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주체, 어떻게 세울까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⑥-2]
        2018년 05월 15일 0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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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투쟁주체를 세울 것인가?

    1.  비정규직 투쟁,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2. 학습소조, 지역조직과 전국조직의 건설

    인간의 활동은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변혁운동에 있어 양자관계를 말하자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반재벌 투쟁이라는 새로운 실천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주체들의 ‘학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같은 선도적 주체로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그중에서도 의식 있는 선진 활동가들을 지목하였다. 이들은 첫째, 스스로 반재벌에 기초한 새로운 현장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둘째, 이 같은 노선에 입각하여 비정규직 운동을 지원하고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다. “교육자는 먼저 교육받아야 한다.”는 명제가 여기서도 성립한다. 따라서 현 시기 선진노동자 특히 대공장 선진 활동가와 정파들의 임무는 우선 반재벌 학습을 수행하기 위한 현장 내 ‘학습소조’의 결성과 또 그것을 ‘실천소조’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이후 이들을 기초로 지역 및 전국 정치조직의 건설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출발점은 학습소조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대공장 사업장들은 87년‘ 대투쟁을 계기로 노조가 설립된 이래 그간 수많은 투쟁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그 가장 큰 성과물이라 할 수 있는 상당 수준의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적지 않은 현장 활동가들이 존재한다. 특히 이들의 조직적 결사체인 ‘현장정파‘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이들은 비록 지금은 일정 ‘선거조직’으로 퇴보한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노조 집행부의 타락, 타협주의, 어용화를 끊임없이 내부에서 견제하는 비판세력으로서의 자기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또 사업부대표, 대의원, 현장위원 등 각종 부서활동에 적극 참여함을 통해 노조 집행부의 지도력을 보완해준다. 그리하여 임단협 때에만 집중하고 그것이 끝나는 순간 대체로 투쟁을 접고 마는 노조 집행부와는 달리, 그들은 필요시 해고자 복직투쟁, 고소고발 및 손배 철폐 투쟁 등을 독자적으로 끈질기게 지속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과감히 선도적으로 문제제기 함을 통해 노조의 투쟁을 견인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바로 이러한 현장정파이다. 현대차의 경우만 하더라도 큰 정파는 200~300명, 작은 정파는 20~40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 같은 정파가 대략 10여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인식상의 전환만 이루어진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훌륭한 반재벌 투쟁의 ‘선도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위의 비정규직을 지원하는 선도적 부대로서의 자기역할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관건은 바로 ‘의식 전환’이다. 진정으로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이 재벌문제임을 깨닫고 반재벌 주체로 나서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구조와 그 대외적 종속성에 대한 인식, 재벌의 형성 및 발전의 역사, 그뿐만 아니라 그 대안으로써 ‘재벌 국유화’ 강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 지구화 시대에 있어 이미 다국적 자본으로 변모한 한국의 재벌은 미국과 같은 외부 국제역량(제국주의)과도 긴밀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적 시각 또한 요구되며, 신 국제질서 수립을 둘러싼 제 세력 간의 대립에 대해서도 이해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미 ‘재벌과두통치’를 형성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손에 쥔 한국의 재벌과 싸우기 위해선 전략전술에 대한 이해와 높은 정치적 각성도 요구된다. 이 같은 내용들은 충분하고 전문적인 학습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갖추어 질 수 있다. 현장정파들이 선거조직으로 변질되고 있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노동해방’을 지향했던 원래의 초심으로 되돌아와야만 이 같은 학습이 비로소 진행될 수 있다. 또 학습을 기피하고 이론을 경시하는 요즈음의 풍조 역시도 현장 활동가들의 ‘의식전환’을 위해선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장애 중의 하나이다.

    비정규직과 재벌 문제로부터 시작된 학습이 계획대로 진행된 후라면, 이 성과를 바탕으로 학습소조는 ‘실천소조’로 전환되어야 한다. 애초 주요 주제인 현실의 비정규직 문제와 재벌 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학습과 토론을 거쳐 새로운 투쟁방향에 대한 공감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는 ‘강령’에 대한 초보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또 계속해서 반재벌 투쟁의 주체 형성과 관련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 정치세력화에 대한 거시적 전망과 이 같은 조직을 어떻게 형성해 갈 것인가에 관한 경로에 대해 대체적인 공감이 형성되었다면, 이는 ‘규약’에 대한 초보적인 합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학습소조의 실천소조로의 전환을 위한 기본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학습 위주의 토론모임이 너무 길게 진행되고 학습내용이 너무 세부화 할 경우, 자칫 최초 비정규직 투쟁이라는 절실한 현실문제로부터 시작된 긴장감이 느슨해지면서 말 그대로 ‘학습을 위한 모임’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이 같은 사태를 방지하고 처음의 취지를 계속해서 잘 유지하는 가운데 학습을 마치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제와 학습기간의 설정과 함께 그 결론이 지향하는 바의 ‘실천단위’로의 전환이 반드시 모색되어져야 한다.

