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새의 러시아 여행기①
    블라디보스톡과 역사의 추억들
        2018년 10월 02일 08:47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죽산 조봉암선생 기념사업회 권범재 이사의 러시아 여행기를 게재한다. <편집자>
    ————————

    붕정만리

    1970년대의 텔레비전은 화면이 흑과 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영이 아닌 국영방송국이었던 KBS에선 정기적으로 대통령 각하 어록이 화면에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신문은 세로읽기에 주요기사 제목은 한자로 표기되었는데 높은 양반들의 외유는 봉황에 빗대어 붕정만리(鵬程萬里)라 표현되었다. 반 백 년을 살고도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한 주변부 인생의 먼 길 나들이를 나름 ‘연작(燕雀)만리’라 부르는 까닭은 강권에 못 이겨 써 나가는 글의 제목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파리 그리고 사진 한 장

    선배를 잘못 만나거나 책을 잘못 읽으면 운동권이 된다고 홍세화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되는데 나는 친구를 잘못 사귀어 운동권 언저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경기’라는 머리글자로 시작되는 사람들과 성남에서 말이다. 하지만 책과 자료는 정파적 견해를 떠나 다양하게 접했다. 그래서인지 반도의 북부만이 아닌 소비에트연방이나 러시아에 대한 아련한 무언가는 항상 생각의 창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었다.

    인터넷을 떠도는 사진 한 장에서 여행은 시작되었다

    나는 무덥던 작년 여름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에 관한 사진 한 장을 SNS에 올리며 일 년 뒤에 반드시 가겠다는 결심을 밝혔는데 지인들의 동참이 시작되며 결국 우리는 ‘이르쿠츠크 원정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액체 폭탄과 동방을 지배하라

    드디어 9월이 오고 짐을 꾸려 공항으로 향했다. 원정대는 네 사람으로 구성했는데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이등 객차가 4인실이기 때문이다.

    허나 후배 한 사람이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세 사람만 러시아 항공기에 오르게 되었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전에 가이드 역할로 일행의 중심이었던 후배가 휴대용 가방에는 액체류나 금속 물질이 없어야 한다고 해서 서둘러 짐 정리를 다시 했는데 뭔가 하나 빠진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색대에서 경보음과 함께 직원이 미스트를 압류했다. 후배의 말로는 액체폭탄으로 의심될 수 있어서라는데 저가물품 판매점인 ‘다 있는’ 집이 의열투쟁을 위한 폭탄제조소라도 된다는 건가.

    어쨌든 해프닝 끝에 난생 처음 비행기에 올라 북한 영공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동방을 지배하다”는 뜻의 이 도시는 1860년까지는 청나라의 영토였다. 이 무렵 함경도에 기근이 닥쳐 두만강을 넘는 조선 백성이 생겨났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행렬은 땅과 생존의 기회를 찾아 러시아령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그 후 1937년 서기장 동지(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까지 약 20만 명의 조선인들이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연해주 여러 곳에서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레닌 동상과 마지막 황제

    러시아에 도착한 기념으로 한 시간의 노화를 얻었다. 돌아갈 때까지 함께할 시간의 주름이다. 공항을 나서는데 숨 쉬는 공기조차 상쾌하게 느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들었다. 초보 여행자에게 강요된 어색한 해방감 탓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처리할 일이 있던 우리는 역사 맞은편에 하차했는데 먼저 레닌 동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행 설계자이자 역관(젊은 시절 언어 학습능력이 떨어졌던 나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친구를 농으로 역관이라 불렀는데 이 번에도 후배 이 선생을 그렇게 칭했다)께서 러시아의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레닌 동상, 구KGB 건물, 전몰자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은 반드시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망해가던 시절에 언론에서 보았던 쓰러진 레닌 동상은 헛것이었나. 누군가 다시 일으켜 세우기라도 한 건가. 얼떨떨하지만 ‘볼키와 러알’(거름출판사에서 펴낸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을 줄여서 그렇게 불렀다. 당대의 필독서였다)을 읽은 삼십 주년 기념으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선생과 심야 인증 샷을 찍었다.

