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정상회담 소감 :
    재미·감동·교훈 선사하다
    [기고] 우린 이제 한 발짝 디뎠을 뿐
        2018년 09월 21일 03: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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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을 보면서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정치드라마라는 느낌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훌륭한 드라마를 완성했고 드라마의 주연으로서 자신의 값어치를 한껏 키우는 데 성공했다. 하나하나의 합의보다 중요한 것은 2박3일의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보여준 강렬한 메시지다.

    내부정치의 측면

    이 드라마는 내부 여론을 이끌고 지지를 확산시키기 위한 장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두 정상은 곳곳에서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15만 군중 앞에서 연설하도록 배려함으로써 “김정은 위원장에게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다”는 말을 이끌어냈다. 적대국 미국의 동맹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다”란 언급은 그동안 핵무력 건설만이 살 길이라는 공식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근거를 제공해주고, 핵 폐기에 따른 일각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두 정상의 백두산 동행은 민족적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혁명의 성지’를 남측 지도자가 방문하도록 인도함으로써 북한 인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지도력에 긍정적 이벤트였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국민들이 북한을 통해(대통령은 “우리 땅을 통해”라고 표현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게 만듦으로써 남북 화해와 교류에 대한 지지여론을 확산시킬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주었다.

    두 정상 모두 개혁의 더딘 성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지도력 불안을 상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새로운 노선 전환 이후, 큰 변화와 성과가 없는 대내외 경제상황에 대한 회의가 주민들 속에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 풍계리 핵 실험장의 폭파, 억류 미국인의 석방, 미군 유해의 송환, 미사일 엔진 실험장 해체 작업 등 자신이 결행한 선도적 조치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북미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짐으로서 정치엘리트들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리더십의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각종 경제지표의 악화에 따른 야당의 공격과 경제‧사회개혁이 뒷걸음치는 와중에 일어난 지지층의 이탈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은산분리 규제완화, 부동산 폭등 등 개혁정책의 후퇴와 미비에 대한 비판은 일단 멈췄다, 범법을 저지른 재벌에 면죄부를 준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이들을 방북에 동행시킴으로써 비판은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를 앞세워 친일 행위를 가리려 하듯, 남북 경제교류의 선봉을 맡아 과거의 적폐행위가 면책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예상대로 자유한국당은 정상회담과 평양공동선언에 대해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이번 정상회담이 쇼에 불과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쇼면 어떤가. 괜찮은 쇼는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깨끗하고 반듯한 ‘여명 거리’의 화려한 고층 빌딩과 아파트에 대해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다. 진짜 북한 모습이 아니라는 거다.

    1972년 9월 13일 북한 적십자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백 만 환영인파가 동원되는 가운데 반공 게시물이 철거되었고, 빌딩 소등이 금지되었으며, 경부고속도로로 차량을 가져오라는 지침이 하달되었다. 북측 인사가 “남한의 모든 차량을 성공적으로 서울로 동원한 것을 축하한다”고 비꼬자, 남측 인사는 “그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당신들에게 보여주려고 전국의 대형빌딩을 서울로 동원한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고 응수했다고 한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지금 북한에서 낙후된 환경 아래 고단한 세월을 겪는 수많은 인민들이 있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그러나 여명거리의 아파트를 통째 옮겨 놓은 건 아니지 않은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그에게 달동네 구경은 시키지 않을 터.

    백두산 천지 앞의 양 정상 부부(공동취재사진단)

    핵심은 외부 향한 메시지, 이는 특히 미국을 향한 것

    북미정상회담 이후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미국 일각에서는 다시금 ‘군사옵션’이 거론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와중에 제재 강화 카드도 다시 꺼내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북 정상은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남북한 주민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냄으로써 한반도 모든 구성원의 강력한 평화 의지를 미국 측에 전달한 것이다.

    두 정상은 핵문제와 별도로 재래식 군비가 첨예하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남북한 접경지역의 군사적 완화조치를 구체적으로 합의했다. 이번 합의가 비록 한계가 분명한 초기적 조치이긴 하지만, 남북한 냉전 패러다임 전환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미국 매파에 대한 압박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이들 조치는 미국 매파의 딴지로 인해 힘을 내지 못하는 트럼프가 다시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두 정상은 트럼프에게 공을 넘겼다. 세게 넘긴 것이 아니라 받기 좋게 넘겼다.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데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을 허락함으로써 적어도 미국까지 도달하는 운반수단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선행조치를 내놓고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 나가겠다’고 했으며, 이를 위해 ‘상응하는 조치’를 하라며 공을 넘겼다. 적어도 ‘미래 핵’에 대한 포기를 명시하며 공을 넘긴 것이다.