    원래 인식과 실천은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과학적 인식에 도달하였을 때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결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미룰 필요는 없다. “쇠도 달구어졌을 때 두드리라”는 말이 있다. 어렵사리 학습을 통해 생겨난 투쟁에 대한 새로운 ‘열정’ (그것은 과학적 전망을 획득했을 때 얻게 되는 선물이다!)을 조직적 결과로 승화시켜 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몇 차례의 학습만을 가지고서 참석자들이 새로운 투쟁방향과 관련한 내용들을 모두 습득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때문에 부족한 내용을 메우기 위한 추가적인 학습이 이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 같은 작업은 이후 ‘실천소조’로 전환된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또 그럴 경우 좀 더 명확한 실천 지향성 때문에 학습 효과도 높아진다.

    이렇듯 학습소조에서 진화한 실천소조는 아직까지는 별다른 상급조직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한 강령과 규약만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이면 된다.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하여 재벌과 횡포한 외자에 대한 국유화가 필요하며, 향후 ‘국유기업 주도의 시장경제 건설’을 목표로 한다.

    -정기적인 회합을 통해 지속적인 학습과 일상적 실천사업에 대해 논의하며, 이를 위해 모임의 책임자를 선정하고 소집과 연락을 책임지게 한다.

    -내부적으로는 민주적 토론을 진행하고, 공동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회원 각자가 집행 의무를 갖는다.

    이 시점에서 실천소조 각 성원의 임무는 성원의 확대를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것과,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자신의 의식수준의 향상을 기하는 것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다음 상급조직(지역위원회, 전국조직) 건설 문제로 넘어가기에 앞서, 여기서 보충할 것이 하나 있다. 지금까진 주로 대기업 정규직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는데, 그러나 비정규직운동 역시도 이미 10년이 넘는 자체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분야의 활동가들을 위한 지침 또한 필요하다.

    대기업 정규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의 반재벌 주체의 형성을 위해서는 현 비정규직 활동가들 역시도 ‘反재벌’ 내용을 가진 새로운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된 학습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도 있지만, 현재 비정규직운동 내에서 그 투쟁을 이끌고 있는 선진 활동가나 노조 간부들 스스로도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의식 전환’이 관건이며, 만약 기존의 관념과 관성을 버리고 주체의 결의만 이루어진다면 그들 스스로도 현 노조 집행부나 열성 조합원을 중심으로 그 같은 학습소조를 꾸릴 수 있다. 이 소조 역시도 학습 성과를 바탕으로 실천소조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비정규직운동이 갖는 한 가지 유리한 점은, 그것의 ‘한 발짝 전진’이 힘든 만큼 반대급부로 이 투쟁으로부터 적지 않은 훌륭한 투사들이 배출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충분히 이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현재의 비정규직 투쟁에 첨가되어야 할 사항은 기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투쟁의 기초 위에서 ‘反재벌’의 내용을 가진 ‘+ α 교육이다. 현재의 비정규직운동에 있어 부족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상급조직인 지역위원회(준비위)를 꾸리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재벌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문제이며, 그러기에 반재벌 주체의 형성은 본질상 정치세력화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앞서의 학습소조와 실천소조를 기초로 하여 지역과 전국 차원의 정치조직을 건설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반재벌 투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특히 비정규직 투쟁의 지원이라는 현실의 긴급한 임무를 수행하고 이를 각기 사업장 사업과 조화시키면서, 또 이에 필요한 선전·교육·조직 사업의 유기적 배치를 위해서는, 지역 차원의 상급조직이 가급적 조속히 건설되어야만 한다. 여러 공장과 각 부문에서 확장되고 있는 각각의 소조단위들을 고립 분산적이게끔 놓아두어서는 안 되며, 이들이 써클적 형태로 너무 오래 정체되게 해서도 안 된다.