    레닌 동상 앞에서

    블라디보스톡 역은 제정시대에 건축된 수려한 건물이라는데 한밤에 긴장한 상태로 짐을 끌며 방문한 탓에 외관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내부에 들어서며 역관 이 선생이 혹시 있을지 모를 좀도둑을 조심하라 해서 짐가방을 움켜쥐고 사주경계를 하느라 땀이 날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역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 사회주의 몰락 이후 부활한 쌍두 독수리 문장이 보였다.

    쌍두 독수리는 동로마 제국에서 동ㆍ서양을 초월한 지배력의 상징이었는데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제정 러시아를 거쳐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낫과 망치(농민과 노동자를 상징)로 대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2세에 관한 전시물이 많이 있었는데 역관 선생은 열차표 환불 문제로 곁에 없었고 끼릴 문자를 모르는 나는 까막눈 상황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참가한 황태자 시절(1891년) 사진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숙소, 식사, 당근 김치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볼 일을 마친 우리는 시내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점거한 듯한 여행자 숙소였다. 일행 세 명이 각기 다른 방으로 나눠 수감(?)되었다. 방마다 이층침대가 대여섯 개는 있었고 짐을 보관할 곳도 없어 큰 가방은 침대 위에 올리고 커튼으로 가렸다. 작은 가방과 중요 물품은 휴대하고 장보러 마트에 갔다. 유명한 당근 김치를 처음 봤다.

    아이언맨(스딸) 대원수님에 의해 만리 밖 유배를 당한 고려인들이 배추를 구할 수 없는 중앙아시아에서 김치 대용으로 만든 음식이라는데 샐러드의 느낌이고 아삭하고 새콤한 맛이 좋아서 여행 내내 즐기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고려 당근’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 있는 음식이란다.

    현지 여행 경험이 만렙 수준인 역관 이 선생이 준비해 온 컵라면, 김치 그리고 장봐온 러시아 식재료로 ‘동북아’ 혼성 저녁밥을 먹고 노령(露領)에서 첫 날을 마감했다.

    화장실 그리고 러시아의 자랑 수호이

    아침에 화장실을 갔다. 변기 모양이 조금 다르다. 그리고 화장실이 매우 좁다.

    몸집이 작은 한국인인 내가 답답할 정도면 어제 내 위 침대에서 잔 거구의 러시아 아재는 문을 닫고 볼 일 보는데 애로사항이 차고 넘칠 듯하다. 이 나라는 무료 공중화장실이 없단다. 유별나게 화장실을 자주 드나드는 내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려 한다.

    여행의 첫 일정으로 버스를 타고 루스키 섬에 소재한 극동 연방대학을 찾았다.

    도착하니 무장한 보안요원들이 보이는데 동방경제포럼 때문이라 했다. 극동지역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 유치 행사인데 21세기 짜르 푸틴 대통령의 각별한 국책사업이라 한다. 내부 셔틀을 타고 해안가에 도착하자 때맞춰 수호이 전투기가 등장했다. 되는 집안은 가지 밭에 수박이 열리기도 한다더니 러시아의 자랑이라는 수호이(SU)가 눈앞에서 저공ㆍ저속 비행을 하며 수직 급상승을 비롯한 현란한 곡예를 보여줘 다들 탄성과 함께 전화기를 들이대기 급급했다. 게으르고 굼뜬 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구 소련의 전투기는 미그(MIG)기 시리즈와 수호이(SU) 시리즈로 나뉘는데 설계 및 제작을 담당하는 기관이 다르다.

    내가 지켜본 수호이는 동방경제포럼 행사의 일환으로 에어쇼 예행 연습을 한 걸로 보이는데 SU-27인지 35인지는 알 길이 없다. 눈요기도 하고 바닷바람도 쐬고 즐거운 순간에 슬슬 화장실 생각이 났다. 그 때 역관 선생이 말하길 러시아의 대학은 외부인의 건물 안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수많은 건물 어디에도 나를 받아줄 화장실이 없다는 거다. (뭐지, 어이없음을 넘어 실소가 나오는 이 상황은)

    어쨌든 버스를 타러 이동하는데(할렐루야!) 신축중인 행사용 야외 화장실을 발견했다. 푸틴 (각하) 천세, 천세, 천천세!를 빌어주며 한 걸음에 뛰어들어 손까지 씻고 나왔다.

