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의 우상화, 악마화
    [종교와 사회] 인간 유한성의 성찰
        2018년 08월 13일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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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니체는 흔히 허무의 철학자 혹은 부정의 철학자, 땅(대지)의 철학자로 얘기되고 있다. 그는 또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반기독교 철학자의 대표자로 종종 거론되고 있다. 하긴 “Anti – Christ”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사실 그는 정신적인 병으로 어찌 보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그의 인생은 참으로 가련하고 안타까운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책을 잘 살펴보면 그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절망적, 미치광이적인 철학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웬만한 철학자들은 그를 진정 긍정의 철학자요, 희망과 도전, 꿈의 철학자라고 평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2,30대에 니체를 읽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그는 실제로 20세기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천재 철학자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그가 당시 기독교를 저주했고, 반기독교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른 소문에 불과하다. 사실 그는 예수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이요, 인류 최초의 기독교인이고 최후의 기독교인은 예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어찌 보면 니체야말로 당시 부패하고 세속화되는 유럽 교회와 기독교의 철저한 개혁을 통한 참된 모습으로의 회복을 갈망했던, 교회를 진정 사랑했던 개혁운동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생각된다. 사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으니 당시의 기독교가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인가.

    나는 ‘신은 죽었다’는 말은 어찌 보면 신을 죽게 만드는 당시 기독교에 대해, ‘신은 아직도 살아있다’고 외치는 역설적 표현이 아닐까 해석해 본다. 그는 참 철학, 참 시대정신, 참 기독교, 참 교회를 위해 당시 거짓 철학, 거짓 시대정신, 거짓 기독교, 거짓 교회를 강하게 부정했던 게 아닌가, 그러니 니체야말로 진정 긍정의 철학자, 교회의 철학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사람이 자기의 실존적 유한자로서 인간의 조건을 짊어진 채로 그것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정하면서, 동시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기 자신을 상실함 없이 자기를 부정 초극할 수 있다면 그의 삶과 생명은 궁극적 계시가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삶을 살면서도 자기를 영화롭게 우상화 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투명한 존재가 된다.’고 쓰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과 능력, 영광과 신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광야 시험에서 스스로 부정했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연약한 조건을 짊어진 채로 본연의 연약성을 그대로 지닌 채, 자기가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하나님, 곧 궁극적 실재”의 본성과 사랑을 인류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고, 끝까지 땅 위의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면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인간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가 된 것이다. 로마의 백부장은 십자가 위의 그런 예수를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인정했다.

    지금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각 종교에 더욱 필요한 시대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신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신의 아들이면서도 십자가 처형에 담담이 임했던 예수의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마치 자기가 신적인 능력이 있어서 큰 교회를 이루거나 큰 절, 성당 등 종교적 성공을 이룬 것인 양 자기 자녀에게 세습하거나, 개인 재산화한다면 이는 참 어리석은 일이다.

    설조 스님의 단식 때 모습(유투브)

    최근 어느 노스님이 한 달 이상 불교의 개혁을 위해 단식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신은 죽었다’하는 니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스님은 ‘부처는 죽었다’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부처는 아직 우리 마음에 살아있다’고 문제 많은 불교계에 외치는 것은 아닐까. 폴 틸리히는 ‘거룩한 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그 거룩한 것 자체와 동일시되는 현상’을 ‘악마화, 우상화’라고 했다. 교회나 절, 특정 교리나 종교적 전통, 신앙적 해석, 제도와 법, 이런 상징적 표현들이 그 본래적 정신이나 계시, 뜻인 양 한다면 이런 현상이 곧 악마화요 우상화일 것이다. 악마화, 우상화되는 종교 현상이 주위에 비일비재 한 것은 아닌지.

    장자는 ‘득어망전 (得魚忘筌)’이라 하여 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도 뗏목을 타고 여울을 건넜으면 그 뗏목을 뒤에 두고 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했다. 뗏목이 고맙다고 언제까지나 등에 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서에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정신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 있다. 종교가, 언젠가 사라질 뗏목이나 그물 같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다보면 생사람을 잡는 악마적 현상을 일으킨다. 많은 사이비 종교나 정치적 집단들이 역사에서 증명해 주고 있다.

    무지개 색깔을 사랑하는 동성애자나 동성애를 절대적 죄인으로 몰거나 죄악시 하는 것도 결국, 언젠가 사라지거나 변할 특정 종교적 교리나 전통,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를 우상화하는 데서 나오는 위험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사랑과 포용이라는 종교와 휴머니즘의 본래적 정신으로 바라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차별철폐 운동을 앞장서야 할 종교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차별을 조장하며 악마화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해야 할 세태인 것 같다.

    필자소개
    거창 씨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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