    상급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주체적 조건은 이미 성숙되었다. 앞서 반재벌 학습모임을 통해 회원들의 높아진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은 자연스럽게 일반 노동조합과는 다른 규율을 갖춘 조직의 필요성을 자각시킨다. 또 그 조직은 상당한 의식수준을 갖춘 선진 활동가들로 구성되기에 민주집중제의 조직운영 원칙을 실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평소 조직 내 활발한 토론은 허용되지만, 일단 전체의 결의가 이루어지고 또 투쟁이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상급조직을 건설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으로 보면, 대공장 정규직 사업장과 지역 내 비정규직 사업장에 현장소조(실천소조)가 4~5개 구성되고, 전체 회원이 20~30명에 달할 경우, ‘지역위준비위’를 결성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경우 각 현장소조로부터 추천된 총 3~5인으로 지역위준비위를 결성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아직 정식 ‘지역위원회’를 결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 단계에서 각 사업장 내 조직발전이 아직 미약하고, 또 지역 내 청년학생, 지식계층, 시민단체, 정당 등 다른 분야 사업의 미개척으로 인해 지역 전체에 대한 ‘대표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후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극복되게 되면 ‘지역대표자대회’와 같은 정식적인 대회와 선출절차를 거쳐 ‘지역위’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설령 ‘지역위준비위’ 단계일지라도 지역사업 전반 및 일부 전국사업까지도 명확히 자기 임무로 설정하여야 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내부 전문분업 체계를 갖추고 체계적인 활동을 수행하여야 한다. 또한 현장소조 및 기타 외곽조직 등의 하부조직에 대해서도 상급기관으로서의 자기 책무를 다해야 한다.

    지역위준비위 단계에서부터는 분명한 자기 강령과 조직규약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만 수평적으로는 각각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존의 현장소조 및 다른 하부기관들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으며, 수직적으로는 서로간의 상하관계를 분명히 함을 통해 전체로서의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조직체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강령적 측면에서 볼 때,

    – 중심적인 현안문제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요구를 보다 분명히 제출하고 몇몇 사항에 대해선 구체화하여야 한다.

    – 이 같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재벌 및 횡포한 외자에 대한 국유화와,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 건설’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 대외 관계에 있어선 대미 자주화, 미군철수, 동북아평화체제 구축, 평화와 평등의 기초위에서 남북통일의 실현이라는 지향점을 명확히 밝힌다.

    이 단계에서 대외관계에 대한 위의 강령이 추가되는 것은 자신의 정치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이미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기타 요구는 각 부문(지식인, 청년학생, 농민과 영세상인 등)과 접촉해 가면서 구체화하되, 처음부터 백화점 식으로 너무 많은 요구들을 나열할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지역(준비)위 규약과 관련해서 보면, 위의 기본소조(실천소조)에서의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다음 사항이 명기되어야 한다.

    – 민주집중제 원칙을 분명히 한다.

    – 회원은 조직의 한 부분에 소속하여 실제적인 활동을 하여야 한다.

    – 통일적인 회부 납부와 회계 규정의 제정.

    – 조직 명칭은 내부적으로 정하되 (가칭 ‘재벌개혁과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는 모임’ 등), 대외적으로는 아직 비공개로 할 수 있다. 즉 공개화가 그렇게 급한 문제는 아니며, 내부적인 양적 확대와 체계 정비가 이 단계에선 더욱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조직의 기본단위로서의 현장 ‘실천소조’는 새롭게 규정받게 된다. 실천소조는 3인 이상일 경우 구성이 가능하며, 독자활동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회원 가입에 대한 결정 권한을 상당 정도 부여받아야 한다.

