에 이르면 조선 사절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설비와 기술을 보유하게 된다. 조선 사절들은 일본의 성곽·수차·사찰·민가 등을 상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수차(水車)였다. 17세기 초 이래 강에서 “물을 끌어올려 바로 부엌으로” 대주고 성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수차의 구조를 자세히 묘사하며 그 규모와 효율성에 감탄하는 기록이 거듭 보인다(181~83면). 전국적으로 도량형이 통일되어 민가의 집 “칸의 크기가 한자 한치도 다르지 않”고 “길가의 여러 집들이 먹줄을 친 듯이 바르게 늘어서 있”으며 “병풍과 자리(다다미)를 설사 다른 집에 옮겨놓더라도 조금도 들어맞지 않음이 없”는 점 또한 주목한 부분이다(187면).

    무엇보다 괄목상대하게 발전한 것은 조선술이었다.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승리한 이래 조선은 자국 배의 견고함을 자랑하여 조선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655년까지 조선에서는 일본 배가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견고하기는 우리나라 배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193면)라는 인식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런 인식은 18세기에 들어 역전된다. 1748년의 사행원 홍경해는 일본 배가 “만약 병기를 싣는다면 어느 곳에 나아가든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함의 훈련은 (…) 이것과 비교하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95면)라고 기록했으며 조선술에서 네덜란드–중국–일본–조선 순이라는 평가를 수용하고 있다. 100년이 못 되어 기술력의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조선 사절들은 자국 방어 차원에서 이런 상황에 크게 위기의식을 느꼈다. 원중거는 『화국지(和國志)』 「주즙(舟楫)」에서 배의 크기와 구조부터 국가가 배를 운용하는 제도, 설계의 정밀함, 기술인력에 대한 치밀한 관리 등을 기록하며 조선의 기술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했고, 조선 후기 이용후생론자들 또한 공통적으로 조선술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의 높은 기술력이 조선의 개혁론자들에게 자국을 성찰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우리는 같은 문(文)을 공유하고 있다’
    문화적 유대와 동아시아 평화공존의 꿈

    일본의 발전과 부강이 조선에 자국을 성찰하는 계기로 작동했다면 일본을 같은 문화권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평화공존의 꿈을 꾸게 한 것은 일본의 유교화였다. 1603년에 들어선 토꾸가와막부는 유교를 장려했고 각지에 학교를 세워 일본 전역에서 배움에 힘쓰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이 원래 글을 배우지 않아 위로 천황부터 아래로 서민까지 한 사람도 문자를 아는 자가 없다”(강홍중, 216면)라는 것이 17세기 초까지의 인식이었으나, 1682년 사행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야만으로 여겨 (…) 거의 마음을 두지 않는데, 이는 매우 두려워할 일이다” “우리가 돌아갈 때에 우리의 글에 대해 좋고 나쁨과 장단점을 평론하고 책으로 엮어 국중에 유포한다. 나 같은 못난이로서는 (…) 진땀이 나지 않을 수 없다”(홍세태, 219면)라는 토로가 보인다. 불과 100년도 안되어 일본은 4, 5세 어린아이가 붓을 잡고 10여세 아이가 시를 지으며 여자들도 당시(唐詩)를 쓰는 “해중문명의 고을”(219면)이라는 평을 듣게까지 되는 것이다.

    조선 사절이 왔다 하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정성으로 시문을 구하고 글씨 한자, 말 한마디를 얻으면 소중하게 간직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사절들은 감동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일본 유학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특히 1763년의 계미통신사 일행은 일본 고문사학(古文辭學)을 계승해 사절들과 ‘성인의 도’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 타끼 카꾸다이(瀧鶴臺)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풍부한 학식과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절들은 논쟁의 내용과 함께 타끼 카꾸다이의 이름을 조선에 전했고, 이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에 뛰어난 문인들이 등장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과 ‘문(文)을 같이하고 있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의식은 일본의 학문을 비웃고 폄하하던 자세를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나아가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에 문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고 도를 공유하는 세계가 실현되기를”(307면) 꿈꾸게 되었다. 일본이 ‘인(仁)’을 근본으로 삼는 유교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이런 바람은 양국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저들이 만약 인의를 알고 염치를 알아 옛것을 기뻐하고 지금을 돌이킨다면 이는 단지 그 나라의 다행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이 침략당할 우환이 더욱 없어”지리라(342면)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방적이고 중화중심주의적 한계가 엿보일지라도 이는 긴 세월의 반목과 대립을 넘어 어렵사리 이해와 공감에 도달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최대치의 희망, 평화공존의 꿈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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