    이 상응하는 조치가 ‘종전선언’이 될 가능성이 많다. 종전선언은 이미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사안이며 미국도 포괄적으로 이 선언을 지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완전한 핵시설의 신고와 사찰 등 비핵화의 가시적 조치가 진전되어야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며, 종전선언을 거래의 수단으로, 핵협상의 새로운 쟁점으로 만들었다. 이는 대북 군사옵션의 포기로 비칠 수 있다는 점, 유엔군 사령부와 같은 정전체제 관리기구의 해체 문제로 종전선언을 해석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첫 공정인 동시에 신뢰조성을 위한 선차적인 요소”(조택범, “종전선언발표가 선차적공정이다,” 『로동신문』, 2018.8.9)라고 주장한다. 즉 군사적으로 중요한 현상 변경조치로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과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상징적 조치로 보는 시각이 대립해왔다.(이러한 해석의 차이도 있지만, 협상 주도권 싸움이라는 성격이 강하다-필자) 문재인 대통령은 귀국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종전선언이 초기 조치라는 점을 설명하고, 북한의 입장도 이와 같다며 종전선언의 연내 성사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서울 기자회견이라는 방북일정의 마지막도 대미 메시지에 할애한 셈이다.

    미국이 이 메시지에 어떻게 답할지는 다음 주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결과가 나와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리용호 외무상의 회담뿐만 아니라 2차 북미정상회담의 추진 이야기가 미국 쪽에서 나오는 것은 긍정적 사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관계 진전의 부수효과가 아니며, 남북관계 발전이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는 동력이라고 했다.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을 방문했던 특사단도 “특히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천적 방안을 협의하기로 하였다”고 보고했다. 이와 같은 의지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일부 실현되었으며, 두 정상은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약속했다. 이는 비핵화문제에서 우리 정부가 발언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드라마의 배경화면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평양의 변모된 모습은 북한이 경제적으로 죽지 않았음을 시위한다. 남북, 북미 간 정상회담 성과에 대한 매파들의 폄하 현상은 늘 북한에 더 큰 양보를 얻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다. 협상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시각은 대북경제제재와 군사위협이 북한을 협상장으로 끌어냈다는 판단, 북한 경제가 곧 무너질 수 있다는 판단에 근거해 있다.(“미국은 협상 전까지 매우 우월한 위치였다. 미국의 ‘벼랑 끝 외교’가 매우 성공적이었다. 북한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회담장에서 미국이 회군했다.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는데 진격을 하지 않고 후퇴한 격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北은 후속 회담에서도 양보하지 않을 것…비핵화는 불가능,” 『조선일보』, 2018.6.27) 그러나 북한은 거꾸로 미국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낸 것은 자신들의 핵무력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상대가 굶어죽을 정도냐, 배는 고프지만 견딜만하냐에 따라 협상에 임하는 전략과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북한은 현대적으로 변모한 국제공항, 고층아파트와 잘 꾸며진 도로, 화려한 한복을 차려 입은 환영군중, 전투적 구호간판이 사라진 거리를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살림살이는 넉넉하지 않고 어렵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며, 자신들이 협상에 나선 것은 경제 발전을 위한 대외환경의 개선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 드라마의 묘미는 재미와 감동, 교훈을 동시에 선사한 데 있다. “대통령 각하를 영접하기 위해 도열하였습네다”로 시작하는 조선인민군 의장대 사열과 21발의 예포, 카퍼레이드와 중간의 하차 인사, ‘대집단체조’를 공연하는 5.1경기장의 15만 군중 앞에서의 연설, 팔짱을 낀 두 ‘영부인’, 그림이 아닌 실물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한 사진과 영상,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답방 약속 등은 정치군사적 대립에 지친 사람들의 감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또 이 드라마는 남북한이 손을 잡으면 강대국에 대한 발언권과 전략적 위상이 높아진다는 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교훈을 선사한다. 남북관계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은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를 위한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다. 환영 군중을 향해 문재인 대통령이 90도 인사를 했다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본 모습은 아니듯, 김정은 위원장의 솔직하고 겸손한 모습이 북한 정치체제의 본 모습이 아니듯, 남북한 정상의 악수는 남북관계의 본 모습이 아니다. 한미동맹보다 훨씬 가역적(可逆的)이다. 곧 올 것 같은 평화와 통일의 길은 실제 멀고 험한 길이다. 우리는 또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필자소개
    북한학 박사. 정의정책연구소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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