    이렇듯 상급조직이 건설됨으로써 의식과 조직 면에서 더욱 각성된 회원들은 필연적으로 ‘독자활동능력’이 일층 강화된다. 이는 이들의 조직에 대한 충성도와 활동에 대한 적극성을 높여줌으로써 회원의 확대 및 조직의 발전이 세포분열식으로 이루어 질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조직의 발전은 다시 지역위(준비위)의 영향력의 강화와 활동범위의 확대를 가져오고, 마침내 명실상부한 지역사업의 지도기관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현장의 학습소조나 실천소조를 기초로 하여 ‘지역위원회’와 같은 상급조직을 건설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비정규직 투쟁이 요구하는 ‘연대투쟁’을 그 동력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소규모 하청사업장 (비정규직들은 대부분 이 같은 사업장 소속들이다) 노동자들은 사업장 규모가 작고 영세하기 때문에, 또 상대해야 할 원청 대기업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연대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막상 원청 대기업의 일감 중단 또는 노조 탄압을 겨냥한 기업체 매각과 같은 일이 닥쳤을 때, 다른 하청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찍힐 것이 두려워서,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업별노조’의 협소한 틀에 갇히어서, 지금 당장 이들의 연대투쟁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비록 민주노총이나 산별노조 혹은 지역본부 등의 상급단체 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 역시 한국의 기업별 노조 체계 위에서 성립된 상급단체인지라 힘의 중심이 단위사업장 노조에 가 있는 현실에서 인력과 재정 등의 한계 때문에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할 때가 많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약 반재벌 투쟁을 자신의 고유한 임무로 삼는 지역조직이 존재한다면, 비정규직 투쟁이 필요로 하는 연대는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조직은 앞서 ‘반재벌 학습소조’에서 진화된 현장 실천소조가 4~5개만 존재하더라도 쉽게 결성될 수 있다. 이 같은 지역조직이 있을 경우 ‘연대’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까닭은, 이들 현장의 실천소조와 그 상급단위로서의 지역위(준비위)가 처음부터 ‘反재벌’이라는 공통의 이념과 투쟁대상을 기초로 결성되었으므로 사상적 동질성이 강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반재벌 투쟁은 반드시 개별사업장 차원이 아닌 전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조직 성원들은 잘 인식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보통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탄압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한국사회에서 지역차원의 ’00사업장 지원공동대책위’ 등은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직은 상설화되지 못하고 시간이 가면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아마도 참가하는 하청 비정규직 노조나 다른 연대 조직들이 그들 역시 기본적으로 기업별 노조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본의 탄압이 올 때 시급한 불을 끄기 위해 연대할 뿐이며, 탄압이 잠시 수그러들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사실상 자신들 하청 비정규직 문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재벌은 그대로 둔 채,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한 하청업체만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다 마는 셈이다. 이점은 이들이 자신들을 포함한 한국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을 아직 깨닫고 있지 못한 한계를 반영한다. 이처럼 처음부터 ‘반재벌’이라는 공동의 투쟁목표를 분명히 설정하지 못하는 싸움은 한계가 있다. 이와 비교할 때 위의 지역위(준비위)는 처음부터 비정규직 연대투쟁을 전문으로 하는 한 단계 발전된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위준비위는 비록 초기 설립 시에는 회원의 사업장 분포나 사업장내 밀집도 등에서 아직 힘이 미약한 ‘실천소조'(현장소조)를 발판으로 삼고 있기에, 지역 전체 사업장을 움직여 동맹파업을 조직하는 것과 같은 큰 투쟁을 하기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그럴지라도 현재 조직된 회원들과 그들의 영향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지원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또 끊임없이 ‘학습소조’와 ‘실천소조’를 발판으로 확대발전하는 자기 동력을 갖고 있다.

    예컨대 지역위준비위는 각 사업장 현장소조에서 파견된 경험 있고 지도력 있는 분자들로 구성되어 일정한 ‘권위’와 자체 전문 분업체계를 갖는다. 또 앞서도 말했듯이 일시적인 투쟁체가 아니라 ‘상설적’ 조직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기존의 임시적인 ‘공동대책위’와는 다르다. 지역위(준비위)는 일단 투쟁이 발생하면 곧 바로 전담팀을 구성하여 전체 지역적 차원에서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최대한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집중하게 된다. 예컨대 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만약 이미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을 경우 노조를 움직이고, 노조가 없거나 있어도 집행부를 아직 장악하지 못한 경우에는 사업장 내부에 있는 현장소조의 회원과 연락하여 그 현장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움직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또 지역위준비위 자체가 이들 움직임들을 종합하여 적절한 선전선동 작업을 실시하면서, 투쟁이 발생한 사업장의 요구에 부응한 측면지원을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울산지역의 경우, 동진오토텍 조합원들이 같은 글로비스 계열 하청사들에 대한 연대를 위한 작업이 필요할 경우 이들 계열하청 노동자들의 개인 SNS을 통해 지속적으로 투쟁소식의 전달과 동참을 호소하거나, 노동뉴스나 레디앙·오마이뉴스와 같은 전국매체에 조직적인 투고 작업을 통해서 여론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파업이나 농성이 발생할 경우에는 그 정치교육을 담당하고, 만약 다른 지역에도 이 같은 지역위(준비위)가 출범하였을 경우에는 이들과의 조직적 연계를 통해 지역 간 연대를 실현하면서 점차 정치문제화 할 수 있다. 이 같은 지역위(준비위)의 힘이 시간이 감에 따라 성장할수록, 이 같은 연대의 위력 또한 커질 것이다.