    레닌 기념품, 스탈린 사진, 마오쩌둥

    다시 시내로 돌아와 독수리 전망대를 거쳐 잠수함 박물관을 찾았다. 러시아에서 대조국 전쟁이라 부르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C-56이라는 잠수함을 개조한 곳이다. 잠수함이 해군의 주력이었던 독일의 경우 바다로 나간 U보트가 다시 돌아올 확률은 높지 않았는데 소련은 육지가 주전장이었으니 경우가 다르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화석을 보는 기분이다.

    잠수함 내부에서 이동하기

    고증된 잠수함 내부를 관람하다 서기장 동지 사진을 발견하고 촌스럽게 관광용 인증 샷을 찍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 아니 강철의 대원수 스딸린.

    시인이자 저술가였으며 군인이자 정치가로 어느 한 부분만으로 평하기 어려운 거대한 다면인격체. (실제 키는 나와 비슷한 단신이다!) 군사용 기념관에 왔으니 군사적 재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는 히틀러의 침공을 예견하지 못했으며 전쟁의 서전을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해 군인들을 포함 천만에 가까운 생명을 희생시켰다. 대조국전쟁 전체 시기로 확대하면 희생자의 정확한 추계가 불가능하지만 이천 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전쟁과는 별개로 그의 집권기간 동안 숙청 등 국가테러에 희생당한 인원이 가장 적게 잡아 60만 명이 넘는단다. (많게는 300만 명 이상) ‘조지아의 인간백정’ 이 맞는지 ‘약소 민족의 해방자’인지는 더 논할 능력이 안 되니 길손의 본분으로 돌아가자.

    서기장 스탈린 동지의 사진 앞에서

    잠수함을 나오는 출구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이며 밀리터리룩 의상을 입고 있던 이 선생이 레닌 배지를 기념으로 구입했다.

    십 년 전 북경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문화대혁명을 컨셉으로 한 기념품을 내게 준 적이 있는데 문혁(문화대혁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조악한 벽보와 마오 주석께서 손을 흔들면 시간이 흘러가는 손목시계였다. 벽보는 얼마 못 가서 미관을 해친다는 가족의 항의로 철거하고 손목의 주석님도 이틀 만에 서거하시어 나의 문화대혁명은 삼 일 만에 끝났는데 오랜만에 레닌 배지를 보니 예전 추억이 소환 되었다.

    오늘 혁명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관광지의 현금으로 버티는 추억이 되었는데 그렇게라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이 사라지는 것 보단 낫지 않을까. 나중에 이르쿠츠크에 있을 때 먼저 돌아간 이 선생이 레닌 배지를 추가로 구해 달라 하였는데 그 곳의 인민들은 레닌을 추억하지 않아 배지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둘째 날의 마무리 그리고 시베리아로

    둘째 날의 저녁은 러시아에 오면 먹어야 한다는 보르쉬 국과 샤슬릭을 맥주 한 잔과 함께 했다. 보르쉬는 우크라이나에서 유래된 음식인데 비트를 넣어 붉은 빛을 띠었다. 샤슬릭은 러시아 꼬치구이로 기호에 맞는 고기를 주문하면 된다. 음식에 별 관심이 없고 미식과 거리가 먼 내게도 맛있는 식사였다. 역관 이 선생 설명으로는 러시아 인은 장사에 밝은 사람들이 아니어서 카프카스 남쪽 아르메니아에서 온 상인들이 어디나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낮에 러시아 햄버거를 먹었던 가게도, 샤슬릭을 파는 식당도 카프카스 지역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주인이다.

    둘째 날 심야에 급한 용무로 서울로 돌아가는 이 선생과 헤어졌다. 역관 이 선생과 나는 두어 시간 후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74시간을 달려 이르쿠츠크로 갈 것이다. 이제는 철길 위의 시간들이다.

    필자소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