    이제 다른 한편으로, 대기업 정규직과의 연대를 생각해보자. 이 지역위(준비위)에는 현대차나 현대중공업과 같은 대기업 정규직노동자가 다수 회원으로 참여한다. 그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반재벌’이라는 공동의 투쟁목표가 갖는 포괄성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위준비위는 이들 회원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기업 사업장 내의 정규직들에게 외부의 하청노동자들(비정규직)의 상황을 알리고, 이들의 투쟁을 지원할 것을 그들 내부에서 호소할 수 있다. 지금처럼 현자나 현중 대기업노조가 내부 임단협 사안에만 몰두한 채 막대한 시간과 물량을 쏟는 것은 비판될 필요가 있다. 비록 그들의 임단협 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들 사업장은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 ‘전략사업장’인 만큼 당연히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하며 내부문제에만 골몰해서는 안 된다.

    또 정작 노동운동 전체의 대의를 안고가야 할 현장정파들이 선거조직으로 전락하고, 현 집행부에 대한 ‘비판을 위한 비판’에만 몰두하는 태도들도 지적될 수 있다. 이 같은 비판의 목소리가 사업장 외부가 아닌 지역위(준비위) 산하 현장소조를 통해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현장정파에 대한 비판은 지역위가 주도하는 지역 노동자언론을 통해 외부로부터 여론을 형성하는 방식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는데, 이 양자가 결합되면 현장정파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현 단계 변혁은 비정규직 투쟁을 수행하면서 당 건설과 변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앞서 본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이 토지혁명의 전개를 통해 그것들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지역위준비위’가 설립되어 어느 정도 안착되면 다른 지역에도 이 같은 사례를 적극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전국적 사안이고 각 지역마다 대부분 존재하는 현상이기에, 이 같은 사업모델은 충분히 보편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 창원·거제, 서울, 경기, 부산 등 주요 도시와 공단지역에 지역위원회가 건설되어 전체적으로 2~3개가 되면, 전국조직 건설을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이 경우 ‘재벌 국유화’와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 건설’을 핵심 강령으로 하는 ‘정당건설’ 추진을 명확히 밝히고 공개화 하며, 이때부터는 지방선거, 총선 등 제도권 정치일정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추진해야 한다.

    노동계의 집회 자료사진(사진=노동자연대)

    3. 정치세력화의 새 물결을 일으키자!

    이제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포함한 이 같은 새로운 반재벌 투쟁의 주체가 어느 정도 전국 각지에 형성되었을 때,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정식으로 착수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우리가 중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노동운동 내부만이 아니라 ‘진보정당’ 등 기존의 정치세력과의 관계이다.

    이 경우 강령의 핵심부분인 ‘반재벌’이 갖는 설득력과 포괄성, 그리고 현장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그 추진 주체 역량의 강력함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주체들은 기존의 대부분의 진보정당으로 하여금 이 같은 새로운 사업에 참여토록 설득하고 추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 진보정당은 이미 사회적으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반재벌 강령을 거부할 명분도 없으며, 또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합친 거대한 대오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하겠다고 고집할 수 있는 역량도 없다.

    그동안의 역사를 보면 한국에서 진보정당 사업의 발전은 사실상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이후 그동안 진보정당 운동은 민중의당, 민중당, 국민21 등 여러 차례 시도와 좌절을 겪으면서 일정한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본격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립부터였다.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1987년 7~8월 대파업 이후 노동운동이 대중화되고, 현총련(1990년), 전노협(1991년), 민주노총(1995년) 창립으로 이어지는 조직적 단결과 이에 조응하는 계급의식의 제고, 그리고 1997년 노동악법개정 저지 총파업투쟁 등을 거치면서 노동자들 스스로가 일련의 투쟁경험 속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자각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노동운동은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에 있어 가장 큰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선거 시엔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가장 많은 표를 던져주는 등으로 민노당의 원내 정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이 같은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국회의석을 획득하고 한 때 지지율이 20%에 육박하는 ‘제3위 정당’으로 발 돋음 할 수 있었다.

    이상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한국의 진보정당 사업은 노동운동과 공장 투쟁 발전의 토대위에서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지금처럼 ‘양당 구조’가 확고하고 좀처럼 깨지지 않는 이유는, 한반도 남북 대립을 활용하려는 미국의 대중국 억지전략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안보논리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또한 궁극적으로는 재벌체제와 관련된다. 때문에 지금의 양당구도는 최근의 남북관계의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재벌체제가 존속하는 한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재벌체제는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해서만 철저히 깨부수어 질 수 있으며, 결국 노동운동과 비정규직 투쟁의 발전 없이는 진보정당 사업의 발전은 기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작금의 진보정당 사업의 침체 역시도 노동운동의 침체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얼마 전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자 파업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노동계급의 조직률도 정체 내지는 날로 축소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노동운동의 침체로 인해 노동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높아졌으며,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와 열기도 식어졌다. 이는 자연히 진보정당에 참여하는 인적·물적 자원의 축소를 가져오고 선거에 있어 낮은 지지율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결과가 초래된 것은 노동자들의 높은 기대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간 진보정당 활동이 노동운동 발전에 별반 기여하지 못한데 기인한다. 진보정당은 2004년 총선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이후 노동자들의 공장투쟁과 조직화 및 노동법 개정 등 제도적 개선을 통해 노동자들의 좋은 투쟁환경을 조성하는데 매진하기보다는, 점차 선거에서 지지 투표율의 향상과 더 많은 의석의 확보 등 합법적인 제도권 내 활동에만 치우치는 한편, 당권과 공직을 둘러싼 내부 파벌싸움에만 몰두하는 등으로 노동자들의 신뢰를 저버림으로써 스스로 쇠퇴를 자초하였다. 그러므로 진보정당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현 시기 한국사회 최대 현안문제로 부각한 비정규직 투쟁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업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 즉 ‘반재벌’ 기치 하 정치세력화에 동참함으로써 애초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를 더욱 잘 실현시키도록 하여야만 한다.

    노동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도, 한국 변혁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그간 노동운동의 발전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엄호 속에서 발전하여 왔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민족분단을 극복코자 하는 제1세대 통일운동세력이 한국 진보운동의 주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19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다시 이들 통일운동과 민주화 세력은 이하 두 가지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첫째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대중적 전개는 그간 경제개발과 함께 점차 계급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던 한국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의 개별적·집단적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을 촉진하고, 전태일 열사 분신과 청피노조의 탄생 그리고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전개에서 보듯 초보적이나마 노동운동이 시작될 수 있게끔 하였다. 둘째, 이들 양대 운동의 선각적인 분자들이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들어 대거 직접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결합함으로써, 노동계급 내 선진적 분자들의 의식화를 위한 지식분자들을 대량 공급하였다.

    이상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등 진보운동의 발전 속에 공장투쟁과 노동운동의 활성화가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7년 7~8월 대파업투쟁은 그 기초 위에 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정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주파와 평등파로 대표되는 진보진영의 단결은 민주노동당의 창당을 가능케 하였으며, 많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노동자들의 정치투쟁 전선에 투신하려는 적극성을 고취시켰으며, 1997년 IMF사태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맞선 공장투쟁을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노동악법개정 투쟁과 같은 전국적 차원의 계급투쟁을 좀 더 과감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자신감과 수단을 제공하였다. 2004년을 정점으로 이후 민노당 내 파벌투쟁과 분열 현상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희망이 있었으며, 노동운동의 하강과 본격적인 침체는 그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말 이후 민주노동당 분열 사태의 진행은 이와는 대조적인 정반대의 교훈과 시사를 던져준다. 자주파와 평등파로 대표되는 진보진영의 분열은 필연적으로 노동운동 내의 분열을 동반하였으며, 대적 투쟁능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통일운동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 진보운동의 침체와 노동자들의 공장투쟁의 침체는 동시적인 현상으로 출현하였다. 진보정당 내 변혁세력의 분열은 선거투쟁에 임하는 노동대중과 사회 진보계층 및 집단들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회의를 높이는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이들의 투표 참여 열기를 현저히 떨어뜨렸으며 이로부터 선거전의 무력화와 참패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는 다시 적들에게 노동운동에 대해 탄압과 강경정책을 펼칠 수 있는 합법성 즉 ‘의회입법 권력’을 부여해 주었으며, 이로 인해 노동운동의 침체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결론. 한국변혁운동에 있어 노동운동과 진보세력 간의 올바른 공동사업의 발전 없이는 공장투쟁과 진보정당 사업을 포함하는 전체 한국변혁운동의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과 기존 진보정당 사업의 주체들은 비정규직문제의 해결과 반재벌 투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화 사업에 있어 함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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